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위하여 개성공단과 아라한대통령
전쟁을 바라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평화를 바란다. 그러나 전쟁은 언제 어느 때 찾아 올 지 알 수 없다. 대부분 인간의 탐욕과 성냄과 무지에서 기인한다. 한나라의 지도자가 탐욕을 내었을 때, 상대방 지도자에 대하여 격노하였을 때, 정세를 잘못 판단하였을 때 파멸로 이끌 수 있다. 그럴 때 가장 많이 희생당하는 사람들이 젊은이들이다.
유시민의 예언을 듣고
대통령 국회연설과 관련하여 팟캐스트방송을 들었다. 노유진의 정치카페로서 ‘정치’카페 89편(1부) - 백 투 더 퓨처 : 대통령 국회연설’를 말한다. 하루 전에 방송된 내용으로 대통령이 국회에서 어떻게 연설할 것인지에 대하여 크게 다섯 가지로 예측하였다.
정치인에서 작가로 변신한 유시민은 다음과 같이 예측하였다. 첫째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했다는 것과 둘째 장거리미사일을 대비하여 사드를 배치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세번째로 북한봉쇄를 위하여 중국의 협력을 끌어내야 한다는 것, 네번째로 개성공단 가동중단한 것은 불가피하고 올바른 결정이었다는 것, 마지막으로 개성공단 중단으로 북한은 혹독한 대가를 치루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다.
유시민작가의 다섯 가지 예측이야기를 팟캐스트로 들었다. 다음날 대통령의 연설문을 들어 보니 맞아 떨어졌다. 그러나 모두 우려 되는 것들이다. 대통령은 화해와 평화를 말한 것이 아니라 대결과 갈등에 초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마치 시대가 거꾸로 돌아 가는 듯한 느낌이다. 더구나 혹독한 대가를 치룰것이라는 대통령의 말은 미래를 불안하게 한다.
대통령은 개성공단에 대하여 단정적으로 언급하였다. 통일부장관이 부적절한 발언이라 하여 도중에 사과 하였음에도 기사에 따르면 대통령은 ‘천연덕스럽게’ 말한 것이다. 이런 말에 대하여 언론에서는 ‘참사’라는 표현을 하였다. 또 ‘돌아 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고도 하였다.
평화는 간데 없고
집안에서 가장이 분노하면 집안 분위기는 얼어 붙는다. 회사에서 사장이 분노하면 회사분위기 전체가 가라앉는다. 한나라의 지도자가 분노하면 전쟁이 발발할 수 있다. 전쟁이 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 몫이다. 생활기반과 산업은 초토화 되고 젊은 사람들은 수도 없이 죽어 나갈 것이다.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린다.
유튜브에서 전쟁과 관련된 동영상을 보았다. 주로 2차 세계대전에 대한 것이다. 또 전쟁과 관련된 영화도 다수 보았다. ‘스탈린그라드-최후의 전투(1993)’라는 영화를 보면 전쟁을 혐오할 수 밖에 없다. 또 과달카날을 소재로 ‘씬 레드 라인(The Thin Red Line, 1988년)’를 보면 일본군국주의가 무모한 전쟁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한나라의 미래를 책임지고 있는 지도자의 입에서 ‘전쟁불사’를 의미하는 말이 나왔을 때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전쟁이 일어나면 대량인명살상과 파괴가 뒤따른다. 그런데 이런 전쟁은 유사이래 계속 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잠시 평화의 기간이 있긴 있었지만 항상 제자리로 되돌아 가는 것처럼 전쟁터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 같다. 마치 매섭게 추운 겨울날이나 뜨겁게 달구어진 여름날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꽃피는 봄날은 언제 지나갔는지 알 수 없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날 만 같을 것 같은 가을날 역시 언제 지나갔는지 모른다. 결국 혹독한 추위와 참을 수 없는 더위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전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평화의 시대는 언제 지나갔는지 모르게 사라지고 시체더미와 폐허위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였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
장군요청을 받았지만
어떤 경우에서라도 폭력은 정당화 될 수 없다. 설령 폭력이 선을 위한 것일지라도 정당화 되서는 안된다. 만을 누군가 악을 몰아내기 위한 명분으로 폭력을 행사한다면 이에 동의할 수 없다. 그 어떤 경우에서라도 전쟁은 정당화 될 수 없다. 힘으로 무력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려 한다면 부처님 가르침에도 맞지 않다. 부처님은 평화를 말씀 하셨다.
평화의 종교인 불교에서 전쟁이라는 말은 맞지 않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전쟁과 관련하여 어떤 태도를 취하였을까? 가장 먼저 숫따니빠따 ‘출가의 경(Sn3.1)’을 들 수 있다. 부처님이 출가하여 수행자로서 삶을 살 때 빔비사라왕과의 만남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 당시 고대인도에서는16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 중게 가장 강한나라가 마가다와 꼬살라이었다. 그 중에서도 마가다국은 최강이었다. 그런데 마가다의 국왕 빔비사라는 부처님을 보자 한눈에 장군감인 것을 알아 보았다. 보통사람과 다른 모습을 보고서 “코끼리의 무리가 시중드는 위풍당당한 군대를 정렬하여 당신께 선물을 드리니 받으십시오.”(stn421) 라며 ‘상군(象軍)’을 이끄는 장군이 되어 달라고 했다.
부처님은 빔비사라왕의 요청을 거절 하였다. 장군이 되기 위하여 출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출가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감각적 욕망에서 재난을 보고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출가하였다고 말하였다.
“칼로 그대의 목숨을 빼앗으면”
불교는 평화의 종교이다. 폭력과 전쟁을 싫어하는 종교라는 말도 된다. 이는 ‘뿐나’의 포교에서도 알 수 있다. 상윳따니까야 ‘뿐나의 경(S35.88)’에 따르면 부처님의 제자 뿐나는 목숨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이교도 지역에 포교하러 가는 뿐나에게 부처님이 “만약 쑤나빠란따까의 사람들이 그대를 손으로 때리면 뿐나여, 그대는 어떻게 할 것인가?” (S35.88) 라며 물어 보았다. 이에 뿐나는 흙덩이를 던지지 않는 것만으로 다행이라 하였다. 기꺼이 맞겠다는 말이다.
이교도 지역에서 포교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 놓아야 한다. 목숨을 걸고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손에 경전을 들고 또 한손에 칼을 들고 포교하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비폭력적 방식에 따른다. 이는 다음과 같은 부처님과 뿐나와의 대화에서 절정을 이룬다.
[세존]
“뿐나여, 그러나 만약 쑤나빠란따까의 사람들이 날카로운 칼로 그대의 목숨을 빼앗으면 뿐나여, 그대는 어떻게 할 것인가?”
[뿐나]
“세존이시여, 만약 쑤나빠란따까의 사람들이 날카로운 칼로 저의 목숨을 빼앗으면, 그 때 저는 이와 같이 ‘몸 때문에 목숨 때문에 오히려 괴로워하고 참괴하고 혐오하여 칼로 자결하길 원하는 세존의 제자들도 있다.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고도 칼로 자결하는 셈이다.’라고 말하겠습니다. 세상의 존귀한 님이여, 그때는 이와 같이 말할 것입니다.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이여, 그때는 이와 같이 말할 것입니다.”
(뿐나의 경, 상윳따니까야 S35.88, 전재성님역)
이교도지역에서 이교도가 칼로 목숨을 빼앗으려 할 때 피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상대방을 제압하여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 칼에 죽음을 맞이 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몸 때문에 목숨 때문에 오히려 괴로워하고 참괴하고 혐오하여 칼로 자결하길 원하는 세존의 제자들도 있다.”라는 말을 인용하였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고도 칼로 자결하는 셈이다.”라 함으로써 죽음을 당하는 것이 결코 두렵지 않다고 하였다.
경에서 칼로 자결하기를 원하는 제자들이 있다고 하였다. 이는 부정관 수행한 부처님의 제자들이 자신의 몸의 더러움을 관찰하고 자결을 택하는 일이 있었음을 말한다.
뿐나가 가려고 했던 이교도지역 ‘쑤나빠란따까’는 뿐나의 고향이었다. 주석에 따르면 뿐나는 쑤나빠란따까에서 장사를 하던 상인이었다. 장사를 하기 위해 사왓티에 왔다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출가하여 수행승이 된 것이다. 그런데 사왓티가 자신의 기호에 맞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의 고향으로 되돌아 가르침을 전하고자 한 것이다. 각주에 따르면 ‘쑤나빠란따까’는 오늘날 뭄바이 근처 ‘타나(Thana)’지방이라 한다.
뿐나는 부처님에게 인사를 하고 자신의 고향 ‘쑤나빠란따까’로 향하였다. 도착하여 가르침을 전하였다. 하지만 우려한 대로 이교도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에 제자들이 부처님에게 뿐나의 미래 운명에 대하여 물어 보았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수행승들이여, 뿐나는 훌륭한 가문의 아들로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라고 하였다.
때리면 맞는다
번뇌 다한 아라한에게는 욕망이 없다. 또한 성냄도 없다. 이교도가 시비를 걸었을 때 맞대응 하지 않을 것이다. 상대방이 자극하여도 자극받지 않는다. 상대방이 화를 내어도 분노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폭력을 행사해도 폭력으로 맞대응하지 않는다. 때리면 맞는 것이다. 칼로 찌르면 뿐나가 말했던 것처럼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고도 칼로 자결하는 셈이다.”라 할 것이다. 이런 아라한에게 원한이 있을 수 없다.
이 세상 지도자가 모두 아라한이라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소멸된 아라한에게 남아 있는 것은 관용과 자애와 지혜이다. 만약 아라한대통령이 있다면 이 세상은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될 것이다.
2016-02-17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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