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이란 무엇인가? 현응스님과 수불스님의 맞짱토론을 기대하며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음에 무엇인가를 주제로 한 토론회에 참석하였다. 교계신문사이트에서 기사를 보고 참석한 것이다. 재가단체 ‘정의평화불교연대(정평불)에서 주관한 이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하여 먼저 이학종기자와 통화 하였다. 한번 만나서 식사나 하자고 한 것이 꽤 되었는데 이를 이행하지 못하여 늘 미안하던 차에 세미나에 참석을 계기로 서울로 올라가는 전철을 타게 되었다.
미디어붓다 사무실이 있는 두산위브빌딩에서 이학종기자를 만났다. 만나서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깨달음 논쟁에 대하여 이것 저것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사동으로 이동하여 점심식사를 함께 하고 걸어서 사간동으로 이동하였다. 동십자각 법련사 못미쳐 세미나 장소 화쟁문화아카데미 강의실이 있다. 미리 도착하여 자리 정리 하였다. 협소한 강의실 한 켠에 책상을 설치 하였다. 필기하기에 좋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자리를 잡고 기다리니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강의실은 꽉 찼다. 왜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온 것일까? 아마 요즘 불교계에 갑자기 일고 있는 ‘깨달음’에 대한 논쟁에 대한 관심일 것이다. 현응스님이 지난해 9월 4일 깨달음에 대하여 ‘이해 하는 것’이라는 취지로 발표하였기 때문이다. 발표 이후 한 교계에서는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결정적으로는 지난해 끝자락에 수불스님이 현응스님의 깨달음관에 대하여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촉발되었다.
정평불의 깨달음 세미나는 원래 지난해 11월에 하기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이번 수불스님의 도발적 문제제기로 이슈화 됨에 따라 관심을 받게 된 것이다. 그래서 ‘깨달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에 관심을 가진 스님들과 불자들이 대거 참석하게 된 것이다.
논쟁의 핵심은?
이번 깨달음토론회는 세 명의 발제자와 세 명의 논평자가 참석 하였다. 발제자로소 신승환 가톨릭대교수, 이도흠 한양대교수, 박병기 교원대 교수가 선정되었다. 평론 및 질문자로서 일지암 주지 법인스님, 능인불교대학원교수 김재성교수, 서울대 성해영 교수가 선정되었다.
토론회에 대하여 노트하였다. 그리고 전 과정을 스마트폰으로 녹음하였다. 평일멀리서 일부로 시간을 내서 참석하였기 때문에 헛되이 보낼 수 없었다. 이날 사회는 정평불의 최연공동대표가 보았다.
깨달음에 대한 논쟁의 핵심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이해’에 대한 것이다. 이는 현응스님이 깨달음에 대하여 ‘잘 이해 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이해’라는 말에 대하여 선종에서 발끈하였다. 수좌회에서 성명이 나오고 수불스님이 장문의 글로써 조목조목 비판하였기 때문이다.
두 번째 발제자로 나온 이도흠교수는 현응스님의 깨달음관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 이는 발제문 ‘깨달음에 대한 쟁점 및 맥락적 지향성’이라는 글에서 가장 마지막에 실려 있는 문장을 보면 알 수 있다. 글에서 화엄철학을 인용하여 “알라약식 전체의 완전한 통제를 해탈이라 부르며, 무의식적 의식의 총체적인 내용의 성취를 깨달음이라 부른다.”라고 하였다. 알라아식의 정화가 이루어져야 진정한 깨달음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서재응교수의 견해와도 일치한다. 서재영 교수는 현응스님의 깨달음관에 대하여 6식에서의 이해차원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 바 있다. 그래서일까 이도흠 교수는 알라야식의 정화와 관련하여 결론적으로 “현응스님의 이해는 이런 깨달음의 개념과 결합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이도흠교수가 알라야식의 완전한 통제가 해탈이며 깨달음이라고 말한 것은 놀랍다. 각주를 보니 화엄철학에 실려 있는 것이라 한다. 이렇게 본다면 대승의 입장에서 현응스님의 깨달음관을 비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응스님은 초기불교적 입장에서 깨달음을 말하였다. 구체적으로 율장 마하박가(대품)에 실려 있는 깨달음에 대한 가르침을 근거로 한 것이다. 이렇게 초기불교경전을 근거로 한 깨달음관에 대하여 발제자는 대승경전을 근거로 하여 비판한 것이다.
법인스님 말하기를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4시간 동안 참으로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다. 활발한 토론이 거침없이 벌어지고 말미에는 참석자의 질문도 있었다. 평론자 중에 ‘법인스님’은 깨달음에 대하여 굳이 어렵고 힘들게 생각할 이유가 있는지에 대하여 의문하였다. 만일 깨달음에 대하여 어려운 것으로 생각한다면 부파불교시대에 아비달마 불교와 다를 바 없다고 하였다.
법인스님은 깨달음에 대하여 현응스님이 말한대로 잘 이해 하는 것이라는 말에 동의 하였다. 그러면서 현응스님의 깨달음관에 대하여 비판적인 수불스님을 비롯하여 서재응 교수, 선원수좌회 등에서 말한 것이 과연 ‘텍스트’를 잘 보고 한 것인지 의문하였다. 단지 깨달음에 대하여 ‘이해 하는 것’이라는 말에 걸려서 ‘알음알이’라는 말 등으로 직격탄을 날리는 것이 아닌지 묻는 것이다.
현응스님이 말한 ‘이해’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특히 선종 수좌스님들이나 선종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도저히 받아 들이기 어려운 것 같다. 그래서일까 법인스님은 이해라는 말 대신 ‘앎’이나 ‘통찰’ 등으로 바꾸어서 생각해 보자고 한다. 즉 이해라는 말에 대하여 ‘오온의 통찰’ 또는 ‘연기실상의 이해’ 등으로 용어를 바꾸어 말하였을 때 그렇게 비난의 화살을 보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다.
또 법인스님은 깨달음이라는 것이 팔정도의 정견과 정사유와 정념을 넘어 그 밖에 있을 수 있는가에 대하여 묻는다. 우리 몸과 마음 밖에서 깨달음을 찾고자 하는 것에 대한 경계의 말이라 볼 수 있다.
지도만 보고 있다고
법인스님은 오온 밖에서 무언가를 찾지 말자고 하였다. 그럼에도 한자경 교수의최근 기고문을 보면 밖에서 찾는 것처럼 보인다. 한자경 교수는 미디어붓다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나 만약 현응스님이 ‘경전의 이해’를 주장하면서 ‘마음의 깨달음’을 배제하려는 것이라면, 그것은 곧 지도를 보되 그것이 어느 산의 지도인지를 망각하는 것과 같으며, 이는 곧 지도를 보는 목적을 상실하는 것이고 결국은 지도가 지도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도를 보고 수행했는데 목적지에 달성 못했으면, 잘못된 지도를 들고 있었거나, 지도 읽는 법이 잘못되었거나, 제대로 된 산길 안내자를 못 만나서 일 것이다. 그럴 경우에는 바른 지도를 찾아내거나, 지도 읽는 법을 다시 배우거나, 길을 잘 아는 안내자를 만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대신 마음의 실체성을 부정하는 것은 오히려 산의 존재를 부정하고 등산의 의미를 부정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산을 지도 속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그러나 우리가 산에 오를 것이 아니라면 왜 지도를 보겠는가? 산이 없는 지도가 무슨 지도이겠는가?
(한자경교수, “‘자아’와 ‘진여’ 구분 못하는 건 아닌지…”, 미디어붓다, 2016-01-13)
한자경교수는 현응스님의 깨달음관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깨달음에 대하여 이해 차원으로 보는 것에 대하여 ‘지도’만 보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래서 지도만 보지 말고 산을 직접 올라 가 볼 것을 말한다.
한자경 교수의 한마음
한자경 교수는 기고문에서 독특한 이론을 소개 하고 있다. 그것은 “나는 불교의 핵심은 종이 위에 그려진 a나 b 또는 a와 b의 관계가 아니라, a와 b 둘의 공통의 바탕인 빈종이 A에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대체 A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이어지는 문구를 보면 “a와 b는 종이 위에 그려진 상(相)이고, 바탕 A는 상을 여읜 성(性)이고 바탕 체(體)이다.”라 하였다. 또 “a와 b는 종이 위에 그려진 상(相)이고, 바탕 A는 상을 여읜 성(性)이고 바탕 체(體)이다.”라 하였다.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것은 A이다. 이 A에 대하여 ‘공’이라 하였다.
한자경 교수는 A가 공인 것에 대하여 힌두교에서 말하는 ‘브라흐마’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우파니샤드의 ‘범아일여’를 말하는 것 같다. 왜 그런가? 이는 몇 해전 한자경교수가 ‘꿈의 비유’를 들어 한마음에 대하여 설명한 바 있기 때문이다. 그때 당시 불교TV에 올려진 영상강좌를 보고서 녹취한 바 있다. 그리고 ‘한자경 교수의 ‘무아’와 ‘한마음’비판, ‘윤회와 무아 현대적 의미’를 보고(2011-04-23)’라는 제목으로 글을 남긴 바 있다.
그때 당시 올린 글에서 한자경 교수의 불교관을 비판하였다. 자세히 들어 보니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과 동떨어진 것이었다. 한자경 교수가 이해 하는 불교는 유식과 화엄사상에 바탕을 두었다. 특히 ‘한마음’을 강조 하였는데 강의 도중에 “저는 불교의 핵심은 바로 이 ‘한마음’에 놓여 있다고 생각합니다.”라 하였다. 이 한마음은 무엇일까?
한자경 교수는 한마음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꿈의 비유를 들었다. 우리가 꿈을 꿀 때, 꿈속의 나와 꿈꾸는 나가 있다는 것이다. 이 때 꿈속의 나는 가짜의 나(가아, 나1)이고, 꿈꾸는 나는 진짜의 나(진아, 나2)이다. 그런데 꿈을 깨보면 꿈속의 나와 꿈속의 객관적 대상들 즉, 너라든가 산천초목과 같은 것들은 모두 모두 꿈꾸는 나(진아, 나2)가 모두 만들어 내는 것이라 한다. 그것도 마음이 만들어 내는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강연말미에 놀랍게도 “제가 생각하기에 우리의 조상들은 한울에다 존칭인 님을 붙여서 한울님, 하눌님, 하느님이라 불렀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한마음이고, 부처님 마음이고, 하늘이고, 유교식으로 하면 태극이고, 기독교의 하늘의 주, 천주도 모두 한마음 속에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이고 천주님입니다. 그래서 저는 모든 종교가 궁극적으로 이 한마음, 부처님의 마음을 통해서 다 하나로 통한다고 생각합니다.” (한자경 교수, 제8회 윤회와 무아의 현대적 의미 2부) 라 하였다.
꿈꾸는 나는 한마음과 같은 것이고 근본에 있어서는 기독교나 불교나 모든 종교가 같은 것이라 하였다. 이 부분을 보고서 부처님의 근본가르침과 근본적으로 다르고 오히려 범아일여의 우파니샤드철학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일까 한자경 교수는 교계신문에서 “일차적인 근원을 갈구하는 마음이 바로 나이니라”라는 ‘우파니샤드’의 문구가 좌우명이라 하였다.
한자경 교수는 현응스님의 깨달음관에 대하여 비판하면서 “마음의 실체성을 부정하는 것은 오히려 산의 존재를 부정하고 등산의 의미를 부정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라 하였다. 마음의 실체성을 인정한다는 말과 같다. 그것은 한마음이다. 원효스님의 일심사상을 말한다.
그런데 선종에서는 한마음이 있다고 하였다. 그 한마음에 대하여 한물건, 일원상 등 여러가지로 표현 한다. 특히 서산대사의 선가귀감에 “[그것은] 본래 한없이 밝고 신령한 것이기에 일찍이 생겨나지도 않았고 일찍이 사라지지도 않았습니다. 이름 붙일 수도 없으며 모양을 그릴 수(狀)도 없습니다. (有一物於此, 從本以來, 昭昭靈靈, 不曾生 不曾滅, 名不得 狀不得.)”라 하여 잘 표현 되어 있다. 부처님도 몰랐던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선종에서는 마음을 깨닫는다 하였을 때 그 마음이 바로 한마음이라 하였을 것이다.
우상을 부수자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한마음사상은 보이지 않는다. 선종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사실상 마음을 실체화 하고 있다. 하지만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 널리 확산되고 있는 이 시점에 마음을 실체화 하는 것은 비판 받는다. 최근 원담스님은 동안거 기간 중에 작성된 수행일기에서 이렇게 비판 하였다.
2016년1월12일(화)맑음
움켜쥔 주먹을 들어 보이면서 ‘甚麽物심마물고?’ 이 무슨 물건인고? 주장자를 치켜들고 ‘보느냐?’ 탁자를 한 번 치면서 ‘듣느냐?’ 집게손가락을 구부리고 펴면서 ‘네가 한 것도 아니고, 내가 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안 움직인 것도 아니다. 누가 했느냐? 답을 가져 오너라.’ 막대기로 탁자를 때리면서 ‘이것 밖에 없다.’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치면서 ‘이것 밖에 없느니라.’
이런 짓들이 禪門선문에 횡행한다. 모두 깨달았다고 자처하는 자들이 추종자들에게 자기의 깨달은 소식을 보인 것이다. 이 무슨 미친 짓인가? 모두 欲의 부림일 뿐이다. 후라이판에 놓인 메뚜기 같이 파닥이며 손발을 놀리고, 고슴도치를 보고 놀란 개처럼 입을 벌려 짖어댄다. 깨달음을 남에게 보이려는 의도가 벌써 욕이다. 그렇게 해서 사람을 혹하게 만들면 추종자가 생긴다.
사람이 모이면 힘이 실리고 돈이 모인다. 깨달음을 과시하면 인기와 권력과 돈이 따라온다. 그래서 깨달음 사람이 인기, 권력, 금력에 서서히 중독되면 깨달음 장사꾼이 된다. 오늘 한국의 선문에서 말하는 소위 ‘깨달음’은 어디에서 연유했는가? 서산대사의 선가귀감을 보자.
有一物於此, 從本以來, 昭昭靈靈, 不曾生 不曾滅, 名不得 狀不得.
여기 한 물건(一物)이 있습니다. [그것은] 본래 한없이 밝고 신령한 것이기에 일찍이 생겨나지도 않았고 일찍이 사라지지도 않았습니다. 이름 붙일 수도 없으며 모양을 그릴 수(狀)도 없습니다.
一物者, 何物? ○. 古人頌云; 古佛未生前, 凝然一相圓; 釋迦猶未會, 迦葉豈能傳. 此一物之所以不曾生 不曾滅 名不得狀不得也.
한 물건’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의 둥근 원(一圓相)입니다. 옛사람이 [깨달음의 경지를] 노래하였습니다(頌云). “옛 부처께서 나시기도 전에, [이미] 뚜렷한(凝然) 둥근 하나의 모습(一相圓). 석가모니(釋迦)가 오히려 이해하지(會) 못한 것을 가섭(迦葉)이 어찌 전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한 물건’이 일찍이 생겨나지도 않고 일찍이 사라지지도 않으며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다고 한 이유입니다. (退耕 권상로의 번역)
1.한 물건一物을 깨달은 것을 ‘깨달았다’고 하며, 그래서 그 한 물건에 대한 소견이 생기면 깨달음의 소식이 왔다고 해서 ‘한 소식했다’고 하는 것이다. 깨달음에 대한 부정부패와 사회적 악영향이 중대하여 공공의 이익을 위해 검사가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형사상 고발을 했다고 치자. 그러면 깨달은 사람은 피고인의 자격으로 법정에 출두하여 깨달았다는 증언을 진술해야한다. 그 증언 자료로 쓸 만한 것이 선가귀감에 나오는 위의 구절이다.
그런데 피고의 진술가운데 자체 모순이 있다면 증거자료로 채택되지 못 할 것이다. 위 문장을 살펴보자. 한 물건은 이름 붙일 수도 없으며 모양을 그릴 수(狀)도 없다(名不得 狀不得)고 전제했는데, ‘한 물건’이라 벌써 이름을 붙였고, ‘본래 한없이 밝고 신령한 것(昭昭靈靈)’이라는 모양을 이미 그렸다. 한 문장 안에서 자체적으로 모순을 내포한 진술을 한 것이다. 이런 진술은 증거자료로 채택될 수 없다. 그 이하의 문장에서 아무리 심오하게 주절댄다 해도 설상가상일 뿐이다. 이런 종류의 깨달음을 가지고 법정에 서면 검사의 기소에 대해 자신을 변론하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2.불교의 사유방법은 연기설이다. 연기설에 입각하여 사유한다면 깨달았다는 사람에게 ‘한 물건’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가? 한 물건이 생겨나온 조건과 바탕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답할까? 아마도 이런 질문을 받아본 적도 없고, 연기적으로 사유해보지 않았기에 어리벙벙할 것이다. 한 물건이란 원인도 없고 조건 바탕도 없이 자체적으로 완전무결한 진리이기에 어디서 생겨난 것도 아니고, 그러기에 소멸될 수도 없는 영원불변의 그 무엇이라는 꽉 막힌 생각을 하고 있으니 이런 질문을 이해할 수도 없다.
만약 그렇다면 그런 한 물건이란 인과를 초월한 것이고, 연기를 초월한 것이다. 연기를 초월한 것을 말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연기하지 않은 것을 어떻게 떠벌이며 말로 할 수 있는가? 그런데 벌써 입을 벌려 말했다면 연기한 것인데, 어이하여 연기를 초월했다 하는가? 요컨대 ‘한 물건’이 연기를 초월한 것이라면 한 물건이라는 말도 성립될 수 없고, 연기한 것이라 한다면 생멸하는 것이니 어찌 ‘일찍이 생겨나지도 않았고 일찍이 사라지지도 않았다. 이름 붙일 수도 없으며 모양을 그릴 수(狀)도 없다.’라고 할 수 있으랴. 결론적으로 한 물건이란 성립할 수 없다. 그런데도 자꾸 한 물건을 들먹이며 무슨 최상승 도리를 설한다고 설쳐대는 짓은 불교의 기초도 모르는 소행이다.
3.선가귀감의 첫 문장에 나오는 한 물건 운운...은 인도의 브라흐만에 매우 가깝다.
aham brahmāsmi Brihadaranyaka Upanishad 1.4.10
"I am Brahman"
나는 브라흐만이다.
ayam ātmā brahma Brihadaranyaka Upanishad 4.4.5
"The Self is Brahman"
자아는 브라흐만이다.
sarvam khalvidam brahma Chandogya Upanishad 3.14.1
"All this is Brahman"
모든 것은 브라흐만이다.
ekam evadvitiyam Chandogya Upanishad 6.2.1
"That [Brahman] is one, without a second"
브라흐만이 유일하다, 제2는 없다.
tat tvam asi Chandogya Upanishad 6.8.7 et seq.
"Thou art that" ("You are Brahman")
네가 곧 그것이다. 네가 브라흐만이다.
prajnānam brahma Aitareya Upanishad 3.3.7
"Knowledge is Brahman"
아는 것(昭昭靈靈)이 브라흐만이다.
이상의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내용으로 봐서 한 물건이 곧 브라흐만가 매우 유사해보이지 않은가?
또 太極說태극설과 비교해보자. 태초에 無極무극이 있었는데 바야흐로 발동할 기미가 있자 太極태극이 되어 음양이 나눠지고 四相사상과 八卦팔괘가 벌어졌다. 여기에 나오는 무극이나 태극이 곧 한 물건이 이면서 동시에 性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선가귀감에서 말하는 한 물건은 범아일여의 梵범, 태극설의 태극내지 무극, 성리학에서 말하는 性에 해당된다. 그래서 ‘한 물건’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기보다는 브라만 사상과 중국의 도교와 성리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한 물건은 진짜 불교가 아니고 하이브리드 불교(hybrid잡종, 튀기)이다.
4.소위 ‘이 뭣고?’라는 화두는 一物, 한 물건이 무엇인고? 라고 자문하는 것이다. 이는 ‘나는 누구인가?’라든가, ‘부모가 나를 나아주기 이전의 참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과 동일한 종류이다. 그에 대한 답이 가슴에서 터져 나와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라 답하거나, 갑자기 몸을 일으켜 절을 하거나, 아니면 뒤로 세 걸음 물렀다가 앞으로 세 걸음 나아간다든가, 왔다갔다 걷는다든가 해도 모두 욕의 부림이지 별 수가 있는 건 아니다.
5.조선시대 내내 그리고 지금까지도 선가귀감은 한국의 선가에서 인기 있는 참고서 역할을 해온다. 그런데 그 내용은 잡종, 튀기불교이다. 한국 선종이 진품 불교가 아니기에 선사들의 언행은 비불교적이다. 이제 시대가 변했다. 반도에 갇혔던 한국 선종은 세계불교로 문을 열고 나가 널리 배워야 할 것이다. 지금 한국 선종은 황혼에 물든 우상이다.
황혼이 짙어지면 어둠속으로 잠겨들고 말 것이다. 이제 더 기다릴 시간도 없다. 지금 각성의 망치를 들고 우상을 깨 부셔야한다. 망치로 철학하라고 했던 니체처럼 진실한 수행자라면 우상을 파괴해야한다. 지금 파괴해야할 우상은 한국 선종이다. 선종 패밀리의 보스로 자처하는 종정과 방장, 조실 및 선사들을 사정없이 밟고 지나가야 한다. 잃을 것은 사견이요, 얻는 것은 정견이다.
(원담스님, 동안거 수행일기-5, 2016-01-14)
원담스님은 선종의 게송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소소영영한 한 물건에 대하여 일원상이라고 이름 붙인 것 자체가 모순이라 하였다. 더구나 한물건이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에 대하여 연기법에 위배 된다고 하였다.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이 세상 모든 현상은 조건발생하고 조건소멸한다. 어느 것 하나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한국불교에서는 변치 않는 소소영영한 한 물건이 있다고 하였다. 그 한 물건은 본래 이름이 없기 때문에 아무 이름이나 갖다 붙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일원상, 한물건, 그놈, 진여, 불성, 본래불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릴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상제, 브라흐마, 알라, 야훼, 하나님, 참나 등이 같은 개념이라 하였다.
원담스님은 우상을 부수자고 하였다. 또 한국불교는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에서 벗어난 잡종, 튀기 불교라 하였다. 선종에서 말하는 한물건은 우파니샤드에서 말하는 브라흐마와 놀랍게도 유사하다고 하였다. 이런 불교를 타파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타파 하였을 때 “잃을 것은 사견이요, 얻는 것은 정견이다.”라 하였다.
현응스님과 수불스님의 맞짱토론을 기대하며
발제자와 평론자의 토론이 끝나고 자유질의 시간이 있었다. 참가하였던 청중 중에 한 사람이 ‘참나’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이에 법인스님은 참나에 대하여 “영역 밖에 있다면 잘못 된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였다. 그러면서 텍스트 중심으로 이해할 것을 강조하였다. 사실상 현응스님과 뜻을 같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날 발제자들의 발제문을 보면 현응스님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 반면 평론자들은 현응스님에 대하여 우호적이었다.
이날 현응스님은 청중으로서 참석하여 토론을 지켜 보았다. 쉬는 시간에 스님에게 인사를 드렸다. 4년 전 찾아 뵌 적이 있었는데 얼굴을 기억하였다. 그러면서 블로그 잘 보고 있다고 하였다.
청중 중에 한분이 질문하였다. 현응스님의 깨달음관에 대하여 매섭게 비판하였다. 왜 혼란을 야기하느냐는 것이었다. 이에 현응스님은 토론회 말미에 마이크를 잡았다. 그러나 깨달음관에 대한 질문에 구체적으로 답을 하지 않았다. 스님은 이 자리에서 깨달음에 대하여 구체적 내용을 말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이 깨달음이라는 말에 너무 집착하는 것 같다고 하였다. ‘깨달음과 그 이후’라는 글을 썼는데 ‘그 이후’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않고 오로지 ‘깨달음’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아쉽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수불스님과 토론을 할 수 있음을 내 비추었다.
현응스님과 수불스님의 토론을 기대한다. 깨달음에 대하여 또 그 이후에 대하여 맞장토론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 현응스님도 토론하기를 희망하였다. 수불스님도 참석하여 깨달음에 대하여 ‘끝장토론’해 보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깨달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명확한 정의를 내리고 더 이상 소모적인 논쟁을 지양하였으면 한다. 대신 현응스님의 말대로 ‘깨달음 그 이후’에 대하여 뜨겁게 논쟁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본다.
2016-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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