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 내가 세상에 사는 이유
두 갈래 길에서
여기 두 갈래의 길이 있다. 하나는 남들이 가는 길이고 또 하나는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이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은 넓고 잘 닦인 대로(大路)로서 편하다. 그런데 잘 다니지 않는 길은 폭이 좁은 소로(小路)로서 다니기 불편하다. 두 갈래 길에서 어느 길로 가야 할까?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있다. 이 길로 가면 사는 길로 가는지 죽음의 길로 가는지 알 수 없다. 그럴 경우 남들이 다니는 길로 가면 안전할 것이다. 큰 길로 갔을 때 남을 따라만 가면 된다. 마치 밤길을 운전할 때 앞차를 따라만 가면 편한 것과 같다. 그런데 나홀로 가는 길에 작은 길로 가는 사람들이 있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길을 덤불을 헤치며 때로 길을 내며 나아 가야 한다. 탄탄대로가 아니라 가시밭길이 될 수도 있다. 그런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다.
글을 하나 받았다. 법우님이 결심한 것이다. 법우님은 “2월 15일에 출가합니다. 현정 파사 하는 마음으로 조계종으로 출가합니다. 제 메일 공개해서 도움 받게 해주신 점 감사합니다.”라 하였다. 이전에 올린 ‘출가를 결심한 법우님(2015-12-23)’라는 제목으로 작성한 글에서 장문의 메일을 남겨 주신 법우님이다. 어느 곳으로 출가해야 되는지 망설였지만 조계종으로 출가하기로 했다고 한다. 현정파사하는 마음으로 출가함을 밝히고 있다.
누구나 출가를 꿈꾼다. 그러나 실행하는 자는 매우 드물다. 설령 출가하였다고 하더라도 초심을 유지하는 경우 역시 드물다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출가는 숙세의 인연이 작용하였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누구나 다 가는 대로를 놔두고 남들이 가지 않는 험난한 길을 간다는 것은 특별한 인연 아니면 설명이 잘 되지 않는다.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
원담스님의 수행일기를 읽었다. 읽을 때 마다 공감하는 내용이 많다. 그것은 꾸밈 없고 솔직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삶을 사는 것 같다. 스님은 이렇게 표현 하였다.
2015년12월25일(금)맑음
不風流處也風流불풍류처야풍류, 有意氣時添意氣유의기시첨의기 라는 선시가 있다. 풍류랄 것도 없는 게 오히려 풍류이고, 열의가 일어날 때 열의를 더 보태라는 말이다. 수행자는 억지 풍류를 부리지 않음이 오히려 멋이다.
60년대 70년대의 중들의 세계는 질풍과 노도(폭력에 물든 불교정화와 막행막식)의 시대였다. 80년대 90년대는 양산박과 풍류의 시대(무애행과 니힐적인 용맹정진)였다. 2000년대 이래 구법순례와 체념의 시대이다. 90년대 이래 일단의 스님들이 미얀마와 태국, 스리랑카와 인도로 법을 구하러 갔으며, 해외관광풍조에 편승한 인도성지순례가 유행처럼 퍼졌다.
오늘 날은 승가가 해체되어 개인주의, 각자도생주의가 되었다. 事判사판 권력승들은 카르텔을 형성했고, 理判이판 역시 기득권으로 들어가 안주하려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 얇게 끼인 운수객들은 그럭저럭 살아간다.
타성에 젖어 의욕과 열의가 부족하다. 초발심의 순수함과 열의를 되살려야 할 때이다. 그리고 意氣의기를 보태야 할 시절이다. 그러나 먼저 그 의기라는 게 欲욕에 기인한 것인지, 願원에 기인한 것이지 분명해야 한다.
무엇 때문에 출가하여 수행하는가? 라고 물으면 어름하게 ‘깨닫기 위해서, 일체 중생의 성불을 위해서....’등등 뭐라고 답이 나오겠지만, 이런 건 학습되고 세뇌된 것이어서, 진실하지도 않고 힘도 없다. 그런 질문 자체의 뿌리를 뽑아버리는 강력한 현존의 힘이 살아 있어야한다.
나무에게 ‘나무야, 너는 왜 나무가 되었니? 왜 그렇게 한 평생 제 자리를 지키며 나무 노릇을 하니?’라고 물어보라. 나무에게 그런 질문은 가당찮다. 나무에게 나무인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나무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 스님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출가하여 수행하고, 수행해서 편안해지고 지혜가 생긴 만큼을 이웃과 나누며 세상에 봉사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 외에 딴 길이 없다. 이건 한생만 그런 것이 아니고 세세생생 그럴 것이다. 이것이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이며 살아가는 이유이다. 이것은 보리심이다.
밤 정진 입선하려고 선방 마루에 서서 앞산을 바라보니 보름달이 둥실 떠오른다.
(원담스님, 동안거 수행일기-4, 2016-01-03)
편의상 문단을 나누었다. 눈에 띄는 말이 60년대 70년대는 ‘질풍노도시대’라 하였다. 또 80년대 90년대는 ‘양산박과 풍류의 시대’, 2000년대 이후는 ‘구법순례와 체념의 시대’라 하였다. 이런 시대구분법은 처음 들어 본다. 그러나 스님들 세상에서는 널리 회자 된 이야기 일 것이다.
질풍노도의 시대를 거쳐 구법순례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출가자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출가에 대하여 ‘나무의 비유’를 들고 있다. 저기 서 있는 나무에 대하여 갖가지 추측을 하지만 나무는 그 자리에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재가불자들이 가장 궁금하게 여기는 말이 “스님은 왜 출가 하셨어요?”라는 말이다. 이에 이야기를 상세하게 해 주는 스님이 있는가 하면 끝내 말해 주지 않는 스님도 있다. 그러나 스님은 지금 여기서도 스님이라는 것이다. 나무가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라 하였다.
당신이 태어난 이유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무엇이고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떻게 내가 여기에 있게 되었는지 알고 싶어 한다. 내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이전에 번역하였던 노래 가사가 생각이 났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Reason Behind Your Birth
Theres a reason behind your birth
Its not by chance youre here on earth
Who you are is how you have been
The law of karma tirelessly spins
Natures law is perfect and just
With a cause the effect is cast
Though in life no one escapes pain
This sad human state, need not always remain
Break free from this cycle that binds
Leave your earthly selfish concerns behind.
Be a Buddha in your thoughts, deeds, and ways
And surely, youll be in pure land one day
Look inside your heart, and you will find
A nature that is pure and kind
Let your heart be noble and true
Let your mind be calm and stable, too
Break free from this cycle that binds
Leave your earthly selfish concerns behind
Be a Buddha in your thoughts, deeds, and ways
And surely, youll be in pure land one day
당신이 태어난 이유
당신이 태어난 이유가 있다.
당신이 여기에 있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당신의 전생이 여기에 있게 만들었다.
까르마의 법칙은 이렇게 끊임없이 돌고 돌게 만든다.
자연의 법칙은 완전한 것이다.
원인으로 결과를 낳아서
어느 누구도 이 윤회의 고통으로부터 탈출 할 수 없다.
불쌍한 존재는 끊임 없이 윤회계를 돌고 돌 뿐이다.
당신를 속박하고 있는 이 윤회의 사이클에서 벗어나라!
그리고 당신의 내면에 있는 이기적인 관심사에서 벗어나라!
당신의 생각과 행동으로 붓다가 간 그 길로 향해 가라!
그렇게 하면 당신은 언젠가 확실히 피안으로 가게 될 것이다.
당신의 내면을 주시하라 그리고 발견하라!
자연은 순수하고 매우 친절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의 가슴을 고귀하고 정직하게 만들어라!
또한 당신의 마음을 평온하고 안정되게 만들어라!
이 윤회의 속박에서 해방 되어라!
당신의 내면에 숨어 있는 이기적인 관심사에서 벗어나라!
당신의 생각과 행동으로 붓다가 간 그 길로 향해 가라!
그렇게 가면 당신은 언젠가 확실히 피안으로 가게 될 것이다.
(진흙속의연꽃 번역)
여기서 ‘pure land’를 피안으로 번역하였다. 원래 ‘pure land’는 ‘정토(淨土)’또는 극락을 의미한다. 그러나 노래 가사의 전체적인 맥락을 보면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래서‘pure land’는 피안 또는 열반이라는 뜻이 더 가깝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부모가 있어서 태어난 것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더 깊은 뜻이 있다. 그것은 ‘업력’에 의해서 태어난 것이다. ‘업생’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태어난 이곳은 욕망으로 가득찬 욕망의 세계라는 것이다. 그래서 욕망의 감옥에 갇혀 있는 것으로 본다.
윤회의 감옥에서
유튜브에서 돼지가 새끼 낳는 장면을 보았다. 갓 태어난 새끼들은 본능적으로 어미 돼지의 젖을 열심히 빨아댄다. 그리고 먹이를 주면 열심히 먹는다. 돼지 농장주에 따르면 돼지들 특유의 먹는 소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라 하였다. 그렇게 자란 돼지들은 팔려 나간다. 인간의 살코기가 되기 위하여 도살장으로 향하는 것이다.
미얀마속담에 “빛나던 범천도 돼지우리 속에서는 꿀꿀거리네”라 하였다. 천상에서 기쁨을 음식으로 살아가는 빛나던 존재들도 수명과 공덕이 다하면 이전에 악업이 익어서 돼지로도 태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중생들은 마치 두레박처럼 삼계를 오르락 내리락 한다. 윤회의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다.
언젠가 윤회의 감옥을 벗어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저 언덕으로 건너 가게 될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이미 저 언덕으로 건너 간 자는 다음 생에 저 언덕에서 태어나게 될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보시하고 지계하였다면 저 언덕은 욕계천상이 될 것이고, 선정을 닦았다면 색계천상이 될 것이다. 이미 저 언덕으로 건너 간 자만이 내생에서 저 언덕에서 태어날 수 있다. 지금 여기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접한자는 또 다시 가르침을 접할 수 있는 인연이 된다. 그래서 수행자로 산 사람들은 또 다시 수행자로 살게 될 것이라 한다. 그런데 “한생만 그런 것이 아니고 세세생생 그럴 것이다.”라는 것이다.
중도(中道)열차
누구나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왜 태어났는지 모른 채 일생을 살아간다. 가기 쉬운 길, 누구나 가는 큰 길로 간다. 그런데 길을 아는 자는 남들이 가지 않는 길로 간다. 그 길은 험한 가시밭길도 될 수 있고 울퉁불퉁 자갈길도 될 수 있다. 그런데 그 길은 이미 앞서 갔던 사람들이 가던 길이다. 그 길은 ‘중도(中道)’라는 길이다.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千と千尋の神隠し, The Spiriting Away Of Sen And Chihiro, 2001)’이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감독의 판타지 에니메이션이다. 영화에서 열차이름이 ‘중도(中道)’이다. 왜 중도열차일까? 이는 ‘물과 불’ ‘차안과 피안’ ‘욕망과 정화’ ‘삶과 죽음’이라는 이분법적 경계에서 중도라 하여 중도열차라 한다.
불교에 중도가 있다. 빠알리어로 ‘맛지마빠띠빠다(majjhimā paṭipadā)’ 라 한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말씀 하신 중도는 어떤 의미일까? 이에 대하여 초전법륜경에서 부처님은 “여래는 이 두가지의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라 하셨다. 팔정도가 중도인 것이다.
그런데 팔정도에서 정견은 사성제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사성제는 다름 아닌 연기법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이 말씀 하신 중도는 연기법이다. 그래서일까 ‘깟짜야나곳따의 경(S12.15)’에서 ‘유무중도 (有無中道)’는 십이연기로 설명되어 있다. 또 ‘아쩰라깟사빠의 경(S12.17)’에서 ‘자타중도(自他中道)’ 역시 중도가 십이연기로 설해진다. 이외 ‘무명을 조건으로의 경(S12.35)’에서 ‘일이중도(一異中道)’ 역시 십이연기로 설명되어 있다.
양극단을 떠나는 것이 중도라 한다. 그렇다고 중간길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중도는 팔정도에서 정견에 해당된다. 견해가 바로 서야 바른 길로 나아 갈 수 있음을 말한다. 만일 정견이 바로 서 있지 않다면 어떻게 될까? 엉뚱한 길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오랜 세월 고통과 불행을 당할 수 있다. 금생 뿐만 아니라 내생에 까지 이어질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정견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바른 길로 갈 수 있다. 그 정견은 무엇일까? 다름 아닌 부처님 가르침이다. 그 중에서도 연기법이다.
사견의 독화살을 맞았을 때
말룽끼야뿟따는 부처님에게 ‘세상은 영원한가’ 등에 대하여 물었다. 만일 부처님이 답을 하지 않는다면 “나는 배움을 포기하고 세속으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마음 먹었다. 더구나 말룽끼야뿟따는 부처님이 알지 못하면 알지 못한다고 솔직하게 말해 달라고 하였다. 하지만 부처님은 말해 주지 않았다. 그 대신 “어떤 사람이 독이 짙게 묻은 화살을 맞았다고 하자.”라며 독화살의 비유를 말씀 하셨다. 부처님은 왜 갑자기 뜬금 없이 독화살 이야기를 하셨을까?
부처님은 독화살의 비유를 들면서 사성제를 설하였다. 사성제는 팔정도로 실천되고, 팔정도의 정견은 사성제이므로 서로 맞물려 있다. 또한 사성제는 연기법에 근거하므로 결국 연기법을 설한 것이 된다. 그런데 중도는 다름아닌 연기법과 같은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중도는 사성제, 팔정도, 연기법과 같은 개념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중도는 또한 ‘정견’이라는 것이다.
정견이 있으면 정견이 아닌 것도 있을 것이다. 이를 사견이라 한다. 정견을 삼마딧티(sammādiṭṭhi)라 하고 사견을 밋차딧티(micchā-diṭṭhi)라 한다. 밋차딧티는 잘못된 견해를 말한다. 또한 과녁을 벗어난 견해를 말한다. 부처님이 독화살을 비유를 들었을 때 이는 사견의 화살을 말한다. 말룽끼야뿟따는 사견의 화살을 맞은 것이다.
세상은 영원한가 등의 사견의 화살을 맞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사견을 설명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독화살을 맞았으면 빨리 독화살을 빼야 하듯이 사견의 화살을 맞았다면 사견을 제거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열 가지 형이상학적 질문에 답하지 않고 사성제를 설하였다.
부처님이 가던 길
말룽끼야뿟따는 사견의 독화살을 맞았다.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든가 ‘몸이 무너져 죽으면 정신도 죽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사견의 독화살이다. 그런데 두 길에서 사람들이 많이 가는 길이 바로 사견의 길이라는 것이다. 영원주의 아니면 허무주의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바른 길로 가는 사람들은 드물다. 연기법을 아는 자들만이 바른 길로 갈 수 있다. 그 길이 중도이고 팔정도의 길이다.
수행자들은 길을 가는 사람들이다. 외롭지만 홀로 갈 수도 있다. 그 길은 가시밭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바른길로 죽 가면 피안의 언덕에 도달 할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이 가던 길이다.
출가 수행자는 집 잃은 새가 아니다.
그들은 귀양 온 신선도 아니다.
현상을 떠나 이데아를
향해 날아가려는 철새도 아니다.
그들은 차안과 피안에 양다리를
걸치고 한 걸음 한 걸음 가는 사람이다.
그들은 한 쪽 발로 진흙을 밟고
한 쪽 발로는 연꽃을 밟고 가는 사람이다.
그는 중도를 가는 행자이다.
긍정도 밟고 부정도 밟고,
차안도 밟고 피안도 밟고 갈 뿐이다.
오직 ‘감’만 있을 뿐 ‘가는 자’는 없다.
如來여래 如去여거.
(원담스님, 동안거 수행일기-4, 2016-01-03)
2016-01-04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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