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처럼 살 것인가 인간답게 살 것인가?
크리스천과 대화에서
하나의 편견일 수 있다. 크리스천과의 대화에서 늘 듣는 이야기가 ‘목구멍포도청론’이다. 일로 인해서 만난 사람도 그랬고 동기동창과의 대화에서도 그랬다. 이는 종교를 주제로 하여 토론했기 때문일 것이다.
도덕경에 이런 말이 있다. 어떤 이가 도에 대하여 이야기 하면 대부분 크게 웃어 버린다는 것이다. 일부는 반신반의 하고 소수만이 귀담아 들을 뿐이라 하였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 그것은 도라는 것이 현재의 삶과 반대 되는 논리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실을 사는 자들 대부분은 눈과 귀 등으로 오욕을 즐기는 삶을 살지만, 도를 이야기하는 자들은 ‘욕망을 내려 놓아라’는 이야기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디 가서 함부로 도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였다. 아무나 붙잡고 도에 대하여 이야기 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 받을 것이다. 친한 사이라 하여 도에 대하여 이야기 하면 십중팔구 “지금 처자식이 굶어 죽는데 무슨 도 타령이냐?”라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이는 다름아닌 목구멍포도청론이다. 그래서 도에 대하여 함부로 이야기 하지 말라고 하였다. 또 수행한다고 함부로 떠들고 다니지 말라고 하였다. 격려는 고사하고 가만 있으면 다행이다. 대부분 크게 웃어 버린다.
황금자칼의 새끼사랑
TV에서 자연다큐를 즐겨 본다. 사실상 다큐채널이라 볼 수 있는 EBS에 항상 채널이 고정 되어 있다. 어느 방송에서든지 자연다큐를 보면 동물의 세계를 다룬다. 특히 새의 부화에서 비상에 이르기까지 과정이 매우 감동적이다. 또 하나는 사바나에서 약육강식의 살아가는 동물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 프로 중에 ‘황금자칼’에 대한 이야기를 보았다.
아프리카 초원에서 살아 가는 황금색을 가진 자칼 부부가 있다. 새끼를 다섯 마리 낳았는데 드넓은 초원에서 생존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살아 가는 방식을 보여 주고 있다. 가장 먼저 새끼를 포식자로부터 지키는 것이다. 그래서 교대로 망을 보며 사냥을 하여 먹여 살린다.
자칼은 자신 보다 덩치가 큰 초식동물을 사냥한다. 그러나 번번히 실패하고 만다.그러다가 이제 부화하여 얼마 되지 않은 작은 새를 발견한다. 한입에 집어 삼키고 새끼들이 있는 곳에 온다. 그런데 자칼은 삼킨 먹이를 게워 내는 것이었다. 반쯤 소화된 것을 게워내자 새끼들이 달려 들어 피투성이가 된 먹이를 게걸스럽게 먹는다. 이렇게 부모자칼이 먹이를 열심히 사냥한 결과 다섯 마리의 새끼들은 무럭무럭 잘 자란다.
목구멍포도청론
자연다큐에서 가장 볼만한 것은 새끼를 길러 내는 과정에 대한 것이다. 새의 부화에서 비상까지, 또 동물의 탄생에서 자립까지 과정을 보면 어미들의 새끼에 대한 헌신이 매우 인상적이다. 이를 인간과 비교해서 말하기도 한다. 축생도 자신의 새끼에 헌신하는데 인간이 자식을 버리는 것이 말이 되지 않다는 것이다. 또 새나 짐승의 경우 새끼가 다 자라서 떠나면 다시는 보호해주지 않음을 말하며 이를 사람의 자식에 빗대어 이야기하기도 한다. 나이 스무살이 넘어도 부모에 의지하려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목구멍포도청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항상 처자식을 앞세워 말한다. 처자식을 먹여 살리는 것이 가장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임을 강조한다. 또한 도 닦는다고 돌아다니거나 수행한다고 앉아 있는 것에 대하여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특히 타종교인이 그렇다. 그러나 불교인 중에서 목구멍포도청론을 말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럼에도 불교인 중에서도 그렇게 말하는 이가 있다.
어느 불교인 말하기를
어느 불교인은 세상을 사는 것 자체가 ‘불도’라 하였다. 재가자들은 이 세상을 떠나 살 수 없기 때문에 이 세상을 열심히 사는 것 자체가 불도를 닦는 것이라 한다. 처자식을 먹여 살리고 처자식을 굶기지 않는 것 만 해도 큰 일을 한 것이라는 것이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디. 그러나 지나치게 세속화 시킨 측면도 없지 않아 있다.
불자들은 오계를 지키며 살아 간다. 이런 점은 동물들과 다른 것이다. 또 일반인과 차별화 된다. 이렇게 오계를 지키는 삶을 살면 최소한 ‘도둑놈’ ‘사기꾼’이라는 소리 듣지 않고 처자식을 먹여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사는 것이 과연 진정한 재가자의 삶이라 볼 수 있을까?
오계를 지키며 처자식을 부양하는 것은 재가불자로서 기본중의 기본이다. 어느 불교인든지 삼보에 귀의 하면 오계를 지키려 노력하고 처자식을 굶기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행위는 타종교인이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다. 타종교인들도 나름 대로 계를 지키며 착하고 건전하게 살려 하기 때문이다. 종교를 갖지 않은 일반사람들도 법을 지키며 착하게 살아간다.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법을 지키며 처자식을 부양하며 살아 간다. 불교인도 오계를 지키려 하며 처자식을 먹여 살리는 삶을 살아 간다. 과연 이런 삶이 재가불교인들의 목적이 될 수 있을까?
축생과 같은 삶의 방식
만약 목구멍포도청론을 앞세워 재가에서 열심히 사는 것이 삶의 목표라면 굳이 불교를 종교로 갖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럼에도 일반사람들이나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불교에 적용하여 “재가 신도들에게 있어서 수행이란 세간사를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바로 수행 입니다.”라 말하는 것에 동의 할 수 없다. 왜 그런가? 그것은 다름 아닌 ‘축생과 같은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처자식을 부양하고 세상을 열심히 살아 가고 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오계이다. 오계를 지키는 삶을 살아가면 인간이지만, 반대로 오계를 어기는 삶을 살면 약육강식의 동물의 세계와 같다. 오계라는 딱지를 떼어 버린다면 인간과 동물의 삶의 방식은 구별이 되지 않는다. 새끼 키우고 사는 것이 동물과 다를 바 없음을 말한다.
김성철교수 말하기를
재가의 삶은 축생의 삶과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자연 다큐에서 보듯이 새의 부화와 비상, 그리고 동물의 출산과 성장 과정과 같은 삶을 산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김성철교수는 ‘중론강좌’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
“하사도에서 제일 마지막 사람이 누구냐 하면 열심히 일해갖고 돈벌어 갖고 가족을 잘 먹여 살리고, 잘 키우고, 시간 나면 놀러도 가고, 그런데 절대 나쁜 짓은 안해요. 착하게 사는데 종교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요. 이런 사람들이 하하에요.”
(김성철교수, 해인사 2003중론김성철 13 20:37)
여기서 하사도(下士道)는 티벳불교 ‘보리도차제론(菩提道次第論: Lam rim)’에서 하나의 단계를 말한다. 김성철교수에 따르면 티벳불교에서는 수행체계가 확립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를 세 단계로 나누고 있는데 상사도(上士道), 중사도(中士道), 하사도(下士道)가 그것이다. 상사도는 보살도를 말하고, 중사는 아라한도를 말한다. 하사도는 천상도를 뜻한다.
버러지 같은 삶
재가불자가 인간이나 천상에 태어나기 위해 닦는 도가 ‘하사도’이다. 하사도에도 또 다시 세 가지로 나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상, 하중, 하하가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하하(下下)’에도 들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였다. 남의 것을 훔치거나 속이며 사는 자를 말한다. 오계를 어기며 사람이 이에 해당된다. 초원에서 약육강식의 육식동물에 해당된다. 보리도차제론의 ‘등외’ 사람이 이에 해당된다.
김성철 교수에 따르면 처자식을 부양하며 착하고 사는 자에 대하여 ‘하하’라 하였다. 그런데 이런 삶에 대하여 ‘버러지 같은 삶’이라 하였다. 왜 버러지 같은 삶인가? 이어지는 강연을 들어 보면 “사회에서 아버지가 열심히 일해 가지고 밤새며 돈 벌어서 자식을 먹여 살리고 학교에 보내고 집안을 살리면 좋은 아버지 이렇게 이야기하죠? 이게 버러지 같은 사람이에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그것은 짐승도 그렇게 한다 이렇게 말해요.”라 하였다.
자연 다큐를 보면 크게 육식과 초식동물로 나뉘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바나에서 육식동물은 늘 먹이를 찾아 해매 다닌다. 호시탐탐 먹잇감을 노려서 포착되면 폭발적 스피드로 목덜미를 물어 숨통을 끊어 놓는다. 이렇게 사냥한 멋잇감을 새끼들에게 나누어 주어 어미로서의 역할을 다한다. 반면 초원의 초식동물들은 풀만 먹고 자란다. 그런 한편 늘 두려움에 떤다. 언제 어떻게 육식동물에게 먹힐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초식동물도 새끼를 낳으면 자랄 때 까지 지극정성으로 보호한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육식동물이나 초식동물이나 공통적으로 새끼를 키우는데 있어서 인간 못지 않다. 어느 면에 있어서는 인간 보다 더 감동적이다. 특히 새끼가 다 자랐을 때 독립시키는 것을 보면 인간이 이를 배워야 할 정도이다.
인간이 동물 보다 못할 때가 있다. 성년이 되어서도 독립할 줄 모르는 것이 가장 큰 것이다. 또 오계를 지키지 않았을 때 초식동물 보다 못 한 것이다. 보리도파제론으로 따진다면 육식동물은 살생하여 먹고 살기 때문에 오계를 어기며 사는 인간과 같다. 그래서 보리도차제론의 하하에도 들지 못하는 등외가 된다. 이에 반하여 초식동물은 살생을 하지 않고 살기 때문에 오계를 지키며 착하게 사는 인간과 같다. 이런 인간이 보리도차제론에 따르면 하사도 중의 하, 즉 하하에 해당된다.
보리도차제론에 ‘하하’에 해당 되는 자에 대하여 ‘버러지 같은 삶’이라 하였다. 종교를 가지지 않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착하게 성실하게 가족을 부양하며 사는 자를 말한다. 누군가 바른 직업을 가지고 거짓말 안하고 주지 않는 것 억지로 가지지 않고 회사에서 돈 벌고 진급하기 해서 치열하게 경쟁하고 처자식 먹여 살리고 때로는 막노동판에서 몸둥아리 굴려 가며 사는 것에 대하여 재가불자들의 삶의 목적이라 한다면 이는 하하에 속한다. 김성철교수의 표현에 따르면 버러지 같은 삶이다. 짐승도 그렇게 살아 가기 때문이다.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착하게만 살면 된다고?
흔히 하는 듣는 말이 있다. 그 말은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착하게 살면 되죠 뭐”라는 말이다. 매우 소극적 삶의 방식이다. 타종교인도 그렇게 살아가고 종교를 가지지 않은 사람도 그렇게 살아 간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착하게 살아 간다는 것은 결국 “짐승보다 못한 놈, 저 사기꾼...” 이런 소리 안 들으면서 남의 가슴에 못을 박지 않고 살아 가는 사람을 말한다. 이와 같은 소극적 삶의 산다고 하여 선처에 태어난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또 악처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불교에서는 적극적 삶의 방식을 요청한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소극적 삶과 반대 되는 것이다. 초원의 초식동물과 같은 하하의 삶의 방식을 넘어 ‘하중’ 또는 ‘하상’의 삶의 방식을 말한다. 그렇다면 불자를 천상과 같은 선처로 인도하는 보리도차제론의 ‘하사도’는 어떤 것일까? 김성철교수의 논문 ‘체계불학과 보리도차제론 ‘ 을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하사도 - 삼악도를 벗어나 내생에 인간이나 천상에 태어나는 길
1) 죽음과 무상에 대한 사유
- 명예욕과 재물욕에서 벗어나 진정한 종교심이 발생함
2) 삼악도와 천상의 고통에 대한 사유
- 인간의 소중함을 자각
三惡道의 고통: 지옥, 아귀, 축생의 세계의 고통에 대한 상세한 설명
天上의 고통: 恐怖苦, 死苦 등.
3) 삼보에의 귀의
4) 인과응보에 대한 믿음
(김성철교수, 체계불학과 보리도차제론)
김성철교수에 따르면 티벳불교의 수행체계에 해당되는 보리도차제론은 1038년 입국한 인도의 고승 아띠샤(Atiśa: 980~1052C.E.)의 교학에 연원을 둔다고 하였다. 그래서 “첫째는 삼보에 대한 믿음을 갖고 선업을 지어 윤회의 세계 내에서 향상을 추구하는 凡夫의 길로 下士道라고 부르고, 둘째는 깨달음을 추구하며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소승적 수행자의 길로 中士道라고 부르며, 셋째는 중생의 제도를 위해 윤회의 세계 내에서 살아가는 발보리심한 대승 보살의 길로 上士道라고 부른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하사도는 윤회계 내에서 살아 가는 삶의 방식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삶의 방식은 단지 착하게 벌레러럼 사는 것과 다르다. 특히 첫 번째 언급된 죽음에 대한 사유가 그렇다.
왜 죽음에 대한 명상을 해야 할까?
보리도차제론은 불교경전을 바탕으로 구성된 것이다. 경전에서 관련된 구절을 가져와 짜집기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사도에서 ‘죽음과 무상에 대한 사유’가 있는데 이것 역시 경전적 근거를 한다. 이는 다름 아닌 ‘죽음에 대한 명상(maranasati)’이다.
왜 죽음에 대한 명상을 해야 할까? 그것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지금 젊고 건강하다고 하여 이런 삶이 영원히 계속 될 수 없다. 지금 여기에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 있다고 해도 한시간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숫따니빠따에서 “이 세상에서 결국 죽어야만 하는 사람의 목숨은 정해져 있지 않아 알 수 없고” (Sn3.8) 라고 분명히 말씀 하였다.
사람의 목숨은 알 수 없는 것이다. 기대수명이 발표 되고 있지만 가 보아야 알 수 있다. 땅이 꺼져 죽고 천정이 무너져 죽는다. 달리던 기차가 탈선하고 순항하던 배가 전복되고 하늘을 날던 비행기가 추락해서 죽는다. 그래서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앙굿따라니까야에서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날이 저물고 밤이 오면 이와 같이 ‘나에게 죽음의 조건은 많다. 뱀이 나를 물거너, 전갈이 나를 물거나, 지네가 나를 물면, 그 때문에 나는 죽을 것이고 그것은 나에게 장애가 될 것이다.” (A6:20) 라 하여 이 밤이 지나면 내일이 올지 내생이 시작될 지 알 수 없을 것이라 하였다. 더 촉박하게 ‘내가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동안’이라 하였다.
죽음에 대한 명상을 하였을 때 삶의 태도가 바뀌어질 수 있다. 앞으로 전개 될 을 예측할 수 없다면 오늘 하루를 헛되이 보낼 수 없다. 지금 이 순간 임종을 맞게 되었을 때 여한이 없어야 한다. 이는 나꿀라삐따가 임종에 들려 할 때 그의 아내 나꿀라마따가 “그대는 근심을 가지고 임종에 들지 마십시요. 장자여, 근심이 있는 임종은 괴롭습니다. 세존께서는 근심이 있는 임종을 질책하였습니다.” (A6:16) 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임종시에 여한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단지 착하게 사는 것만으로 되지 않는다.
천수념(devatānussati)을 보면
소극적 삶의 방식은 벌레 같은 삶을 말한다. 또 초식동물과도 같은 삶을 말한다. 단지 착하게 살며 도둑놈 사기꾼 소리 듣지 않고 처자식을 부양하며 사는 삶의 방식은 하하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하상과 같은 적극적 삶을 살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할까?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부처님 가르침을 들 수 있다.
[세존]
“네 위대한 왕이 있는 하늘나라의 신들이 있고, 서른 셋 하늘나라의 신들이 있고, 축복받는 하늘나라의 신들이 있고, 만족을 아는 하늘나라의 신들이 있고, 창조하고 기뻐하는 하늘나라의 신들이 있고, 남이 만든 것을 지배하는 하늘나라의 신들이 있고, 하느님의 권속인 하느님 세계의 신들 등이 있다.
그 신들은 이와 같은 믿음을 갖추고 이곳에서 죽어서 그곳에서 태어났다. 나에게도 역시 믿음을 갖추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죽어서 그곳에서 태어나는 그와 같은 믿음이 있다.
그 신들은 이와 같은 계행을 갖추고 이곳에서 죽어서 그곳에서 태어났다. 나에게도 역시 계행을 갖추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죽어서 그곳에서 태어나는 그와 같은 계행이 있다.
그 신들은 이와 같은 배움을 갖추고 이곳에서 죽어서 그곳에서 태어났다. 나에게도 역시 배움을 갖추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죽어서 그곳에서 태어나는 그와 같은 배움이 있다.
그 신들은 이와 같은 보시를 갖추고 이곳에서 죽어서 그곳에서 태어났다. 나에게도 역시 보시를 갖추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죽어서 그곳에서 태어나는 그와 같은 보시가 있다.
그 신들은 이와 같은 지혜를 갖추고 이곳에서 죽어서 그곳에서 태어났다. 나에게도 역시 지혜를 갖추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죽어서 그곳에서 태어나는 그와 같은 지혜가 있다.”
(Mahānāmasutta-마하나마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6.10, 전재성님역)
이는 천수념에 대한 것이다. 천상의 신을 늘 생각하며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천수념은 불수념, 법수념, 승수념 등과 함께 40가지 사마타명상 주제 중의 하나이다.
천수념을 보면 하사도의 조건을 모두 갖추었다. 그것은 매우 적극적인 삶의 방식에 대한 것이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단지 착하게만 살면 된다는 소극적 삶의 방식을 뛰어넘는다. 그래서 부처님은 재가불자들에게 믿음(saddhā), 계(sīla), 배움(suta), 보시(cāga), 지혜(paññā) 이렇게 다섯 가지를 실천하라고 말씀 하셨다.
벌레처럼 살 것인가 인간답게 살 것인가?
흔히 ‘시계생천(施戒生天)’이라 말한다. 보시하고 계를 지키는 삶을 살면 천상에 태어남을 말한다. 그런데 천수념을 보면 세 가지가 더 있다. 그것은 믿음과 배움과 지혜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착한 불자가 되는 것도 좋지만 지혜로운 불자가 되라는 것이다. 어떤 지혜일까?
사람들은 삼보에 귀의함으로써 불자가 된다. 삼보에 귀의 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삼보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을 요청한다. 부처님과 가르침과 성스런 상가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내야 불자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불자가 되는 첫 번째 조건은 삼보를 귀의처, 의지처, 피난처로 삼는 것이다. 이런 믿음은 불수념과 법수념, 승수념에서 잘 표현 되어 있다. 이것이 삿다(saddhā), 즉 합리적이고 이성적 믿음이다.
불법승 삼보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이 생겨났다면 그 다음 단계는 계행을 지키는 것이다. 오계를 말한다. 그래서 진정한 불자가 된다는 것은 삼보에 귀의하고 오계를 준수함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진정한 불자로서 요청되는 것이 배움과 보시와 지혜이기 때문이다. 특히 지혜가 강조 된다.
불교적 지혜는 단순하게 ‘착하게 살자’라는 구호를 뛰어 넘는다. 단지 착하게만 살면 하하에 해당된다. 벌레 같은 삶, 또는 초식동물 같은 삶이다. 오로지 자신과 가족 밖에 모르는 사람들이다. 등을 달아도 오로지 자신과 가족의 건강, 학업, 사업, 치유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불자가 된다는 것은 자신과 가족을 뛰어 넘는다. 이것이 불교적 지혜로 나타난다. 그런 지혜는 다름 아닌 부처님 가르침으로 나타난다.
벌레나 초식동물은 베풀지도 못하고 지혜롭지도 않다. 오로지 먹는 것에만 급급하며 생존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목구멍포도총론을 말하는 자들 역시 벌레나 초식동물과 같은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에게 “지금 여기에서 착하게 벌레처럼 살 것인가 지혜롭게 인간답게 살 것인가?”라고 물을 수 있다.
2016-02-1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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