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를 결심한 법우님
남한테 피해만 안주면 된다고
전에는 남에게 피해만 끼치지 않는 삶을 살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물론 착하게 사는 것이다. 그렇다고 착하게 사는 것이 건전하고 지혜롭게 사는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소극적인 삶의 방식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소극적으로 살아 간다. 착하게 살며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 삶의 방식을 말한다. 그러다 보니 베풂이 나눔, 보시와 같은 말에 익숙하지 않다. 봉사하는 생활은 꿈도 꾸지 못한다. 또 착하게 살면 된다고는 하지만 계행을 잘 지킨다는 보장이 없다. 그때 그때 상황에 휩쓸리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불건전한 행위를 할 수 있다. 착하게 산다고 하여 모두 지혜롭게 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부분 종교가 착하게 살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좀 더 적극적 행위를 요구한다. 그것은 봉사하는 삶과 도덕적인 삶이다. 보시나 베풂, 나눔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를 멀리 하는 삶을 요청하는 것이다. 그래야 천국이나 천상에 태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천상에 아무나 나지 않는다. 가장 먼저 삼보에 귀의해야하고 봉사하는 삶과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이렇게 믿음으로 보시를 하고 계행을 지키는 삶이 생활화 되면 천상에 나는 것은 따 놓은 당상과도 같다고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지혜로운 삶이다. 단순히 착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착하고 지혜롭게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런 지혜는 부처님 가르침에서 나온다. 부처님 가르침과 늘 함께 하다 보면 지혜로운 자가 되는 것이다.
걸려 있고 묶여 있는 것이 많아서
불교를 믿는 목적은 무엇일까? 사대소원을 잘 들어 달라고 비는 것일까? 그러나 부처님의 원음을 접하면 달라진다. 그것은 ‘열반’이다. 다시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출가’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그러나 재가자에는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걸려 있고 묶여 있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번 생에 가능하지 않다면 ‘발판’이라도 마련해 놓는 것이다.
아라한이 되면 불교를 믿는 목적이 달성된다. 부처님이 가신 길을 그대로 따라 가기만 하면 아라한이 된다. 그러나 아라한이 되기 까지 이전 생에서 엄청난 공덕을 세웠을 것이다. 아라한이 못되면 불환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불환자가 되면 정거천에서 태어나 수명대로 살다가 아라한이 되어 완전한 열반에 들게 된다. 불환자가 못되면 일래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일래자가 되면 인간이나 천상에 한 번 더 태어나 살다가 아라한이 되어 완전한 열반에 들게 된다. 일래자 못 되면 예류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예류자가 되면 일곱생이내에 완전한 열반에 들게 예약 되어 있다.
아라한이나 불환자, 일래자가 이번 생에 힘들다면 예류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예류자가 되기 쉽지 않다. 가장 좋은 방법은 출가하는 것이다. 재가의 삶 보다는 출가의 삶을 사는 것이 월등하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숫따니빠따에서는 공작과 백조의 비유를 들어 “하늘을 나는 목이 푸른 공작새가 백조의 빠름을 따라 잡을 수 없는 것처럼, 재가자는 멀리 떠나 숲속에서 명상하는 수행승, 그 성자에 미치지 못한다.”(stn221) 라 하였다. 재가자는 출가자의 빠름을 따라 잡을 수 없음을 말한다.
가족 밖에 모르는 사람들
재가의 삶을 살면서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가기 힘들다. 그렇다고 포기 할 수는 없다. 이번 생에 힘들다면 다음 생을 위한 발판이라도 마련해 놓아야 한다. 어떤 발판인가? 다름 아닌 ‘공덕’이다. 이번 생에서 공덕을 쌓아 놓는다면 그 공덕의 과보로 다음 생에는 좀 더 좋은 조건이 형성 될지 모른다. 그래서 앙굿따라니까야 ‘벨라마의 경(A9.20)’에서는 보시공덕에 대하여 말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인색한 삶을 산다. 남을 도와 주고 베푸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극히 적다.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는 많이 베풀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는 인색한 것이 일반사람들의 특징이다. 부처님 당시도 그랬다.
경에 따르면 장자는 오지 자신의 가족밖에 모른다. 보시를 해도 가정에다 하는 것이다. 자신의 아내와 자녀, 그리고 하인에게 보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베풀고 나누고 보시하는 삶이라 볼 수 없다. 생활인이라면 당연히 하는 일이다. 누군가 자녀에게 용돈을 주면서 자신의 일기장에 “오늘 나는 참 착한 일을 했다.”라고 적어 놓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보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엇이 수승한 보시인가?
부처님은 바라문 벨라마의 보시 이야기를 하였다. 이에 대하여 굉장한 보시라 하였다. 어느 정도일까? 경에 따르면 ‘팔만사천 개의 황금그릇’을 보시한 것으로 되어 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 보시한 것이다. 오늘날 연말이 되면 불우이웃에 쓰라면서 거액을 내 놓는 사람과 유사하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와 같은 굉장한 보시도 한사람의 견해를 갖춘 이에게 보시하는 것 보다 못하다고 하였다. 여기서 견해를 갖춘 이는 ‘흐름에 든 성자’를 말한다.
흐름에 든 성자, 즉 예류자 보다 ‘백 사람의 예류자’에게 보시하는 것이 더 수승하고, 백사람의 예류자 보다는 ‘한 사람의 일래자’에게 보시는 것이 더 수승하다고 하였다. 이를 순서대로 ‘불환자’와 ‘아라한’을 거쳐 ‘연각승’에 이른다. 그리고 마침내“한사람의 이렇게 오신님, 거룩한 님, 올바로 깨달은 님에게 보시한다면”이라 하여 부처님에게까지 이른다. 부처님에게 보시하는 것이 더 수승하다는 것이다.
절을 보시는 것
보시공덕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부처님은 “깨달은 님 앞에서 수행승의 참모임 공양”하는 것이 부처님에게 탁발음식 등을 보시는 것 보다 더 수승하다고 하였다. 이는 승가에 보시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승가에 보시는 것 보다 더 수승한 보시가 있다. 절을 보시는 것이다. 아나타삔다까처럼 절을 지어 승가에 보시하는 것이다. 아마 이런 행위는 아나타삔디까와 같은 부자나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돈 많은 부자들이 가장 공덕을 많이 짓는 것일까? 하지만 그런 기대는 무너진다. 부처님은 승원을 지어서 승가에 보시하는 것 보다 더 수승한 것이 ‘삼보에 귀의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를 의지처, 귀의처, 피난처로 하는 것이 절을 보시는 것 보다 더 수승하다는 것이다.
수행자로 사는 것이 더
삼보에 귀의하는 것 보다 더 수승한 것이 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오계’를 지키는 것이다. 누구나 삼보에 귀의하면 불자가 되지만 오계를 지키지 않는다면 반쪽짜리 불자 밖에 되지 않는다. 오계를 지킨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다름 아닌 ‘도덕적인 삶’이다. 이제까지 보시하는 등 의 삶의 살아 왔다면 이는 ‘봉사하는 삶’이라 볼 수 있다.
오계를 지키면서 봉사하는 삶과 도덕적인 삶을 산다면 이상적이다. 동시에 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삼보에 귀의하였다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된다. 이렇게 믿음과 보시와 지계의 삶을 살게 되면 확실하게 천상에 태어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삼보에 대한 믿음과 보시, 지계의 삶 보다 더 수승한 것이 있다. 그것은 ‘자애의 삶’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단지 스치는 향기처럼이라도 자애의 마음을 닦는다면”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마음을 닦는 삶이 더 수승하다는 것이다.
재가신자로서 보시하며 지계하는 삶을 살았다면 지금부터 수행자로서 살아 간다면 가장 큰 공덕을 짓게 된다. 그래서 “단지 손가락 튕기는 순간이라도 무상에 대한 자각을 닦는다면 그것이 더욱 커다란 과보를 가져올 것입니다.”라 하였다. 무상에 대한 자각이 자애의 마음을 닦는 것 보다 더 수승하다는 것이다. 결국 수행자의 삶이 가장 수승함을 말한다.
표로 정리하면
이에 대하여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No |
커다란 과보를 가져 오는 행위(A9.20) |
비 고 |
1 |
한사람의 견해를 갖춘 님에게 보시한다면 |
보시하는 삶 |
2 |
백사람의 견해를 갖춘 님에게 보시한다면 | |
3 |
한번 돌아오는 님에게 보시한다면 | |
4 |
백사람의 한번 돌아오는 님에게 보시한다면 | |
5 |
한사람의 돌아 오지 않는 님에게 보시한다면 | |
6 |
백사람의 돌아 오지 않는 님에게 보시한다면 | |
7 |
한사람의 거룩한 님에게 보시한다면 | |
8 |
백사람의 거룩한 님에게 보시한다면 | |
9 |
한사람의 연기법을 깨달은 님에게 보시한다면 | |
10 |
백사람의 연기법을 깨달은 님에게 보시한다면 | |
11 |
한사람의 이렇게 오신님, 거룩한 님, 올바로 깨달은 님에게 보시한다면 | |
12 |
깨달은 님 앞에서 수행승의 참모임 공양한다면 | |
13 |
사방의 참모임을 위해 승원을 세운다면 | |
14 |
청정한 믿음의 마음으로 부처님과 가르침과 참모임에 귀의한다면 |
삼귀의 |
15 |
청정한 믿음으로 살아 있는 것을 죽이는 것을 삼가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는 것을 삼가고,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는 것을 삼가고, 거짓말 하는 것을 삼가고, 곡주나 과일주등의 취기가 있는 것을 삼가는 학습계율을 갖춘다면 |
지계 |
16 |
단지 스치는 향기처럼이라도 자애의 마음을 닦는다면 |
수행자의 삶
|
17 |
단지 손가락 튕기는 순간이라도 무상에 대한 자각을 닦는다면 |
수행자의 삶이 가장 수승하다. 재가자로의 보시하고 지계하는 삶도 수승하지만 가르침을 실천하는 삶 만한 것이 없다. 그래서 초기경전에 따르면 가르침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되었을 때 출가하게 된다.
디가니까야 ‘사만냐팔라경(D2)’에 따르면 “그래서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나 다른 종족의 출신자가 그 가르침을 듣게 됩니다. 그 가르침을 듣고 여래에 대한 확신을 얻습니다. 여래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된 그는 ‘집에서 사는 것은 번잡하고 티끌로 가득 차 있지만 출가는 자유로운 공간과 같다. 집에서 사는 자는 지극히 원만하고 오로지 청정한, 소라껍질처럼 잘 연마된 거룩한 삶을 살기가 어렵다. 자, 나는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고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여 수행승이 되는 것이 어떨까?’라고 이와 같이 생각합니다.” (D2)라 하였다. 출가하게 되어 청정한 삶을 살게 되었을 때 출가의 목적은 달성될 것이다.
가르침에 의한 보시가 가장 훌륭하다
보시하고 지계하는 것이 커다란 공덕이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더 큰 공덕은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라 하였다. 가장 좋은 것은 출가하는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늘 가르침과 함께 산다면 스승한 것이다. 또한 가르침을 널리 알리는 것도 수승한 것이다. 이는 “보시 가운데 가르침에 의한 보시가 가장 훌륭하다.”(It.97) 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다.
글을 쓰는 것도 일종의 보시일 것이다. 그리고 공덕행이라 볼 수 있다. 가르침을 근거로 하여 글을 썼을 때 종종 감사의 글을 받는다. 종종 글을 주시는 M법우님은 “진흙속의 연꽃님을 인연해서 니까야 공부를 하게 되어 정말 시행착오를 겪지 않고 부처님을 만나게 된 것이 큰 축복입니다.”라 하였다. 또 메일에서 S법우님은 “저도 연꽃님 블로그를 알고 글들을 읽어온 지가 몇 년 되는 것 같습니다. 대승불교만 알고 있던 제가 초기불교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금년에는 4부 니까야와 5부니까야의 일부까지 구비하여 소장하고 있게 되었습니다.”라 하였다.
메일에 장문의 글을 주신 법우님
글을 주신 법우님들에게 감사하게 생각한다. 보통불자의 일상적인 이야기에 지나지 않고 또한 삼류, 비주류, 비급에 불과한 글이지만 무언가 건질 것이 있다면 다행으로 생각한다. 아마 경전에 근거한 글쓰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어느 법우님은 글을 읽고서 출가발심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메일에 장문의 글을 남겨 주신 법우님의 사연은 다음과 같다.
안녕하세요?
연꽃님
매일 매일 연꽃님의 법문 꼼꼼히 읽고 있습니다
요며칠 2002년에 이루어진
도올 인도를 만나다 강의를 듣고 있는데
근본불교가 아직 많이 알려지기 전이고
번역도 제데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인지
김용옥 선생님의 교리적인 강의의 질이
연꽃님의 글보다 조금 미흡하게 다가옵니다
그래도 열정적으로 강의하시는 것 보면 참 멋있습니다
몇 개월 전에 '분노하는 것'에 대해서 문의 매일을 드렸었는데
'찐짜 마나위까'를 주제로 해서
저의 메일을 소개하고 글을 주셨을 때는 아주 감사했습니다
유명인에게 싸인 받은 기분이라고 할까요?~
음악cd도 잘 듣고 있습니다
연꽃님 블로그 배경음악으로
'나모따싸바가와또' 반복되는 음악 깔아도 좋을 듯합니다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요
아이패드로 하루 두 시간 정도 빼먹지 않고
연꽃님 글을 읽고 메모하고 있습니다
19일부터 글이 업데이트가 안되길래
해외 성지 순례 가셨나 했는데
모바일로 보다보니
최신글이 업데이트가 안될때가 있더라구요
지금 데스크 탑으로 보니까 몇 개의 글이
빠짐없이 쓰여져 있네요
잘읽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연꽃님께 메일을 보내는 것이 4~5번 정도 되는 것 같네요
2014년 1월 처음 부처님의 법을 접하고
인간적인 부처님과 오리지널 부처님을 알고 싶어서
검색창에 '부처님' '육체' '고통'을 검색했었는데
그 때
연꽃님의 '부처님의 병실법문 (13년 3월 5일 글)을 처음으로 읽었네요
그후 그 글을 기점으로 최신글을 향해서 한 글 한 글 모두 읽어 나갔더니
드디어 매일 업데이트 되는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뒤로는 한 글 한 글 읽어나가다 보니
2012년 3월 30일 글까지 읽어 나갔습니다
그 당시 억대 도박 사건이 터질 때
조계종에서 발표한 자체정화약속들이
지금은 어떻게 잘 지켜지고 있는지
아니면 뭔가 바뀌었는지...궁금하네요
그때는 엄청 심각했었는데요
연꽃님도 언론도 사회도
3년 후에 그 당시 글을 읽고 있으니
제행무상인데
유독 조계종종회와 스님들의 비행은 변하지 않네요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한 번 스님은 영원한 스님!
이라는 문구가 생각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연꽃님이 스님들의 잘못을 지적해도
결국 과거의 그랬던 글처럼 묻히겠지요
2014년 1월은 저에게 인생이 바뀌는 날이었습니다
연꽃님도 닉네임 '구름'이라는 인터넷 논객 이경숙을 아실런지 모르겠네요
'노자를 웃긴 남자'라는 책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불교는 중국에서 발생했다라고 생각할 정도로 무지했던 저는
지인이 건네준
이경숙의 '마음의 여행(과학으로 풀어 본 삶, 죽음, 영혼)'이라는 책을 읽고
부처님을 알게됬습니다
물론 지금보면 그 책은 유식사상을 바탕으로 한 책이고
아뢰야식이 윤회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과학으로 삶과 죽음을 풀어보겠다는 이 책의 거대한 취지도 결국은
이경숙의 추측과 가능성일 뿐 아무것도 밝히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구름타운'이라고 그 분이 운영하는 사이트에 가보면
그 분을 추종하는 분들은
자신의 어머니가 죽으면
아뢰야식으로 49일간 있다가 다시 태어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안이비설신의가 색성향미촉법과 접촉을 해서
느낌이 생겨나고 그 느낌에서 갈애와 집착이 생겨나고
이 집착이 존재를 만들고
우리를 윤회하게 만든다,
우리는 정견이 없기에
이 감관을 통해서 생겨나는 쾌락을 찾아 살지만
사성제에 대한 바른 믿음을 내는 정견을 가지고
세상의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해야 한다
그러면서 팔정도라는 방법을 통해
감관의 제어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버리면
노병사에서 벗어난다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너무 놀랐습니다
전에 없던 너무나도
확실한 노병사의 해결방법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접촉을 통해서 느낌과 갈애가 생겨난다'
저는 이 말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나는 누군가? 우주는 끝이 있을까? 신은 있는가?
이런 것이 너무나도 알고 싶어
과학과 서양철학 기독교를 뒤적거렸지만 늘 모호했습니다
그때는 불교가 기독교의 아류로 생각해서
거들떠 보지도 않았으니
중국에서 발생한 종교라고 착각할 정도로 무지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의문들이
결국 번뇌를 증가시키는 희론일뿐
독화살을 뽑는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초기경전을 읽고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신의 유무와 우주의 끝이 궁금하지 않습니다
더 일찍 부처님의 말씀을 접하지 못한 것이 후회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더 나이들기 전에 알게된 것을 기뻐합니다
하긴 2000년 스무살때는 너무 어렸고
빠알리경전도 번역되기 전이라
초기불교를 접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35살이지만 대승이나 선불교에 빠지지 않고
곧바로 근본불교를 찾아왔다는 것에 감사하기도 합니다
저는 81년 생 남자입니다
97년 고등학교 때 부터 2014년 1월 부처님의 법을 접하기 전까지
오로지 시詩만을 생각하고 살아왔습니다
신춘문예 등단이 최단의 목표였습니다
대학교도 문예창작이고 대학원(중퇴)도 문예창작입니다
시인이 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법을 접하고 나서
시를 쓰고 있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법을 접한 후
저는 하루 8시간 정도
니까야를 읽고 외우고 불교강의를 듣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경재적인 부분을 감당해가며
공부를 하고 수행을 하자니
생계 때문에 피할 수 없는 현실적인 상황 때문에
만나고 싶지 않은 상황과 만나게 되는 일이 많기에
공부와 수행이 어렵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버는 돈 때문에
화도내고 욕도하고 술도 마시고 하는 상황에
노출될 가능성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입니다
정말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고
가르침대로 살기 위해서는
무소유하는 것이 가장 첫 번째로 시급한 문제임을 느꼈습니다
돈을 벌지 않고 청정을 지향하는 것
그래서 부처님께서
'걸식'을 말씀하셨구나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하루 한 끼를 걸식할 마음과
세 벌 옷으로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저는 아직 결혼도 안했고 벌어놓은 돈도 없지만 빚도 없습니다
장애도 없습니다
부처님의 법을 처음 접하던 그 순간 부터
비쿠의 삶을 살아 보는 것도 괜찮겠다라고 했는데
2년이 가까워지는 사이 비쿠의 삶을 살아야 겠다라고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더 나이들기 전에 출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법과 계율안에서
살아야겠다라고 다짐했습니다
지금 제가 현실적으로 출가에 앞서 당면한 문제는 두 가지 입니다
아직 사랑하는
10년 된 여자친구와의 정리,
그리고 출가를 어디로 할 것인가의문제입니다
여자친구에게는 내년에 출가할 것 말했고
여자친구는 흔쾌히 제 뜻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기점을 정해놓고 만나고 있는 것이
참 힘들겠지만 결국은 제 스스로 정리해야할 문제겠죠
하지만 중요한 문제는
출가를 어디로 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수많은 불교종단이 있는걸로 알고 있지만
대한불교 조계종 조계사로 출가를 할 것이냐
아니명 다른 종단으로 할 것이냐
아니면 미얀마나 스리랑카 같은 타국으로 출가를 할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인터넷 검색중 떠도는 글 중
지식인에서 각묵스님의 글이라고 나와있는 것을 보면
조계종으로 출가를 해서
초기불교의 생각을 가진 스님이나 도반을 만나면
얼마든지 초기불교의 수행을 할 수 있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행자 생활 6개월과 승가대학에서의 4년 거의 대부분을
대승경전을 공부하고 싶은 생각은 없거든요
저는 아는 절도 스님도 없기에
조계종 출가사이트에 전화문의를 드렸더니
은사스님이 없으면
절로 찾아와 상담을 하면
조계사의 스님이 은사스님을
정해준다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6개월의 행자 생활
그리고 한달간의 행자교육원 생활
그후 4년의 강원이나 승가대학 동국대생활 후
비구계 수지
최소 5년의 시간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과연 초기불교의 가르침대로 살 수 있고 수행할 수 있고
그 경전들을 배울 수 있는 것인가..
도대체 물어볼 사람들이 없어서 답답합니다
출가를 했다가 그런 교리적인 괴리감때문에
방황하기 싫기도 하구요
스리랑카나 미얀마로의 출가는
언어의 문제가 가장 걸리는 것 같습니다
최소한 영어정도는 제대로 해야 하는데
제가 단어만 나열하는 수준이거든요
그리고 지금 초기경전이 우리나라에서도 잘 번역되어있고
올바른 수행을 지도하는 곳이 많은 걸로 알고 있기에
타국으로 출가가 많이 망설여 집니다
한국의 초기불교 사원이나
초기불교를 지향하는 스님이 계신 조계종 사찰이 있는 것인지
조게사로 출가해도 초기불교를 배우고 할 수 있는 것인지
대한불교 조계종 승려가 되도
부처님의 그 당시 그대로 살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제가 자료수집 능력이 부족하고 경험도 부족해서
연꽃님에게 조언을 구하고 싶습니다
연꽃님께서는
우리나라의 불교의 실정도 아시고
여러 절을 많이 돌아보셨기에
저보다 많이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고 조언이기에
부담없는 몇 줄 조언 부탁드립니다
ps
아 그리고 연꽃님
연꽃님의 글을 읽다보면
어마어마한 자료수집 및 정리 능력에 감탄하곤 합니다
스님들이 논문에서 인용할 정도면 연꽃님의 엄청난 노고임이 분명합니다
블로그를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이
불교계 소식을 알 수 있도록
따로 카테고리 하나 만들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연꽃님 께서 글을 쓰시기 위해
매일매일 여러 종류의 불교 신문을 보시고 검색하시다가
초기불교의 소식이나 역경 소식
혹은 현 불교의 비행이나 선행, 꼭 같이 공유하고 싶은 기사들을
링크만 해주셔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제가 연꽃님의 지난 글을 소급해서 읽지 않았다면
전재성 박사님의 동국대 강의라든가
아쌍가 교수의 초기불교 강의
혹은 사야도의 초전법륜강의나
여러 논문 자료들을 아직도 접하지 못하고 있을 것 같아서요
|
(S법우님)
S법우님은 메일로 긴 글을 주었다. 이런 글을 공개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기도 하지만 익명으로 통하는 인터넷세계에서 공개해도 무방할 것이라 생각되어 공개한다. 이 점 글쓴이에게는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한다.
출가를 결심한 법우님
법우님은 출가를 결심하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블로그에 실려 있는 글에 영향을 받아 발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인터넷 바다에 올려진 글이 누구에겐가는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법우님은 어디로 출가해야 할지 고민스럽다고 했다. 국내로 출가해야 할지 해외로 출가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고민에 대하여 조언을 줄 수 없었다. 혹시 누군가 이 글을 읽는다면 어디로 출가해야 좋을 지 등에 대하여 좋은 의견을 줄 수 있을 지 모르겠다.
S님의 장문의 글을 읽고서 참으로 잔잔한 감동을 받았다. 젊었을 때 가르침을 접하여 전혀 새로운 삶을 꿈꾸고 있다는 것이 부럽기도 하다. 부처님 가르침과 함께 하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삶인데, 수행자로서 삶을 사는 것도 이 세상에 태어나 해 볼만한 일이다.
S님의 글 중에 “부처님의 법을 접한 후 저는 하루 8시간 정도 니까야를 읽고 외우고 불교강의를 듣고 있습니다.”라 하였다. 하루 종일 가르침과 함께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수행자로 살아 간다면 “하루 한 끼를 걸식할 마음과 세 벌 옷으로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 하였다. 부처님 가르침 그대로 살아 가고자 함을 말한다. 이렇게 출가를 결심한 법우님은 이제 선택만 남은 것 같다. 부디 좋은 선택을 하여 훌륭한 수행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2015-12-2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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