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달인과 사유중지
흔히 번뇌망상을 끊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무심(無心)을 말한다. 무심이라면 문자 그대로 마음이 없는 상태이다. 이는 열반을 말한다. 마음이 없으니 사물을 인식할 수 없다. 그렇다고 일상에서 무심의 상태가 될 수 없다. 식물인간이 아닌 한 활동하는 인간에게 번뇌와 망상, 망념 등 잡생각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호흡이 피난처
어떻게 해야 잡념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수 많은 법문, 수 많은 글, 수 많은 강연을 접하였다. 그런 것 중의 하나로 ‘호흡이 피난처’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틱낫한 스님과 함께 프랑스 플럼빌리지를 창립한 베트남 출신의 ‘찬콩 스님’은 호흡이 피난처라 하였다.
어떻게 호흡이 피난처가 될 수 있을까? 교계신문에 따르면 스님은 “깨어 있는 사람은 삶 속에 있지만 마치 바다 위를 항해하는 것처럼 행동한다.”고 말하고, 또”삶이라는 고단한 바다에서 거듭 이 ‘섬’으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이다.”라 하였다.
섬은 안전한 곳이다. 마치 열반을 섬으로 묘사 하였듯이 거친 바다, 폭풍우 치는 바다, 위험한 바다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는 섬이다. 평온하고 안은한 마음의 섬으로 피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찬콩스님은 “폭력적인 기억이 덮친다면 ‘섬’, 그러니까 부동의 기준점 숨·호흡으로 돌아와야 한다”라 하였다.
시를 하나 썼는데
호흡이 피난처라는 찬콩스님의 글을 보고서 시를 하나 쓴 바 있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호흡이 피난처
매일 숨을 쉰다.
들이 마시고 내쉬고를 반복한다.
지금까지 숨을 쉬며 들이 마시며
호흡하며 살아 왔다.
숨을 멈춘다면 사망이다.
한번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지 못한다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물고기가 물의 고마움을 모르듯
사람들은 숨의 고마움을 모른다.
물고기가 밖으로 나오면 헐떡이듯
산소가 희박하면 헐떡인다.
“있을 때 잘해!”라는 유행가도 있다.
숨을 쉴 때 잘 살아야 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청정한 삶이다.
늘 새벽을 새벽을 맞는다.
새벽은 해가 뜨는 전조이다.
착 가라 앉은 새벽에
숨소리가 난다.
들이 마시고 내쉬고 할 때마다
이전의 행위가 부끄러워 진다.
이럴 때 외워 놓은 시가 생각난다.
마음에 드는 시는 외워놓고 볼 일이다.
그날의 행위가 깨끗한지는
잠자리에 들면 알 수 있다.
한 생의 삶이 청정한지는
죽음의 침상에 누워봐야 알 수 있다.
더러운 삶을 산 자는
‘내가 악을 지었다’고 후회한다.
청정한 삶을 산 자는
‘내가 선을 지었다’고 환호한다.
청정한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늘 깨어 있는 삷이다.
깨어 있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현재만 계속 된다면
죽지 않는 것과 같다.
게으른 사람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깨어 있지 않아 지금 여기서
알아차리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순간의 유혹에 사로잡혀
그 순간에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
숨을 들이 마시고 내 쉰다.
호흡하면 잡생각이 나지 않는다.
피난처가 삼보라 하지만
이 순간 만큼은 호흡이 피난처이다.
(호흡이 피난처, 진흙속의연꽃, 2015-05-04)
맛지마니까야 ‘사유중지의 경(M20)’에서
번뇌, 망상, 망념, 잡념 등 온갖 부정적 사유들로부터 해방되려면 호흡으로 돌아 오라고 하였다. 호흡은 생명의 근원이기도 하며 동시에 올바른 사유의 근원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부정적 사유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호흡만 있을까? 맛지마니까야 ‘사유중지의 경(M20)’에 따르면 호흡을 포함하여 다섯 가지 방법이 제시 되어 있다. 그 다섯 가지 방법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그는 인상과 다른, 선하고 건전한 어떤 인상에 관련된 정신활동을 일으켜야 한다.
둘째, 그 수행승은 그 사유들 속에서 위험을 이렇게 ‘이러한 사유는 불건전하다. 이러한 사유는 비난받을 만하다. 이러한 사유는 고통을 유발한다.’라고 성찰해 보아야 한다.
셋째, 그 수행승은 그러한 사유에 새김을 두지 말고, 정신활동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넷째, 그 수행승은 그 사유에 대하여 사유활동의 중지를 위한 정신활동을 일으켜야 한다.
다섯째, 수행승은 이빨을 이빨에 붙이고 혀를 입천장에 대고 마음으로 마음을 항복시키고 제압해서 없애 버려야 한다.
마음을 항복받는 이야기
다섯째 사항을 보면 ‘이빨을 이빨에 붙이고 혀를 입천장에 댄다’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다름 아닌 참선방법에 대한 것이다. 초기경전에서 최초로 언급된 참선자세라 하였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마음을 항복시킬 수 있다고 하였다. ‘마음을 항복받는다’는 이야기는 금강경에도 나온다.
금강경에서 수보리가 “세존 선남자 선여인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응운하주 운하항복기심(世尊 善男子 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應如是住 如是降伏其心)”라 하였다. 이는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샴막삼보리의 마음을 냈으면, 마땅히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오리까?”라는 뜻이다.
금강경에서는 마음을 항복받는 것에 대한 물음으로서 시작 된다. 그런데 맛지마니까야 사유중지의 경에서도 마음을 항복받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는 “그가 이빨을 이빨에 붙이고 혀를 입천장에 대고 마음으로 마음을 항복시키고 제압해서 없애 버린다.(Dante'bhidantamādhāya1 jivahāya tāluṃ āhacca cetasā cittaṃ abhiniggaṇhato abhinippīḷayato abhisantāpayato)”(M20) 라는 내용이다. 구체적으로 ‘이빨을 이빨에 붙이고 혀를 입천장에 댄다’라 하였다. 그래서 ‘마음으로 마음을 항복받는 다(āhacca cetasā cittaṃ)’ 고 하였다.
마음(citta)과 마음의 요소(cetasika)
‘마음으로 마음을 항복받는다(āhacca cetasā cittaṃ)’ 고 하였을 때 앞마음과 뒷마음에 대한 빠알리어가 다르다. 앞마음은 citta로서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의 뜻이고, 뒷마음은 ceto로서 건전한 마음이다. 착하고 건전한 마음으로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을 제압하는 것이다.
여기서 마음이라 하였을 때 이는 찟따(citta)를 말하며 마음일반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 마음은 마음의 요소(cetasika)에 의하여 좌우된다.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은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의 요소 즉, 탐욕(lobha)이나 성냄(dosa) 등의 마음의 요소에 따른다. 이렇게 보았을 때 이미 오염된 마음은 믿음(saddha)이나 사띠(sati) 등 착하고 건전한 마음의 요소를 일으켜야 한다. 이렇게 마음은 마음(citta)과 마음의 요소(cetasika)로 이루어져 있다. 이때 빠알리어 쩨따시까(cetasika)는 “ 'mental things, mental factors', are those mental concomitants which are bound up with the simultaneously arising consciousness”라고 설명된다.
이렇게 본다면 “āhacca cetasā cittaṃ”라는 문구는 citta가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이고, ceto는 마음부수로서 착하고 건전한 마음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악하고 불건전한] 마음을 [착하고 건전한]마음의 요소를 일으켜 제거한다”라고 설명될 수 있다.
이 문구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마음으로 마음을 제지하고”라 하였고, 냐나몰리와 빅쿠보디는 “crush mind with mind.”라 하였다. MDB각주에서는 “ MA: He should crush the unwholesome state of mind with a wholesome state of mind.” (243번 각주) 라 하여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을 착하고 건전한 마음으로 부순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생각이 많은 사람
맛지마니까야 사유중지의 경에서 핵심은 ‘악하고 불건한(akusla)’ 사유를 ‘착하고 건전한(kusala)’ 사유로 부수는 것이다. 여기서 사유라 한 것은 경에서 언급된 Vitakka를 번역한 것이다. 빠알리어 Vitakka는 ‘reflection; thought, 尋, 尋求, 覚, 思惟’의 뜻이다.
위딱까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사유’로 번역되어 있다. 그래서 Vitakkasaṇṭhānasutta에 대하여 ‘사유중지의 경(성전협)’ 또는 ‘사유를 가라앉힘 경(초불연)’이라 하였다. 그런데 MDB에서는 ‘The Removal of Distracting Thoughts’라 하여 ‘생각’의 뜻인‘Thought’라 하였다.
생각이 많은 사람이 있다. 이런저런 생각하면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옛날일이 생각나서 괴로워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럴 때 차라리 기억을 지워 버리는 것이 마음 편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어느 교수는 칼럼에서 최근 기억에서 부터 차츰 지워져 가는 치매환자가 더 편할 수 있다고 하였다. 심지어 식물과 광물로 확대하기 까지 한다. 그래서 치매환자나 식물이나 광물은 생각이 없기 때문에 무념무상이 되어서 이미 해탈한 상태나 다름 없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서양의 어느 철학자는 ‘인간은 사유하는 갈대’라 하였다. 또 “나는 사유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사유는 착하고 건전한 것이다. 아무리 연약한 갈대와 같은 인간이지만 사유함으로써 우주를 알게 된다. 우주 속에 모래알과도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지만 사유하기에 모든 우주를 포괄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사유가 아닌 생각, 그것도 악하고 불건전한 생각을 하게 되었을 때 우주적 스케일의 고통을 받는다. 이런 괴로움에 대한 해법이 사유를 중지 할 수 있는 다섯 가지 방법이라 볼 수 있다.
마음은 제멋대로이다
마음은 내버려 두면 제멋대로 날뛴다. 그래서 “흔들리고 동요하고 지키기 어렵고 제어하기 어려운 마음” (Dhp33) 이라 하였다. 또 상윳따니까야에서는 마음에 대하여 “예를 들면 원숭이가 삼림의 숲속으로 다니면서 한 가지를 붙잡았다가 그것을 놓아버리고 다른 가지를 붙잡는 것과 같다.” (S12:61)라 하였다. 원숭이가 계속 눈을 굴리면서 이가지 저가지로 옮겨 가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마음은 제멋대로이고 경망하고 변덕이 심한 것이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마음은 기본적으로 불건전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우 쿤달라 비왐사의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에 따르면 마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 하였다.
1) 마음은 길들이기 어렵다.
마음을 길들이고 다스리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마음은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여서 원하는 곳은 어디라도 가며, 자유롭게 떠돌아 다닌다. 마음으로 갈 수 없는 나라가 있는가? 상상만으로도 어디로든 갈 수 있다. 그리고 이를 막을 수 있는가? 아무도 자신의 나라로 들어 오는 마음을 막을 수 없다. 마음에는 장벽이 없다.
2) 마음은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진다.
마음은 빠르게 일어났다가 빠르게 사라지는 성품을 가지고 있다. 매우 빠른 속도로 변화한다. 한 순간 행복하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슬퍼진다. 이 순간에 행복 하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화를 낸다. 이순간에는 공손하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그렇지 않다.
3) 마음은 제멋대로이다.
마음은 자기가 선택한 마음의 대상에 스스로의 의지로 다가간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불 법 승 삼보와 정신, 물질이라는 특정한 마음의 대상에 마음을 두는 것은 쉽지 않다. 위빠사나를 처음 시작한 수행자는 정신적대상과 물질적 대상에 집중을 하려고해도 마음이 여기 저기로 돌아 다닌다. 그 마음은 시장으로, 사무실로, 학교로 어디든 돌아다닌다.
4) 마음은 원래 선하지 않은 것을 좋아한다.
마음은 여간해서는 선한 생각에 머물지 않는다. 마음은 선하지 않은 생각과 선하지 않은 대상에 빠져 드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은 수행자 개인의 성품이 그래서 그런 것은 아니다. 원래 마음의 성품이 선하지 않은 행위를 좋아 한다. 마음은 좋지 않은 것을 즐긴다. 마음을 내버려 두면, 마음은 대부분 선하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하고 있다.
(우 쿤달라 비왐사,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행복한 숲)
쐐기의 비유
마음에 대하여 경에서는 “탐욕과 관련되고, 성냄과 관련되고, 어리석음과 관련된,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이라 하였다. 이와 같은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을 어떻게 해야 다스릴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에 “때때로 다섯 가지 인상에 정신활동을 일으켜야 한다. (Adhicittamanuyuttena bhikkhave bhikkhunā pañca nimittāni kālena kālaṃ manasikātabbāni.)”(M20) 라고 하였다.
초불연에서는 “다섯 가지 표상을 때때로 마음에 잡도리해야 한다.”라고 번역하였다. MDB에서는 “from time to time he should give attention to five signs”라 하였다. 여기서 빠알리어 nimittā에 대하여 인상, 표상, signs라고 번역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경에 따르면 마음은 다섯 가지 방법으로 다스릴 수 있음을 말한다.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이 ‘마음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이다.
첫째, 선하고 건전한 어떤 인상에 관련된 정신활동을 일으켜야 함을 말한다. 이 말은 악하고 불건전한 생각을 착하고 건전한 생각으로 부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었다.
Seyyathāpi bhikkhave dakkho palagaṇḍo vā palagaṇḍantevāsī vā sukhumāya āṇiyā oḷārikaṃ āṇiṃ abhinīhaneyya abhinīhareyya abhinivajjeyya, evameva kho bhikkhave bhikkhuno yaṃ nimittaṃ āgamma yaṃ nimittaṃ manasikaroto uppajjanti pāpakā akusalā vitakkā chandūpasaṃhitāpi dosūpasaṃhitāpi mohūpasaṃhitāpi, tena bhikkhave bhikkhunā tamhā nimittā aññaṃ nimittaṃ manasikātabbaṃ kusalūpasaṃhitaṃ. Ye pāpakā akusalā vitakkā chandūpasaṃhitāpi dosūpasaṃhitāpi mohūpasaṃhitāpi te pahīyanti. Te abbhatthaṃ gacchanti. Tesaṃ pahānā ajjhattameva cittaṃ santiṭṭhati sannisīdati ekodi hoti samādhiyati.
수행승들이여, 마치 숙련된 미쟁이나 그의 도제가 작은 쐐기로 커다란 쐐기를 쳐서 뽑아 버리는 것처럼,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은 어떤 인상에 관해 그 인상에 정신적 활동을 일으켜 자신 안에 탐욕과 관련되고, 성냄과 관련되고, 어리석음과 관련된,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가 일어나면, 그는 그 인상과는 다른, 선하고 건전한 어떤 인상에 관련된 정신활동을 일으켜야 한다. 그가 그 인상과는 다른, 선하고 건전한 어떤 인상에 관련된 정신활동을 일으키면, 탐욕과 관련되고, 성냄과 관련되고, 어리석음과 관련된,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들이 버려지고 사라진다. 그것들이 버려지면 안으로 마음이 확립되고 가라앉고 통일되고 집중된다. (M20,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쐐기의 비유를 들었다. 그래서 “작은 쐐기로 커다란 쐐기를 쳐서 뽑아 버리는 것처럼(sukhumāya āṇiyā oḷārikaṃ āṇiṃ abhinīhaneyya)”라 하였다. 마치 독을 독으로써 제독하는 것과 같다. 이는 동종요법을 말한다.
동종요법(同種療法)
동종요법(同種療法)은 인체에 질병 증상과 비슷한 증상을 유발시켜 치료하는 대체 의학의 일종이다. 유사요법, 호메오파티(homeopathy)라고도 한다. 버스웰 교수에 따르면 간화선이 동종요법과 같은 방식이라 하였다. 이는 의심이라는 번뇌로써 큰 번뇌를 잡는 방법을 말한다.
간화선에 삼요체가 있다. 그것은 대신근(大信根), 대분지(大憤志), 대의정(大疑情) 이렇게 세가지이다. 대신근은 큰 믿음의 뿌리라는 뜻이고, 대분지는 큰 열정적인 의도, 대의정은 큰 의심의 감정이라는 뜻이다.
대의정에 대하여 고봉선사의 말을 빌어 “혼자 있을 때 뭔가 아주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데, 이것이 발각되기 직전에 느끼는 불안감과 비슷하다”라 하였다. 이와 같은 의정에 대하여 대혜선사도 역시 당혹감, 불안, 좌절 등으로 묘사 하였다고 한다.
의심을 이용하여 번뇌를 해결하는 방식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초기불교적 입장에서 본다면 긍정적이지 않고 부정적이다. 인도 불교전통, 즉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그런데 간화선에서는 14가지 해로운 마음(불선법)의 하나인 의심(vicikaccha)이라는 독으로 더 큰 독(번뇌)를 해결코자 하는 것이다.
선불교에서는 내가 본래 부처라 한다. 그래서 수행하는 것도 내가 본래 부처임을 확인 하는 것이라 한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정말 내가 부처일까?”라는 의심이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럴 경우 이뭐꼬나 무자 등의 의심으로 더 큰 의심 즉, “내가 부처일까?” 하는 의심을 제거 하는 것이라 한다.
하지만 버스웰 교수에 따르면 동종요법은 독이 될 수도 있다고 하였다. 아주 극소량의 독으로 독을 제독하고자 하였을 때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작은 의심으로 아주 큰 의심을 제거 하기 위한 방법도 위험을 내포 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의심이라는 말 자체가 불선한 것이다. 예를 들어 욕망으로 욕망을 제거 하는 것과 같다.
세상사람들은 탐진치로 살아가고 동시에 오욕락으로 살아간다. 모두 욕망충족을 목표로 한다. 그런데 탐욕이라는 불선법으로 욕망이라는 번뇌를 잡을 수 있을까? 식욕, 성욕 등 오욕락으로 욕망을 충족하면 욕망이 근절 될 수 있을까? 아마 채워도 채워도 갈증만 날 것이다. 그래서 불선법으로는 번뇌를 근절시킬 수 없다. 다만 선법으로 불선법을 제거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래서 위험하지 않다.
이와 같은 동종요법에 대하여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 독으로서 독을 제거 하는 간화선(2012-06-19)’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마음으로 마음을 항복시키는
부처님이 쐐기(āṇi)의 비유를 든 것은 일종의 동종요법이다. 이는 사유를 사유로서 잡겠다는 것과 같다. 즉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에 대하여 착하고 건전한 사유를 일으켜 잡겠다는 것과 같다. 마음으로 마음을 항복시키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다.
탐욕의 사유가 살아 있는 존재를 향해 일어날 때에, ‘다른 인상’은 부정(不淨)에 대한 명상이다. 탐욕의 사유가 살아 있지 않은 존재를 향해 일어날 때에, ‘다른 인상’은 무상에 대한 정신활동이다. 성냄의 사유가 살아 있는 존재를 향해 일어날 때에, ‘다른 인상’은 자애에 대한 명상이다. 성냄의 사유가 살아 있지 않은 존재를 향해 일어날 때에, ‘다른 인상’은 세계에 대한 정신활동이다. 그리고 어리석음에 대한 치유를 위해서는 스승아래에서 사는 것, 가르침을 배우는 것, 의미에 대한 탐구, 가르침에 대한 경청, 원인에 대한 질문이다.
(370번 각주, Pps.II.88, 사유중지의 경 M20, 전재성님)
악하고 불건한 사유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과 관련이 있다. 특히 탐욕과 성냄과 관련하여 살아 있는 것과 살아 있지 않은 것 두 가지로 분류 하였다.
살아 있는 것에 대한 탐욕이 일어난다면 부정상을 닦으라고 하였다. 이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염처경에서는 32가지 신체기관과 10가지 부정상을 관찰하라고 하였다. 이는 내적 외적 접촉에 따른 감각적 욕망에 따른 표상이 일어 났을 때 벗어나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분노가 치밀었을 때
성냄과 관련하여 살아 있는 존재에게는 자애를 닦아야 한다고 하였다. 분노가 치밀었을 때 자애의 마음을 닦아 두었다면 마음이 가라 앉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분노의 마음을 억누를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경전을 근거로 하여 분노다스리기 아홉 단계를 설명해 놓았다. 이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화를 화로써 앙갚음 하지 않는다.
둘째, 연민을 통해 적개심을 가라 않는다.
셋째, 자신을 훈계하여야 한다.
넷째, 업이 각자 자기의 주인임을 반조한다.
다섯째, 부처님이 전생에 인욕수행한 덕을 반조해야 한다
여섯째, 일체중생에 대하여 나를 한번쯤 낳아준 어머니로 생각한다.
일곱째, 자애수행의 열한가지 이익에 대하여 생각한다
여덟째, 존재를 나(我)나 나의 것이 아닌 오온, 12처, 18계의 요소로 본다.
아홉째, 보시를 통하여 성냄을 제거 한다. (Vism.9장)
가르침을 기억하고 되새기고 사유하고
다섯 가지 표상을 일으키는데 있어서 첫번째는 동종요법이다. 이는 마치 작은 쐐기를 이용하여 큰 쐐기를 뽑아 내는 것처럼, 또는 독을 독으르써 제독하는 것처럼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를 착하고 건전한 한 생각을 일으켜 제압하는 방법을 말한다. 그래서 탐진치와 관련된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가 일어 났을 때 “그는 인상과 다른, 선하고 건전한 어떤 인상에 관련된 정신활동을 일으켜야 한다. (Tassa tamhā nimittā aññaṃ nimittaṃ manasikaroto kusalūpasaṃhitaṃ,)”라 하였다.
사유에 사유를 일으켜 제압하면 어떻게 될까? 경에 따르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과 관련된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가 버려지고 사라진다고 하였다. 이는 앞마음과 뒷마음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미 발생된 번뇌 망상이 일어 났을 때, 항상 가르침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띠 하는 것이다. 가르침을 기억하고 되새기고 사유하는 것이다. 이렇게 늘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을 때 어떤 경계에 부딪쳐도 이겨 낼 수 있다.
가르침을 기억하였을 때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은 이전의 마음이 되어 버린다. 마음은 오로지 한 순간에 하나의 일 밖에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마음을 마음으로 항복받는 일종의 동종요법이라 볼 수 있다.
표로 정리하면
맛지마니까야 사유중지의 경에 다섯 가지가 설명되어 있다. 이는 보다 높은 마음을 닦을 때 필요한 것이라 하였다. 여기서 보다 높다는 것은 ‘팔선정’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수행자를 위한 가르침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현대를 살아 가는 사람들이 갖가지 경계에 부딪칠 때 효과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이를 표로 요약해 보았다.
No | 다섯 가지 방법 | 내 용 |
1 | 선하고 건전한 정신활동을 일으킴 |
작은 쐐기로 커다란 쐐기를 쳐서 뽑아 내는 것처럼.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들이 생겨나면, 그 인상과는 다른, 선하고 선하고 건전한 어떤 인상에 관련된 정신활동을 일으킴. |
2 | 불건전한 사유는 고통을 유발한다고 성찰함 | 뱀이나 개나 사람의 사체를 보여 주면 놀라는 것처럼.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들이 생겨나면, 사유들 속에서 위험을 보고 ‘이러한 사유는 불건전하다. 이러한 사유는 비난받을 만하다. 이러한 사유는 고통을 유발한다.’라고 성찰함. |
3 | 사띠하지 않고 정신활동도 일으키지 않음 | 시야에 들어온 형상을 보지 않고자 눈을 감거나 다른 곳을 쳐다 보는 것처럼.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들이 생겨나면, 새김을 두지 않고 정신활동도 일으키지 않음. |
4 | 사유활동의 중지를 위한 정신활동을 일으킴 | 사람이 급히 가는데 ‘내가 왜 급히 가는가? 오히려 천천히 가보자.’라고 생각하여 천천히 가고, 또한 ‘내가 왜 서있는가? 오히려 앉아있어 보자.’라고 생각하여 앉아있고, 또한 ‘내가 왜 앉아있는가? 오히려 누워있어 보자.’라고 생각하여 누워있는 것처럼.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들이 생겨나면, 사유활동의 중지를 위한 정신활동을 일으켜야 함 |
5 | 마음으로 마음을 항복시키고 제압함 | 힘 있는 사람이 힘없는 자를 머리나 어깨를 붙잡아 항복시키고 제압해서 없애버리는 것처럼.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들이 생겨나면, 이빨을 이빨에 붙이고 혀를 입천장에 대고 마음으로 마음을 항복시키고 제압해서 없애버려야 함. |
āpajjitabbā를 염두에 두지 않은 번역
세 번째 항에서 ‘사띠하지 않고 정신활동도 일으키지 않음’이라 하였다. 여기서 사띠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또 정신활동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에 대한 각주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청정도론 자애수행(7장) 편에 실려 있는 ‘절복진노경(A5.161)’에서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앙굿따라니까야에 ‘원한의 제거에 대한 경(절복진노경, A5.161)’이 있다. 경에 따르면 어떤 사람에게 원한이 생겨났을 때 자애와 연민과 동정의 마음을 내라고 하였다. 그러면 그 사람에 대한 원한이 제거 된다고 하였다. 모두 다섯 가지 방법이 소개 되어 있는데 네 번째에 이런 가르침이 있다.
Yasmiṃ bhikkhave, puggale āghāto jāyetha, asati amanisikāro tasmiṃ puggale āpajjitabbā. Evaṃ tasmiṃ puggale āghāto paṭivinetabbo.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사람에 대하여 원한이 생겨나면, 그 사람에 대하여 새김을 놓아버리고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와 같이 하면 그 사람에 대한 원한은 제거 된다.”
(Paṭhama āghātapaṭivinayasutta- 원한의 제거에 대한 경, 앙굿따라니까야 A5.161, 전재성님역)
원한 맺힌 자가 떠 오를 때가 있다. 그럴 때 그 자를 계속 생각한다면 어떻게 될까? 내 돈을 떼 먹고 달아난 자 또는 나를 버리고 떠난 자를 계속 생각한다면 괴로울 것이다. 그럴 때 차라리 잊어 버리는 것이 마음 편할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에 대하여 새김을 놓아버리고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않는다.(asati amanisikāro tasmiṃ puggale āpajjitabbā)”라 하였다.
초불연에서는 “어떤 사람에게 원한이 생기면 그 사람에 대해서 마음챙기지 않음과 주의를 기울이지 않음을 닦아야 한다.”라 하였다. 영문에서는 “When anger has arisen towards a certain person, not thinking of him, forgetting him should be developed towards that person.”라 하였다.
그러나 세 번역 모두 āpajjitabbā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빠알리사전에 따르면 āpajjitabbā는 āpajjitā형태로서 ‘One who falls into, is guilty of’의 뜻이다. 따라서 “asati amanisikāro tasmiṃ puggale āpajjitabbā”에 대하여 직역한다면 “죄악을 일으키는 그 사람에 대하여 기억하지도 않고 관심도 두지 않는다”가 될 것이다.
그 인간(사람)에 대하여 생각만 해도 ‘불선심’만 자극한다. 그럴 때 마다 죽도록 미워하는 마음이 생겨나고 심지어 살해하려는 의도까지 발생할 수 있다. 이는 죄악이다. 빠알리 구문에서 ‘죄악을 일으킨다’는 뜻인 ‘āpajjitabbā’가 있다. 그러나 어느 번역에서도 ‘āpajjitabbā’에 대하여 표현 되어 있지 않다.
잊어 버리는 것(forgetting)과 무시하는 것(ignoring)으로
그 사람을 생각하면 죽도로 미워하는 마음과 함께 분노의 감정이 치밀어 오른다. 이는 불선심이다. 그리고 죄악을 짓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래서 그 사람에 대하여 잊어 버리고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하였다. 그것이 ‘asati amanisikāro’하는 것이다. 그런데 타닛사로 빅쿠의 영역을 보면 매우 적절하게 표현 되어 있다. 이를 번역해 보았다.
“The forgetting and ignoring of a person with whom you are annoyed can be practiced; this too is how annoyance with him can be removed.”
(Thanissaro, AN 5.161)
당신에게 분노를 유발케 한 사람에 대하여 ‘잊어 버리는 것(forgetting)’과 ‘무시하는 것(ignoring)’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에게 일어나는 분노를 어떻게 제거 하는지에 대한 방법입니다.
타닛사로 빅쿠는 영역에서 forgetting과 ignoring을 사용하였다. 죄악심을 유발케 하는 원한 맺힌 자에 대하여 단지 ‘잊어 버리는 것(forgetting)’과 ‘무시하는 것(ignoring)’으로 수행하자는 것이다.
분노다스리기의 결정판
한역으로 절복진노경이라 번역되어 있는 ‘āghātapaṭivinayasutta’는 사무량심에 근거한 것이다. 그래서 자애, 연민, 평정을 기본으로 하였다. 여기에 잊어버리고 무시하기와 업이 자신이 주임임을 반조하기 두 가지를 추가 하였다. 특히 마지막 ‘업자성정견’의 경우 모든 분노다스리기의 결정판이라 볼 수 있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kammassako ayamāyasmā1 kammadāyādo kammayonī kammabandhū kammapaṭisaraṇo. Yaṃ kammaṃ karissati kalyāṇaṃ vā pāpakaṃ vā, tassa dāyādo bhavissatī"ti. Evaṃ tasmiṃ puggale āghāto paṭivinetabbo..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사람에게 워한이 생겨나며느 그 사람에 대하여 행위가 주인이라는 사실을 이와 같이 ‘이 사람에게 행위가 주인이고, 행위가 상속자이고, 행위가 모태이고, 행위가 친족이고, 행위가 의지처이다. 선하거나 악한 행위를 하면, 그것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라고 인식해야 한다.” (A5.161, 전재성님역)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 하였을 때 마음의 평정을 유지한다. 행위에 따른 과보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오히려 연민의 마음으로 바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업자성정견은 분노다스리기의 결정판이라 볼 수 있다.
사유의 달인
부처님 가르침은 탐진치 삼독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다. 경에 따르면 탐욕은 부정관을 닦음으로 인하여 제거 되고, 성냄은 자애관을 닦음으로 제거 된다. 어리석음은 가르침을 접함으로서 제거 된다. 악하고 불건전하 사유도 이와 다르지 않다.
맛지마니까야 사유중지의 경에서는 모두 다섯 가지 방법이 제시 되었다. 마음을 마음으로 다스리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이렇게 하였을 때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들은 버려지고 제거 된다고 하였다. 버려지면 안으로 마음이 확립되고 가라앉고 통일되고 집중된다고 하였다. 이는 팔선정을 위한 기본 조건이다.
선정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사유중지도 요청된다. 일상에서 다섯 가지 인상을 기억하고 되새기고 사유함으로써 번뇌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다.
yaṃ vitakkaṃ ākaṅkhissati taṃ vitakkaṃ vitakkessati,
yaṃ vitakkaṃ nākaṅkhissati na taṃ vitakkaṃ vitakkessati,
“그는 자신이 사유하고자 원하는 사유를 할 것이고,
자신이 사유하고자 원하지 않는 사유를 사유하지 않을 것이다.”(M20, 전재성님역)
“그가 원하는 사유를 할 것이고
그가 원하지 않는 사유를 할 것이다.” (M20, 대림스님역)
he wishes to think and
he will not think any thought.( M20, MDB)
번역을 보면 전재성님은 원문을 모두 직역하였다. 그러나 대림스님은 생략된 번역을 하였다. 이는 MDB에서도 동일한 현상이다.
사유를 자재자재로 할 수 있음을 말한다. 번뇌망상이 일어났다고 하여 식물인간처럼 또는 치매걸린 사람처럼 또는 식물이나 광물처럼 ‘무심(無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번뇌, 망념, 잡념, 악하고 불건전한 생각이 일어 났을때 휩쓸리지 않고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만일 무심만을 말한다면 착하고 건전한 마음까지 무심이어야 할 것이다. 이는 모순이다. 그럼에도 일어나는 번뇌망상을 잡기 위하여 무심을 말한다면 이는 빈데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다.
번뇌망상이 일어 났을 때 이를 알아차려야 한다. 그 알아 차리는 방법에 대하여 다섯 가지로 가르침을 주셨다. 이런 가르침을 잘 기억하고 되새기고 사유하였을 때 사유를 다스릴 줄 아는 자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사람에 대하여 ‘사유과정의 스승(vasī vitakkapariyāyapathesu)’이라 하였다. 이는‘사유의 달인’이라 볼 수 있다. 자제력이 있는 현명한 자를 말한다.
2015-10-18
진흙속의연꽃
'담마의 거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님을 믿으면 실망하기 쉽다, 스님의 환속을 보고 (0) | 2015.10.27 |
---|---|
재가자는 출가자를 넘어 설 수 없다, 스님과 마주치면 반배의 예를 (0) | 2015.10.23 |
나의 삶도 축복이고 나의 죽음도 축복이다 (0) | 2015.10.15 |
사띠(sati)는 ‘바른 기억(正念)’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0) | 2015.10.14 |
저열한 사유를 제거 하려면 (0) | 2015.10.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