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새 노새 젊어서 노새 늙어지면 못노나니, 악마의 달콤한 유혹
알고 지내는 B법우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카톡으로 “법우님 지난번 도움주셔서 늦게나마 감사합니다. 한가지 여쭤 봅니다. 초기경전에서 사람이 죽으면 다시 윤회한다고 설하신 것이 있는지요? 전 윤회설을 신뢰(?) 하기 어렵거든요. 가르침 부탁드립니다.”라 하였다. B법우님은 올해 상반기 재가불교활동할 때 알았다. 나이가 70대이지만 각종 행사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또한 카페에 시형식으로 글을 올리기도 하였다.
스승의 조건
현재재가불교운동을 하지 않는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문제로 구호만 있고 수행이 없다는 것이다. 특히 단체를 이끌고 가는 리더십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어느 조직이나 단체에서 리더십은 중요하다. 특히 불교관련 조직이나 단체라면 여법해야 한다. 그것은 리더로서 또는 스승으로서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초기경에 따르면 스승으로서 조건이 있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탐진치가 있으면 안되는 것이다. 스승이 갑자기 버럭버럭 화를 낸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자비의 가르침이라고 이해 해야 할까? 중요한 사실은 분노를 표출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스승이 분노에서 자유롭지 않음을 말한다. 탐진치가 소멸되지 않았다면 깨닫지 못한 것과 같기 때문에 사소한 일에 감정이 상해서 버럭버럭 성질을 냈다면 깨닫지 못한 스승이다. 그런 스승밑에 있어야 할까? 맞지마니까야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해법을 제시한다.
그는 그를 조사해서 탐욕의 상태에서 벗어나 청정한 것을 알았으므로 계속 해서 성냄의 현상에 관해 조사했습니다. ‘이 존자가 성냄의 상태에 있으면서 성냄의 상태에 사로잡혀 알지 못하면서 ‘나는 안다.’라고 말하고, 보지 못하면서 ‘나는 본다.’라고 말하며, 또한 오랜 세월 불행과 고통을 가져올 길로 다른 사람을 이끄는 것은 아닌가?’
(Caṅkīsutta-짱끼의 경, 맛지마니까야 M95, 전재성님역)
스승이 성냄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면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 그럴 경우 떠나야 할 것이다. 왜 그런가? 경에 따르면 “오랜 세월 불행과 고통을 가져올 길로 다른 사람을 이끄는 것은 아닌가?”라는 문구에서 알 수 있다. 그래서 ‘공부가 안되면 그곳을 떠나라’고 하였다.
공부가 안되면 그곳을 떠나라
맛지마니까야 ‘우거진 숲의 경(M17)’에 따르면 ‘이 숲속에 의지해서 지낼 때에 나는 아직 이루지 못한 새김을 새기지 못하고, 아직 집중하지 못한 마음을 집중하지 못하고, 아직 소멸하지 못한 번뇌를 소멸하지 못하고, 아직 도달하지 못한 위없는 안온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생각하였을 때 “그 숲속에서 떠나는 것이 좋으며, 그곳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M17)라고 하였다. 공부가 안되는 장소나 조직이나 단체가 있다면 그곳을 떠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그래서 재가단체활동을 접고 그곳을 떠났다.
재가단체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사귀었다. 그 중에는 스승으로 삼을 정도로 배울만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단체는 구호만 있고 수행이 없었다. 더구나 리더십을 보면 탐진치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이는 일반사회단체가 아니라 종교단체이기 때문에 탐진치에 머물지 않는 리더십을 필요로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활동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느 법우님에 따르면 “그 사람의 장점만 보고 가렵니다.”라 하였다. 어쩌면 이 말이 정답인지 모른다. 수행만 하는 단체가 아니기 때문에 덜 완성될 수밖에 없다. 단점이 나타날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그럼에도 탐진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리더십을 가지고 있다면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공부가 안되면 그곳을 떠나라’고 하였을 것이다.
“몸이 죽으면 정신작용(영혼)도 사라지고”
B법우님은 카톡에서 윤회를 믿기 어렵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어느 카페에 실려 있는 윤회와 관련된 글을 링크 시켜 놓았다. 일부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들의 몸이 죽으면 정신작용(영혼)도 사라지고
물론 윤회도 없다고 보는 것이 과학적 상식에 맞다 고 본다,
최초의 생명체인 단백질에서 부터 수많은 세월을 거쳐
진화하여 생긴 것이 인간이다.
현대인은 먼 조상인 유인원에서 원시인으로 ,
다시 원시인에서 현대의 인간으로 진화하여 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유인원과 원시인,
원시인과 현대인의 경계에서
죽은 유인원이나 원시인이 윤회하여 ,
다시 본래의 유인원으로 또는 원시인으로 윤회하질 않고
어떻게 원시인 또는 현대인으로
진화하여 환생 하였다고 설명될 수 있는 가 ?
불교계에서 최대카페라 불리우는 ‘나무아미타불’ 자유게시판에 올려진 글이다. 글을 보면 마음에 대하여 뇌의 작용으로 보고 있다. 보고 듣고 느낀 것이 모두 뇌에서 일어나는 작용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마음을 뇌의 작용으로 보았기 때문일까 “몸이 죽으면 정신작용(영혼)도 사라지고”라 하였다. 전형적인 단멸론이다. 몸이 무너졌을 때 뇌의 작용에 불과한 마음도 죽기 때문에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호모사피엔스 출현에 대하여
글을 보면 진화론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인간이 진화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유인원과 원시인, 예를 들어 네안데르탈인은 왜 이땅에 존속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네안데르탈인이 오늘날 호모사피엔스로 윤회하지 않았음을 말한다. 그렇다고 네안데르탈인이 호모사피엔스로 진화한 것일까? 진화론에 따르면 현생인류와 네안데르탈인은 전혀 별개의 종이라 하였다. 네안데르탈인에서 호모사피엔스로 진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화론자, 특히 진화연기론을 주장하는 강병균교수류와 같은 사람들은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교과서를 보면 현생인류 호모사피엔스에 대하여 ‘출현’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출현이라는 것은 갑자기 나타남을 말한다. 호모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에서 진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몇 백만년 전에 직립원인 등에서 진화해 왔다고 한다. 하지만 이를 연결할 고리가 없다. 이를 ‘미싱링크’라 한다. 그렇다면 현생인류는 어디서 출현하였을까?
현생인류의 출현에 대한 것은 과학적 범주에 속한다. 종교영역에서 다루기가 부적한 것이다. 그럼에도 과학적 사실을 들어 불교를 종교로 접목하려 한다면 어떻게 될까? 필연적으로 ‘단멸론’이 될 수밖에 없다. 왜 그런가? 과학은 물질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온 밖에서 진리를 찾으려 한다면
우리 몸을 지수화풍 사대로 본다면 죽으면 모두 흩어지고 만다. 정신도 흩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육사외도의 교설에 따르면 생명현상도 하나의 요소로 보고 죽지 않는다고 한다. 빠꾸다 깟짜야나의 ‘7요소설’이 대표적이다. 영혼이 세세생생 윤회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빗나간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님은 우리 몸과 마음을 떠나 이야기 하지 않았다. 우리 몸과 마음 밖에서 진리를 찾은 것이 아니다. 밖으로 향하는 마음을 안으로 돌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였다. 그래서 항상 몸과 마음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는데 이것이 오온이다. 색, 수, 상, 행, 식으로 이루어진 오온이 우리가 사는 세계이다. 이 오온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오온을 떠나서 진리를 찾는 것은 모두 사견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은 일체에 대하여 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 하였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6외입처와 6내입처이다. 그래서 오온, 12처, 18계가 우리가 사는 세상인 것이다.
오온을 떠나 세상을 이야기하고 진리를 이야기 하는 것은 모두 빗나간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부처님 제자 ‘세상은 영원하다든가,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든가, 세상은 유한하다든가, 세상은 유한하지 않다든가, 영혼은 육체와 같다든가, 영혼은 육체와 다르다든가’ 등의 열 가지 의문을 제기 하였지만 답을 하지 않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오온밖에서 진리를 찾으려 한다면 헛된 일이 된다.
청정한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 질문
부처님은 세상은 영원하다든가 등의 형이상학적 주제에 대하여 말씀 하지 않았다. 요즘식으로 따지면 물질에 기반을 둔 과학적 탐구에 관심을 두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분명하게 “말룽끼야뿟따여. 내가 그대에게 ‘말룽끼야뿟따여, 와서 내 밑에서 청정한 삶을 영위하라. 나는 그대에게 ‘세상은 영원하다든가,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든가, 세상은 유한하다든가, 세상은 유한하지 않다든가, 영혼은 육체와 같다든가, 영혼은 육체와 다르다든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한다든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든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든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든가’에 대하여 설명할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가?” 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물질에 기반을 둔 과학적 현상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오온으로 이루어진 이몸과 마음을 탐구하여 괴로움을 벗어나고자 하였다.
설령 부처님이 말룽끼야뿟따의 형이상학적 질문에 답을 하였다고 할지라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왜 그럴까? 그것은 청정한 삶을 살아가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청정한 삶(brahmacariya)은 탐진치를 소멸하는 삶, 즉 윤회를 종식하는 삶을 말한다. 그런데 ‘세상은 영원하다’ 등의 형이상학적 주제를 탐구하였을 때 괴로움을 소멸하고 윤회에서 벗어나는 청정한 삶을 실현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음을 말한다. 그럼에도 일부 불교인들은 과학적 사실을 들어 이를 불교에 접목하여 설명하려 한다. 그러다 보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부정된다. 대표적으로 업과 윤회가 부정된다.
강병균교수 말하기를
과학을 불교와 접목하여 새로운 불교이론을 만들어 가고 있는 강병균교수가 있다. 강교수는 최근 불교닷컴에 “인간은 전두엽을 지닌 존재이므로, 게다가 엄청나게 커다란 전두엽을 지닌 존재이므로, 두뇌를 이용해서 ‘삶의 낙’을 창조한다.”라 하였다. 물질을 기반으로 한 과학자의 생각을 유감 없이 보여 준다.
앞서 어느 단멸론자가 “마음은 뇌의 작용에 따른다’라 하였다.”라 하였다. 강병균교수의 주장도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강교수는 깨달음도 뇌의 작용으로 보았다. 그래서일까 강교수는 뇌의 특징 부위, 예를 들어 갓스팟(God Spot)을 자극하면 열반체험을 할 수 있다고 기고한 바 있다. 그런 강교수는 물질을 기반으로 한 뇌의 작용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혹시 깨달음의 세계도 그런 것은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인간은 깨달음을 얻어 대열반(para nirvana)에 들기 전에, 즐거움을 맘껏 누려야 한다. 예를 들어, 중생을 교화하는 즐거움은 무여열반에 들면 불가능하다. 그렇지 않다면 부처의 대열반을 맞아 제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슬퍼할 이유가 없다. 물론 ‘무여열반에 들지 말고 끝없이 다시 오자’는 대승불교의 이론은 이와는 다르다.”
(강병균교수, 열역학 제2법칙과 깨달음, [연재] 강병균 교수의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80. 2015-12-28)
강병균교수가 주장하는 것은 ‘젊어서 노새’이다. 이는 열반에 들기 전에 “즐거움을 맘껏 누려야 한다.”라는 말로 알 수 있다. 그런데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어 교화 한 것을 즐거움으로 보고 완전한 열반에 들었을 때 그런 즐거움이 지속되지 않기 때문에 제자들이 슬피울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마치 깨달음을 얻는 것이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노새 노새 젊어서 노새 늙어지면 못노나니”
그렇다면 강병균교수는 무엇을 말하고자함일까? 이는 다음 구절에서 알 수 있다. 강병균교수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다음과 같은 말이라 보여진다.
“깨달음을 얻은 다음에는 세속 즐거움(여기에는 깨달음에 대한 기대도 포함된다)을 누리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세속 즐거움을 누리다가도 깨달음을 얻는 것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세속과 깨달음 사이의 길은 일방통행이다. 세속에서 깨달음으로 가는 것만 가능하지, 그 반대 방향인 깨달음에서 세속으로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즉 "깨달은 사람이 다시 미(迷)해질 수 있는냐"고 노골적으로 묻는 것이 불경에 등장하며, 불경의 단호한 답은 “불가능하다”이다. 즉, "일단 한번 깨달으면 다시 미(迷)해지는 일은 없다."
(강병균교수, 열역학 제2법칙과 깨달음, [연재] 강병균 교수의 '환망공상과 기이한 세상'-80. 2015-12-28)
이 말은 깨닫기 전에 즐기자는 것이다. 한마디로 “노새 노새 젊어서 노새 늙어지면 못노나니”이다. 이렇게 젊어서는 즐기고 수행은 나이 들어 해도 늦지 않다는 견해는 외도와 같다. 상윳따니까에 따르면 “존자들은 젊고 머리카락이 아주 검고 행복한 청춘을 부여 받았으나 인생의 꽃다운 시절에 감각적 쾌락을 즐기지 않고 출가했습니다. 존자들은 인간의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즐기십시오.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마십시오.” (S4.21)라는 말이 있다. 이는 악마 빠삐만이 젊은 부처님 제자들에게 한 말이다. 그런데 강병균교수는 “깨달음을 얻은 다음에는 세속 즐거움(여기에는 깨달음에 대한 기대도 포함된다)을 누리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세속 즐거움을 누리다가도 깨달음을 얻는 것은 가능하기 때문이다.”라고 악마 빠삐만과 똑 같은 말을 하였다.
달콤한 악마의 유혹
꽃다운 시절에 출가하여 수행자의 삶을 살아 가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악마가 생각하기에는 쓸데 없는 짓이다. 머리가 칠흑같이 젊은 시기에 해 볼 것 다 해보고 자손을 번식하고 하고 난 다음 수행해도 늦지 않음을 말한다. 실제로 부처님 당시 브라만들은 그렇게 했다.
사람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이 생에서 저 언덕에 가 있지 않으면 죽어서 도달 할 수 없다. 저 언덕이 열반이 될 수도 있고, 색계가 될 수도 있고, 욕계천상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할 것 다 하고 마음껏 감각적 욕망을 즐기다가 갑작스럽게 임종을 맞이 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아마 “아직도 할 일이 많은데”라는 후회가 일어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젊어서 수행자의 삶을 사는 것이 하나도 억울하지 않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의 의식이 인상의 유혹에 사로잡히거나 속성의 유혹에 사로잡혀, 그 순간에 죽는다면 지옥으로 떨어지거나 축생으로 태어나는 두 가지 운명가운데 하나를 얻을 가능성이 있다.”(S35.235)
이 법문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단속하지 못하였을 때 치명적인 위험을 당할 수 있음을 말한다. 악마의 말을 믿고 “노새 노새 젊어서 노새 늙어지면 못노나니”라 하여 즐기는 삶을 살았을 때, 그 순간에 죽는다면 지옥 아니면 축생이라 하였다. 왜 그런가? 공덕이 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먹고 마시고 배설하는 즐거움만을 추구하여 살았을 때 짐승 또는 짐승보다 못한 삶이다. 현생에서 짐승 같은 삶을 살았다면 짐승으로 태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마치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젊어서 즐기고 늙어서 깨달아도 늦지 않다고 말하는 강병균교수의 글은 달콤한 악마의 유혹과도 같다.
범위를 너무 확대하면
모든 것을 과학적 상식과 과학적 사실로 설명하는 과학자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은 부정된다. 부처님 대신 과학이 그 자리를 차지 하고 있다. 일종의 ‘과학교’라 볼 수 있다. 그래서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것도 부처님 가르침이라기 보다 하나의 과학현상으로 본다. 이를 강교수는 ‘엔트로피법칙’으로 설명한다.
엔트로피법칙과 반대 되는 것이 ‘네겐트로피’이다. 생명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강교수는 모든 생명체에 대하여 진화의 산물로 보고서 과학이 발달되면 모두 깨달을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태양은 지구에 에너지를 공급하고, 에너지는 생물체의 뇌를 발달시키고, 발달한 뇌는 세계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고, 지식은 지혜를 증진시키고, 마침내, 지혜는 인간을 깨달음으로 인도한다.”라 하였다. 모든 존재의 근원, 생명의 근원을 태양으로 보는 것이다. 여기에 부처님이 설자리가 없다.
강병균교수와 같은 과학주의자들의 말을 들어 보면 더 이상 부처님 가르침을 따를 필요가 없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가르침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모두 부정된다. 깨달음에 대해서도 뇌의 작용이라 하며 태양이 있어서 인간을 깨달음으로 인도한다고 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는 범위를 확대 하였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오온을 떠나서 진리를 설하지 않았음에도 강병균 교수는 이를 아메바 등 미생물부터 우주에 까지 확대하였다. 이는 말룽끼야뿟따가 의문한 ‘세상은 영원한가’ 등의 열 가지 형이상학적 질문과 같은 범주에 속한다. 하지만 형이상학적 질문은 청정한 삶으로 이끌어 주지 못한다. 평생을 탐구해도 답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설령 현시대에서 이론이 맞을지라도 후대에 뒤바뀌어질 수 있다. 아직도 과학은 현생 인류가 어떻게 갑자기 출현 하였는지 밝히지 못하고 있다.
육척단신의 몸 안에
부처님은 오온을 떠나 외부에서 진리를 찾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라 하였다. 부처님이 세상이라 하였을 때 오온의 세상이다. 부처님이 일체라 하였을 때 십이처를 말한다. 그래서 “여섯으로 세상이 생겨났고 여섯으로 사귐이 이루어지며 여섯 때문에 세상이 집착하고 여섯으로 세상이 괴로워하네.” (S1.70)라 하였다.
오온을 떠나 세상과 진리를 논하는 것은 빗나간 견해이다. 청정한 삶으로 이끌 수 없을뿐더러 당면한 괴로움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러나 벗이여, 세계의 끝에 이르지 않고서는 괴로움의 끝에 도달할 수 없다고 나는 말합니다. 벗이여, 지각하고 사유하는 육척단신의 몸 안에 세계의 발생과 세계의 소멸과 세계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 있음을 나는 가르칩니다.”(S2.26)라고 말씀 하셨다.
2015-12-30
진흙속의연꽃
'진흙속의연꽃'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 내가 세상에 사는 이유 (0) | 2016.01.04 |
---|---|
오늘 밤까지만 살아도 여한이 없는 (0) | 2015.12.31 |
원담스님의 한국불교의 현실에 대한 우려와 고뇌 (0) | 2015.12.26 |
출가를 결심한 법우님 (0) | 2015.12.23 |
스님의 손은 마이더스의 손? 스님이 가져서는 안되는 직업 (0) | 2015.1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