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서 행복인가 만족인가
스마트폰시대에
지금은 스마트폰시대이다. 지금은 인터넷시대이다라고 말한 것이 대세 이었으나 이제 바뀌었다. 손안에 들고 다니는 작은 컴퓨터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만사가 오케이이다. 그런 스마트폰은 마치 ‘공룡’과도 같다. 각종 ‘앱’이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휴대폰 따로, MP3따로, 디카 따로이었으나 이제 앱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었다. 그래서 스마트폰은 갖가지 고유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전자제품을 앱이라는 이름으로 잡아 먹는 공룡이 되었다.
스마트폰은 여러가지 장점이 많다. 반면 단점도 많다. 고유기능을 가진 전자제품을 앱이라는 이름으로 잡아 먹은 것이 대표적 단점이라 볼 수 있다. 소비자 입장에서 보았을 때 앱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만 MP3나 디카, 게임과 같은 관련산업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원망스런 것이다. 그럼에도 소비자에는 이점이 많아 보배와 같은 것이다.
스마트폰 시대에 스마트폰이 손에서 떠나지 않는다. 일인사업자에게 있어서 전화는 생명과도 같은 것이라 스마트폰을 잠시라도 손에서 놓을 수 없다. 또 스마트폰은 세상과 소통하는 도구이다. 갖가지 대화방이 있어서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 보다 유용한 기능은 ‘유튜브’이다. 일정액의 요금을 내면 무제한의 데이터를 접할 수 있는 것이 최대장점인데 유튜브는 그런 욕구를 충족시켜 준다.
이어령 교수의 깊은 슬픔
최근 유튜브에서 이어령교수와 관련된 동영상을 보았다. 이재철목사와 대담형식으로 진행된 것이다. 제목은 ‘성서 스토리텔링’이다. 우연히 접하게 된 동영상에서 이어령 교수의 깊은 슬픔을 보았다. 그것은 목사가 “사랑하는 따님과 손자를 하나님 나라로 보내셨는데..”라고 이야기를 시작 하였기 때문이다. 이 말에 이끌려 동영상의 일부를 보았다.
이어령교수에 대하여 비판한 적이 있다. 그것은 불교적 관점에서 나약함을 지적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나약한 지성 이어령(李御寧)(2010-11-14)’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글에서 불교의 세계관을 이야기 하면서 “수 많은 지식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딸의 시련과 그에 따른 기도 때문에 기독교인이 되었다.”라고 비판하였다. 그런데 그 딸과 그 딸의 고뇌의 상징과도 같은 손자가 죽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 몹시 슬퍼 보였다.
이어령 교수는 목사와의 대담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제가 딸의 죽음에서 느낀 것은 육체를 가진 생명이라는 것은 그것이 얼마나 황홀하고 찬란하고 사랑의 대상이고 우리에게 소중한 건지, 여러분들 정말 오늘 살아서 숨쉬고 옆에 만질 수 있는 동생, 형, 오빠, 친구 그게 얼마나 축복이고 자랑스럽고 귀중한 건지 살아 있는 사람들은 모른다 이거야. 그 사람의 비었던 자리를 어떤 것도 매꿔 주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이어령 교수는 육체를 가진 생명을 소중히 하라고 했다. 영성도 소중하지만 듣고 보고 만지고 숨쉬는 대상과 함께 있는 것이 소중하고 심지어 황홀하다고 했다. 아파서 문드러져도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에 대하여 말한다. 그러면서 ‘이 순간’을 강조하였다. 이렇게 살아 있어서 함께 하는 순간이 매우 소중하다는 것이다. 청중들과 서로 앉아서 웃고 보는 이런 관계가 무척 소중하다고 하였다. 결국 지금 여기 살아 있는 존재가 소중하고 심지어 황홀하다고 하였다.
낫에 잘린 푸른 갈대처럼
지금 여기,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함을 누구나 다 안다. 그러나 마음은 항상 과거나 미래에 가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괴롭다. 때로 슬퍼한다. 이렇게 마음이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에 머물러 있거나 오지 않은 미래에 가 있으면 ‘시들은 갈대’와 같다. 이를 초기 불교에서는 “낫에 잘린 푸른 갈대처럼”(S1.10) 이라 하였다.
갈대를 낫으로 베었을 때 처음에는 푸른 색깔이지만 점차 누렇게 변색된다. 생명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늘 과거에 가 있어서 후회한다면 낫에 잘린 갈대와도 같다. 또 마음이 미래에 가 있어서 미리 걱정한다면 역시 낫에 잘린 갈대와도 같다. 그래서 부처님은 늘 지금 여기에 마음을 내라고 하였다. 지금 이순간을 관찰하라는 것이다.
지금 이순간을 관찰하면 죽지 않는다. 지금 이순간이 영원히 지속된다면 죽을 일이 없을 것이다. 영원히 살려거든 지금 이순간이 영원히 지속되면 된다. 그러나 조건에 따라 발생하고 조건에 따라 소멸하는 것이 마음이다. 마음은 한 순간도 가만 있지 않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내가 생각한다고 하지만 사실 생각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 없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M131) 고 했다.
손님이 찾아 왔는데
손님이 찾아 왔다. 처음 있는 일이다. 아직까지 글과 관련해서 찾아 온 사람이 없다. 그런데 누군가 찾아 오겠다고 하였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일과 관계된 사람이라면 즐거이 맞이 할 것이다. 나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험, 대출 등 상품판매와 관련하여 방문한다면 거절 할 것이다. 대출관련 전화가 왔을 때 매정하게 끊는 것과 같다. 그런데 글과 관련하여 오겠다는 것이다. 더구나 물어 볼 것도 있다고 하였다.
방문 요청을 받았을 때 고민하였다. 딱 잘라 거절할 수도 있었다. 가장 쉬운 방법은 ‘바쁘다’는 핑계를 대는 것이다. 그러나 글과 관련하여 불교인의 방문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우리 불가에서 늘 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라는 말이다. 먼 곳에서 지방에 있는 이름 없는 불자의 사무실을 방문하겠다고 요청하였을 때 일시적으로 머뭇거렸으나 이내 받아 들이기로 하였다.
올해 들어 생각한 것이 있다. 그것은 만나고 싶은 사람을 방문하는 것이다. 일종의 교류라고 볼 수 있다. 존경하는 사람이나 도움을 주었던 사람 등을 만나고자 한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것은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 들일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따른다. 만일 상대방이 ‘바쁘다’ 등의 핑계를 들어 거절한다면 어떻게 할까? 아마 마음의 상처가 클 것이다.
어느 법우님의 방문 요청을 받아 들였다. 불교공부와 관련하여 도움을 요청한다고 하는데 어떤 도움인지 알 수 없었다. 더구나 어떤 성향을 가진 사람인지도 알 수 없다. 세상에는 수 많은 성향을 가진 사람이 많아 내 마음 같지가 않다. 아무리 불교라는 종교로 맺어진 관계라도 살아 온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성향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는 글에서도 알 수 있다.
어떤 이는 올린 글에 대하여 감사의 말을 전한다. 반면 또 어떤 이는 다짜고짜 모든 것이 ‘잘못 되었다’ 또는 ‘엉터리이다’라는 말을 퍼 붓는다. 그래서 자신의 카페나 블로그, 또는 게시판 등에 비난을 퍼 붓는다. 이렇게 본다면 안티카페가 있고 안티블로그가 있는 셈이다. 마치 연예인처럼 ‘안티’가 있는 것이다.
법우님이 도착 하였다. 일부러 먼 곳까지 찾아 온 것이다. 여성 법우님으로 대학원에서 불교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 논문을 써야 되는데 도움을 받고 싶다고 한 것이다. 법우님을 보니 ‘감관’이 맑아 보였다. 마치 비구니 스님이나 수녀의 ‘말간’ 얼굴을 보는 것 같다. 수행의 경지가 상호에 드러나 보인 것이다. 이렇게 감관이 맑아 보이는 사람과 대화 하면 저절로 청정해지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대화가 술술 잘 풀려 나갔다.
법우님으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또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이야기 중에 많은 사람들이 블로그를 접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알게 되었다. 그것은 불로그에 올려진 글에 대한 것이다. 법우님에 따르면 키워드 검색을 하면 걸리는 것이 블로그에 올려진 글이라 하였다. 그래서 주변의 도반들이 블로그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스님들도 마찬가지라 한다. 흔적을 남기지 않지만 오래 전부터 블로그를 알고 있었고 또 보고 있다는 것이다. 예상한 것이지만 말로 들으니 실감이 났다. 이에 대하여 “부끄럽습니다”라는 말로 대신 하였다.
법우님은 논문을 작성 중에 있다고 한다. 대화를 하면서 무언가 도움이 될 것을 기대한 것 같다. 그러나 스님도 아니고 학자도 아닌 보통불자가 딱히 도움이 될만한 것이 없었다. 생업을 하면서 동시에 글을 쓰는 입장이라 전문성이 없다. 그래서 올린 글은 논문도 법문도 아니다. 늘 하는 강조하듯이 비급. 삼류, 비주류의 글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도 무언가 도움을 줄 수 있었다. 글을 쓰는데 필요한 자료를 건네 준 것이다. 아마 크게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법우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였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마치 수다쟁이가 된 듯 하였다. 그것은 상대방이 말을 잘 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자기 자랑하듯이 글쓰기에 대하여 주로 이야기 하였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이야기만 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만일 용기를 내어 존경하는 사람 또는 만나고 싶은 사람을 방문하였을 때 상대방이 자신의 이야기만 한다면 곤혹스러울 것이다. 그 꼴이 된 것 같다.
수행경력이 있는 법우님은 행복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러면서 ‘지금 여기’를 강조하였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에 대하여 관심 있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행복이라 말하지만
지금 여기라는 말은 부처님도 강조한 사항이다. 지금 여기에서 늘 깨어 있는 삶을 말씀 하신 것이다. 늘 사띠를 유지하고 있으라는 말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수행이다. 그것도 일상에서 깨어 있음을 말한다. 행주좌와어묵동정간에 깨어 있음을 말씀 하신 것이다. 그래서 초기경전 도처에서 사띠라는 말이 수 없이 등장한다.
지금 여기에서 깨어 있는 삶이 행복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서 깨어 있기가 쉽지 않다. 마음은 제멋대로이고 종잡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지금 여기에서 늘 ‘사띠(sati)’가 유지된다면 아라한이나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아라한만이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자라 하였다.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행복이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행복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 그런 행복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다. 오감에 따른 감각적 쾌락의 행복에서부터 적멸의 행복에 이르기 까지 매우 다양하다. 그래서 행복이라 하였을 때 어느 행복을 말하는 것인지에 대하여 알 수 없다. 다만 그 사람이 처한 상황에 따라 판단 할 수밖에 없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행복은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오감의 충족에 따른 행복을 행복이라 하지 않았다. 오히려 괴로움이라 하였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즐겁다고 하는 것, 고귀한 님은 괴롭다고 말하고”(S35.136) 라 하였다. 거꾸로 본 것이다. 세상사람들의 흐름과 거꾸로 갔을 때 오히려 행복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괴롭다고 하는 것, 고귀한 님은 즐겁다고 하네.” (S35.136) 라고 역설적으로 말씀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행복해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할까?
요즘은 스마트폰 시대이다. 수 많은 앱 중에서 대화방이 있다. 스마트폰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문자로 대화 하며 지낸다. 학교동기동창 대화방이 있다. 대화방에서 ‘도사’로 통한다.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대화방에서 글을 많이 올리다 보니 그렇게 부른다. 사실 대화방은 글 쓰는 사람에게는 ‘놀이터’나 다름 없다. 대부분 침묵모드이지만 글 쓰는 이에게 대화방에서 문자 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 보다 더 쉬운 일이다. 글 몇 마디 올려 놓아도 도사라고 별명 붙이는 식이다. 친구 중에 크리스천이 있다. 그 친구가 “어차피 인생자체가 고행아니던가?”라 하며 “도사님이 오늘 한 수 가르쳐 주세요”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이에 간단히 “내려 놓아라”라고 하였다.
“어떠한 것에든 만족하는 것이 행복이고”
진정한 행복은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 가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욕망을 내려 놓아 버렸을 때 행복해질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선가에서는 ‘방하착(放下着)’이라 한다. 이는 ‘손을 내려 밑에 둔다’라는 뜻이다. 흔히 ‘내려 놓아라’ 라든가 ‘놓아 버려라’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선종에서 화두로 삼는 용어 중의 하나이다.
초기불교에서도 내려 놓으라는 의미의 말이 무수하게 등장한다. 이는 집착하지 않는 삶을 뜻한다. 집착에서 벗어 났을 때 자유로울 수 있음을 말한다. 대표적인 말이 ‘염오-이욕-해탈’이라는 말이다.
염오는 싫어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에 대하여 싫어하는 마음이 아니다. 사람에 대한 호불호가 아니라 집착하는 삶에 대하여 싫어하는 것이다. 그것도 넌더리 칠 정도로 싫어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넌더리 칠 정도로 싫어 하는 경험이 수반 되어야 할 것이다. 가장 쉬운 방법은 수행으로 달성된다.
마음이 고요해졌을 때 이전에 집착된 삶이 부끄럽고 창피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렇게 싫어 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더 이상 욕망이 일어나지 않는다. 욕망이 곧 괴로움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술을 마실 때는 기분이 좋지만 그 다음날 지옥을 경험한다면 감각적 쾌락이 재난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욕망에서 자유로워 졌을 때 ‘대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하였다. 이를 다른 말로 ‘해탈’이라 하였다.
불교인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해탈이다. 해탈은 자유를 말한다. 그것도 ‘대자유’를 뜻한다. 욕망에서 완전히 벗어 났을 때 만족하는 삶을 산다. 이에 대하여 행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행복이라는 말 보다 만족이라는 말이 더 마음에 다가온다. 욕망을 내려 놓아 버렸을 때 오는 만족이다. 그래서 ‘소욕지족’이라는 말이 있다.
소욕지족의 삶은 욕망을 내려 놓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법구경에서 “어떠한 것에든 만족하는 것이 행복이고(Tuṭṭhī sukhā yā itarītarena)”(Dhp331) 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다. ‘어떠한 것(itarītarena : whatsoever)’에도 만족하는 삶이 소욕지족이다. 이를 또 다른 말로 행복이라 하였다.
내려 놓으면 행복하다. 욕망을 최소화 함에 따른 만족이다. 이렇게 본다면 만족과 행복은 동의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만족이라는 말이 더 와 닿는다. 그런 만족은 어떤 것이 있을까? 주석에 따르면 세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1) 좋거나 거친 어떠한 것을 얻든, 소득에 따른 만족(yathalabhasantosa), 2)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에 만족하는, 기력에 따른 만족(yathabalasantosa), 3) 사치스런 것을 피하고 필수적인 것만을 취하는, 분수에 따른 만족(yathasaruppasantosa)이 있다.” (Srp.II.161) 라고 하였다. 불교인이라면 당연히 세 번째 항 ‘분수에 따른 만족’일 것이다. 이것이 소욕지족이다.
소욕지족의 삶에 대하여
소욕지족과 관련하여 아름다운 게송을 발견하였다. 원담스님은 다음과 같은 한시를 카페에 올려 놓았다.
君子如何長自足, 군자여하장자족 군자는 어찌하여 늘 스스로 족하며
小人如何長不足; 소인여하장부족 소인은 어찌하여 늘 부족한가.
不足之足每有餘, 부족지족매유여 부족하나 만족하면 늘 남음이 있고
足而不足常不足; 족이부족상부족 족한데도 부족타 하면 언제나 부족하네.
樂在有餘無不足, 낙재유여무부족 즐거움이 넉넉함에 있으면 족하지 않음 없지만
憂在不足何時足; 우지부족하시족 부족한 걸 걱정하면 언제 만족하랴,
安時處順更何憂, 안시처순경하우 때에 맞춰 순리로 살면 무엇을 근심 하리
怨天尤人悲不足; 원천우인비부족 하늘을 원망하고 남 탓하면 슬픔은 끝이 없으리.
求在我者無不足, 구재아자무부족 내게 있는 것을 구하면 족하지 않음이 없지만
求在外者何能足; 구재외자하능족 밖에 있는 것을 구하면 늘 부족하리니
一瓢之水樂有餘, 일표지수낙유여 한 바가지 물로도 즐거움은 남음이 있고
萬錢之羞憂不足; 만전기수우부족 만금의 진수성찬을 먹은들 근심할 일 없으랴
古今至樂在知足, 고금지락재지족 예부터 지금까지 진정한 樂은 족함을 아는 데 있으니
天下大患在不足; 천하대환재부족 세상의 큰 근심은 족함을 알지 못함에 있다.
二世高枕望夷宮, 이세고침망이궁 진시황과 그 아들이 아방궁에서 베개를 높이 벴을 때
擬盡吾年猶不足; 의진오년유부족 죽을 때까지 즐길 줄 알았겠지.
唐宗路窮馬嵬坡, 당종로궁마외파 당 현종이 馬嵬坡마외파에서 길이 막혔을 때
謂卜他生曾未足; 위복타생증미족 한 생을 더 산다 해도 부족하다 말했다네.
匹夫一抱知足樂, 필부일포지족락 필부의 한 아름도 족함을 알면 즐겁고
王公富貴還不足; 왕공부귀환부족 욕심이 과하면 왕공의 부귀도 오히려 부족하다오.
天子一坐知不足, 천자일좌지부족 天子란 높은 자리도 만족할 줄 모르면 그만이요
匹夫之貧羨其足; 필부지빈선기족 필부의 가난도 족함을 알면 부러워할만하다
不足與足皆在己, 부족여족개재기 부족함과 족함은 모두 내게 달렸으니
外物焉爲足不足; 외물언위족부족 외물이 어찌하여 족함과 부족함이 되리오.
吾年七十臥窮谷, 오년칠십와궁곡 내 나이 일흔에 궁핍한 골짝에 누웠더니
人謂不足吾則足; 인위부족오즉족 남들이야 부족타 해도 나는야 족해.
朝看萬峯生白雲, 조간만봉생백운 아침에 만 봉우리에서 흰 구름 피어나는 걸 보노라면
自去自來高致足; 자거자래고치족 저절로 왔다가는 고상한 운치가 족하고,
暮看滄海吐明月, 모간창해토명월 저물녁 푸른 바다에 밝은 달 떠오르면
浩浩金波眼界足; 호호금파안계족 가없는 금물결에 보기에 족하도다.
春有梅花秋有菊, 춘유매화추유국 봄에는 매화 있고 가을엔 국화 있어
代謝無窮幽興足; 대사무궁유흥족 피고 짐이 끝없으니 그윽한 흥취가 족하고
一床經書道味深, 일상경서도미심 책상 가득 經書엔 道의 맛이 깊어라
尙友千古師友足; 상우천고사우족 고전을 벗 삼으니 스승과 벗이 족하네.
德比先賢雖不足, 덕비선현수부족 德은 선현에 비해 비록 부족하지만
同吾所樂信有時, 동오소락신유시 내가 좋아하는 것이 그들과 같으니 진실로 때가 되었네,
卷藏于身樂已足; 권장우신낙이족 몸에 책을 간직하니 즐거움이 이미 족하다
俯仰天地能自在, 부앙천지능자재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보아 능히 자유로우니
天之待我亦云足. 천지대아역운족 하늘도 나를 보고 만족하시겠지.
(출처: 세상의 큰 근심은 족함을 알지 못함에 있다)
이 시의 제목은 ‘세상의 큰 근심은 족함을 알지 못함에 있다’라고 되어 있다. 원담스님의 설명문에 따르면 이 시는 조선시대 ‘구봉 송익필’의 시라 한다. 오로지 ‘족(足)’자 하나만을 사용하여 그 유례를 보기 드문 명시를 남긴 것이다. 소욕지족의 삶의 방식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듯 하다.
행복 보다 만족이다
사람들을 많이 만나려 한다. 평소 존경한 분이나 도움을 주었던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그렇다고 잡담하자 것은 아니다. ‘법담’을 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담마토크’ 하는 것을 장려하였다. 이는 숫따니빠따 ‘위대한 축복의 경(Sn2.4)’에서 “수행자를 만나서 가르침을 서로 논의하니”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또 수행자로부터 “때에 맞추어 가르침을 들어라”고 하였다. 이것이 행복이라 하였다. 그것도 가장 큰 행복이라 하였다. 그래서 “존경하는 것과 겸손한 것, 만족과 감사할 줄 아는 마음으로 때에 맞추어 가르침을 듣는 것”과 “인내하고 온화한 마음으로 수행자를 만나서 가르침을 서로 논의”하는 것이 가장 가장 큰 축복이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존경하는 사람, 만나고 싶은 사람을 못 만날 이유가 없다. 또 진정한 불교인이라면 거절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아무도 찾지 않는 사무실에 어느 법우님이 찾아 와서 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감관이 맑아서 인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를 한 것이 도움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대화를 하면서 알게 된 중요한 사실은 이 글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무척 많다는 것이다. 인터넷에는 국경이 없기 때문에 타종교인도 볼 수 있고 스님도 볼 수 있고 학자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코멘트를 남겨 주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그렇다고 코멘트에다 일일이 답신을 하지 못한다. 이점 늘 미안하게 생각한다. 생업과 글쓰기 두 개를 하다 보니 무척 바쁘다는 핑계를 댈 수 밖에 없다. 매일 글을 올리는 것으로 답신을 대신한다.
법우님과의 대화에서 지금 여기라는 말에 주목하였다. 결국 지금 여기 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 여기를 떠나면 괴로움이다. 이미 지나간 과거에 후회하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한다면 낫에 잘리 푸른 갈대신세나 다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늘 지금 여기를 강조하였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 그때 관찰하라”라고 하였다. 늘 깨어 있는 삶을 말한다. 사띠하는 것이다.
매순간 사띠 하였을 때 만족할 것이다. 현재의 조건에 만족하는 삶이다. 한끼를 먹어도 맑고 깨끗한 것은 소욕지족의 삶이다. 어떠한 것에든 만족하는 삶이다. 욕망을 내려 놓았을 때 지금 여기에서의 삶은 행복 보다 만족이다.
2016-01-22
진흙속의연꽃
'진흙속의연꽃'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과거에 지은 죄업을 어찌 할 것인가, 세상은 바이로차나의 한바탕 꿈? (0) | 2016.01.28 |
---|---|
중생구제인가 개인구제인가, 수행과 깨달음에 대하여 (0) | 2016.01.24 |
재가자가 가사와 장삼을 수하고, 인류역사의 최고의 사건 미국불교 (0) | 2016.01.18 |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현응스님과 수불스님의 맞짱토론을 기대하며 (0) | 2016.01.16 |
아라한이 되기 전까지는 행복이라 말하지 말라 (0) | 2016.0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