고귀한 길은 거듭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불교는 어려운 종교?
불교가 어렵다고 한다. 특히 타종교와 비교해서 그렇다. 유일신종교의 교리를 배우는데 삼 개월이면 족하다고 본다면 불교는 삼년은 배워야 제대로 알 수 있기 때문이라 한다. 오로지 유일신에게만 의지 하는 종교에서는 기도는 있을지 몰라라도 수행은 크게 필요치 않다. 그러나 자력의 종교인 불교에서는 수행을 통하여 궁극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그래서 고도의 이성적 사유를 해야 하고 깊은 수행을 해야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불교는 매우 어려운 종교임에 틀림없다.
불교가 어렵다는 말을 비구니스님들과 수녀들의 대화에서 들었다. 유튜브에서 본 동영상에 따르면 비구니사찰을 방문한 수녀일행들에게 어느 비구니 스님은 “불교가 어렵다고 해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해요. 그런데 여기 있잖아요.”라고 말하였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나는 여기 있다. 대체 어떤 말일까?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데 여기 있는 것에 대하여 금강경의 문구를 활용하기도 한다. 금강경에 ‘若見諸相非相卽見如來(약견제상비상즉견여래)’라는 말이 있다. 뜻은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이 아닌 것으로 보면 곧 부처를 보리라’라는 내용이다. 참으로 어려운 문구이다. 마치 선문답을 보는 것 같다. 마치 암호문과 같은 게송은 누군가 해설해 주기 전에는 그 뜻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데 여기 있는 것에 대하여 어떤 이는 과학적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현대물리학에서 말하는 양자론을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만유(萬有)의 구경의 질료인 양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라는 실로 놀라운 결론에 도달하게된다.”라고 한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말은 대지도론에도 있다고 한다. 대지도론 980에 따르면 수보리가 “모든 법에는 네 가지 모양이 있나니, 첫째는 ‘있다[有]’고 하고, 둘째는 ‘없다[無]’고 하며, 셋째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하고, 넷째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고 한다.”라고 하였다. 이 네 가지는 삿된 기억 때문에 네 가지 삿된 행이라 하고, 네 가지 법을 집착하기 때문에 삿된 도라 하였다. 이 가운데서도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을 논파하기 때문에 무법유법공이라 한다. 부처님께서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는 것까지 논파하기 때문에 “유전도 없고 환멸도 없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참으로 어려운 말이다.
주석이 없는 아함경
불교는 정말 어려운 것일까? 그러나 초기경전을 보면 그다지 어렵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한글만 깨치면 누구나 읽을 수 있고 알 수 있다. 다만 한단어 한구절에 심오한 내용이 함축 되어 있기 때문에 주석을 보아야 한다. 다행히 니까야의 경우 주석이 되어 있어서 누구라도 이해하는데 큰 불편이 없다. 이런 점은 아함경과 다르다.
한역으로 전승된 아함경의 경우 주석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아함경을 근거로 하는 글들을 보면 갖가지 설이 난무한다. 한문 자체가 표의 문자로서 글자 하나가 이미지이기 때문에 갖가지 해석이 나올 수 있는데, 더구나 한역아함경의 경우 주석이 전혀 없으니 갖가지 개인적 견해가 나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인터넷에서 단멸론자들이 아함경의 문구를 들어 합리화 하는지 모른다.
암호문 같은 게송
초기경전에도 난해한 문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주석이 되어 있기 때문에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앞서 언급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라는 유사한 문구가 우다나에 있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Ahu pubbe tadā nāhu
nāhu pubbe tadā ahu,
Na cāhu na ca bhavissati
na cetarahi vijjatī
[세존]
“앞서 있었지만 있지 않게 되고
앞서 있지 않았지만 있게 된다.
있지 않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지금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Ud66, 전재성님역)
암호문 같은 게송이다. 주석이 없으면 도저히 내용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오래 전에 부처님 제자들은 이를 주석하여 놓았다. 우다나 주석은 6세기 스리랑카 마하비하라(대사)에서 담마빨라가 주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악하고 불건전한 원리들(akusale dhamme)과 착하고 건전한 원리들(kusale dhamme)
이 게송이 나오게 된 연유가 있다. 경의 서두에 “그때 마침 세존 께서는 자신에게 무수한 악하고 불건전한 원리들이 버려지고 무수한 착하고 건전한 원리들이 닦여져 원만하게 되는 것을 관찰하고 계셨다.” (Ud66) 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악하고 불건전한 원리들’과 ‘착하고 건전한 원리들’이란 무엇을 말할까?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를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악하고 불건전한 원리들(akusale dhamme):
탐욕, 성냄, 어리석음, 전도된 정신활동,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 창피함을 모르는 것, 해태와 혼침, 분노, 원한, 위선, 잔인, 질투, 인색, 환술, 기만, 고집, 격정, 자만, 광기, 갈애, 무명 등을 말한다.
착하고 건전한 원리들(kusale dhamme):
계행, 삼매, 지혜, 해탈, 해탈에 대한 앎과 봄, 네 가지 새김의 토대, 네 가지 올바른 노력, 네 가지 신통의 기초, 네 가지 고귀한 길, 네 가지 열매, 네 가지 분석적인 앎 등을 말한다.
“앞서 있었지만 있지 않게 되고(Ahu pubbe tadā nāhu)”
게송에서 “앞서 있었지만 있지 않게 되고(Ahu pubbe tadā nāhu)”라 하였다. 이 말은 무슨 의미일까? 주석을 보지 않으면 이해 할 수 없다.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Ahu pubbe tadā nāhu: UdA.337에 따르면, 거룩한 길과 관련된 앎이 일어나기 전에 일체의 탐욕 등의 오염의 무더기가 나에게도 존재 했는데, 그러나 고귀한 길에 들어서는 순간에 그 오염원의 무리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조금이라도 오염원이 남아 있다면, 최상의 길에서 버려져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812번 각주)
앞서 있었다는 것은 오염원을 말한다. 탐욕과 성냄 등과 같은 악하고 불건전한 원리들에 의해 지배 받았지만 도와 과를 이루는 순간 더 이상 오염원이 존재 하지 않음을 말한다. 이전과 이후가 다른 것이다. 이전은 범부의 삶이었지만 이후는 성자의 삶이다.
“앞서 있지 않았지만 있게 된다.(nāhu pubbe tadā ahu)”
두 번째 구절을 보면 “앞서 있지 않았지만 있게 된다.(nāhu pubbe tadā ahu)”라 하였다. 이 또한 수수께끼 같은 말이다. 마치 암호문과 같다. 주석에서는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nāhu pubbe tadā ahu: UdA.337에 따르면, 이 나의 무수한 죄악을 여읨은 지금 수행을 통해서 닦여져 원만하게 되었지만, 고귀한 길에 들어서는 순간, 이전에는 없었고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나에게 최상의 길에 대한 앎이 생겨나자, 그 모든 나의 죄악의 여읨은 완성되었다. 최상의 길을 성취함으로써 일체의 모든 것을 아는 덕성이 깨달은 님들의 손아귀에 떨어진다. (813번 각주)
여기서 있다라는 것은 도와 과를 말한다. 이전에는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없던 것이 생겨난 것이다. 그것에 대하여 최상의 깨달음이라 하였다.
“있지 않았고 있지 않을 것이다.(Na cāhu na ca bhavissati)”
세 번째 구절을 보면 “있지 않았고 있지 않을 것이다.(Na cāhu na ca bhavissati)”라 하였다. 대체 무엇이 있지 않은 것이고 무엇이 있지 않을 것이라는 말인가? 주석에서는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Na cāhu na ca bhavissati: UdA.337에 따르면, 죄악을 여의는 고귀한 길이 보리수 아래에서 생겨났다. 그것을 통해 모든 오염의 무리들은 남김없이 제거되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 길은 길에 들어서는 순간의 이전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그 고귀한 길을 통해서 내가 버려야 하는 오염원들이 없어 졌으므로, 그 오염들처럼 길도 없어지고 미래에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814번 각주)
여기서 ‘있지 않았고’라는 말은 오염원들을 말한다. 길에 들어서는 순간 오염원들이 모두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있지 않을 것이다’라 하였다. 이는 놀랍게도 ‘길(paṭipadā)’을 말한다. 오염원이 소멸 되었으므로 길도 미래에 생겨 나지 않을 것이라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열반을 성취를 말한다. 완전한 열반에 들면 이미 소멸된 오염원 뿐만 아니라 성취된 도와 과 역시 없게 된다.
“그것은 지금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na cetarahi vijjatī)”
네 번째 게송에서 “그것은 지금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na cetarahi vijjatī)”라 하였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na cetarahi vijjatī: UdA.337에 따르면, 지금 현재 있지 않다. 즉, 내가 행해야 할 일이 없으므로 인식되지 않는다. 고귀한 길은 거듭해서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815번 각주)
게송도 어렵지만 주석의 내용도 난해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특히 주석에서“고귀한 길은 거듭해서 일어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숫따니빠따의 한 구절을 들어 “거듭 피안에 들지 못한다.”(stn714)라고 보충 설명하였다. 또 그 의미에 대하여 ‘Prj.II.497-498’의 근거를 들어 “한길을 통해 두 번 열반에 이르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설명하고 있다.
고귀한 길은 거듭해서 일어나지 않는다는데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수다원의 도와 과를 이루면 또 다시 수다원의 도와 과를 이룰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수다원 다음의 사다함이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가다 보면 최종적으로 아라한 도와 아라한 과에 이를 것이다.
사향사과가 있다. 수다원의 도와 과를 성취한다는 것은 열반을 성취한 것이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수다원의 열반이나 아라한의 열반이나 경지는 같은 것이다. 다만 수다원에게는 남아 있는 번뇌가 있어서 번뇌를 소멸하는 수행을 해야 한다. 사다함이 된다는 것은 역시 열반의 체험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열반의 경지는 수다원이나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열반의 경지와 모두 같은 것이라 하였다. 다만 수다원에서 사다함이 될 때 이미 수다원의 도와 과를 거쳤기 때문에 두 번 거치지 않는다. 그래서 사다함의 도와 과를 성취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차츰 차츰 아라한의 도와 과에 이른다.
아시따선인이 당부하기를
숫따니빠따에서 “거듭피안에 들지 못한다.”(stn714)라고 하였다. 관련된 경을 찾아 보았다.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Uccāvacā hi paṭipadā
samaṇena pakāsitā,
Na pāraṃ diguṇaṃ yanti
na idaṃ ekaguṇaṃ mutaṃ.
수행자로서 높고 낮은 여러 가지
길에 대해서 나는 말했습니다.
거듭 피안에 이르지 못하지만
생각건대 단번에 이르지 못합니다. (stn714)
이 게송은 숫따니빠따 날리까의 경(Sn3.11)에 실려 있다. 날라까의 경 서문에는 아시따선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부처님이 태어난 것을 안 선인은 카필라성으로 들어 간다. 그러나 너무 늙어 부처가 출현하는 것을 보지 못함을 아쉬워 한다. 그때 선인은 자신의 조카를 불러 “만일 네가 나중에 다른 사람이 ‘세존’이라는 말과 ‘올바로 깨달음을 얻어 진리의 길을 간다.’고 말하는 것을 듣거든, 그 때 그곳으로 가서 가르침을 묻고 그 세존 밑에서 청정한 삶을 살아라.”(stn696)라고 당부한다. 마침내 부처가 출현하자 조카는 부처님을 찾아 뵙고 가르침을 청한다. 이런 식으로 경이 시작된다.
아시따선인의 조카 날라까는 부처님께 이것저것 묻는다. 그 중에 하나가 성자의 최상의 삶에 대한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여러 가지 말씀을 하였다. 위 게송은 그 중의 하나이다.
“한 길을 통해서 두 번 열반에 이르지 않는다”
게송을 보면 ‘높고 낮은 여러 가지 길(Uccāvacā hi paṭipadā)’이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길은 빠띠빠다(paṭipadā)를 말한다. 이 구절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 ‘빠르게 곧바로 아는 길’즐거운 길과 ‘늦게 곧바로 아는 괴로운 길’을 말한다.”(Prj.II.497) 라고 하였다. 전자는 아라한의 길이라 한다. 후자는 아라한의 길을 제외한 길 즉, 수다원과 사다함과 아나함의 길을 말한다고 하였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단계를 거치도록 되어 있다. 처음부터 단번에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쉬운 가르침부터 시작 하여 심오한 가르침에 이르기까지 점진적으로 가르쳤다. 이를 차제설법이라 한다.
아라한의 길에 이르는데 있어서 빨리 도달 할 수도 있지만 늦게 갈 수도 있다. 성자의 흐름에 들면 일곱생이내에 열반이 보장 되어 있는데, 일곱생이라는 것은 늦게 도달 하는 것이다. 그래서 ‘늦게 곧바로 아는 괴로운 길’이라 하였을 것이다.
세 번째 구절에 “거듭 피안에 이르지 못한다 (Na pāraṃ diguṇaṃ yanti)”라는 말이 있다. 앞서 언급된 내용이다. 숫따니빠따 주석에서는 “한 길을 통해서 두 번 열반에 이르지 않는다.” (Prj.II.497-498) 라고 설명되어 있다. 여기서 한 길이라는 것은 수다원이면 수다원 길이고, 사다함이면 사다함 길을 말한다. 수다원이었던 자가 번뇌를 소멸하면 다음 단계인 사다함이 될 것이다. 이때 수다원의 열반이나 사다함의 열반은 같은 것이다. 그러나 길은 다른 것이다. 그래서 “한 길을 통해서 두 번 열반에 이르지 않는다.”라 하였을 것이다.
표로 정리해 보면
우다나에서 “앞서 있었지만 있지 않게 되고”로 시작 되는 게송은 매우 난해하다. 그것은 ‘있다’와 ‘있지 않다’의 연속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치 퀴즈문제처럼, 또는 암호문처럼 보인다. 그러나 주석을 참고 하면 모든 것이 명쾌하다. 이를 표로 정리해 보았다.
No |
게 송 |
설 명 |
요 약 |
1 |
앞서 있었지만 있지 않게 되고 Ahu pubbe tadā nāhu |
거룩한 길과 관련된 앎이 일어나기 전에 일체의 탐욕 등의 오염의 무더기가 나에게도 존재 했는데, 그러나 고귀한 길에 들어서는 순간에 그 오염원의 무리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
조금이라도 오염원이 남아 있다면, 최상의 길에서 버려져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 |
2 |
앞서 있지 않았지만 있게 된다. nāhu pubbe tadā ahu, |
이 나의 무수한 죄악을 여읨은 지금 수행을 통해서 닦여져 원만하게 되었지만, 고귀한 길에 들어서는 순간, 이전에는 없었고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
최상의 길에 대한 앎이 생겨나자, 그 모든 나의 죄악의 여읨은 완성됨 |
3 |
있지 않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Na cāhu na ca bhavissati |
죄악을 여의는 고귀한 길이 보리수 아래에서 생겨났다. 그것을 통해 모든 오염의 무리들은 남김없이 제거되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것을 통해 모든 오염의 무리들은 남김없이 제거되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
길을 통해서 내가 버려야 하는 오염원들이 없어 졌으므로, 그 오염들처럼 길도 없어지고 미래에 생겨나지 않을 것임 |
4 |
그것은 지금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na cetarahi vijjatī |
지금 현재 있지 않다. 즉, 내가 행해야 할 일이 없으므로 인식되지 않는다. |
고귀한 길은 거듭해서 일어나지 않음 |
고귀한 길은 거듭해서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는 “거듭 피안에 이르지 못한다.” (stn714) 라는 말이다. 그래서“한 길을 통해서 두 번 열반에 이르지 않는다.” (Prj.II.497-498) 라고 하였다. 한번 수다원이면 수다원인 것이다. 한번 성자의 흐름에 들어서면 다시 범부로 되돌아 가지 못함을 말한다. 한번 사다함이면 사다함이지 아래로 떨어져 수다원이 될 수 없음을 말한다. 번뇌가 다 소멸되어 아라한이 되었다면 아라한이지 밑으로 떨어질 수 없음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한번 깨달았으면 깨달은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깨달았다고 하면서 탐욕이나 성냄으로 살아 간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저는 아직 깨닫지 못했습니다”
흔히 스님들로부터 듣는 말이 있다. 그것은 “저는 아직 깨닫지 못했습니다.”라는 말이다. 이런 자기고백적 말은 아직까지 번뇌를 다 소멸시키지 못하였다는 말로 들린다. 아직까지 번뇌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고백으로 보인다. 그런데 깨달았다고 말하면서도 마구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막행막식을 하는 자들을 말한다. 깨달으면 걸림 없기 때문에 끌리는 대로 산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깨달았다고 볼 수 없다.
깨달음에 대하여 어떤 특수한 정신적 세계를 경험한 것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다. 특별한 체험을 하여 깨달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계행이 엉망이라면 결코 깨달은 자라 볼 수 없다. 그렇다면 깨달은 자는 어떤 사람을 말하는가? 그것은 번뇌와 관련이 있다.
번뇌가 소멸한 아라한에게 있어서 탐심이나 성냄이 일어 날 수 없다. 아라한이 여자에게 넘어 가서 파계하여 가정을 이루고 산다면 ‘아라한이 아니었다’라고 볼 수 있다. 제자들을 가르친다고 하여 자비의 분노를 낸다면 더 이상 깨달은 자라 볼 수 없다. 그래서일까 한국불교에서는 도를 많이 닦았음에도 “저는 아직까지 깨닫지 못했습니다”라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2015-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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