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고 없애는 삶을 위하여
포기하면 마음이 편할 때가 있다. 누군가에게서 떠났을 때 마음이 편할 때가 있다. 못 받을 돈을 포기하면 마음이 편하다. 삶에 염증이 난다면 잠시 떠나 있는 것도 좋다. 일단 떠나면 기분이 바뀐다. 주변의 풍광을 보면 기분이 달라진다. 더구나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 싫어하였던 마음은 이전의 마음이 되어 버린다.
심해탈에 도움이 되는 아홉 가지 이야기
무언가 싫어 하여 떠난다는 것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부처님도 그렇게 말씀 하셨다. 우다나와 앙굿따라니까야에 있는 ‘메기야의 경’에서 부처님은 마음에 의한 해탈에 도움이 되는 원리 다섯 가지를 말씀 하셨다. 그 중에 세 번째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Puna ca paraṃ Meghiya bhikkhu yāyaṃ kathā abhisallekhikā cetovivaraṇasappāyā ekantanibbidāya virāgāya nirodhāya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ṃvattati, seyyathīdaṃ? Appicchakathā, santuṭṭhikathā, pavivekakathā, asaṃsaggakathā, viriyārambhakathā, sīlakathā, samādhikathā, paññākathā, vimuttikathā, vimuttiñāṇadassanakathā. Evarūpāya kathāya nikāmalābhī hoti akicchalābhī akasiralābhī, aparipakkāya Meghiya cetovimuttiyā ayaṃ tatiyo dhammo paripākāya saṃvattati.
[세존]
“메기야여, 더욱이 수행승이 버리고 없애는 삶을 살고 마음을 여는데 도움이 되고 오로지 싫어하여 떠나고, 사라지고, 소멸하고, 적멸하여, 곧바로 알고, 올바로 깨닫고, 열반에 드는데 도움이 되는 이야기, 예를 들어 소욕에 대한 이야기, 만족에 대한 이야기, 멀리 여읨에 대한 이야기, 사교의 여읨에 대한 이야기, 정진에 대한 이야기, 계행에 대한 이야기, 삼매에 대한 이야기, 지혜에 대한 이야기, 해탈에 대한 이야기, 해탈에 대한 앎과 봄의 이야기가 있는데, 그는 이러한 이야기를 원하는 대로 얻고 어렵지 않게 얻고 힘들이지 않고 얻는다. 메기야여, 마음에 의한 해탈이 성숙하지 않았다면, 이 세 번째 원리가 성숙에 도움이 된다.”
(Meghiyasuttaṃ-메기야의 경, 우다나 Ud34, 앙굿따라니까야 A9.3,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메기야를 위하여 설법을 하고 있다. 메기야가 홀로 망고숲에 가서 정진하려 하였으나 좋지 못한 사유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감각적 욕망, 분노, 폭력에 매인 사유가 일어난 것을 말한다. 이 세 가지는 팔정도에서 정사유에 속한다.
정사유는 정견과 함께 지혜에 속한다. 메기야에게 일어난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를 없애려면 마음에 의한 해탈을 닦아야 한다. 그러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디. 그것은 좋은 친구를 사귀고 계행을 지키는 것이다. 기본이 되어 있어야 해탈로 갈 수 있음을 말한다. 부처님은 세 번째로 ‘버리고 떠나기’를 말씀 하셨다. 이에 대하여 “싫어하여 떠나고, 사라지고(virāgāya nirodhāya)”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심출가하면
초기경전에서 싫어하여 떠난다는 ‘위라가 니로다(virāgā nirodhā)’에 대한 문구는 많이 나온다. 거의 정형화 되어 있어서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숫따니빠따 ‘라훌라의 경’에서는 “세상을 아주 싫어 하여 멀리 떠나라”(stn340) 라고 하였는데 이는 몸에 대한 부정관으로 존재부터 멀리 떠나라는 말이다. 윤회의 소용돌이에 실망하여 모든 세상을 기뻐하지 않는 자각을 가지라는 말이다. 이때 ‘싫어하다’라는 말이 ‘nibbida’이다.
‘세상을 싫어 하여 떠나라’는 말은 사실 수행승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다. 만일 재가자가 세상이 싫어 떠나버린다면 산속에서 홀로 사는 ‘자연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재가자는 세상을 멀리 할 수 없다. 다만 가르침 속에서 ‘심출가’를 하며 사는 것이다.
nibbidāya virāgāya nirodhāya
‘싫어 하여 떠나고 사라진다(virāgāya nirodhāya)’는 말은 오온에 대해서도 사용된다. 상윳따니까야 ‘과거미래현재의 경1’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과거와 미래의 물질이 무상한 것인데, 하물며 현재의 물질은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수행승들이여,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이와 같이 보아서 과거의 물질에 마음을 두지 않고, 미래의 물질을 추구하지 않고, 현재의 물질에서 싫어하여 떠나고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하도록 수행한다.”(S22.9, 전재성님역)
여기서 “싫어하여 떠나고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하도록”라는 말이 있다
이는 “nibbidāya virāgāya nirodhāya”라는 말의 번역이다. 초불연 각묵스님은 “염오하고 탐욕이 빛바래게 하고 소멸하기 위해서”라고 번역하였다.
싫어하여 떠난다는 것
Nibbidā에 대하여 ‘싫어하여 떠난다(전재성님역)’와 ‘염오한다(각묵스님역)’ 이렇게 두 가지로 번역하였다. ‘싫어하다’와 ‘염오하다’라는 말은 같은 말이다. 한글과 한자어 차이라 본다. 그런데 각묵스님은 염오와 관련하여 매우 길게 각주를 달았다. 베다문헌의 근거를 들기도 하였는데 염오에 대하여 ‘넌더리 침’으로 설명하기도 하였다. 구역질 나도록 싫은 상태를 말한다.
오온에 대하여 구역질 나도록 싫어 한다면 떠날 것이다. 단지 싫어 하는 차원을 넘어 떠나고 말 것이다. 애인에게 싫은 마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떠날 정도는 아니라면 문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남자를 만난 것을 보았다면 구역질 나도록 싫어할 것이다. 그럴 경우 혐오의 감정이 극에 달할지 모른다. 배우자가 바람 피웠다면 싫어 하는 마음을 넘어 혐오가 극에 달할 것이다. 이렇게 극도로 혐오 하였을 때 떠날 것이다.
몸이나 느낌, 지각 등 오온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오온이 무상한 것을 안다면 붙잡고 있을 이유가 없다. 그래서 떠나고자 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단지 염오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싫어 하여 떠나는 두 가지가 작용하게 될 것이다.
Nibbidā에 대한 빠알리 사전을 보면 ‘aversion; disgust; weariness’라 되어 있다. 극도의 혐오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전봇대에 누군가 토해 놓은 것을 보면 구역질이 날 것이다. 그것을 계속 보고 있을 사람은 없다. 그 자리를 빨리 피하려 할 것이다. 이처럼 Nibbidā는 ‘싫어 하여 떠남’의 뜻이 더 강함을 알 수 있다. 빅쿠보디는 “for its fading away and cessation.” 라 하였다. 여기서 ‘nibbidāya virāgāya’ 두 단어에 대하여 ‘fading away’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탐욕이 빛바랜다?
Virāgā에 대하여 ‘그것이 사라지고(전재성님역)’와 ‘탐욕이 빛바래게 하고(각묵스님역)’라고 두 가지로 번역하였다. 마치 서로 다른 번역처럼 보인다. 이는 각묵스님이 ‘탐욕이 빛바랜다’라 하여 약간은 ‘낭만적으로’ 번역하였기 때문이다.
탐욕이 빛바랜다는 말은 어법에 어긋나 보인다. 왜 이런 번역을 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각주에서 매우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상윳따니까야 ‘과거현재미래 경(S22.9)’의 각주에 따르면 이렇게 되어 있다.
탐욕의 빛바램은 Virāgā를 옮긴 것이다. 이 술어는 vi(분리접두어)+ rāgā로 구성되어 있다. Rāgā는 물들인다는 동사 rañjati에서 파생되었다. 그러므로 Rāgā는 기본적으로 색조나 색깔이나 물들임의 뜻이 있다. 그래서 마음이 물들인 상태, 즉 애정, 애욕, 갈망, 집착, 탐욕, 욕망 등의 뜻으로 쓰인다.
(초불연 상윳따3권 88번 각주, 각묵스님)
각묵스님은 번역어 ‘탐욕이 빛바램’에 대하여 rāgā의 어원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이런 설명은 주석서에서도 보인다. 이렇게 본다면 탐욕이 빛바랜다는 다소 낭만적 번역은 주석에 근거한 ‘주석적 번역’이라 볼 수 있다.
Virāgā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그것이 사라지고’라 하여 사라짐을 강조하였다. 빅쿠보디는 fading away라 하여 ‘nibbidāya와 virāgāya 두 단어를 한꺼번에 처리 하였다.
소욕에 대한 이야기(Appicchakathā)
부처님은 메기야에게 수행승으로서 버리고 없애는 삶과 마음을 계발하는데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하였다. 가장 먼저 싫어하여 떠나라고 하였다. 그래야 해탈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말한다. 만약 오온을 내 것이라고 붙잡고 있다면 영원히 마음의 의한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해탈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소욕지족’이다. 경에서는 소욕에 대한 이야기, 만족에 대한 이야기로 표현 되어 있다.
‘소욕에 대한 이야기(Appicchakathā)’는 무엇일까? 우다나 주석에 따르면 “욕망을 여읨에 대한 이야기로서 지나치게 원하거나 악하게(사기쳐서) 원하거나 많이 원하거나 하지 않는 것”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욕망을 여의어야 소욕이라 할 수 있을까? 주석(UdA.227-228)에서는 이렇게 되어 있다.
1) 필수품과 관련된 소욕(네 가지 필수품을 적게 원하는 것)
2) 고행과 관련된 소욕(자신의 고행이 널리 알려지길 바라지 않는 것)
3) 경전과 관련된 소욕(많이 배운 것이 널리 알려지길 바라지 않는 것)
4) 성취와 관련된 소욕(흐름에 든 경지 등의 자신의 경지가 알려지길 바라지 않는 것)
네 가지 사항은 모두 출가수행자에게 해당된다. 재가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도 일부 적용될 수 있다. 여기서 세 번째 항과 네 번째 항에 주목한다.
득도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스님들을 소개할 때 이력을 길게 소개한다. 이미 출가한 몸임에도 과거 어느 대학을 나왔고 어떤 학위를 취득하였는지에 대하여 자세히 소개 된다. 이는 방송이나 라디오, 기고문 등에서도 볼 수 있다. 더욱 더 놀라운 사실은 ‘득도’ 하였다고 표현 하는 것이다. 대게 어느 은사스님을 모시고 득도 하였다는 식이다. 이렇게 득도라는 표현을 함부로 해도 되는 것일까?
율장대품 (Cattāri akaraṇīyāni- 네 가지 행해서는 안될 일, 율장대품 제1장)
에 따르면 ‘네 가지 행해서는 안될 일(Cattāri akaraṇīyāni, 율장대품 제1장)’라 하여 수행자로서 해서는 안될 일 네 가지가 언급되어 있다. 그것은 성교, 도둑질, 살생, 사칭을 말한다.
부처님은 수행자들이 ‘동물과도 성교를 해서는 안된다’라고 하였다. 또 ‘풀잎이라도 주지 않은 것을 훔칠 목적으로 갖지 말아야 한다’라 하였다. ‘개미라도 의도적으로 살아 있는 생명의 목숨을 빼앗지 말아야 한다’라 하였다. 마지막으로 “인간을 뛰어넘는 상태에 이른 것을 사칭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네 번째 항 ‘인간을 뛰어넘는 상태’는 무엇을 말할까? 만일 누군가 자신은 깨달았다고 말하고 다닌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율장에 따르면 ‘사끼야의 아들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차라리 빈방에서 고독을 즐기면 즐겼지 삼매가 어떤 경지이고 해탈이 어떻고 열반이 어떤 것인지 말을 하여 사람들을 현혹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 ‘한소식했다’라든가 ‘득도했다’라든가 ‘깨달았다’고 떠 벌리고 다닌다면 종려나무의 꼭대기가 잘린 것과 같다고 하였다. 잘린 종려나무는 더 이상 성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족에 대한 이야기(santuṭṭhikathā)
‘만족에 대한 이야기(santuṭṭhikathā)’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주석을 보면 ‘자신의 것이나 자신이 얻은 것에 대하여 만족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현재 있는 것에 만족함을 말한다. 더 이상 바라지 않는 삶을 말한다. 이에 대한 경전적 근거로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여기 이 깟싸빠는 어떠한 옷에도 만족한다. 그는 어떠한 의복에도 만족하는 것을 칭찬한다. 그래서 그는 의복 때문에 삿되거나 부적절한 행위를 하지 않는다. 그는 옷을 얻지 못해도 동요되지 않고 옷을 얻어도 그것에 취착하지 않고 탐닉하지 않고 잘못을 범하지 않고 위험을 직시하고 떠남을 생각하며 그것을 받는다.” (S16.1, 전재성님역)
깟싸빠는 두타제일로 알려져 있다. 부처님은 이런 깟싸빠를 수행승의 모범으로 다루고 칭찬하였다. 경에 따르면 네 가지 필수품 즉, 의복, 탁발음식, 와좌구, 필수의약품에 대하여 ‘삿되거나 부적절한 행위를 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부적절한 행위’란 무엇을 말할까? 주석(Ppn.II.476)에 따르면 세 가지 만족의 유형을 설명한다.
1) 좋거나 어떤 것을 얻든, 소득에 따른 만족
2)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에 만족하는, 기력에 따른 만족
3) 사치스런 것을 피하고 필수적인 것만을 취하는, 분수에 따른 만족
만족에 대한 키워드는 소득, 기력, 분수 이렇게 세 가지이다. 이 중에서 소득에 대한 만족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행복지수 공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인연따라 살아야지요. 제가 무슨 힘이 있겠어요”
흔히 행복이란 많이 소유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세상사람들은 가능한 많이 축적하고자 한다. 미래의 노후를 위하여 준비하는 이유가 가장 크다. 그런데 이런 소유에 출가수행자도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 조계종과 선학원이 법정에 서게 되었다. 그것은 재산권 다툼에 기인한다. 조계종에서 효율적인 재산관리를 위하여 모든 재산을 등록하도록 추진하고 있는데 선학원에서 반발하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선학원에 등록된 스님들의 재산이 문제라는 것이다. 어떤 문제인가?
스님들이 원력으로 이룬 개인사찰이 있다. 이를 조계종에 등록하면 여러 가지 불이익을 받을 염려가 있어서 상당수 스님들이 선학원에 등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선학원이 조계종과 결별을 선언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스님들은 별 다른 생각 없이 같은 집안으로 보고 등록한 것일 뿐인데 한번 등록된 재산을 찾아 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계종으로 남자니 재산을 잃어 버릴 것이고, 선학원에 남자니 조계종 스님이 되지 않는 진퇴양난에 처한 스님들이 매우 많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허정스님은 기고문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제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어요. 저는 그냥 여기서 살다가 죽을 래요” 충청도에서 만난 노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인연따라 살아야지요. 제가 무슨 힘이 있겠어요” 전라도에서 만난 노비구니 분원장스님의 말이다. 그들은 조계종 승려증보다는 재산을 선택하겠다는 말을 그처럼 완곡하게 표현했다. ‘인연따라’라는 말이 그렇게 슬프게 들렸던 적이 없다. “스님에게 조계종 승려증은 얼마입니까?”라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그 말을 차마 꺼낼 수 없었다. 이분들도 시대의 희생자가 아닌가하는 생각에서다.
(허정 스님, 조계종 승려증은 얼마일까? 2015년 10월 1일, 불교신문)
스님의 글에 따르면 진퇴양난에 빠져 있는 스님의 입장에 대하여 “조계종승려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조계종 승려증을 버리고 재단법인 분원장으로 남을 것인가?”라 하였다.
재산을 지키려고 한다면 선학원에 남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글에 따르면 선학원에 남기로 한 스님의 말이 ‘그렇게 슬프게 들렸던 적이 없다’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한국불교에서 스님의 복지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음을 말한다.
‘각자도생’이라는 말이 있듯이 현재 한국의 스님들은 각자 살 궁리를 찾아야 한다. 부자스님과 가난한 스님으로 나뉘어져 있어서 출세간의 사회 역시 세간의 사회와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는 종단이 가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님은 부자이어도 종단은 가난하다’는 말이 나온다. 그러다 보니 거점 지역에 절을 짓는다든지 하는 불사를 할 수 없다. 그래서 종단에서 재산관리를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종단은 부유해도 스님은 가난하게 사는 시스템’이다. 모든 재산을 종단에서 관리하고 스님들은 최소의 비용으로만 살았을 때 소유에서 자유로울 수 있음을 말한다.
현대판 소욕지족은
소욕과 만족을 안다는 것은 출가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재가의 삶을 사는 불자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그렇다고 많이 소유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도 재가자에게 소유를 강조하였다. 다만 정당하게 번 것이여야 함을 말한다. 그래서 ‘이마의 땀과 팔의 힘으로 일구어낸 재산이 가치있다’고 하였다. 또 한편 많이 소유해서 많이 베풀라고 하였다.
허황된 꿈을 꾸는 자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로또복권을 사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런데 주변에는 복권을 사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당첨 되었다는 판매점에는 길게 줄을 서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알 수 없는 미래를 위하여 사람들은 가능한 많이 축적하고자 한다. 그러다 보니 오로지 소유를 위한 삶만 살게 된다. 그러나 포기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어떻게 포기 하는가? 그것은 현재의 조건에 만족하는 것이다.
현재 재산이 많건 적건 간에 현재의 조건에 만족하는 삶이 소욕지족의 삶이다. 그래서 행복공식을 보면 분모에 해당되는 욕망을 극소화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분자에 해당되는 소유는 무엇이 되었든 상관 없다.
지금 백만원을 가진자나 백억을 가진자나 욕망이라는 분모를 극대화 하면 행복지수는 작아져서 만족하지 않게 된다. 반면에 지금 분자에 백만원을 가진 자나 백억을 가진 자나 욕망이라는 분모를 극소화 한다면 당연히 행복지수는 높아 질 것이다. 그래서 지금 적게 가졌건 많이 가졌건 욕망을 줄인다면 행복지수는 높아지게 되어 있다. 이것이 현대판 소욕지족의 삶이 아닐까?
사교의 여읨에 대한 이야기(asaṃsaggakathā)
우다나 주석에는 매우 풍부한 이야기가 많이 실려 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사교의 여읨에 대한 이야기(asaṃsaggakathā)’이다. 부처님은 메기야에게 사귐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했다. 그러나 경에서는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주석에서는 하나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주석에 따르면 ‘사교의 여읨에 대한 이야기’는 다섯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피해야 할 다섯 가지를 말한다. 그것은 들음에 의한 사귐, 봄에 의한 사귐, 대화에 의한 사귐, 즐김에 의한 사귐, 신체에 의한 사귐 이렇게 다섯 가지를 말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일까? 주석(UdA.231)에서는 다음과 같이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1) 어떤 수행승이 이러저러한 마을이나 도시에 최상의 연꽃 같은 모습을 한 아주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고결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번민하여 청정한 삶을 지속할 수 없어 배움을 포기하고 환속한다면, 그것은 오염된 사귐으로 들음에 의한 사귐에 해당된다.
2) 어떤 수행승이 이러저러한 마을이나 도시에 최상의 연꽃 같은 모습을 한 아주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고결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만 한 것이 아니라 보고 번민하여 청정한 삶을 지속할 수 없어 배움을 포기하고 환속한다면, 그것은 오염된 사귐으로 봄에 의한 사귐에 해당된다.
3) 여인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일어난 오염된 사귐은 대화에 의한 사귐이다.
4) 여인과 귀중한 것을 주고받음으로써 생겨난 오염된 사귐은 즐김에 의한 사귐이다.
5) 여인의 손 등을 만짐으로써 생겨난 오염된 사귐은 신체에 의한 사귐이다.
다섯 단계를 보면 최초 듣는 것부터 시작된다. 이어서 보는 것, 대화하는 것, 선물 등을 주고 받는 것을 거처 마침내 신체접촉까지 이르게 된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여읨에 대하여 ‘사교의 여읨에 대한 이야기(asaṃsaggakathā)’이라 하였다.
여러 가지 이야기
이 외에도 부처님은 메기야에게 멀리 여읨에 대한 이야기, 정진에 대한 이야기, 계행에 대한 이야기, 삼매에 대한 이야기, 지혜에 대한 이야기, 해탈에 대한 이야기, 해탈에 대한 앎과 봄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준다.
여읨에 대한 이야기(pavivekakathā)는 신체의 멀리 여읨, 마음의 멀리 여읨, 집착의 멀리 여읨에 대한 것이다. 신체의 멀리 여읨은 모든 행동양식에 있어서 무리지어 다니는 것을 피하고 격리된 장소에서 지내는 것을 말한다. 마음의 멀리여읨은 여덟 가지 성취를 말하고, 집착의 멀리 여읨은 열반을 말한다.
정진에 대한 이야기(viriyārambhakathā)는 네 가지 올바른 정진을 말한다. 계행에 대한 이야기(sīlakathā)는 출세간적 계행과 세간적 계행을 말하는데, 사청정에 대한 것은 세간적인 것이고 길과 경지의 계행은 출세간적인 것이라 하였다.
삼매에 대한 이야기(samādhikathā)는 세간적 삼매와 출세간적 삼매 두 가지가 있다. 접근삼매와 같은 통찰의 기초를 구성하는 삼매는 세간적인 것이고, 길과 연관된 것은 출세간적 삼매라 한다.
지혜에 대한 이야기(paññākathā) 역시 두 종류가 있다. 세간적 지혜는 배움으로 이루어지고, 사유로 이루어지고, 선정과 연관된 통찰지혜를 말한다. 출세간적 지혜는 길과 경지의 지혜를 말한다. 해탈에 대한 이야기(vimuttikathā)에 대한 이야기는 고귀한 경지에 의한 해탈과 열반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해탈지견에 대하여
해탈에 대한 앎과 봄에 대한 이야기 (vimuttiñāṇadassanakathā)는 해탈했다고 확신하는 지혜를 말한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봉사가 ‘붉은 신호등일 때 서고 푸른 신호등일 때 가야한다.’는 앎이 있어도, 실제 신호등 앞에서는 봄이 없기 때문에 그의 앎은 소용이 없다. 또 어린 아이는 신호등 앞에서 붉은 신호등이나 푸른 신호등을 볼 수 있어도 , ‘붉은 신호등일 때 서야 하고 푸른 신호등일 때 가야한다.’는 앎이 없기 때문에 그의 봄은 아무 소용이 없다. (551번 각주, 우다나, 전재성님)
한역에서는 앎과 봄에 대하여 지와 견이라 한다. 그래서 ‘해탈에 대한 앎과 봄(vimuttiñāṇadassana)’에 대하여 ‘해탈지견’이라 한다.
표로 정리해 보면
부처님은 메기야에게 마음의 해탈을 이루게 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는 부처님의 단계적 가르침에 따른다. 그래서 ‘이야기(kathā)’ 형식으로 말한 것이다.
경에서 이야기의 구체적 내용은 경에 보이지 않는다. 다만 우다나 주석에서는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부처님이 소욕지족 등의 여러 이야기를 표로 정리 하여 보았다.
No |
버리고 없애는 삶 이야기 |
내 용 |
1 |
소욕에 대한 이야기 (Appicchakathā) |
1) 필수품과 관련된 소욕(네 가지 필수품을 적게 원하는 것) 2) 고행과 관련된 소욕(자신의 고행이 널리 알려지길 바라지 않는 것) 3) 경전과 관련된 소욕(많이 배운 것이 널리 알려지길 바라지 않는 것) 4) 성취와 관련된 소욕(흐름에 든 경지 등의 자신의 경지가 알려지길 바라지 않는 것)
|
2 |
만족에 대한 이야기 (santuṭṭhikathā) |
1) 좋거나 어떤 것을 얻든, 소득에 따른 만족 2)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에 만족하는, 기력에 따른 만족 3) 사치스런 것을 피하고 필수적인 것만을 취하는, 분수에 따른 만족 |
3 |
사교의 여읨에 대한 이야기 (asaṃsaggakathā) |
들음에 의한 사귐, 봄에 의한 사귐, 대화에 의한 사귐, 즐김에 의한 사귐, 신체에 의한 사귐을 여의는 것 |
4 |
여읨에 대한 이야기 (pavivekakathā) |
신체의 멀리 여읨, 마음의 멀리 여읨, 집착의 멀리 여읨 |
5 |
정진에 대한 이야기 (viriyārambhakathā) |
네 가지 올바른 정진 |
6 |
삼매에 대한 이야기 (samādhikathā) |
접근삼매와 같은 통찰의 기초를 구성하는 삼매는 세간적인 것이고, 길과 연관된 것은 출세간적 삼매 |
7 |
지혜에 대한 이야기 (paññākathā) |
세간적 지혜는 배움으로 이루어지고, 사유로 이루어지고, 선정과 연관된 통찰지혜를 말한다. 출세간적 지혜는 길과 경지의 지혜 |
8 |
해탈에 대한 이야기 (vimuttikathā) |
고귀한 경지에 의한 해탈과 열반에 대한 이야기. |
9 |
해탈에 대한 앎과 봄에 대한 이야기 (vimuttiñāṇadassanakathā) |
해탈했다고 확신하는 지혜. (해탈지견) |
왜 기억해야 하는가?
부처님은 메기야에게 아홉 가지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런 이야기는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요새처럼 필기구나 녹음기가 있다면 좋으련만 부처님 당시에는 잘 귀를 기울여 듣고 새기는 것 밖에 없었다. 그래서 기억한 것을 되새기고 사유함으로써 부처님이 말씀하신 의미를 분명히 파악하는 것이 수행의 전제조건이었을 것이다.
팔정도에서 정념에 대한 항목을 보면 부처님이 말씀 하신 32가지 신체기관이나 10가지 부정관, 그리고 세 가지 느낌, 탐진치 등의 마음, 그리고 오장애와 오온, 여섯 감역, 칠각지, 사성제 등을 관찰하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을 잘 기억하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라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정념이라는 말은 ‘바른기억’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기억해야 한다. 언제 어느 때나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을 늘 기억하고 되새기고 사유하는 과정에서 향상이 이루어진다. 만일 부처님이 말씀 하신 오온, 여섯 감역, 칠각지, 사성제 등을 모르고 오로지 “이뭐꼬?”만 한다면 엉뚱한 길로 가게 될 가능성이 많다. 이는 정견이 서 있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정견은 사성제를 아는 것이다. 그리고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하는 것이디. 그래서 늘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였을 때 수행이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팔정도에서 정념은 기억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마음챙김이니 마음지킴이니 하는 말들은 본질을 어긋난 것이라 볼 수 있다. 제2, 제3의 뜻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사띠의 제1의 뜻은 메모리이다. 이는 빠알리사전에서도 제1의 뜻으로 memory(기억) 또는 Recollection(기억 또는 회상)이라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수적으로 ‘active state of mind, fixing the mind strongly upon any subject, attention, attentiveness, thought, reflection, consciousness’의 뜻이 있다. 이렇게 본다면 전재성님의 사띠 번역어 ‘새김’은 매우 탁월하다.
모든 배움은 기억하는 것으로부터
부처님은 가르침을 기억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가르침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그 때까지 여래는 가르침을 설하지 않는다.” (A8.82) 라고 하였다. 그리고 부처님은 설법할 때 “잘 새겨들어라”라고 말씀 하신 정형구를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의 말씀을 잘 새겨 들을 필요가 있다.
부처님이 메기야에게 소욕지족 등 아홉 가지 이야기를 해 주었을 때 메기야가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렸다면 어떻게 될까? 결코 마음의 의한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달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모든 배움은 기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왜 공부 잘 하는 학생들이 열심히 노트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2015-10-09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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