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지은 죄업을 어찌 할 것인가, 세상은 바이로차나의 한바탕 꿈?
자꾸만 옛날 생각이 나서
예비군 훈련장에서 일이다. 오래 전 일이지만 기억에 남는 말이 “자꾸만 옛날 생각이 나서”라는 말이다. 어느 해 여름동원훈련이 있었다. 수원 근교 예비군교장에서 텐트를 치고 몇 일 훈련을 받았다. 회사원들 뿐 만 아니라 지역에 사는 사람들도 동원 되었는데 ‘어슬렁’ 거리며 걸어 다니는 폼이 전형적인 예비군스타일이었다.
어느 날 텐트로 만들어진 막사에서 어느 하사관 출신이 새벽에 담배를 피웠다. 자꾸 옛날 생각이 나서 잠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옛날생각이라는 것이 좋았던 것인지 후회 되었던 것인지 알 수 없다. 훈련장에 와 보니 군대에서 일이 떠 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에 끄달려 잠을 못 이루었을 것이라 본다. 옛날 군대시절의 생각이 그 사람의 의식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이미 지나간 과거를 회상하며 산다. 또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기대하며 살아 간다. 지나간 과거가 영광스런 일도 있었겠지만 대부분 후회스런 일 또는 아쉬운 일이 되기 쉽다. 오지 않은 미래의 일이 기대를 하지만 또 한편으로 막연한 불안과 초조를 야기 하기도 한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일을 미리 걱정하는 것이다.
노인들은 대부분 마음이 과거에 가 있다. 앞으로 살 날이 많지 않고 또한 미래에 대한 기대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몸이 불편하여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떠 올리는 것은 과거의 일 밖에 없다. 대게 “그때 더 잘 해 줄껄”과 같은 후회를 하고 아쉬워하며 회한에 잠긴다. 반면 젊은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정신세계를 지배한다. 학업이나 취업 걱정이다. 또 미래의 노후에 대한 걱정이다. 특히 안정적 노후생활을 위하여 계획을 세운다. 그래서 단계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 고민하게 된다.
마음이 과거나 미래에 가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대게 악하고 불건전한 생각들이 지배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대한 후회나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에 마음이 가 있으면 편하지 않다. 그것은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머리 속에서 생각하며 애태우고 걱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낫에 잘린 푸른 갈대와 같다고 하였다.
과거는 이미 지나 간 것으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뿐이다. 미래는 오지 않아 생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마음을 항상 현재에 두라고 하였다. 그렇다고 현재가 있는 것도 아니다. 현재는 아무리 쪼개고 쪼개도 붙잡을 수 없는 것이다.
금강경에서도 표현 되어 있듯이 시간은 ‘과거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이다. 과거나 미래나 현재가 마음에만 있을 뿐이지 실체가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현재도 붙잡을 수 없다. 다만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할 뿐이다. 그래서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M132) 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과거에 지은 업은 어떻게 할 것인가?
과거에 지은 업을 어떻게 할 것인가?
천수경에 ‘백겁적집죄일념돈탕진(百劫積集罪 一念頓蕩盡)’이라는 말이 있다. 백겁동안 쌓인 죄업이 한 생각에 모두 없어진다는 말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에 대하여 이중표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러분이 천수경을 보면 백겁적집죄일념돈탕진 그러죠? 부처님은 억겁에 지은 죄가 다 없어져 버린다니. 그게 진정한 업보의 자리에요. 업보라는 것은 지금 업보만 있지 작자는 없다는 공의 도리를 업보라고 말하는 거에요.”
(이중표교수, 이중표교수의 연기법 6강(존재와 법 02) 5:27)
천수경에 참회진언이 있다. 그런 참회진언 중에 ‘백겁적집죄일념돈탕진’이라는 말을 부처님이 했다고 한다. 아직까지 이런 말에 대하여 경전적 근거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과거 또는 전생에 지은 죄가 한 순간에 사라져 버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공의 도리를 알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업보는 있고 작자는 없다’라고 말한다.
과거를 돌아 보면 후회스런 일이 많다. 군대에 있을 때 집합을 하여 후임을 구타한 것이 지금도 마음에 걸린다. 이는 군대라는 특수한 문화 때문이다. 선임이 후임을 집합시켜 기합을 주고 구타하는 것은 다반사이었다. 이처럼 관행처럼 내려온 군대문화에 젖어 들어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업을 짓고 만 것이다. 그때 당시 원망의 눈초리로 쳐다 보던 후임을 생각하면 지금도 부끄럽고 창피하다. 그렇다고 아주 못되게 한 것은 아니다. 한 두 번 그런 일이 있었다. 그것은 위에서 시켰기 때문이다. 군대라는 특수 조직에서 거역할 수 없는 일이다.
조직에 속하다 보면 자신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악행을 저지르는 수가 많다. 상사가 부하에게 피를 묻히게 하는 수법이 있다. 조직을 위하여 희생자를 만드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떠나게 되었을 때 인간적으로 미안한 마음 금할 수 없다. 그런데 칼을 들고 피를 묻힌 그 사람도 결국 떠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조직생활을 오래 하면 할수록 남는 것은 상처뿐인 영광이다. 그 자리에 오르기 까지 수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였고 피를 흘려 쟁취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사랑과 배신으로 점철 되어 있다. 개인에게 있어서 사랑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사랑을 쟁취하기 위하여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행을 할 수 있다. 아무리 사랑이 아름다운 것이라 하지만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한 과정에서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가 자행되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없다.
삶을 살아 간다는 것은 결국 업만 짓는 것이 된다. 그 업이 선한 것일 수도 있고 불선한 것일 수도 있다. 대체적으로 불선한 것이 많다. 그래서 살면 살수록, 오래 살수록 악행은 늘어만 간다. 이렇게 이렇게 쌓이고 쌓인 악행이 종종 생각날 때면 후회하고 괴로워 한다. 그런 악행이 이번 생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전 생에서도 있었고 더 이전 생에서도 있었을 것이다. 백겁동안 악행이 쌓였다면 수미산보다 더 높을 것이다.
이 세상은 꿈속의 집인가?
이중표 교수는 ‘백겁적집죄일념돈탕진’의 예로서 앙굴리말라를 들었다. 연쇄살인자 앙굴리말라가 용서되는 자리가 마음 한번 바꾼 것에 있다고 하였다. 이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업보라는 것은 지금 업보만 있지 작자는 없다는 공의 도리를 업보”라 하였다. 공의 도리를 알면 마치 치매환자 걸린 것처럼 과거의 일이 전부 무효가 되는 것일까?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중생들이 업보를 받아 들일 때는 삼세에 걸쳐서 윤회하는 업보로 받아 들이는 것이 중생의 업인 거에요. 깨닫지 못한 자는 자기가 지은 업에 매여 가지고 과거의 나다 현재의 나다 미래는 뭐가 되야 한다 이런 생각 속에 빠져 끊임 없이 고통과 갈등 속에 있지만 업보의 진실을 제대로 보는 사람은 미망한 생각에서 일어난 생각은 꿈처럼 사라져 버려요. 일체유위법은 꿈과 같이 허망한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거에요.”
(이중표교수, 이중표교수의 연기법 6강(존재와 법 02) 5:27)
과거 또는 억겁 전쟁에 지었던 업은 단 한 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이 세상을 꿈인줄 알면 된다는 것이다. 금강경 대미를 장식하는 게송이 ‘일체유위법여몽환포영’인데, 이 문구를 활용하여 일체법이 허망한 것인 줄 안다는 것이다. 과거에 지은 죄도 꿈속에서 지은 것과 같기 때문에 꿈만 깨면 된다는 것이다.
선종의 선사들이 법문에서 종종 이 세상을 꿈속으로 비유하고 있다. 총무원장을 지낸 어느 스님은 열반게에서 이 세상을 ‘꿈속의 집’이라고 하였다. 유튜브 동영상에서 C스님은 ‘본래 없음’을 강조 하였다. 그래서 나도 없고 죽음도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진짜백이는 죽는 일이 없다’고 하였다. 이것이 진리라고 한다. 이 스님 역시 법문 말미에 금강경 ‘일체유위법여몽환포영’을 말하며 꿈에서 깰 것을 강조하였다.
대승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 세상은 꿈의 집일까? 지금 나는 꿈꾸고 있는 것일까? 꿈속의 나가 있고 또 꿈꾸는 나가 따로 있는 것일까? 분명한 사실은 다수의 스님들이 금강경의 게송을 예로 들며 이 세상은 꿈속의 세상이라 하였다.
육입처(salāyatana)에 대하여
대승에서는 이세상을 꿈속으로 보고 있다. 이는 일체가 우리가 만든 인식작용 때문이라 하였다. 이를 ‘육입처’로 설명한다. 대상을 보는 나와 나 밖에 대상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된 것이라 한다. 이런 이야기는 어느 정도 타당하다.
상윳따니까야 살라야따나상윳따 일체의 경을 보면 “일체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 청각과 소리, 후각과 냄새, 미각과 맛, 촉각과 감촉, 정신과 사실, 이것을 일체라 한다.”(S35.23) 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를 여섯 감역이라 한다. 시각과 형상을 하나의 감각영역으로 본 것이다. 이는 시각과 형상의 영역이 함께 인식되고 있음을 말한다.
시각에 대하여 내입처라 하고 형상에 대하여 외입처라 하는데 공통적으로 입처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감각영역안에 있음을 말한다. 시각의 대상이 형상인데, 형상이라 하여 외부에 대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식영역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각과 형상을 함께 묶어 시각영역이라 한다. 이런 영역이 여섯 개 있다고 하여 ‘육입처(salāyatana)’라 한다.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의식이 없으면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만일 우리 몸에서 의식이 떠나면 무어라 부를까? 시체라 할 것이다. 다른 말로 ‘죽’음이다. 의식이 몸을 떠나면 여섯 가지 감역은 작용할 수 없다. 그런 감역은 외적감역과 내적감역으로 나뉜다. 외적 감역은 색, 성, 향, 미, 촉, 법이고, 내적 감역은 안, 이, 비, 설, 신, 의이다. 이와 같은 내적 외적 감역에서 의식이 없다면 이미 죽은 목숨이다. 그래서 의식은 내적 감역 모두에 작용하고 있다.
이중표 교수에 따르면 육입처가 세계라 하며 모든 현상에 대하여 인식작용으로 여긴다. 심지어 오온에 있어서 색온 조차도 인식된 것이라 한다. 이는 육입처와 오온을 동일시 한 것에 따른다. 그러나 전재성님의 상윳따니까야 해제에 따르면 “니까야들은 정확하게 두 구조를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다.”(상윳따4권 해제) 라 하였다. 그럼에도 이중표교수는 이를 무리하게 연계하며 설명하고 있고 심지어 십이연기와 팔정도, 구차제정까지도 연결하여 설명하고 있다.
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함일까? 그것은 모든 것을 마음의 작용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유식의 일체유심조 논리로 마음 하나 내면 모든 번뇌가 없어진다고 말한다. 또 ‘본래 없다’는 용수의 공의 논리에 바탕을 두어문자로 개념지어진 것들이 본래 없는 것이라 한다. 그러다 보니 이 세상은 꿈과 같은 것이고 꿈을 깨야 실상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세상을 인식론으로 보는 이유
부처님이 말씀하신 일체라는 말은 아비달마와 이견이 있는 것이다. 일체의 경(S35.23)에 따르면 부처님은 협의의 의미이든 광의의 의미이든 일체는 모두 여섯 가지 감역에 포함된다고 하였다. 시공간이 별도로 있어서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섯 감역을 인식함으로 인하여 시공간이 파생되어 나온 것이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하시면서 ‘이러한 일체를 부인하고 다른 일체를 말한다면 단지 말뿐이다.’(S35.23) 라고 하였다.
일체에 대하여 인식론적으로 본다면 이는 아비달마와 다른 것이다. 대승에서는 이점을 부각하여 아비달마가 잘못 되었다고 한다. 이중표 교수는 ‘엉터리’라고 하였다. 정말 아비달마는 엉터리일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해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까야에서 여섯 가지 감역에 대한 분석이 지향하는 바는 완전한 세계의 현상론적인 구조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명상수행에서 인식의 발생의 출발점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상윳따니까야 4권 해제, 전재성님)
이 세상을 여섯 감역에 따른 인식론적으로 보는 것은 명상수행을 하기 위한 것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이론적인 완결성에 지배되기 보다는 고통에서의 해방에 목표를 둔 부처님 길의 실천적 절박성에 지배된다.”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왜 이렇게 말을 하였을까? 여섯 감역을 통해 고통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이 생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그 세 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난다. 이것이 괴로움의 생겨남이다.”(S35.106) 라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여섯 감역은 괴로움이 세상이 생겨나는 원리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괴로움이 일어나는 발생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싫어하여 떠나라
여섯 감역으로 이루어진 일체도 조건지워져 있다는 사실이다. 조건지워져 있다면 소멸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소멸을 말씀 하셨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부서지는 것이므로 세상이라고 한다. 부서지는 것은 무엇인가? 수행승이여, 시각이 부서지는 것이며, 청각이 부서지는 것이며, 시각이 부서지는 것이며 형상이 부서지는 것이며 시각접촉이 부서지는 것이며 시각접촉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부서지는 것이다.”(S35.820 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것이 일체이다. 그리고 세상이다. 한번 형성된 것은 소멸되고 마는 것이라는 가르침이 여섯 감역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대승의 논리대로 마음 한번 되돌리면 되는 것일까? 이 세상을 꿈속으로 보아 꿈을 깨면 되는 것일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보아서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시각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형상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시각의식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시각접촉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시각접촉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서도 싫어하여 떠난다.”(S35.33)
부처님은 싫어하여 떠날 것을 말씀 하셨다. 이른바 염오-이욕-해탈을 말한다. 이렇게 하였을 때 “그가 해탈할 때 ‘해탈되었다.’는 궁극의 앎이 생겨나서, ‘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은 다 마쳤으니,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안다.”라 하였다. 연기법적 사유와 이해, 그리고 실천으로 괴로움과 윤회를 벗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이다.
본래 없다고 하는데
부처님이 여섯 감역에 대하여 인식론적으로 말씀 하신 것은 괴로움과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다. 그러나 후대 대승에서는 이를 일체유심조로 해석하여 이 세상을 모두 마음의 작용으로 보았다. 그러다 보니 유위법으로 이루어진 이 세상이 ‘허망’한 것이라 하였다. 이 세상을 꿈속으로 세상으로 보아서 꿈에서 깨어 나듯이 실상을 제대로 보자고 한다. 이것이 공의 도리로 설명된다.
공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윤회도 없는 것이라 한다. 업도 없다고 한다. 태어남도 죽음도 없다고 한다. 생사가 열반이고 번뇌가 보리라고 한다. 개념지어진 모든 것이 본래 없는 것이라 한다. 이처럼 대승에서는 시공간을 부정하고 시공간에 사는 생명체를 부정한다. 그러다 보니 아비담마논장에 대하여 부처님 가르침을 왜곡했다고하며 이중표교수 같은 이는 ‘엉터리’라고 하였다. 과연 부처님도 그렇게 말씀 하셨을까? 경전을 열어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용수가 말한 것처럼 진제와 속제로 구분하여 설하지 않았다. 초기경전어디에도 진속 이제로 구분하여 설명한 것을 아직까지 못하였디. 그대신 현실을 직시하였다. 또 부처님은 업과 윤회를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중생의 업과 윤회를 알아 사성제의 진리를 깨달았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사자후에 대한 큰 경(M12)’에 따르면 초야에 ‘숙명통’으로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를 얻어 윤회하는 뭇삶을 보게 되었고, 중야에 ‘천안통’으로 죽음과 태어남을 아는 지혜를 얻어 업과 과보를 보게 되었고, 후야에 ‘누진통’으로 번뇌를 소멸하여 마음에 의한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성취하여 깨달음을 이룬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업과 윤회, 연기를 함께 설명하였다. 그 어디에도 진제와 속제라는 이분법적 구조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대승에서는 진제와 속제로 나누어 설명한다. 그래서 진제로 보았을 때 ‘본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반야심경에서보면 무(無)자 와 불(不)자로 모두 부정해 버린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런 논리로 백겁동안 지은 죄도 한생각만 내면 사라진다고 한다. 마치 죄를 잔뜩 지은 자가 일요일 교회에 나가서 고백하면 죄가 사하는 이치와 다를 바 없다.
각묵스님 말하기를
대승스님들이나 학자들의 법문이나 강연을 들어 보면 본래 없는 것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 또 한편으로 본래 있는 것을 찾자라고 말한다. 여기에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은 보이지 않는다. 비록 진제라는 단서를 달기는 하지만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누군가 “본래 나는 없다”라는 말을 하면 미친사람 취급당할 것이다. 불교인이라면 이해 할 수 있어도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면 ‘미친자’ 취급당할 것임에 틀림 없다. 지금 누군가가 “괴로움은 본래 없다”라거나 “윤회는 본래 없다”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밖에 나가면 ‘미친자’ 소리 들을 것이다. 불교내부에서도 ‘헛소리한다’라 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상윳따니까야 해제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초기불전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 불성과 여래장을 세우기에 급급하고, 본성자리를 상정한 뒤 그것과 하나 되려고 생짜배기로 용을 쓰고 있다.”
(초불연 상윳따4권 해제 64P)
이 말은 해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한 말이다. 초기불교는 분별하여 설명함에도 이를 분별망상으로 치부한 것에 대한 말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직관만으로 나와 세상을 공으로 보았다 하더라도 그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해체를 설하지 않을 수 없다.”라 하였다. 공도 역시 공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스님들은 ‘본래 없는 것’이라는 말을 강조한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부처님께서는 세상을 법으로 헤체해서 보실 것을 강조하셨지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허망하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초불연 상윳따4권 해제 69P) 라 하였다.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거듭 강조하지만, 무위법에 적용되지 않는다고 해서 가법이나 가유라는 논리를 세워서 부정해버리면 그것은 현실을 설명해내지 못하고 현실을 설명해내지 못하면 구세대비의 종교는 되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자기이론이나 주장이 없는 떠돌이 신세가 되기 마련이고 떠돌이는 곧 망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초불연 상윳따4권 해제 64P)
본래없는 것이라 말하는 자들의 말로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이 그렇게 말씀 하지 않았음에도 가르침을 멋대로 해석하여 이 세상을 일체유심조의 꿈속과 같은 세상으로 보아 꿈에서 깨어나자고 말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라 볼 수 있다.
세상은 바이로차나의 한바탕 꿈일까?
불교에 대하여 조금 안다고 하는 자들은 한마디씩 하고 있는 세상이다. 교계뉴스를 비롯하여 인터넷 블로그나 카페, 게시판에 자신의 주장을 올리고 있다. 요즘에는 유튜브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 중에 이중표 교수는 매우 독특한 이을 펼치고 있다.
이중표교수에 따르면 일체는 십이입처임을 강조하면서 ‘보니까 나타남’을 말한다. 이는 일체유심조를 말한다. 그리고 모든 개념지어진 것이 실체가 없다고 하였다. 이는 용수의 중론에 따른다. 이렇게 세상을 보니 이 세상이 꿈속의 세상과 같이 허망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꿈을 깨자고 말한다. 또한 본래 없는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브라흐마의 화현인가 바이로차나의 한바탕 꿈인가?
부처님은 이 세상을 꿈속의 세상이라고 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후대 사람들은 공의논리, 유식의 논리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꿈속의 세상으로 만들었다. 꿈속의 세상은 꿈이 깨면 허망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금강경에서는 ‘일체유위법여몽환포영’이라 하여 이 세상을 허망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초기불교와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현실에 굳건히 서서 있는 그대로 관찰한다.
청정도론에 열 여섯 단계 위빠사나지혜가 있다. 이중에서 가장 첫 번째로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가 나온다. 여기서 물질과 정신은 명색과 같은 개념이다. 정확하게는 오온이다. 그런데 물질과 정신으로 이루어진 오온은 브라흐마의 화현도 아니고 비로자나의 꿈도 아니라는 것이다. 엄연히 살아 있는 현실세계이다.
경행을 하면 발바닥으로 딱딱하거나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고, 또 따뜻함과 차가움을 느낀다. 발을 움직일 때 의도가 있어서 앞으로 나아가기도 하고 멈추기도 한다. 이것에 물질과 정신을 아는 지혜이다. 물질과 정신을 떠나 밖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실에 굳건히 서서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그때 그때 관찰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였을 때 백겁적집죄와 우주적 스케일의 고통도 삼켜 버릴 것이다.
2016-01-28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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