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한이 되기 전까지는 행복이라 말하지 말라
깊은 산골 외딴 집에
춥고 황량하고 삭막하고 외로운 겨울이다. 가진자에게는 따스하고 행복한 겨울일지 모르지만 하루벌어 하루먹고 사는 자에는 혹독하고 ‘형벌 같은’ 계절이다. 그럼에도 스스로 가난을 자처 하는 사람들이 있다. 산골에 사는 사람들이다.
요즘 TV를 보면 깊은 산속 외딴집을 소개 하는 프로가 늘었다. 산중에서 홀로 살아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런 프로 중에 EBS에서 ‘한국기행’을 보았다. 평일 9시대 방영하는 이 프로에서 강원도 정선 오지에서 살아 가는 사람들 이야기 ‘우리들의 천국 강원 2부 외딴 집 그들이 사는 법’을 보았다.
“아, 우리는 행복해요”
깊은 산골 외딴 집에 어느 부부가 살아 간다. 육십가량 되어 보이는 부부는 산중에서 산지 20여년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말 끝마다 “아, 행복해요”라는 말을 연발 한다. 무엇이 그리 행복한 것일까? 아마 대자연에서 걸림 없이 살아 가는 행복할 것이다. 또 하나는 부부가 건강하게 함께 살아 가는 것이 행복일 것이다.
“행복이 뭐에요?”
깊은 산골 외딴 집에 도인처럼 생긴 사람이 살아 간다. 나이는 칠십가량 되었는데 산에 들어 온지 역시 20여년 되었다고 한다. 한때 도시에서 대학의 강단에 서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시집을 여러 권 내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산골 외딴 곳 외딴집에서 홀로 살아 간다. 그런데 도인은 “행복이 뭐에요?”라며 반문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살아 가는 것이 기쁩니다. 그리고 편안합니다.”라 하였다.
같은 산골 외딴 집에 살지만 부부는 지금 이순간이 너무나 행복하다고 하였다. 반면 도인은 행복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그저 편안하다고 하였다. 차이가 무엇일까? TV를 보고 난 다음 복기를 해 보니 ‘소유’가 큰 요인임을 알 수 있었다.
저장하는 삶, 저장하지 않는 삶
산골부부는 저장을 하고 산다. 긴 겨울을 나기 위하여 김치를 김장독에 많이 담가 두었다. 그리고 난방을 위하여 나무를 모으고 있다. 그런데 모터로 구동하는 톱을 들고 다니면서 쓰러진 나무를 자르는 것이다. 전기가 들어 오지 않는 오지이지만 두 사람의 생존을 위하여 먹고 살 준비만큼은 단단히 한 것이다.
반면 도인은 저장하지 않는다. 땔감도 그날 그날 산에 가서 조달한다. 먹을 것도 마찬가지이다. 한겨울이지만 겨울에만 자라는 배추를 텃밭에서 따 먹는 것이다. 또 삼시 세 때를 찾아 먹는 것이 아니라 배가 고플 때만 먹는 것이다. 고구마를 삶아 그날 밭에서 채취한 야채와 함께 간단히 먹는 것을 보았다.
부부의 겨울나기를 보면 결코 외로워 보이지 않는다. 외딴 곳에서 먹을 것과 땔감을 갖추어 놓고 서로 의지하며 자연과 함께 생활하는 모습이 무척 부러워 보인다. 그래서 “아무나 가질 수는 없지만 누구나 가질 수 있는 행복이에요. 감사함이죠”라고 말한다. 이렇게 ‘우리는 너무 행복해요’라는 말을 연발하였을 때 시기와 질투를 유발할 정도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부부중에 한사람이라도 사고가 생겨서 홀로 되었을 때 과연 산생활을 계속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다.
“쌓아 두면 누가 도둑질해갈 암시를”
반면 수염이 허옇게 길게 난 도인은 안정되어 보였다. 어떤 난관이 와도 해쳐 나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것은 모든 것을 놓아 버리는 삶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먹을 것과 땔감을 잔뜩 쌓아 두는 것이 아니라 그날 그날 현지 조달하여 살아 가는 것이 자생력 있게 보였기 때문이다.
도인은 저장하지 않은 삶에 대하여 “쌓아 두면 게을러지거나 쌓아 두면 곰팡이가 생기거나 쌓아 두면 누가 도둑질해갈 암시를 주거나.”라 하였다. 특히 도둑질해갈 암시를 준다는 말에 걸렸다. 도시에서는 누군가 자신의 것을 가져 갈 까봐 담을 높게 쌓고 문을 굳게 닫고 살아 간다. 그런데 산골에는 대문이 없다. 만을 산골 외딴 곳에 값나가는 것이 쌓여 있다면 내 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세속적인 행복과 출세간적 행복
사람들은 행복을 이야기 한다. 대부분 많이 소유하는 것을 행복이라 한다. 추운겨울을 나기 위하여 먹을 것과 땔감을 준비 하듯이, 알 수 없는 미래를 위하여 많이 축적하고자 한다. 그래서 하나 둘 소유물이 늘어 갈 때 이를 행복이라 한다. 그런데 산속의 도인은 행복이라는 말을 인정하지 않는다.
피디가 산속생활에 대하여 “행복하세요?”라고 묻는다. 그러자 도인은 “그런 용어는 제가 잘 모르고, 좋아, 기뻐”라 한다. 자신의 사전에 행복이라는 말은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행복은 아예 몰라. 기쁘고 좋아, 편안해요”라 한다.
도인은 마치 “행복이 뭐에요?”라고 묻는 것 같다. 아마 소유에 의한 행복을 부정하는 것 같다. 그래서 먹을 것과 땔감을 산에서 그날 그날 조달하는 삶을 살아 가나 보다. 산속의 홀로 사는 삶에 대하여 행복이라 하지 않고 ‘기쁨과 평안’이라 하였다.
두 부류의 행복한 삶을 보았다. 프로를 만든자의 의도가 실렸는지 알 수 없지만 교묘하게 두 부류를 대조시켜 놓았다. 이를 유심히 관찰하였다. 확실히 차이가 있었다. 같은 행복이라 하지만 질적으로 다른 행복이다. 같은 산속에 살지만 부부는 세속적인 행복을 말하는 것 같고, 도인은 출세간적 행복을 말하는 것 같다.
빤냐와로 삼장법사의 강의를 듣다가
‘빤냐와로 삼장법사’의 대념처경을 유튜브로 듣다가 귀가 번쩍 뜨이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아라한의 행복이다. 삼장법사는 두 번이나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행복이라 하지 않는다.”라 하였다. 경전에 실려 있는 말이라 한다. 아라한이 완전한 행복임을 말한다.
어느 경전에 근거하는 것일까? 궁금했다. 그래서 검색해 보았다. 그러나 그 말이 들어간 경전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다만 유사한 경이 있는 것을 확인 하였다. 앙굿따라니까야에 ‘밧다지의 경(A5.170)’이다.
무엇이 최상인가?
아난다 존자가 꼬삼비의 고시따 승원에 있을 때 존자 밧다지가 찾아 왔다. 아난다는 밧다지에게 보는 것 가운데 최상이 무엇인지 묻는다. 또 듣는 것 가운데 최상, 행복한 것 가운데 최상, 지각하는 것 가운데 최상. 존재하는 것 가운데 최상이 무엇인지 묻는다. 이에 밧다지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Atthāvuso, brahmā abhibhū anabhibhūto aññadatthu daso vasavattī, yo taṃ brahmānaṃ passati, idaṃ dassanānaṃ aggaṃ.
Atthāvuso ābhassarā nāma devā sukhena abhisannā parisannā. Te kadāci karahaci udānaṃ udānenti: " aho sukhaṃ, aho sukhanti. " Yo taṃ saddaṃ suṇāti, idaṃ savaṇānaṃ aggaṃ.
Atthāvuso subhakiṇhakā nāma devā. Te santaññeva sukhitā sukhaṃ paṭisaṃvedenti. Idaṃ sukhānaṃ aggaṃ.
Atthāvuso, ākiñcaññāyatanūpagā devā. Idaṃ saññānaṃ aggaṃ.
Atthāvuso nevasaññānāsaññāyatanūpagā devā. Idaṃ bhavānaṃ agganti.
[밧다지]
“벗이여, 하느님, 승리자, 정복 될 수 없는 자, 일체를 보는 자, 자재한 자가 있는데, 그를 보는 것이 보는 것 가운데 최상입니다.
“벗이여, 빛이 흐르는 하느님 세계의 신들은 행복이 가득하고 행복이 넘칩니다.그들은 언제나 어디서나 ‘나는 행복하다. 나는 행복하다.’라고 감흥에 흥겨워 합니다. 그 소리를 듣는 자가 듣는 것 가운데 최상입니다.
벗이여, 영광으로 충만한 하느님 세계의 신들은 행복이 가득하고 행복이 넘칩니다. 그들은 고요하고 행복한 열락을 체험합니다. 이것이 행복한 것 가운데 최상입니다.
벗이여, 아무것도 없는 경지에 도달한 하느님 세계의 신들이 있습니다. 가득하고 행복이 넘칩니다. 이것이 지각하는 것 가운데 최상입니다.
“벗이여,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은 것도 아닌 경지에 도달한 도달한 하느님 세계의 신들이 있습니다. 가득하고 행복이 넘칩니다. 이것이 존재하는 것 가운데 최상입니다.”
(Bhaddajisutta-밧다지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5.170, 전재성님역)
불완전한 번역을 보고
보는 자 가운데 최상에 브라흐마(범천: 하느님)이라 하였다. 그런데 전재성님은 “그를 보는 것이 보는 것 가운데 최상입니다.”라 하였다. 여기서 ‘그’는 무엇을 말할까?
보는자 가운데 최상에 대하여 다섯 가지가 소개 되어 있다. ‘하느님, 승리자, 정복 될 수 없는 자, 일체를 보는 자, 자재한 자’를 말한다. 이는 빠알리어로 ‘brahmā, abhibhū, anabhibhūto, aññadatthu, daso vasavattī’라 하였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초불연에서는 “도반이여, 범천이 있습니다. 그는 지배자요, 지배되지 않는 자요, 전지자요, 전능자입니다. 그 범천을 보는 것이 보는 것 가운데서 으뜸입니다.”라고 번역하였다. 그가 범천(brahma)인 것이다.
그라고 한 것에 대한 빠알리 원문을 보면 “yo taṃ brahmānaṃ passati, idaṃ dassanānaṃ aggaṃ.”라고 되어 있다. brahmāna는 ‘a man of the Brahman caste’의 뜻으로서 사성계급의 정점에 있는 브라만 계급을 말한다. 브라만 사제를 ‘브라흐마나’라 하며 한자어로 ‘바라문’이라 한다. 이렇게 본다면 빠알리문구를 번역하면 “바라문이 (범천)을 보는 것 가운데 최상입니다.”가 된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그를 보는 것이 보는 것 가운데 최상입니다.”라 하였다. 이를 달리 바꾸면 “그(범천)를 [바라문]이 보는 것 가운데 최상입니다.”가 될 것이다. 그런데 바라문을 뜻하는 브라흐마나가 생략되어 있다. 초불연 번역을 보면 “그 범천을 보는 것이 보는 것 가운데서 으뜸입니다”라 하였다.
전재성님 번역이나 초불연 번역이나 불완전한 번역이다. 그래서 “taṃ brahmānaṃ passati, idaṃ dassanānaṃ aggaṃ”라는 문구는 “바라문이 그[범천]을 보는 것이 보는 것 가운데 최상입니다.”라고 해야 올바른 바른 번역이 된다, 범천(브라흐마)을 보는 자는 브라만교 사제 바라문(브라흐마나)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보는자 가운데 최상은 하느님, 즉 브라흐마(범천)이다. 이는 색계초선천을 말한다.
“나는 행복하다. 나는 행복하다. (aho sukhaṃ, aho sukhanti)”
두 번째 ‘빛이 흐르는 하느님 세계의 신들(ābhassarā nāma devā)’은 ‘극광천’이다. 이는 색계 2선천이다. 앞서 언급된 범천(brahma)은 색계초선천이다. 그런데 극광천 존재들은 늘 “나는 행복하다. 나는 행복하다. (aho sukhaṃ, aho sukhanti)”라고 감흥에 겨워 말한다는 것이다. 대체 얼마나 행복한 것일까?
색계에서의 행복은 욕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왜 그런가? 욕계에서의 행복은 무언가 성취해서 얻는 행복을 말한다. 대학입시에 합격해서 얻는 행복, 좋은 직장을 다니게 된 행복, 예쁜 배우자를 얻는 행복, 그리고 자동차를 사고 집을 늘려 가는 행복 등 거의 대부분 열심히 노력하여 성취하여 얻는 행복을 말한다.
그런데 색계에서의 행복은 정반대이다. 놓아 버림으로 얻는 행복이다. 감각적 욕망과 불선법을 떨쳐 버리는 것이다. 떨쳐 버림으로서 기쁨과 행복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행복은 세속에서 오욕락을 추구하는 행복과 비교할 바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래서 색계선정에서의 행복에 대하여 “나는 행복하다. 나는 행복하다. (aho sukhaṃ, aho sukhanti)”라고 감흥에 겨워 말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행복에 대하여 앞서 언급한 산골 외딴집에 사는 사람을 대입한다면, 부부의 행복은 ‘욕계의 행복’이라 볼 수 있고, 도인은 ‘색계의 행복’이라 볼 수 있다. 부부가 “아, 우리는 행복해요”라고 하지만 이는 성취한 것에 대한 행복으로서 욕계의 행복이라 볼 수 있다. 반면 도인이 “행복이 뭐에요?”라며 기쁨과 평안을 이야기 하였을 때 이는 놓아 버림에 따라 두 번째 선정에서처럼 희열이 더 강한 기쁨이라 볼 수 있다.
행복한 것 가운데 최상
세 번째 ‘영광으로 충만한 하느님 세계의 신들(subhakiṇhakā nāma deva)’은 ‘변정천’을 말한다. 이는 색계3선천이다. 그런데 이 신들도 행복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고요하고 행복한 열락을 체험합니다. (Te santaññeva sukhitā sukhaṃ paṭisaṃvedenti)”라 하였다. 초불연에서는 “그들은 더없이 행복하면서 [제3선에 기인한] 지고의 행복을 경험합니다.”라고 번역하였다. 기쁨 또는 희열도 떨어져 나가고 오로지 행복만 남은 것이다.
그런데 ‘고요한 행복’또는 ‘지고의 행복’이라 하였다. 이는 세속에서의 감각적 욕망에 따른 행복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완전히 놓아버리고 떨쳐 버림에 따른 행복이다. 그래서 오로지 행복만 지속되는 상태를 말한다. 이런 행복에 대하여 “이것이 행복한 것 가운데 최상입니다. (Idaṃ sukhānaṃ aggaṃ)”라 하였다.
지각하는 것 가운데 최상
네 번째 ‘아무것도 없는 경지에 도달한 하느님 세계의 신들 (ākiñcaññāyatanūpagā deva)’이 있다고 하였다. 이는 ‘무소유처천’을 말한다. 그런데 무소유처천의 존재들에 대하여 “지각하는 것 가운데 최상입니다. (Idaṃ saññānaṃ aggaṃ)”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이것이 인식 가운데 으뜸입니다.”라 하였다. 왜 이렇게 말하였을까? 이는 무소유처천은 바로 이전의 식무변천을 대상으로 하여 성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소유처천은 식무변처를 뛰어 넘는다. 그래서 무소유처천의 존재에 대하여 “지각하는 것 가운데 최상입니다.”라 한 것이다.
존재하는 것 가운데 최상
다섯 번째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은 것도 아닌 경지에 도달한 도달한 하느님 세계의 신들(nevasaññānāsaññāyatanūpagā devā)’이 있다. 이는 무색계에서 가장 상위에 있는 ‘비상비비상처천’을 말한다. 그런데 이에 대하여 “이것이 존재하는 것 가운데 최상입니다. (Idaṃ bhavānaṃ agganti)”라 하였다. 삼계를 통틀어 가장 상위에 있고 또한 8만4천 대겁으로서 수명이 가장 길기 때문이다.
다섯 가지를 아우르는 최상이 있는데
밧다지는 최상에 대하여 다섯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이에 아난다 존자는 다섯 가지를 아우르는 최상이 있다고 하였다.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Yathā passato kho āvuso, anantarā āsavānaṃ khayo hoti, idaṃ dassanānaṃ aggaṃ. Yathā suṇato anantarā āsavānaṃ khayo hoti, idaṃ savaṇānaṃ aggaṃ. Yathā sukhitassa anantarā āsavānaṃ khayo hoti. Idaṃ sukhānaṃ aggaṃ. Yathā saññissa anantarā āsavānaṃ khayo hoti, idaṃ saññānaṃ aggaṃ. Yathābhūtassa anantarā āsavānaṃ khayo hoti, idaṃ bhavānaṃ agganti.
[아난다]
“벗이여, 볼 때에 즉각적으로 번뇌의 부숨이 뒤따르면 그것이 보는 것 가운데 최상입니다.
“벗이여, 들을 때에 즉각적으로 번뇌의 부숨이 뒤따르면 그것이 듣는 것 가운데 최상입니다.
“벗이여, 행복할 때에 즉각적으로 번뇌의 부숨이 뒤따르면 그것이 행복한 것 가운데 최상입니다.
“벗이여, 지각할 때에 즉각적으로 번뇌의 부숨이 뒤따르면 그것이 지각하는 것 가운데 최상입니다.
“벗이여, 존재할 때에 즉각적으로 번뇌의 부숨이 뒤따르면 그것이 존재하는 것 가운데 최상입니다.”
(Bhaddajisutta-밧다지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5.170, 전재성님역)
번뇌의 부숨이 뒤따랐을 때 이를 ‘최상(agga)’이라 하였다. 바라문 사제들은 브라흐마(범천:하느님)을 보는 것이 최상이라 여기지만, 볼 때 번뇌의 부숨이 뒤따를 때 그것이 보는 것 가운데 최상이라 하였다. 여기서 최상은 ‘아라한’을 말한다. 번뇌가 모두 소멸 된 아라한에게 있어서 보는 것, 듣는 것, 행복한 것, 지각하는 것, 존재하는 것은 시설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라한이 되기 전까지는 행복이라 말하지 말라
아난다는 최상의 행복에 대하여 ‘번뇌 다한 것’이라 하였다. 최상의 행복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아라한의 행복’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KBS에서 ‘아라한의 완전한 행복’이라는 다큐 프로를 방영한 바 있다.
세상 사람들은 ‘행복, 행복’ 말하면서 “아, 행복합니다.”라고 말한다. 산골 외딴 집에 사는 부부는 “아무나 가질 수는 없지만 누구나 가질 수 있는 행복이에요.”라고 말하면서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고 한다. 색계 2선천 존재는 “나는 행복하다. 나는 행복하다.”라며 감흥에 흥겨워 말한다. 하지만 갈애의 부숨에 따른 행복만 못할 것이다. 그래서 아라한이 되기 전까지는 행복이라 말하지 말라 했을 것이다.
2016-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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