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 손은 마이더스의 손? 스님이 가져서는 안되는 직업
바른 생계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여기서 바른 생계라 하면 팔정도에서 ‘정명(正命)’을 말한다. 이를 영어로는 ‘Right livehood’라 한다. 빠알리어로는 ‘삼마아지와(sammāājīva)’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잘못된 생활을 버리고 올바른 생활로 생계를 유지 하는 것”(S45.8) 이라 하였다. 다름 아닌 ‘바른 생활’을 말한다. 그래서 바른 생활은 바른 생계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불자들이 가져서는 안될 직업
재가자에게 있어서 바른 생계는 ‘바른 직업’을 갖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한마디로 오계를 어기는 직업을 가지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재가의 신자는 이와 같은 다섯 가지를 판매하지 말아야 한다. 다섯 가지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무기를 파는 것, 사람을 파는 것, 고기를 파는 것, 술을 파는 것, 독극물을 파는 것이다.” (A5.177)라 하였다.
불자들이 가져서는 안되는 유형은 모두 오계와 관련이 있다. 그래서 불자들은 1)무기와 관련된 직업, 2)노예나 매춘에 관련된 직업, 3)동물을 도살하는 직업, 4)독약이나 술이나 마약을 거래하는 직업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한다면 ‘사기꾼’도 해당될 것이다. 입발린 소리를 하여 남의 돈이나 재산을 등쳐 먹는 행위를 말한다. 그러나 사기꾼이 사기꾼이 되고 싶어서 사기꾼이 되는 것이 아니다. 제때에 돈을 갚지 못하면 사기꾼 소리를 듣는다. 사기꾼이라는 말에 아무리 많이 배우고 지위가 높아도 한번 ‘신용’이 무너지면 사기꾼소리를 듣는다.
믿기지 않으면 아무리 믿으려고 해도
누구나 사기꾼이 될 수 있다. 제때에 돈을 못 갚으면 사기꾼이다. 사업을 하면서 결재가 늦어졌을 때 사기꾼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어도 제때에 결재를 해야 한다. 늦으면 사정을 이야기하고 언제 가능한지 알려 주어야 한다. 그럼에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결재하지 않는다면 사기꾼 기질이 농후한 것이다. 다음 번 거래할 때는 경계하게 되고 여러가지 안전장치를 마련해 놓는다.
다 속여도 자신의 마음을 속일 수는 없다. 한번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믿기지 않는데 믿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유일신교에서 믿음을 강조하지만 믿지기 않으면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선종에서 ‘불성’이나 ‘본래불’을 강조하지만 믿기지 않으면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유일신교에서는 무조건적 믿음을 강조한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믿기지 않으면 아무리 믿으려고 해도 믿기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믿음이 가면 믿지 말라고 해도 믿는다. 부처님 가르침이 그렇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에 대하여 “세존께서 잘 설하신 가르침은 현세의 삶에서 현세의 삶에 유익한 가르침이며, 시간을 초월하는 가르침이며,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가르침이며,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가르침이며, 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가르침이다.”(S11.3) 라 하였을 것이다.
부처님이 설하신 가르침은 믿음이 간다. 믿으라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선종에서 ‘신-해-행-증’이라 하여 마치 유일신교처럼 ‘믿음’을 먼저 내세우지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먼저 ‘믿으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와서 보라’는 것이다. 와서 확인하면 되는 것이다. 초대할만하기 때문에 자신 있게 와서 보라는 것이다. 와서 보면 믿게 된다. 한번 믿음이 가면 믿지 말라고 해도 믿는 것이다. 다 속여도 자신의 마음만은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출세간적 바른 생계는?
부처님은 바른 생계(正命: sammāājīva)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그렇다면 출세간적으로 바른 생계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세간적으로는 정명이 오계에 어긋나지 않는 올바른 직업을 갖는 것이다. 그렇다면 탁발에 의존하는 출세간적 입장에서 본다면 바른 생계는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디가니까야 ‘사만냐팔라 경(D2)’에서는 ‘계행’으로 설명하고 있다. 계행을 잘 지키는 것이 잘 사는 것, 즉 바른 생계라는 뜻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탁발에 의존하여 생명을 유지하는 빅쿠는 다른 생계수단을 갖지 않는다. 그래서 짧은 크기의 계행에서는 불살생 등 일곱 가지가 언급되어 있다. 특히 생계와 관련해서는 구체적으로 19가지가 언급되어 있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Bījagāmabhūtagāmasamārambhā paṭivirato hoti.
Ekabhattiko hoti rattūparato paṭivirato vikālabhojanā.
Naccagītavāditavisūkadassanā paṭivirato hoti.
Mālāgandhavilepanadhāraṇamaṇḍanavibhusanaṭṭhānā paṭivirato hoti.
Uccāsayanamahāsayanā paṭivirato hoti.
Jātarūparajatapaṭiggahaṇā paṭivirato hoti.
Āmakadhaññapaṭiggahaṇā paṭivirato hoti.
Āmakamaṃsapaṭiggahaṇā paṭivirato hoti.
Itthikumārikapaṭiggahaṇā paṭivirato hoti.
Dāsidāsapaṭiggahaṇā paṭivirato hoti.
Ajeḷakapaṭiggahaṇā paṭivirato hoti.
Kukkuṭasūkarapaṭiggahaṇā paṭivirato hoti.
Hatthigavassavaḷavā paṭiggahaṇā paṭivirato hoti.
Khettavatthupaṭiggahaṇā paṭivirato hoti.
Dūteyyapaheṇa gamanānuyogā paṭivirato hoti.
Kayavikkayā paṭivirato hoti.
Tulākūṭakaṃsakūṭamānakūṭā paṭivirato hoti.
Ukkoṭanavañcananikatisāci yogā paṭivirato hoti.
Chedanavadhabandhanaviparāmosaālopasahasākārā paṭivirato hoti.
Idampi'ssa hoti sīlasmiṃ.
그는 또한
1) 종자나 식물을 해치는 것을 여읩니다.
2) 하루 한 번 식사하고, 밤에는 식사하지 않으며, 때 아닌 때에 먹는 것을 여읩니다.
3) 노래∙춤∙음악∙연극 등을 보는 것을 여읩니다.
4) 꽃다발∙향료∙버터를 가지고 화장하고 장식하는 것을 여읩니다.
5) 높은 침대, 큰 침대를 받는 것을 여읩니다.
6) 금은을 받는 것을 여읩니다.
7) 날곡식을 받는 것을 여읩니다.
8) 날고기를 받는 것을 여읩니다.
9) 여인이나 여자아이를 받는 것을 여읩니다.
10) 하녀나 하인을 받는 것을 여읩니다.
11) 염소나 양을 받는 것을 여읩니다.
12) 닭이나 돼지를 받는 것을 여읩니다.
13) 코끼리나 소나 암말, 수말을 받는 것을 여읩니다.
14) 경지나 황지를 받는 것을 여읩니다.
15) 심부름을 보내거나 가는 것을 여읩니다.
16) 사고, 파는 것을 여읩니다.
17) 저울을 속이고, 화폐를 속이고, 도량을 속이는 것을 여읩니다.
18) 사기∙기만∙간계∙부정을 여읩니다.
19) 절단하고 살육하고 포박하고 노략하고 약탈하고 폭행하는 것을 여읩니다. 이것도 또한 그 수행승의 계행입니다.
(Sāmaññaphalasutta-수행자의 삶의 결실에 대한 경, 디가니까야 D2, 전재성님역)
첫 번째 항목을 보면 “종자나 식물을 해치는 것을 여읩니다. (Bījagāmabhūtagāmasamārambhā paṭivirato hoti)”라 하였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산속에 있는 과일이나 열매도 따 먹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무나 식물의 가지를 꺽거나 베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탁발에 의존하는 수행승이 빌어먹는 것 외 어떤 생계수단도 갖지 말라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열매도 취하지 말고, 열매를 취하는 과정에서 식물이나 나무를 손상하는 행위도 하지 말라고 하였다.
사회에서는 예선전도 통과 못하는 작품을 가지고
한국불교에서 스님들이 직업을 갖는다. 이는 다 알려진 공공연한 사실이다. 최근 TV를 보니 공영방송 뉴스에서 ‘고려불화전시회’에 대한 어느 스님의 인터뷰기사를 보았다. 그런데 자막에 ‘고려불화복원작가’라고 소개 되어 있다. 스님이 아니라 작가인 것이다. 작가로서 스님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스님이 본분사를 내 팽겨쳐 두고 직업을 갖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주변을 보면 화가스님, 가수스님, 요리사스님 등 갖가지 직업을 가진 스님을 볼 수 있다. 과연 이런 스님들은 해당분야에 대하여 전문성을 갖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B스님은 영상법문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출가할 때 다 버리라고 하는데 일부는 감추어 두고 일부만 버려요. 또 다 버리는 척 하지만 6개월, 3년, 5년 동안만 버려요. 그리고 난 다음 다시 취해요.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일시적으로 버리는 것, 더 좋은 것을 가지기 위해서 지금 버리는 거에요. 그렇게 버리는 것은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계를 벗어나기 위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위치를 차지하려고 일시적으로 버리는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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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보면, 불교계에서는 그 스님의 붓글씨가 굉장히 유명해요. 높이 평가해서 돈을 많이 주고 받고 사고 팔아요. 그런데 사회에 나가면 그거는 서예대전이나 국전에 출품하면 예선전에도 통과 못해요. 통과도 못하는 그 작품을 가지고 불교계 안에서는 막 좋다고 하고 많은 돈을 주고 사고 팔아요.
어떤 사람은 세속에 나가면 강사도 못해먹고 굶어 죽을 사람인데 머리를 깍았기 때문에 대접을 받고 더 잘먹고 살아요. 똑 같은 능력으로. 세속에 나가면 그 그림 한푼어치 가치도 없는데 스님이니까 그 돈을 가지고 거래를 하고 돈을 벌고 먹고 살아요. 이상한 현상이에요. 그거 뭐 하는 짓이에요? 그거는 자기가 가지지 못하는 것을 더 가지기 위해 출가한 거라고 볼 수밖에 없어요.”
(니까야 제54강 범행의 바른 차제 (출가와 재가자의 출가)
출가자 중에는 몸만 출가한 스님들도 있다는 것이다. 마음은 세속에 있고 겉모습만 출가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스님들이라 하였다. 그런데 붓글씨, 그림 등 세속적 직업을 가진 스님들의 작품을 보면 형편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달마도를 그려서 파는 스님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B스님이 말하기를 “거창에 장날에 가다보면 스님들이 몇 사람 짝을 지어가지고 물건을 팔러 다녀요. 붓글씨로 달마도를 그려가지고 갖다 팔아요. 근데 그거 잘 팔려요. 돈도 제법많이 받아요. 그런데 사회에서 예술성을 본다면 그거는 종이도 버려야 해요. 차라리 백지면 종이값도 나오는데.”라 하였다. 단지 스님이라는 이유로 스님이 만든 작품이 불티나게 팔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따졌을 때 예술성도 없고 국전 등 전시회에 나갔을 때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수준임을 말한다. 아마추어와 프로페셔널의 차이라 볼 수 있다.
스님인가 장사치인가?
매년 3월에 3호선 학여울역 바로 위에서는 ‘불교박람회’가 열린다. 매년 관람하며 느낀 점을 블로그에 올려 놓았다. 주로 스님들이 부스에 앉아 있는 것을 비판하였다. 머리깍고 회색승복을 입은 스님들이 부스에 앉아서 손님을 맞는 장면에 대한 것이다.
박람회에 가보면 스님들은 매우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박람회장에 가보면 화가스님, 조각가 스님, 차를 만들어 파는 스님, 사찰음식을 만들어 파는 스님 등 매우 다양하다. 심지어 지팡이를 만들어 파는 스님, 뽕나무잎으로 소금을 만들어 파는 스님 등 갖가지 직업을 가지고 있다. 스님이라기 보다 작가 또는 ‘장사치’로 보인다.
언젠가 연등축제에서 달마도를 파는 스님들을 보았다. 동대문 운동장에서 행렬을 기다리고 있는데 일단의 스님들이 나타나 달마도를 한장씩 돌리는 것이었다. 즐거운 날에 구경나온 불자와 시민들에게 공짜로 보시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돈을 받고 파는 것이었다. 이에 불자들은 나누어 준 달마도를 다시 되돌려 줄 수 없어서 돈을 주고 사는 모습을 보았다.
달마도를 파는 스님들(2010년 연등축제)
스님의 손은 마이더스의 손?
부처님은 출가자들에게 직업을 갖지 말라고 하였다. 탁발에 의존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자가 별도로 직업을 갖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불교에서처럼 그림이면 그림,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음식이면 음식 등 못 하는 것이 없다. 출가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위장출가’했음에 틀림 없다.
위장출가한 스님들의 작품을 보면 그다지 가치 있게 보이지 않는다. 세속에서라면 인정받지 못하는 작품이지만 단지 스님의 작품이기 때문에 용인 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불자들은 머리깍은 스님들이 그린 달마도나 음반, 음식 등을 사 준다. 그것도 불티나게 팔리는 경향이 있다. 세속의 기준으로 따진다면 수준이하이더라도 스님의 손만 타면 판매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스님의 손은 ‘마이더스의 손’과 다름 없다. 그래서 한국불교에서는 스님작가, 스님가수, 스님화가, 스님무용수, 스님요리사가 많다.
하지 말라고 한 것을 골라서 하는
스님들이 왜 직업을 가져서는 안되는가? 이는 부처님이 금한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출가자가 “노래∙춤∙음악∙연극 등을 보는 것을 여읩니다. (Naccagītavāditavisūkadassanā paṭivirato hoti.)”라 하였다. 이는 노래, 춤, 음악 등 생계수단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또 “금은을 받는 것을 여읩니다. (Jātarūparajatapaṭiggahaṇā paṭivirato hoti.)”라 하였다. 생계와 관련하여 돈을 받지 말라는 것이다. 또 “사고, 파는 것을 여읩니다. (Kayavikkayā paṭivirato hoti.)”라 하였다. 거래나 장사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불교스님들은 부처님이 하지 말라고 한 것을 골라서 하는 것 같다.
한국스님들은 출가자로서 못하는 것이 없다. 무엇이든지 다 한다. 먹고 싶으면 무엇이든지 먹는다. 돌아 다니고 싶으면 어디든지 간다. 특히 잘 돌아 다닌다. 이는 공항에 가보면 알 수 있다.
공항에 나가 보면 출국하기 위하여 대기하고 있는 수 많은 스님들을 볼 수 있다. 아마 스님들만큼 해외여행 자주 하는 사람들이 드물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를 들어 보면 전세계적으로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이곳 저곳 돌아 다닌다. 물론 구도를 위하여 공부하러 나가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구경나가듯이 다녀 온다.
외국 불교관광지에 가면 스님들을 많이 본다. 호텔에서 아침에 식사할 때 도 많이 보았다. 마치 부자집 사람들이 매 철마다 해외에 나갔다 오지 않으면 몸이 근질근질한다고 하듯이 우리 스님들은 틈만 나면 밖으로 나가는 것 같다. 한국스님들은 부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을 골라서 하는 것 같다.
스님의 책에 대하여
못하는 것이 없는 스님들은 세간에서 하는 일들은 거의 다 간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르고 사찰음식을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책을 내는 것도 한다.
어떤 이는 스님이 책을 내는 것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보기도 한다. 공부하고 포교하는 차원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스님이 낸 책이 문학적으로 학술적으로 가치가 있는 것일까? 일부 가치가 있기도 하겠지만 대부분 수준미달인 경우가 많다. 단지 스님이 책을 썼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호기심으로 사보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만일 스님이라는 신분을 벗어 버리고, 속된 말로 ‘계급장 떼고’ 세속의 이름으로 출간하였다면 얼마나 인정해 줄까?
스님이라고 해서 책을 쓰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빅쿠로서 해서는 안될 일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저 쪽 세계로 건너간 사람들이 출가자들이다. 그래서 다시는 이 쪽 세상에 되돌아 오지 않기 위하여 그 증표로서 머리도 깍고 회색승복도 걸친 것이다. 그럼에도 세간에서 하는 일에 올인하는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아마 부처님에게 칭찬받기는 힘들 것이다.
출가자는 책 쓰는 것도 엄밀히 말하면 본분사에 어긋나는 것이다. 왜 그런가? 출가자로서는 해서는 안될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혹은 어떤 존귀한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신자들이 보시한 음식을 향유하면서” (D2) 서 알 수 있다. 이렇게 보시받은 음식으로 사는 스님들이 신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장사를 한다면 어떻게 보아야할까? 얻어먹으면서 자신의 작품을 판매한다면 이중으로 이득을 취하는 것이 된다.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디가니까야 ‘사만냐팔라경(D2)’에서 ‘중간크기의 계행’을 보면 알 수 있다. 해서는 안될 일 수 백가지가 매우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신자들로 보시를 받는 출가수행자는 출가목적의 달성을 위하여 올인해야 한다. 그럼에도 부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을 골라서 하는 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이다. 이에는 스님들이 글쓰기를 하여 책을 출간하는 것도 해당된다. 비록 경에서는 책출간에 대한 이야기는 없지만 넓은 범주에서 본다면 보시로 생계를 꾸려 가는 스님들이 해서는 안될 일이다. 만일 부처님이 지금 여기에 계신다면 금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번역서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왜 재가의 일을 가로채려 하는가?
한국불교에서는 스님들이 책을 출간할 뿐만 아니라 번역서도 출간하고 있다. 외국의 서적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자신의 법명으로 출간하는 것이다. 그런 번역서중에는 ‘빠알리니까야’도 있다.
현재 한국에는 두 종류의 빠알리번역서가 있다. 하나는 재가의 학자가 번역한 것이고 또하나는 출가의 스님들이 번역한 것이다. 과연 스님들이 번역에 참여하여 자신의 이름으로 출간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는 행위일까? 이런 의문에 어떤 스님이나 불자들은 당연히 가능하다고 한다. 부처님 가르침을 전달하는데 있어서 승속의 구별이 없음을 말한다. 더구나 스님이 번역하면 사정을 잘 알기 때문에 더 잘 번역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과거 중국에서 구마리집이나 현장법사의 예를 들며 승가에서 번역한 것에 더 신뢰를 주고 있다.
한국에서는 스님들이 손을 대면 무엇이든지 최고가 되는 것 같다. 실력이 부족하고 함량이 부족한 그림이나 노래라도 스님이 취급하면 불자들은 인정하고 기꺼이 사준다. 그래서 장사가 되는 것이다. 책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작가라면 피나는 노력과 선천적 재능이 바탕이 되어 세상에 책을 내놓게 된다. 번역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문학적 소양과 언어학적 소양이 바탕이 되어야 좋은 번역이 나올 수 있다. 그럼에도 단지 스님이 번역하였다고 하여 선호 한다면 이는 달마도를 그려 파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부처님이 지금 여기에 계신다면
스님이라고 하여 모두 인문학적 소양과 언어학적 소양을 두루 갖추었다고 볼 수 없다. 니까야를 우리말로 번역하여야 겠다는 원력만으로 좋은 번역이 될 수 없음을 말한다. 아무리 원력이 좋아도 인문학적, 언어학적 소양이 부족하다면 엉뚱한 번역이 될 수 있다. 만약 그렇게 되었을 경우 부처님 금구성언을 훼손하게 하는 ‘구업’을 짓게 된다.
그렇다면 누가 번역해야 하는가? 인문학적 언어학적 소양을 갖춘 ‘학자’가 번역해야 한다. 그럼에도 스님들이 개입하여 번역을 직업으로 삼는다면 이는 ‘재가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이나 다름 없다.
스님이 해야 할 본분사가 있고 재가자가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다. 특히 번역에서 그렇다. 재가자가 해야 할 일을 스님들이 이곳 저곳 개입하였을 때 능력있는 재가자는 설자리가 없다. 무엇보다 스님들이 재가자가 하는 일을 가로채다시피 하여 몰입하였을 때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위배된다.
스님들은 재가자의 보시에 의존하여 생계를 유지한다. 그래서 탁발 이외 어떤 일도 해서는 안된다. 이것이 팔정도에서 말하는 ‘바른 생계(정명: sammāājīva) ’이다. 그럼에도 출가자가 출가의 목적에 전념하지 않고 재가자의 몫인 그림, 노래, 음식, 출간, 번역 등에 개입한다면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기는 것이 된다.
부처님이 분명히 금은을 받지 않고 거래를 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재가자재부터 보시를 받는 출가자가 또 다시 재가자를 상대로 장사를 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부처님이 지금 여기에 계신다면 허락하지 않을 것임에 틀림 없다.
2015-12-19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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