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중생구제인가 개인구제인가, 수행과 깨달음에 대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16. 1. 24. 15:55

 

중생구제인가 개인구제인가, 수행과 깨달음에 대하여

 

 

 

늘 추위와 열기에 있는 듯

 

혹독하게 추운 날씨이다. 겨울을 겨울답게 하는 매서운 날씨이다. 굶주리고 헐벗은 자에게는 형벌 같은 계절이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자에게는 시련의 계절이다. 축적해 놓은 것은 없고 갈수록 나이는 들어 병고에 시달리는 자는 차라리 안온한 새로운 삶을 꿈꿀지 모른다.

 

거리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옷깃을 여며도 뺨에 와 닿는 촉감이 바늘로 찌르는 듯 하다. 목도리로 두터운 옷으로 몸을 칭칭 감아 보지만 파고 드는 추위에 당해 낼 재간이 없다. 이럴 때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따뜻한 곳에서 안은하게 보내고 싶은 것이다.

 

겨울은 추워서 고통스럽다. 여름은 더워서 힘겹다. 좋은 시절이 있기는 하지만 언제나 느끼는 것은 극단적 추위와 열기이다. 양극단을 떠난 중간은 짧기만 하다. 호시절이 있는지 조차 모르고 지나친다. 즐거움에 취하면 시간이 훌쩍 지나가듯이 봄날은 금방 지나가 버린다. 늘 추위와 열기에 있는 듯 하다.

 

괴로움이 뼈에 사무치는 자각이 일어 났을 때

 

혹한과 혹서는 고통스런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고통은 고통도 아니다. 시간이 지나가면 다 해결 되는 것이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도 해결 되지 않는 것이다. 근원적인 괴로움을 접하였을 때 절망한다. 그래서일까 고성제를 보면 생노병사에 이어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다.”(S56.11) 라 하였다. 십이연기에서 연기가 회전 하였을 때 결국 절망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S12.2) 라 하였다.

 

존재 하는 모든 것들은 괴로움 그 자체이다. 존재를 괴롭다고 자각하였을 때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괴로움에 대하여 뼈에 사무치는 자각이 일어 났을 때 비로서 존재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싫어하여 사라지는 것이 기쁨인 것을 안다.

 

불교는 타종교와 다르다. 타종교에서는 부활을 꿈꾼다. 한번 태어난 이 생이 다하면 영적으로 부활하여 천국에서 영원히 살고자 한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삶을 바란다. 끊임 없이 죽고 사는 윤회의 수레바퀴를 굴려 왔기 때문이다. 이제 그만 쉬고 싶은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죽으면 다시 태어난다. 이를 부활이라 볼 수 있다. 타종교에서는 부활이 축복이지만, 불교에서는 태어남은 괴로움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몰라서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 한다. 하지만 고통에 대한 우주적 스케일의 자각이 있다면 사라지는 것은 축복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하여

 

부처님은 크게 깨달아 생사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중생을 위하여 생사문제를 해결한 것일까? 이에 대하여 동국대 김성철 교수는 중론 강의 도중에 이런 말을 하였다.

 

 

수행의 목적은 뭐냐 하면 뭐가 되는 게 아니고 내 고통만 제거 하는 거에요. 그럼 끝이에요. 외도에서 수행의 목적은 그게 아니죠. 뭔가 이상이 있어가지고 삼매경지, 뭐가 되기 위해서 수행해요. 그건 불교는 아니죠. 일종의 탐욕이죠. 도탐, 도에 대한 탐욕이죠.

 

부처님도 순수했기 때문에 깨닫고 나서 , 설법 하자이렇게 안 하셨어요. 깨닫자 마자 뭐 하셨냐 하면 , 이제 죽어지이렇게 하셨어요. ? 문제 다 풀렸으니까. 뭣하러 또 살아요.

 

열반하자 마자 처음에, 성도하자 마자 서른 다섯살 때, 그 때 가부좌 틀고 앉아가지고 내 이 가르침을 진정으로 수용할 사람이 없구나그러니까 있을 것 같지가 않아요. 그냥 그 자리에서 돌아가실려고 그러죠. 열반할라고.

 

그랬더니 범천, 브라만 천신이 와서 권청을 하죠? 제발 설법해달라고. 그러니까 응병요약, 그래서 일어나신거에요. 이게 불교의 본질이에요.

 

불교는 원칙은 묻지 않으면 답을 하지 않는다이게 불교에요. 다른 종교는 묻지도 않는데 자꾸 강요를 하잖아요. 오히려 독이 되죠.

 

불교 공부할 때 내가 의문이 있을 때, 그 의문에 내가 답을 낼 경우에 이 답을 남한테 알려 줘야지라는 생각을 내지 않고 죽을 때 내가 혼자 가져 가야지라고. 그래서 여한이 없는 그런 문제를 품어야 되요. 그런데남한테 알려 주고 가야지라고 연구하고 그렇게 하면 순수한 건 아니에요.

 

진짜 순수한 것은 내가 진짜 알기 위해서, 죽을 때 남한테 절대 독각처럼 혼자 알다 혼자죽어요. 너무나 의심이 돼가지고 도저히 밥먹고 속물처럼 살 수 없어요. 그러니까 수행을 하고 연구를 하는 거에요. 그래서 남한테 얘기 안해요. 알았어요. 이젠 죽어도 돼요.

 

그런데 왜 이랬었냐 하면 남들이 괴로워 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가르친 거에요. 할 수 없이. 이게 불교에요. 부처님이 그렇게 하셨듯이.”

 

(해인사 2003중론김성철 9,  49:37)

 

 

 

 

 

책을 보거나 자료를 접하였을 때 좋은 내용이 있으면 메모해 둔다. 유튜브에 올려져 있는 동영상의 경우 듣는 것이긴 하지만 시간대를 기억 해 두었다가 녹취해 둔다.

 

김성철교수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부처님이 처음부터 중생구제를 목표로 하여 깨달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생노병사 등 괴로움의 문제를 해켤 코져 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크게 깨닫게 된 것이다.

 

누구나 깨닫는다. 아주 작은 깨달음부터 큰 깨달음에 이르기 까지 매일 매일 삶은 깨달음의 연속이다. 큰 깨달음을 얻었을 때 이를 남에게 알리고자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반면 조용히 자신만 알고자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마 대부분 자신이 아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이 깨달은 것을 남에게 알리고자 하였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예를 들어 보통 사람이 체험하지 못한 것을 깨달았을 때 공감하면 다행이지만 비난하면 상처가 될 것이다. 또 힘들게 이야기 하였음에도 이해 하지 못하면 피곤해 할 것이다. 부처님도 그랬을 것이라 본다.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생사와 윤회문제를 해결한 위없는 깨달음이다. ‘이것 이상 없다라는 말이 있듯이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이다. 이를 아눗따라삼마삼보디라 하여 무상정등정각이라 한다. 이렇게 깨달은 자를 정등각자라 한다. 오로지 부처님 한분에게만 붙여 주는 칭호이다. 그런데 부처님이 처음 무상정득각을 이루었을 때 세상사람들을 위하여 알려 줄 마음은 없었던 것 같다. 이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내 고통을 제거 하기 위하여

 

첫 번째로 부처님의 깨달음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처음부터 남을 구제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깨달음을 추구한 것이 아니다. 이는 김교수가  수행의 목적은 뭐냐 하면 뭐가 되는 게 아니고 내 고통만 제거 하는 거에요. 그럼 끝이에요.”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생노병사 등 괴로움에 대한 문제가 해결 되었을 때 수행의 목적은 달성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초기경전을 보면 부처님은 49일 동안 열반의 즐거움을 누렸다고 했다. 율장대품에서는 그때 세존께서는 보리수 아래에서 칠일 동안 홀로 가부좌를 하고 해탈의 지복을 누리며 앉아 계셨다. (Atha kho bhagavā bodhirukkhamūle sattāha ekapallakena nisaadhikaraasamathāsavidī)”(Vin.I.1) 라고 표현 되어 있다. 이것이 진정한 행복일 것이다. 누구나 행복, 행복 하지만 열반을 성취한 자의 행복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부처님은 보리수나무, 아자빨라니그로다 나무, 라자야따나 나무 등을 옮겨 다니면서 해탈과 열반의 기쁨을 맛보았다. 하지만 이런 기쁨을 누리게 내버려 두지 않은 것 같다. 범천에 있는 신들이 이를 알았기 때문이다. 작은 동산의 보리수아래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감지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안 범천이 부처님에게 법을 설해 주기를 간청한다. 이것이 깨달음에 이어 두번째 일어난 사건이다.

 

 만일 부처님이 깨달은 상태에서 해탈과 열반의 지복을 누리며 살다가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불교는 성립하지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 법을 설해주기를 간청 했기 때문에 오늘날 까지 가르침이 전승되어 온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은 처음부터 중생구제를 목적으로 출가한 것이 아니고, 또한 중생구제를 목적으로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다. 순수하게 개인적으로 일어난 괴로운 문제를 해결하고자 수행한 것이다.

 

수행을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았을 때

 

수행을 어떤 수단을 성취하기 목적으로 삼는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어떤 이익을 위하여 수행을 하여 바라는 목적을 성취하였다면 이는 순수한 행위가 아니다. 흔히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욕구와 같은 것이다. 열심히 노력하여 학업이나 재산, 지위, 권력 등을 성취하는 것과 하등의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수행도 어떤 목적을 위하여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유튜브에서 보았다.

 

유튜브에 에 대한 자료가 올려져 있다. 거의 1987년 공중파 방송에서 방영된 자료이다. 유튜브 동영상을 보면 소설 단의 주인공이 되는 도인에 대한 인터뷰가 실려 있다. 소설 단에서 묘사 된 것처럼 신통력에 대한 호기심에 대한 프로이다. 그런데 수련생 중에 어떤 이는 하루 세시간 또는 하루 종일 수십일 째 수련중에 있다고 하였다. 또 어떤 수련생은 과연 이것이 사실인가 의심도 해 보았지만 제가 본래부터 그 방면에 취미가 있었던 관계로 상당한 책을 읽어 보았습니다. 그래서 수련해 가는 도중과 전에 경험을 비추어 봐서 이것은 분명히 된다고 생각하고 수련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신통을 얻기 위한 수련을 하고 있는 것이다.

 

수련생들은 소설 속의 주인공 도인에게서 신통에 대한 지도를 받아 신통력을 얻기 위해 수련한다고 하였다. 바로 이것이 수행을 목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신통력이 생기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바램을 가지고 수련한 것이다.

 

만일 부처님이 이 세상의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수행하였다면 이는 목적을 가진 것이 된다. 그래서일까 금강경 대승정종분에 아개영입 무여열반 이멸도지 여시멸도 무량무수 무변중생 실무중생 득멸도자(我皆令入 無餘涅槃 而滅度之 如是滅度 無量無數 無邊衆生 實無衆生 得滅度者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이렇게 한량없고 끝없는 중생을 제도하되 실제로는 한 중생도 제도를 받은 이가 없느니라.라는 뜻이다.

 

만일 부처님이 중생을 제도하리라는 마음을 내어서 깨달음을 추구한 것이라면 금강경의 말대로 한 중생도 구제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만일 누군가 이 허공계가 다 하도록 모든 중생을 남김 없이 제도하리라는 우주적 발원을 하여 깨달음을 추구하였다면 이는 목적성을 갖는 것이 된다. 목적을 갖는 것 자체가 일종의 욕망이기 때문에 결코 깨달음도 이룰 수 없고 바라는 바도 성취 될 수 없을 것이다.

 

법은 청원해야 설한다

 

두 번째로 부처님의 깨달음은 권청에 따라 법을 펴신 것이다. 이는 초기경전에서 범천의 권청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느님이라고 번역되는 범천 사함빠띠는 부처님이 깨달은 것을 알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되자 부처님에게 법을 펴 달라고 하였다.

 

만일 누군가 권청하지 않았다면 부처님은 법을 펴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법은 청해야 설한다는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청하지도 않았는데 법을 설한다면 피곤해 할 것이다. 만일 사함빠띠의 청원이 없었다면 부처님은 살만큼 살다가 완전한 열반에 들었을 것이다.

 

범천의 권천이 있었기 때문에 부처님은 법을 설하였다. 그런데 법을 설하려다 보니 걸림이 있었다. 그것은 심오하고 미세한 진리는 보기 어렵네.”(M85) 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왜 진리를 보기 어려울까? 이는 바로 앞구절에 답이 있다. 그것은 흐름을 거슬러 가고라는 말이다.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 가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남들이 재산, 지위, 권력을 추구하는 삶을 살 때 거꾸로 이를 버리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을 따를 자가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상처를 받는 경우

 

누군가 만나는 사람마다 내려 놓으십시오라고 말 할 때 어떤 반응을 보일까?아마 크게 웃어 버리고 말 것이다. 설령 진리를 설하였다고 하더라도 이를 이해 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연기법을 이해할 만한 사람들이 매우 드물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독백처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증득한 이 진리는 심원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고요하고 탁월하여 사고의 영역을 뛰어 넘고 극히 미묘하여 슬기로운 자들에게만 알려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경향을 즐기고 경향을 기뻐하고 경향에 만족해한다. 그러나 경향을 즐기고 경향을 기뻐하고 경향에 만족해하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도리, 즉 조건적 발생의 법칙인 연기를 보기 어렵다. 또한 이와 같은 도리, 즉 모든 형성의 그침, 모든 집착의 보내 버림, 갈애의 부숨, 사라짐, 소멸, 열반을 보기 어렵다. 그러나 내가 이 진리를 가르쳐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나의 고통이 되고 나에게 상처를 줄 것이다.(M85)

 

 

부처님이 해탈과 열반의 지복을 누리고 나서 이를 공유하고자 하였을 때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너무 기쁜 나머지 아무나 붙잡고 이렇게 해 보시오라고 하였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까? 더구나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려 놓으시오고 하였을 때 받아 들일 사람이 있을까? 아마 크게 웃어 버릴 것이다. 이럴 경우 상처 받을 것이다.

 

청원하지 않으면 법을 설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법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 설하는 것이다. 만일 아무나 붙잡고 설한다면 상대방도 피곤하고 자신도 피곤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내가 이 진리를 가르쳐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나의 고통이 되고 나에게 상처를 줄 것이다.”라 하였을 것이다.

 

뭇삶들이 가엾게 보여서

 

부처님은 결국 진리를 설하였다. 범천의 권청이 있기도 하였지만 깨닫고 보니 뭇삶들이 가엾게 보인 것이다. 그래서 뭇삶에 대한 자비심 때문에”(M26) 라 하였다. 초불연에서는 중생에 대한 연민으로라고 하였다. 결국 불쌍함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김성철 교수는 남들이 괴로워 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가르친 거에요.”라 하였다.

 

부처님은 괴로운 문제를 해결하여 해탈과 열반의 지복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중생에 대한 자비심으로 법을 설하였다. 다만 법을 청원한 자에게 해당된다. 그런데 조건이 있다. 법을 배우려거든 먼저 머리속을 비우라고 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라고 하였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념이나 사상, 종교 체계를 모두 내려 놓으라는 말이다. 이렇게 머리를 깨끗하게 비웠을 때 법을 받아 들일 수 있음을 말한다.

 

세상에 비난 받지 않은 도는 도가 아니다

 

수행은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철저하게 자신 혼자서 하는 것이다.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내면과 대면하는 것이다. 이런 수행에 목적이 있다면 실패라 하였다. 마치 세속적인 성공을 추구하듯이 수행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수행을 하여 새로운 사실을 알고 새롭게 깨우쳤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기쁨을 남에게 알려 주어야 할까? 대부분 남에게 알려 주지 않는다. 혼자 안고 가는 것이다. 혹시 이럴지도 모른다. 힘들게 깨친 것을 남에게 알려주기 싫은 마음도 있을 것이다. 또 남에게 이야기 해 보았자 이로울 것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세상사람들은 도나 진리 등 고결한 것에 대하여 관심이 별로 없다.

 

만일 누군가를 붙잡고 도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면 몇 사람이나 귀 기울일까? 아마 대부분은 크게 웃어 버릴 것이다. 그래서일까 예로부터 아무에게나 도 닦는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했다. 칭찬은 고사하고 경청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비난하지 않으면 다행인 것이다.

 

흔히 세상에 비난 받지 않은 도는 도가 아니다라 하였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김성철 교수의 불교 공부할 때 내가 의문이 있을 때, 그 의문에 내가 답을 낼 경우에 이 답을 남한테 알려 줘야지라는 생각을 내지 않고 죽을 때 내가 혼자 가져 가야지라고. 그래서 여한이 없는 그런 문제를 품어야 되요. 그런데남한테 알려 주고 가야지라고 연구하고 그렇게 하면 순수한 건 아니에요.”라는 말에 공감한다. 수행은 세속적 이익을 위한 목적으로 해서는 안되고 진리는 요청하는 사람에게 말해 주어야 함을 말한다.

 

 

 

2016-01-2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