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을 보는 안목 경안(經眼)에 대하여
경을 보는 안목
경안(經眼), 경을 보는 안목이라는 뜻이다. 사전적 의미는 불교의 경전을 이해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경전에 대하여 통달해야 할 것이다. 경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평생 경전을 연구한 학자이거나 경전을 근거로 한 삼장법사가 이에 해당된다.
‘웨란자의 경(A8.11)’에 대하여 글을 올린 바 있다. 부처님이 바라문교도 웨란자와의 대화에 대한 것이다. 앙굿따라니까야에도 나와 있고 율장비구계에서도 볼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이 생에서 거듭 태어나려면(2016-02-09)’라는 제목의 글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유튜브동영상에서 최봉수교수의 일요법문을 듣다가 경안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경안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 같다.
최봉수교수의 첫 번째 경안
최봉수교수의 대원정사 일요법문에서 어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부처님오신날을 맞이 하여 열린 이날 법문에서 부처님의 ‘탄생게’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 불리우는 한문탄생게가 아니라 빠알리어 탄생게를 말한다. 최봉수 교수는 빠알리어 탄생게를 원문으로 소개 하였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Dhammatā esā bhikkhave. Sampatijāto bodhisatto samehi pādehi patiṭṭhahitvā uttarābhimukho1 satta padavītihāre gacchati setamhi chatte anuhīramāne , sabbā ca disā anuviloketi , āsahiñca vācambhāsati: "aggo'hamasmi lokassa, jeṭṭho'hasmi lokassa, seṭṭho'hamasmi lokassa, ayamantimā jāti, natthi'dāni punabbhavo"ti. Ayamettha dhammatā.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원리가 있다. 보살은 태어나자마자 단단하게 발을 땅에 딛고 서서 북쪽으로 일곱발을 내딛고 흰 양산에 둘러싸여 모든 방향을 바라보며, ‘나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님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님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선구적인 님이다. 이것은 나의 최후의 태어남이다. 나에게는 더 이상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고 무리의 우두머리인 것을 선언한다. 이것이 이 경우의 원리인 것이다.
(마하빠다나경-Mahāpadāna Sutta-비유의 큰 경, 디가니까야 D14, 전재성님역)
빠알리어 탄생게는 한문탄생게와 어떦게 다를까? 이에 대하여 ‘천상천하유아독존, 한문탄생게와 빠알리탄생게 어떻게 다른가(2013-05-10)’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그런데 최봉수교수는 어른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가면서 웨란자의 경과 빠알리어 탄생게를 연계하여 법문하였다. 이것을 보고 ‘경안’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최봉수교수의 법문은 들을 만 하다. 그것은 경전을 보는 안목이 탁월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오랜 세월 동안 법문을 하였기 때문에 법문에 대해서는 달인이라 볼 수 있다. 청중을 휘어 잡아 메시지를 확실하게 전달 할 수 있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것이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부처님의 탄생게와 웨란자의 경을 매칭하여 설명한 것이다.
빠알리 탄생게에서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선구적인 님이다.” (D14)라는 말을 웨란자의 경에서 “바라문이여, 나는 참으로 손위고 세상의 최상자입니다.”(A8.11) 라는 구절과 일치한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경을 많이 접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서로 연계하여 설명할 수 있는 안목을 말한다.
최봉수 교수는 일요법문에서 웨란자의 경을 설명하면서 부처님이 탄생하고 나서 무려 47년후에 이를 증명하는 경과 같았다고 했다. 이는 탄생게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이제 갓 태어난 아이가 “내가 이 세상의 최고어른이다”라는 말에 대하여 의문을 품고 있었는데 바라문들이 사는 웨란자 마을에서의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의문이 풀렸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탄생한지 47년 만에 부처님이 왜 이 세상의 어른인지에 대하여 웨란자의 경에서 명확히 밝혀져 있음을 말한다.
최봉수교수의 두 번째 경안
누구든지 나이가 많으면 ‘손위’라 한다. 또 나이가 들어 노년에 이른 자를 어른이라 한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반드시 나이 순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는 웨란자의 경에서 병아리부화의 비유로 알 수 있다.
어미 닭이 알을 품었을 때 먼저 알껍질을 깨고 나온 병아리가 손위라 하였다. 이 과정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최봉수 교수는 전혀 생각지도 않은 말을 하였다. 어미 닭이 알을 부화하는데 여덟 개에서 열 개까지의 알을 한꺼번에 부화한다고 하였다. 알을 일찍 낳은 것을 먼저 품지 않고 여덟 개나 열 개가 될 때 까지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부화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기 쉽지 않았다. 농촌에서 닭을 키워 본 사람이 아니면 이런 생각을 쉽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글을 쓸 때 이런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였다. 단지 알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에만 초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웨란자의 경에서는 두 가지가 포인트이다. 하나는 어른에 대한 것이고 하나는 무명의 타파에 대한 것이다. 어른을 설명하기 위하여 부처님은 병아리부화 이야기를 들었다. 먼저 알껍질을 깨고 나온 병아리가 최상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여덟 개에서 열 개의 알을 품을 때 모두 어미 닭이 낳은 알이라는 것이다. 먼저 낳은 알이라 해서 먼저 알껍질을 깨고 나오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마치 주민등록상 생년은 순서가 있지만 죽는 것에는 순서가 없는 것과 같다. 이를 부처님탄생게와 연계하여 ‘최상자’개념을 설명한 것이다. 설령 늦게 낳은 알이라도 알껍질을 깨고 나온 병아리가 손위가 되는 것이다. 이는 깨달음에도 적용할 수 있다. 나이가 어리지만 먼저 깨달으면 손위가 되는 것이다. 부처님이 그런 케이스라는 것이다.
“여러분들도 가끔 나를 보면 건방지다 이런 소리를 하는데”
최봉수교수는 강연을 매우 재미있게 진행한다. 아마 강연을 듣는 사람들이 최교수보다 나이가 더 많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최교수는 “여러분들도 가끔 나를 보면 건방지다 이런 소리를 하는데”라며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이는 어른 개념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병아리부화의 비유를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이야기속에 무서운 메시지가 나옵니다. 지보다 뛰어나고 높으신 어른 한테 함부로 예를 강요하지 말라. 뒤집어 말하면 예의라는 것은 상대방의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강요하면 안된다는 뜻이에요. 상대방에 대하여 인사할 만하면 말을 안 해도 인사하는 겁니다.”
부처님은 바라문들이 무례하다고 비난 하는 것에 대하여 병아리 부화 비유로 설명하였다. 비록 먼저 낳은 알이라 하더라도 어미 닭이 품을 때 먼저 알껍질을 깨고 나온 병아리가 최상자라 하였다. 마찬가지로 무명을 가장 먼저 타파한 부처님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최상자라는 말이다. 그래서 고령의 바라문들에게 먼저 일어나서 맞이하고 자리를 권하지 않음을 말하였다. 더구나 누군가 부처님에게 그렇게 하기를 권한다면 “그의 머리가 부수어질 것이다.” (A8.11) 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삼장법사의 첫 번째 경안
같은 경을 보아도 누군가는 포괄적으로 더 넓게 깊게 보는 사람이 있다. 숨겨진 의미까지 파악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런 사람에 대하여 ‘경안이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경안이 있는 사람들은 대게 경전을 근거로 말을 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분들 중에 ‘빤냐와로삼장법사’가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빤냐와로삼장법사의 법문을 듣는다. 목소리가 부드럽고 고요하고 깊이가 있어서 부담이 없다. 어떤 법문을 들어 보아도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그것은 철저하게 경전을 근거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법문중에 부처님 열반과 관련된 법문을 들었다.
삼장법사는 대반열반경에서 부처님의 마지막 말씀 중에 압빠마다(appamāda)에 말하였다. 일반적으로 압빠마다에 대하여 ‘불방일’로 번역하는데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하였다.
압빠마다와 관련된 부처님 말씀은 “모든 형성된 것들은 부서지고야 마는 것이니,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 (vayadhammā saṅkhārā appamādena sampādethā)” (D16) 라는 문구이다. 여기서 불방일이라는 말에 대하여 ‘게으르지 않음’이라 말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정확한 의미라 볼 수 없다. 이에 대하여 삼장법사는 “지금 일어난 대상을 탐, 진, 치 없이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이고 말하였다. ‘지금 이 순간을 살자’는 것이다. 여기서 알아차림이라는 말은 사띠와 동의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설명하는 삼장법사의 말에서 경안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압빠마다와 사띠의 관계에 대하여 이전에 ‘압빠마다(appamāda)와 사띠(sati)는 동의어(2015-11-07)’라는 제목의 글을 올린 바 있다. 압빠마다와 사띠가 사실상 같은 의미라는 뜻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삼장법사도 그런 말을 한 것이다. 삼장법사가 법문한 것은 2015년 3월로 되어 있어서 시간적으로 보아 앞선 것이다.
삼장법사의 두 번째 경안
삼장법사는 일요법문에서 불방일을 뜻하는 압빠마다를 설명하면서 전에 들어 보지 못하던 말을 하였다. 그것은 ‘의혹’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려 하자 부처님은 “길과 실천에 관하여 의심이나 의혹이 있다면 질문하라.”(M16) 라고 하였다. 수행승들이 침묵하자 두 번, 세 번에 걸쳐서 똑 같이 말하였다. 이에 아난다는 “이 수행승의 참모임 가운데 한 수행승이라도 부처님에 관하여, 또는 가르침에 관하여, 또는 참모임에 관하여, 또는 길과 실천에 관하여 의심이나 의혹이 없습니다.”(D16) 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이 손아귀에 감추어 놓은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말한다. 설할 것을 다 설하였다는 말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열반에 이르러“압빠마데나 삼빠데타(appamādena sampādethā: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 라 하신 것이다.
부처님은 열반에 드시면서 ‘주먹안에 감추어 놓은 것이 없다’고 하였다. 따로 비밀리에 전수해야 할 가르침이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압빠마데나 삼빠데타”라 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삼장법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부처님이 깨달음의 길로 가는 것에 대하여 모든 것을 다 설해 놓았다는 겁니다. 후대에 나오는 화엄경, 금강경, 그건 부처님이 직접 설한 것은 아니죠? 그건 부처님이 일부로 비밀스럽게 감추어 놓은 건가? 부처님은 다 설했다고 했어요. 그래서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부처님말씀이 아니다라고 해요.”
(빤냐와로삼장법사, 20150313법문)
삼장법사의 법문을 들으니 왜 대승경전이 비불설인지 알게 되었다. 이는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이 분명하게 “의심이나 의혹이 있다면 질문하라.”라고 말씀 하시면서 “나중에 ‘우리의 스승은 앞에 계셨으나 우리는 세존 앞에서 질문할 수가 없었다.’라고 후회하지 말라.” (D16) 라고 분명하게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이런 법문을 듣고 경안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말로만 듣던 대승비불설에 대한 경전적 근거가 되는 것이다.
“압빠마데나 삼빠데타(appamādena sampādethā)”
부처님은 분명하게 다 설하였다고 했다. 그럼에도 대승불교에서는 새로운 경전을만들어 내었다. 또한 선종에서는 부처님의 비밀스런 가르침이 오로지 마음과 뜻으로 전승되어 왔다고 한다. 부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대가섭과 아난으로 이어진 법맥이 달마에 이르렀고, 달마는 중국에 도착하여 오로지 마음과 뜻으로만 알 수 있는 가르침을 전달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달마로부터 시작된 선종의 역사는 조사스님들에게 전등되어 오늘날 한국에서 선맥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부처님은 비밀스런 가르침에 대하여 말씀 하지 않았다.
부처님이 마지막으로 말씀 하신 것은 “압빠마데나 삼빠데타”이다. 우리말로 즉 “방일하지 말고 노력하라”는 말이다. 이를 “열심히 부지런히 노력하라”라는 뜻도 있지만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사실이다. 부처님 45년 설법이 모두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appamādena sampādethā”에 대하여 삼장법사는 무언가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라 하였다. 어떤 결과일까? 그것은 열반에 이른다든가 불사에 몸이 되게 하는 것이라 했다. 또 천상에 태어나는 것에도 해당된다. 그래서 핵심어 ‘압빠마다’라는 것은 “탐진치가 없는 상태에서 열심히 마음을 갈고 닦고 노력하는 것”이라 했다. 또 압빠마다는 ‘지금 이 순간을 알아차리는 것’이라 했다. 이렇게 본다면 압빠마다는 ‘사띠’와 사실상 동의어라 볼 수 있다.
2016-02-15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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