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사상운동종결자, 최봉수교수의 초기불교개론을 듣고
의성어와 동어반복
사람들은 사람에 대한 ‘호불호’가 있다. 좋아 하면 ‘죽어라’ 좋아 하고. 싫어 하면 ‘죽어라’ 싫어 하는 것이다. 특히 싫어하는 경우 그 정도가 심하면 혐오하게 된다. 혐오하면 떠나게 된다. 또 선입견이라는 것도 있다. 어떤 사람을 보았을 때 이러이러한 사람이라고 단정하는 것이다. 이는 이전에 그런 류의 사람을 접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인터넷시대에 유튜브로 법문을 듣다 보면 갖가지 사람들을 보게 된다. 유명인이든 무명인이든 불교에 대하여 지식이나 수행체험을 했다는 사람들이 가르치려 드는 것이다. 호기심에 들어 본다. 그러나 한번 들어 보면 알게 된다. 마치 그 사람이 지혜로운지는 토론해 보면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듯이, 유튜브에 올려져 있는 동영상에서 한편만 들어 보면 알 수 있다. 더 들어야 될 것인지 쳐다 보지도 않아야 될 것인지에 대하여 마음의 판단이 서게 된다. 그런 것 중에 ‘의성어’가 있다.
어떤 이는 법문할 때 과도한 의성어를 사용한다. 대게 법문 내용이 시원치 않다. 그래서일까 내용을 강조하기 위하여 과도한 의성어를 사용하여 주의하게 만드는 것이다. 길게 라는 말에 대하여 “기~일게”라든가. 아주라는 말에 대하여 “아~주”라는 식으로 그에 적합한 표정과 함께 말하는 것이다. 마치 개그콘서트에서 얼굴 표정을 보는 것 같다. 때로 몸개그를 보는 것 같다.
과도한 의성어를 사용하는 것만큼이나 꼴불견이 있다. 그것은 ‘동어반복’이다. 참기름를 ‘진짜참기름’이라 하듯이, 말끝마다 ‘진짜로 정말로 참말로’ 라는 동어를 반복하는 것이다. 이렇게 의성어와 동어반복을 밥먹듯이 하는 법사를 보면 ‘애드립’ 하는 것 같다. 그때 그때 상황에 맞추어 순발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즉석에서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생각나는 대로 내키는 대로 애드립 하는 법문을 듣다 보면 받아 적을 것이 없다.
최봉수교수의 초기불교개론
법사가 과도한 의성어를 사용하였을 때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하나의 편견이 생겼다. 의성어를 사용하는 법사들은 임기응변식으로 시간이나 때우는 식으로 보아 들을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최근 유튜브 동영상 강좌를 보면서 그런 선입견이 깨졌다. 그것은 최봉수교수의 초기불교개론 동영상이다.
최봉수교수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안면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인터넷시대에 인터넷에 올려져 있는 정보를 통해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가장 먼저 알게 된 것은 최초 빠알리 삼장 번역자라는 것이다. 이는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 후기에 쓰여 있는 자료를 통하여 알았다. 자료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빠알리 율장 중 하나인 마하왁가가 1998년 최봉수박사에에 의해 번역되었고”라는 말이다. 이로 본다면 빠알리 문헌 최초 번역자는 최봉수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방대한 빠알리 율장중에 마하왁가 하나 뿐이다. 진정한 빠알리 경전 번역자는 전재성박사라 볼 수 있다. 1999년 상윳따니까야 일부가 한국최초로 출간 되었기 때문이다.
최봉수 교수의 강연을 들어 본 적이 없다. 다만 얼핏 어느 절에서의 동영상 강좌를 한번 보았다. 그런데 과도한 의성어를 사용하였다. 의성어를 사용하면 별 볼일 없을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보다 말았다. 그런데 이번 유튜브 동영상에서는 집중하게 보게 되었다. 왜 이런 변화가 생긴 것일까?
최봉수의 겉으로 본 이미지는 그다지 호감형은 아니다. 깡마른 체구에 과도한 의성어가 보는 이로 하여금 비호감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특히 의성어가 그렇다. 그런데 이번 초기불교개론 강좌를 들으면서 180도 바뀌었다. 과도한 의성어를 사용함에도 이렇게 급격하게 바뀐 이유는 내용이 들을 만 하다는 것이다. 이는 무자격자들이 의성어를 사용하여 순간적인 기지력으로 알맹이 없는 내용을 말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비록 귀에 거슬리는 과도한 의성어가 있음에도 잘 귀담아 들으면 건질 것이 매우 많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육사외도이다
유튜브에 최봉수교수의 초기불교개론이 올려져 있다. 대원불교대학에서 강연한 것이다. 그렇다고 최근 동영상이 아니다. 강연 중에 김대중정부 이야기가 나온 것으로 보아 아마 2000년대 초반에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10여전에 강연한 동영상을 유튜브시대에 접하고 있는 것이다.
최봉수교수의 초기불교개론을 1편부터 보고 있다. 현재 10편 까지 보았다. 보면 볼수록 매력있는 동영상이다. 그것은 불교의 진수를 접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육사외도에 대한 것이다. 불자들이 막연하게 알고 있었던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에 대하여 심도 있게 연구하여 자신의 방식대로 설명한 것이다.
불자들은 육사외도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아마 경전에 쓰여져 있는 정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조금 더 안다면 각주나 해제에 실려 있는 글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정도 알고서 육사외도에 대하여 다 알았다고 볼 수 있을까? 최봉수 교수의 강연을 들어 보니 한마디로 “이것이 육사외도이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록 과도한 의성어가 있기는 하지만 듣는 재미를 느끼게 해 주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강연에 집중하다 보면 과도한 의성어가 차라리 정겹게 느껴졌다.
불자로서 자부심을
최봉수교수의 초기불교개론을 들어 보면 불자로서 자부심을 느낀다. 그것은 부처님이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의 사상을 모두 논파하였기 때문이다. 브라만교의 유신론에부터 로까야따(유물론), 아지위까, 자이니즘에 이르기까지 인도 사상사의 흐름이 있었는데 궁극적으로 불교가 사상통일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한국불교가 오래 전에 사라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는 원동력이 될지 모른다. 그렇다면 부처님 당시 유행하였던 사상들은 어떤 내용일까? 이에 대하여 최봉수 교수는 육사외도의 사상을 이해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어떤 가르침을 베푸셨는가에 대하여 살피러 온 것인데, 다른 종교에서 하는 이야기를 길게 끌고 가지 않는가 이런 생각을 가진 분도 있어요. 다른 종교가 아니라 부처님께서 파악하신 다른 종교 입니다. 그래서 다른 종교 그 자체를 살피자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다른 종교를 어떻게 파악하셨고, 다른 종교에 대하여 어떤 입장을 가지셨는가 하는 것을 앞으로 당신이 이야기하게 될 가르침의 방향을 설정한다는 말입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이 있다. 부처님당시 바라문과 육사외도의 사상에 대한 파악을 통하여 부처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에 대하여 더 잘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오늘날 한국불교가 처한 상황에 대한 해법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현재 한국불교는 번영기일까 쇠퇴기일까? 어느 스님에 따르면 현재 한국불교는 단군이래 최대의 전성기라 한다. 아마 조선시대 오백년간 불교가 핍박 받던 것과 비교하면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반면 어떤 이는 불교가 쇠퇴기에 있다고 한다. 이웃종교와 비교하여 교세가 비교대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 하였다. 실제로 사람이 몰려 사는 도시에서의 교세는 게임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기독교를 극복할 수 있을까?
최봉수교수의 강연을 들어 보면 정말 불교가 얼마나 위대한 종교인줄 알게 된다. 이는 불교가 생겨나는 토대가 되는 고대인도에서 사상의 흐름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중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이 브라만교이다.
전지(全知), 전능(全能), 전선(全善)한 창조주
브라만교는 사성계급의 정점에 있었던 지배종교이었다. 그런 브라만교도 끊임 없이 진화해 왔다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단순한 신을 모신 유목민족의 종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이흐름에 따라 진화해 같다. 인도토양에 맞도록 세월이 흐름에 따라 계속 업그레이드 되어 간 것이다. 단순하게 “신을 믿어라”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우주창조에 대한 고도의 사상체계를 만든 것이다. 그래서 재료에 대한 문제가 걸리니까 ‘빠자빠띠’라는 신을 만들고, 또 안과 밖의 문제가 걸리니까 ‘브라흐마’라는 신을 만드는 식이다.
하지만 브라만교는 치명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는 오늘날 한국에서 득세하는 유일신교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어떤 문제일까? 그것은 ‘무지’와 ‘고통’과 ‘죄악’이라는 세 가지이다. 이 세 가지를 해결하지 못한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유일신교에서 볼 수 있는 전지(全知), 전능(全能), 전선(全善)과 대응되는 것이다.
유일신교에 따르면 이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는 ‘전지’하다고 한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당연한 것이다. 마치 개발자가 상품을 개발하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창조주는 피조물을 다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전지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전지한 신은 동시에 ‘전능’하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 세상 만물을 만들어 내는 것 자체가 전능한 것이다. 그런 신은 반드시 선신이다. 그래서 창조주를 ‘전선’하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치명적 약점이 있다는 것이다.
유일신교의 치명적 약점
업그레이드되고 진화된 브라만교 신관에 따르면 이 세상은 모두 창조주 브라흐마의 화현이다. 삼천초목삼라만상이 브라흐마의 화현인 것이다. 창조주가 이 세상을 창조한 후에 자신의 창조물에 들어 간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이나 사물, 삼라만상은 모두 브라흐마가 내재 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아뜨만 사상이다. 그런 브라흐마는 전지(全知), 전능(全能), 전선(全善)하다. 그러나 피조물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브라만교에 따르면 인간은 브라흐마의 화현이다. 창조주가 각 개인에게 내제 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창조주가 미쳐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 무지하고 고통받고 더구나 죄악을 저지른다는 사실이다. 이는 전지전능전선한 브라흐마와 다른 것이다. 정말로 브라흐마가 개인에게 내재 되어 있다면 창조주처럼 전지전능전선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틀린 말이 된다. 왜 그런가?
인간은 무지하다. 이는 전지한 전지한 창조주와 다른 것이다. 인간이 정말로 전능한 창조주의 화현이라면 인간의 무지는 없어야 할 것이다. 인간은 끊임 없이 고통받는다. 정말로 전능한 창조주가 내재 되어 있다면 고통 받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인간은 갖가지 죄를 짓는다. 인간에게 정말로 전선한 창조주의 화현이라면 악을 저질러서는 안된다.
불교는 사상종결자
인간은 무지하고 고통받고 죄악을 저지르며 살아 간다. 이는 전지전능전선한 창조주의 화현이라 볼 수 없다. 이런 이유로 고대 인도에서 더 이상 신에게 의존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이 고대인도에서 사문운동이 일어나게 된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더 이상 신을 필요치 않게 되는 시대에 살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로까야따, 즉 유물론이다. 오늘날 과학을 신봉하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
부처님 당시 사상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이런 배경에는 더 이상 창조주에 따른 유신론이 통용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전개된 사상의 흐름은 로까야따(유물론), 아지위까, 자이니즘 등으로 연결된다. 그러다 마침내 불교에서 종결 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는 고대인도에서 ‘사상종결자’라 볼 수 있다.
의성어가 정답게
최봉수교수는 열과 성을 다하여 혼신의 힘으로 강연한다. 더구나 중간중간에 행복한 미소를 자아내게 하는 이야기도 빠뜨리지 않는다. 마치 음식에 양념을 치는 것 같은 재미난 이야기와 혼신을 다하는 강연을 듣고 있으면 듣는 맛이 절로 나고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아마 몇 번 반복적으로 들어 내것으로 만들어야 할 예감이 앞선다. 앞으로 남아 있는 강연을 생각하면 뿌듯한 만족감이 밀려 온다. 이런 강연에서 더 이상 의성어는 문제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의성어가 더 정답게 느껴진다. 모처럼 진흙탕속에서 진주를 발견한 듯 하다.
2016-02-0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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