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담스님의 한국불교의 현실에 대한 우려와 고뇌
“스님도 아프세요?”
어느 법회에서 어느 비구니스님은 신도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스님도 아프세요?”라는 질문이라 하였다. 신도들이 보기에는 스님은 병이 나지도 않은 특별한 존재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봄 재가불자활동을 할 때 어느 법우님은 이렇게 말하였다. 자신이 젊은 시절 어느 절에서 잠시 머물러 있었는데 비구니스님과 대화 할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대화 중에 스님도 생리를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스님도 월경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한때 혼란에 빠졌다고 하였다.
일반사람들이 보기에 스님들은 신비화 되어 있다. 절집 사정을 잘 모르는 불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스님들은 도력이 뛰어나서 먹지 않고도 살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화장실에 가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또 스님들은 병도 나지 않아 병원에 가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고, 스님들은 잠도 자지 않아 초능력자로 알고 있다. 하지만 실상을 알고 나면 허상도 드러난다. 스님들도 일반사람들과 똑같이 배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잔다. 또 병이 나면 병원에 간다.
세상사람들은 스님에 대하여 알고 싶어한다. 세상과 다르게 살아 가는 스님들이 어떻게 살아 가는지에 대하여 알고 싶어한다. 특히 가장 많이 알고 싶은 것이 ‘출가이유’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불자들이 꼭 물어 보는 말은 “스님은 왜 출가하셨어요?”라는 말이다. 이런 스님들의 이야기가 책으로 나오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한다.
원담스님의 글을 보면
스님들을 만나기도 쉽지 않고 스님들의 글을 접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인터넷과 스마트폰 세상에서 스님들을 접할 수 있다. 비록 문자로 소통하는 것이긴 하지만 꼭꼭 숨다시피 은둔하며 살아가는 스님들과 달리 진실되고 솔직하게 내면을 이야기하는 스님도 있다는 사실다. 원담스님이 그렇다.
모든 것이 이제 스마트폰으로 통하는 시대에 스마트폰으로 원담스님의 글을 매일 접한다. 스님은 짤막한 교훈이 되는 글에서부터 고도의 사고를 요하는 글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글을 올려 놓는다. 그 중에 가장 기다려지는 글이 있다. 스님의 ‘수행기’에 대한 글이다.
스님은 안거철이나 해제철이나 항상 수행기를 작성하여 인터넷에 올려 놓고 있다. 수행기를 보면 수행에 대하여 잘 모르는 재가불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준다. 그리고 스님들만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통하여 재가불자들이 궁금하게 생각하였던 것을 알게 해준다.
한국불교의 현실에 대한 우려와 고뇌
최근 원담스님의 수행기를 보면 한국불교의 현실에 대한 우려와 고뇌를 엿볼 수 있다. 스님은 화엄사 동안거 중에 작성한 수행기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2015년12월15일(화)흐림
남산스님 방에서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다. 한국불교의 미래는 어둡다. 불교신도들의 신심은 갈수록 떨어진다. 스님들의 질적인 수준이 낮아진다. 출가자는 줄어들고 있다.
우리는 50대와 60대 초반의 중진 스님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종단 내에서 무슨 역할을 하고 있는가? 아무 역할도 주어지지 않는다. 다만 선원에서 수행할 수 있는 기회만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 그 외는 아무 권리도 역할도 없다. 各自圖生각자도생이다. 각자 알아서 살라는 것이다. 우리들 끼리 힘을 모을 어떤 모임이나 조직도 없다. 선원수좌회라는 것이 있긴 하지만 수좌회의 기득권스님들의 이익단체에 불과할 뿐 종단에 어떤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한다.
종단 내의 모든 정책결정에서 우리는 철저히 소외되어 있다. 그리고 신도들에게서 적절한 보시와 존중을 받지도 못한다. 왜? 총무원 권력승들의 부패한 모습이 널리 알려져 스님들에게 대한 보시와 존경심이 땅바닥에 떨어졌으므로. 그리고 우리 같은 중진들은 제자를 둘 만한 여건이 안 된다. 왜? 큰 절이나 말사에 거주할 수 있는 안정된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므로, 상좌가 생길 여건이 조성되지 않는다. 더구나 젊은 층에서 불교에 대한 관심이 없어지니 그들이 출가하려는 마음 내기를 어찌 기대할 수 있으랴? 따라서 앞으로 10년 후면 스님 수가 급격히 감소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도 상좌가 없고 앞으로 생길 가능성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승가는 세대가 단절될 것이다. 총체적으로 판단해 보면 다음 세대의 불교가 어떻게 되리라는 일말의 희망도 기대할 수 없다. 우리들이야 어느 정도 스님생활 잘 하고 이 땅에서 사라지면 되겠지만, 다음 세대의 불교는 어떻게 될까? 다음 세대 스님들은 어떻게 살게 될까? 과연 한국에서 불교가 사라지게 될까? 식어가는 화롯불처럼 불빛이 점점 희미해져 가다가 마침내 꺼지게 될까?
우리 같은 중진 스님들이야말로 다음 생에도 한국에 다시 태어나 불교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자 하는 원을 발해야 하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면 불교가 융성한 남방불교권이나 티베트불교권에 태어나기를 발원하지 한국에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만 그런가? 아마도 의식 있는 다른 스님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한국불교의 미래는 암담하다.
한국에서 불교가 없어진다고 해도 누가 안타까워하고, 누가 걱정이라도 하겠는가? 모두다 손을 놓고 있다. 吾不關焉오불관언. 나와는 상관없는 배부른 이야기로 여긴다. 불교의 흥망성쇠도 중생의 업의 소치이니, 한국 사람들이 불교를 아끼지 아니하고 원하지 않는다면 한국 땅에서 불교는 사라지리라. 그리고 이교도와 유사불교가 판을 치리라. 그런데 한국 불교만 사정이 이렇지 세계 다른 나라의 불교는 더욱 흥성할 것이다. 아놀드 토인비가 빛은 동방에서 온다고 했는데 이제 그 빛이 동방에서 사라지려 한다. 우리는 저물어 가는 佛日불일(불교라는 해)을 바라본다.
(원담스님, 동안거 수행일기-3, 2015-12-25)
편의상 문단을 나누었다. 스님은 한국불교의 미래를 암담하게 보고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 중에 가장 먼저 불교신도들의 신심이 갈수록 떨어지고, 스님들의 질적인 수준이 낮아지고, 또한 출가자가 줄어들고 있다는 세 가지로 보았다. 이렇게 삼박자가 맞아 떨어진 상태로 한세대만 지나면 이 땅에서 불교는 ‘소수종교’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이
재가불자들은 스님들의 세계와 승가를 잘 모른다. 누군가 말을 해 주거나 글로 표현하지 않는 다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스님의 글을 보면 마치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경제학 이론이 실감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지식사이트에서 답변에 따르면 “좋은 품질의 화폐와 나쁜 품질의 화폐가 동시에 존재할 때 품질이 떨어지는 화폐만 남고 좋은 화폐는 사라진다.”는 뜻이라 하였다. 현재 한국불교의 승단이 바로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
종단 권력을 쥐고 있는 부패한 스님들이 청정하게 살아 가는 스님들을 궁지에 몰아 넣고 있다. 그래서 50대와 60대의 중진스님들에게 아무 역할도 주어지지 않고 심지어 상좌도 없다고 한다. 이는 권승들이 절을 독차지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출가한지 오래 되어서 법랍이 높은 스님들은 일정한 거처가 없이 여기 저기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이다.
썩은 보리수와 같은 한국불교의 현실
스님은 언젠가 수행일기에서 한국불교의 현실에 대하여 ‘뿌리가 썩은 보리수와 같다.’라고 표현한 바 있다. 뿌리가 썩었다면 아무리 물을 주고 영양분을 주어도 살아 나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썩은 보리수를 뽑아 버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보리수를 심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뿌리가 썩은 보리수와 같은 한국불교의 현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우려를 표하고 있다.
2015년12월21일(월)흐림, 간간히 가는 비
간간히 가는 비. 앞산은 운무에 싸여. 안개가 골골에서 피어올라. 만상이 하얀 백지위에 그림을 그리며 움직인다. 고요한 움직임. 움직이는 고요. 그림이 살아서 그려진다.
만법이 통 째로 굴러가는 데 무얼 하러 부분으로 조각내어 ‘내 몸’이니 아니니, 여기까지 ‘내 것’이요, 저기부터는 ‘다른 것, 남의 것’이라 분별하겠느냐. 조각난 것을 들고 전체를 담아내려니 자체모순이다. 전체는 어떤 하나로 환원(환원주의)되거나, 단일화(단일주의라는 邊見변견)시켜 말할 수 없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 적도 없고, 한 물건이 만법을 總攝총섭하는 것도 아니다. 흔히들 만법이 一心일심, 한 마음의 나타난 바(一心之所印)라 한다. 그러면 그 일심은 어디서 왔는가? 그것은 원인도 이유도 없이 그저 本來본래부터 있어왔다고 하겠지. 그러나 본래라 말하기 시작하면 순환론적 오류에 빠진다. 그런데도 계속 고집한다면 그건 진리를 찾는 자가 취할 바가 아닌, 고지식한 놈의 우격다짐일 뿐이다.
그러니 무슨 특별한 한 가지를 가져와서 모든 현상을 일거에 해결하려고 하지 말라. 만사를 속편하게 해결하는 쉬운 방법 같지만 그건 결국 치명적인 오류와 자체모순으로 실패하고 만다. 중국에서 기원한 모든 철학이나 사유가 그렇다. 중국적인 사유는 모두 전변설 아니면 적취설이다. 중국적 사유는 도대체 緣起연기를 이해하지 못한다. 중국불교는 中觀중관을 진지하게 공부한 적이 없다. 이렇게 불교의 토대가 부실하니 격의불교, 삼교원융이니, 선, 돈오 등등과 같은 통속적으로 중국화된 불교가 횡행한다.
한자문화권의 불교는 부처님 그분과 가르침에 대해 진지하게 공부하지 않았다. 모두 자기 나름대로 비슷한 것을 만들어내서 그걸 불교라 여기고 떠들었다. 번역은 정교한 오해라고 한 것처럼 중국불교는 오해된 불교이다. 옛날에는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졌었고, 언어적 장벽이 높았기에 불교원전이 중국으로 직수입되어 바르게 번역되는 것이 불가능했지만, 지금같이 세계화된 세상에서는 빠알리어와 산스끄리뜨어 경전을 한글로 바로 번역되어 될 수 있다. 또 실제로 그렇게 번역되어 나왔다. 그리고 중관학은 티베트장경에서 바로 번역하면 된다. 이 작업은 아직 요원하다.
한국 불교는 1700년 역사를 운위하는 것은 정직한 말이 아니다. 제대로 된 불교를 시작한지 얼마나 됐을까? 아니 시작이나 하기는 했을까? 우리가 과연 불교를 공부하기는 했을까? 우리가 불교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불교를 어느 정도 안다고 하는 마음을 완전히 내려놓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제 까지 알던 불교는 모두 소문으로 들은 것이 아닌가? ‘그렇다 카더라’는. 그리고 제 생각으로 이리저리 짜 맞춘 보따리 장사 불교가 아니었던가? 보따리 장사 불교라니? 사람을 끌어들여 인기와 돈을 얻고 권력을 누리려는 장사꾼들이 불교를 이용하는 것이다. 그건 佛敎가 아니라 욕의 때가 묻은 不敎이다. 이 밤에 홀로 앉아 부처님께 송구한 마음이다. 나는 불교를 아는가? 나는 부처님을 아는가?
저녁에 동지 팥죽을 끓일 때 넣을 새알을 빚었다. 대중 울력이다. 一陽일양이 初動초동하여 地雷復지뢰복이라. 주역에서는 동지를 지뢰복 ䷗ 괘(卦)로 표현한다. 위에는 곤(坤)괘이고, 아래에는 뇌(雷)괘이다. 위에는 땅이고 아래에는 우레가 있는 형국이다. 땅 밑 깊은 곳에서 우레가 움직이고 있다. 육효(六爻)로 보면 위의 5개는 전부 음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맨 밑바닥에 한 가닥 양이 있다. 천지가 온통 칠 흙 같은 밤 부싯돌을 때려 불을 일으켜라. 광대한 어둠 속에서 반짝 불똥이 튄다. 이게 지뢰복 괘이다.
기뻐하라. 운세가 바닥을 친다. 낮고 낮아져서 더 낮은 곳이 없어졌다. 이제 부터는 떨어질 낮은 곳이 없으니 올라갈 길만 남았다. 부활이다. 새 출발이다.
(원담스님, 동안거 수행일기-3, 2015-12-25)
스님은 한국불교에 대하여 佛敎(불교)가 아니라 ‘不敎(불교)’라 하였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불교라 하지만 알고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보이지 않는 불교라는 말이다. 이는 마치 아기를 업기 위한 포대기가 있는데, 포대기만 있을 뿐 그 안에는 아기가 없는 것과 같다. 그래서 스님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하였다.
한국불교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한국불교 1700년 역사와 전통을 이제는 잠시 접어 놓아야 한다. 아기가 걸음마부터 시작 하듯이 걸음마부터 배워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제까지 머리 속에 쌓여 있던 불교지식을 비워 내야 한다.
절에 가면 주련에 ‘入此門來 莫存知解(입차문래 막존지해)’라는 문구가 있다.이는 기존의 알음알이를 깨끗이 비워내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시작 하는 마음으로 기존의 불교를 내려 놓고 부처님 그 분이 어떤 이야기를 하였는지 알자는 것이다.
부처님 그 분이 누구인지 알고자
십일년 전 불문에 처음으로 정식으로 입문하였다. 그때 도심포교당에서 삼개월간의 입문교육을 받고 불자가 되었다. 누구나 그렇듯이 처음에는 대승불교에서 시작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지식이 쌓이다 보니 부족함을 느꼈다. 인생의 풀리지 않는 문제, 내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고자 불문에 들어 왔으나 기존불교의 가르침으로는 해법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책 저 책 보고 인터넷에서 이 스님 저 스님 법문을 들어 보았다. 그러나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 불교를 말하지만 거기에는 부처님이 없었던 것이다.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과 ‘아소까’의 저자 일아스님이 있다. 스님은 불교TV 대담에서 강원교육을 다 받을 때 한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고 한다. 불교와 부처님의 가르침을 교육하는 강원에서 “왜 부처님이 보이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었다고 한다. 강원교육과정이 모두 중국스님이나 한국의 유명스님들이 쓴 선에 관한 책이나 중국에서 만들어진 불교경전위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불교인이 되었으면서도 “부처님은 과연 어떤 분일까” 하고 무척 궁금했다고 한다. 그런데 다른 도반들은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 같았고 관심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일아스님은 강원을 졸업하고 부처님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 동남아시아 불교국가로 공부하러 갔다고 한다. 또 미국으로 유학가서 건너가서 본격적으로 초기경전인 빠알리 삼장을 연구하게 되었다고 한다. 공부하고 나니 부처님이 어떤 분 인줄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알려주고자 되자 또 부처님이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알려 주고자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을 집필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불교 불자들은 부처님 그 분이 어떤 분인지 잘 모른다. 어렴풋이 알고는 있겠지만 그 분이 어떤 말을 하였는지 구체적으로 아는 사람들은 드물다. 그래서 자신에게 형성되어 있는 기존 믿음을 버리려 하지 않는다. 기존 신앙에 안주하며 신행을 하는 것이다.
“귀있는 자들은 자신의 믿음을 놓아 버려라”
불자들이 부처님 그 분을 알게 되면 생각이 바뀌게 된다. 그렇게 하려면 먼저 비워야 한다. 기존에 형성되어 있는 믿음과 신앙과 사상을 비워 내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도 요청하신 사항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진리를 펼치시기로 마음 먹고 난 다음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씀 하셨다.
[세존]
“진실로 불사의 문이 열렸으니
귀있는 자들은 자신의 믿음을 놓아 버려라.
하느님이여, 나는 상처받는다는 생각으로
사람에게 승묘한 진리를 설하지 않았네.”(M85, 전재성님역)
이 게송은 빠알리니까야와 위나야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 하느님은 브라흐마(brahma:梵天)를 말한다. 구체적으로 사함빠띠 브라흐마이다.
사함빠띠가 “슬픔에 빠진 뭇삶을 슬픔을 여윈 자께서 살피소서.”라며 말하고 또 “세존께서는 진리를 솔하서소.”라며 읍소하듯이 청원한다. 이에 부처님은 마치 제일의 조건처럼 전제를 달았다. 그것은 먼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나 신앙, 사상을 비워 내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믿음을 놓아 버려라.”라 한 것이다. 이는 법당 주련에서 볼 수 있는 ‘入此門來 莫存知解(입차문래 막존지해)와 같은 내용이다. 그런데 초불연 맛지마니까야 번역을 보면 “자신의 믿음을 보여라.”라 하였다. 이는 오역으로 본다. 부처님은 ‘와서 보라’고 하였지 먼저 믿을 것을 말씀 하지 않았다.
사람을 왜 피곤하게 하는가?
무언가 머리속에 꽉 차 있는 사람들에게 부처님 가르침을 알려 주는 것은 쉽지 않다. 마치 길거리에서 불특정다수를 대상으로 하여 ‘예수천국불신지옥’을 떠 들어대는 것과 같다. 머리속에 자신의 믿음이나 신앙, 사상이 확고하게 자리 잡은 사람에게 예천불지를 아무리 떠들어 보아야 먹혀 들어가지 않는다. 사람만 ‘피곤하게’ 할 뿐이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독백식으로 말씀 하신다.
‘내가 증득한 이 진리는 심원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고요하고 탁월하여 사고의 영역을 뛰어 넘고 극히 미묘하여 슬기로운 자들에게만 알려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경향을 즐기고 경향을 기뻐하고 경향에 만족해한다. 그러나 경향을 즐기고 경향을 기뻐하고 경향에 만족해하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도리, 즉 조건적 발생의 법칙인 연기를 보기 어렵다. 또한 이와 같은 도리, 즉 모든 형성의 그침, 모든 집착의 보내 버림, 갈애의 부숨, 사라짐, 소멸, 열반을 보기 어렵다. 그러나 내가 이 진리를 가르쳐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나의 고통이 되고 나에게 상처를 줄 것이다.’ (M85,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부처님이 발견한 진리를 받아 들이기 어려울 것이라 하였다. 그것은 ‘현자’들만이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조건적 발생의 법칙인 ‘연기’를 보기 어렵다고 하였다.
미묘하고 알기 어려운 진리에 대하여 불특정다수를 대상으로 ‘예천불지’식으로 떠들고 다닌다면 사람들은 피곤해 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 진리를 가르쳐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나의 고통이 되고 나에게 상처를 줄 것이다.”라 하였다. 이는 게송에서 “나는 상처받는다는 생각으로 사람에게 승묘한 진리를 설하지 않았네.”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진리를 받아 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자에게 진리를 설하는 일은 피곤한 것이다. 그래서 가장 먼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나 신앙, 신념체계를 비워 내는 것이다. 이렇게 비워 졌을 때 진리를 받아 들일 가능성이 있음을 말한다.
앞으로 한 세대만 지나면
한국불교는 1700년 전통과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유구한 전통에 대하여 길어야 2백년 밖에 안 되는 타종교에 대하여 우월의식을 갖는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허상이다. 포대기는 있지만 그 안에 아기가 없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제 한국불교에서 아기가 생겼다는 사실이다. 빠알리니까야가 번역되어서 부처님 원음이 알려지고 동시에 수행법도 보급 되어서 이제 걸음마 단계를 지났다. 바로 새로운 보리수가 심어진 것이다.
앞으로 한 세대만 지나면 새로 심어진 보리수는 멋지게 성장할 것이다. 부처님 원음이 널리 퍼져 나가 불자들이 그 분 부처님이 어떤 분이고, 그 분 부처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알게 된다면 이 땅에 확고하게 불교가 뿌리 내릴 것이다.
2015-12-26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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