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지금 여기서 현존을 말하는 자들

담마다사 이병욱 2016. 2. 28. 20:57

 

지금 여기서 현존을 말하는 자들

 

 

 

이것은 알 수 없어요

 

이것이 있다. ‘이것이란 무엇일까? 이것에 대하여 유튜브에서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다. 재가자이지만 머리를 삭발하고 회색법복을 입은 S님이 이것은 알 수 없어요. 어떤 것도 카테고리안에 안들어와요라 하였다. 수십 개가 올려져 있는 S님의 동영상강좌에서 아무 것이나 찍어서 아무 곳을 클릭하였을 때 들은 말이다.

 

S님의 또 다른 동영상을 보면 여기서 희로애락을 맛 보아요. 딴 자리가 아니에요. 지금 여기에서라 하였다. 이것을 말하는 사람들이 늘 그렇듯이 지금 여기를 강조한다. 이것과 지금 여기를 말하는 동영상에서 교리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선어록은 언급된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이것을 말하는 사람들은 선종계통임을 알 수 있다.

 

마음에 본체가 있다고

 

이것을 말하는 또 다른 사람의 동영상을 보았다. 이번에는 여성 K님이다. K님은 이것에 대하여 뭔가 알려는 마음이 있다면 여기서 일어나는 마음인데 마음을 일으켜서 뭔가가 알려는 것은 이미 이 마음이 아니잖아요.”라 말한다. 이는 마음에 본체가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알기도 전에 이미 이 마음입니다.”라 한다. 역시 아무 동영상에서 아무 곳이나 찍어서 녹취한 것이다.

 

이것을 말하는 사람들의 말은 한결 같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것 타령이다. 거기에는 교리도 없고 수행도 없다. 오히려 교리에 대하여 알음알이만 증장한다고 하며 멀리하라고 말한다. 또 수행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한심하게 바라본다. 그래서일까 M선원 K님은 강연도중에 내 몽둥이가 있으면 때려 주고 싶어라고 말 했다.

 

이것만 알면 바로 깨닫는 거에요

 

B선생이 있다. 동영상 강좌를 보면 죽비를 들고 있다. 죽비를 들고서 이것만 알면 바로 깨닫는 거에요라 한다. 이것이란 무엇일까? B선생은 이것을 말하기전에 부처는 부처가 아니라 부처라는 이름일 뿐이다.”라는 금강경 한구절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죽비를 들고서 이것은 죽비가 아니고 죽비라는 이름일 뿐이다 이거에요. 모든 것은 이름이고 말이고 개념이지 실체가 아니라는 얘기에요.”라고 말한다.

 

B님의 설명을 듣고 있으면 마치 브라만교 우파니샤드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다. 이 세상에 이름 붙여진 것은 개념에 불과하여 이름과 형태라고 설명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에서는 세상만물이 모두 브라흐마의 화현이라 하였다. 심지어 모든 사물에 브라흐마가 들어가 있다고 보았다.

 

B선생 역시 삭발하였다. 선어록이나 금강경, 반야심경을 종종 인용하면서 이것을 설명한다. 이번에는 참나에 대한 것이다. B님은 참나에 대하여 참나는 뭐냐? 말과 이름이 아닌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 그것이 참나에요.”라 하였다. 그러면서 죽비를 손바닥으로 탁탁 친다. 지금 이 소리를 알아 차리는 것 이것이 참나라고 한다. 그래서 이것만 알면 바로 깨닫는 것임을 강조한다.

 

참나가 무엇입니까?” “그냥 너다

 

또 다른 동영상을 보았다. 이번에는 Y님 동영상이다. Y님의 홍익학당동영상은  유튜브에 널려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인 입으로 일주일에 두 세편의 동영상을 올린다고 하니 이제 까지 올린 동영상이 천 편이 넘을 듯 하다.더구나 조회수도 많아 어떤 것은 만회도 넘어 간다. 이렇게 본다면 유튜브세계에서 널리 알려진 유명인사라 볼 수 있다.

 

Y님의 널려져 있는 동영상에서 참나라는 제목을 가진 것을 아무 것이나 하나 찍었다. 가장 최근에 올려진 것이다. Y님에 따르면 자신이 선문답책을 하나 지었는데 그 책에서 참나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 보았을 때 그냥 너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Y님에 따르면 모든 선문답을 그 얘기를 하는데 왜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는지 이해 못하겠다고 한다. 또 화두선한다고 선방에 앉아 있는 것이 이해 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말한다. 그러면서 말끝마다 반드시 이해 되세요?”라고 되묻는다.

 

켄 윌버의 참나의 각성

 

유튜브동영상에서 이것을 말하는 사람들은 많다. 출가자 보다 재가자들이 더 많다. 그런데 이것을 말하는 자들에게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지금 여기참나를 강조한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는 꿈의 비유를 든다는 것이다. 이밖에 선어록이나 대승경전, 특히 반야심경과 금강경의 특정 구절을 인용한다. 이렇게 본다면 이것을 말하는 자들은 선종계통임을 알 수 있다.

 

지금 여기를 강조하는 것은 외국인에게서도 볼 수 있다. 그 중에 켄 윌버가 있다. 캔 윌버의 나’ 각성이라는 동영상을 보면 바로 지금 이 를 인식하는 것이 바로 큰 마음으로의 확실한 인내가 됩니다.”라 한다. ‘큰 마음이란 무엇일까?

 

큰 마음이 있다면 작은 마음도 있을 것이다. 큰 마음을 대아라 한다면, 작은 마음은 소아이다. 대아를 영어로 ‘I’라 표현 할 수 있고, 소아를 영어로 ‘i’라 표현할 수 있다. 또 대아를 꿈 꾸는 나(I)라 볼 수 있고, 소아를 꿈속의 나(i)로 볼 수 있다. 그런데 큰 마음, 대아(I)는 다름 아닌 참나라 한다. 이에 대하여 켄 윌버는 이 근원적이고 초월적인 진아는 대상에 좌우되지 않습니다.”라 말한다. 또 모든 것들이 대상이지 주체는 아니라 한다. 순수한 자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켄 윌버에 따르면 큰 마음, 대아, 참나, 순수한 자기에 대하여 나를 느끼고 싶다면 모든 대상물을 걷어 내세요.”라고 말한다. 이런 말에 지적이고 교양 있게 보이는 청중들은 동의 하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빅뱅이전에도

 

이것은 다름 아닌 참나이다. 나 이외 진짜 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나는 지금 여기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름과 개념 지어진 것을 걷어내면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죽비를 탁탁 치는 것도 나를 보는 것이고, 배고프면 밥먹을 줄 아는 것도 나를 보는 것이라 한다. 이렇게 진리는 매우 가까이 있어서 알고 나면 허무할 정도라 한다.

 

이것을 말하는 자들은 평상심을 강조 한다. 배고프면 밥먹을 줄 알고 소리가 들리면 들을 줄 아는 것이 나라고 한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현존하는 것을 아는 것에 대하여 깨달음이라 한다. 그런 나는 5년전에도 존재했고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빅뱅이전에도 있었다고 한다. 그것이 순수 자아인 라고 한다.

 

 

 

Here-and-now

 

 

참나의 보편성에 대하여

 

이것을 강조하는 자들은 참나의 보편성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그래서 불교나 기독교나 힌두교나 모든 원리에 있어서 같은 것이라 한다. 마치 어느 스님이 기독교에는 신성이 있고, 불교에는 불성이 있어서 사실상 같은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일까 홍익학당 윤홍식님은 초기불교에 대하여 비판한다. 참나의 보편성과 맞지 않아서일 것이다.

 

초기불교와 테라와다에서는 참나를 인정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것은 역사적으로 불교가 브라만교의 범아일여사상을 비판하며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초기경전 어디를 보아도 참나는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도 참나찾기 현상이 있는 것 같다.

 

유튜브를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참나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참나에 대한 것은 바이블에서도 보인다는 사실이다. 요한복음 1 2절을 보면 그분은 세상이 창조되기도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은 진제스님이 늘 하는 말인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煎本來面目)’과 매우 유사하다. 그래서일까 진제스님이 미국교회에서 법문할 때 기립박수를 받았을 것이다.

 

단멸론자 아니면 영원주의자

 

이것, 참나, 본래면목, 신성, 불성 등과 같은 말은 사실상 동의어임을 알 수 있다. 마치 한 물건을 놓고 여러 가지 이름을 붙여 놓은 것과 같다. 하지만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외도사상임에 틀림 없다. 초기경전에 이런 용어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외도에 해당될까?

 

이것을 말하는 자들은 오로지 지금 여기서 현존하는 것만 강조 한다. 그러다 보니 업도 본래 없는 것이라 한다. 업이 없다 보니 윤회도 당연히 없는 것이 된다. 있다면 다만 이름과 명칭만 있을 뿐이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이것을 주장하는 자들은 단멸론자들임에 틀림없다.

 

본래 없음을 강조하는 자들은 업과 윤회를 부정한다. 있다면 오로지 지금 이순간 만 있을 뿐이라 한다. 그런 한편 진실한 나가 있다고 한다. 배고프면 배고픈 줄 아는 놈, 죽비소리가 나면 그 소리를 듣는 놈이 있음을 말한다. 또 그런 사실을 아는 것을 아는 자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존재의 근원 영원히 변치 않는참나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이것을 말하는 자들은 영원론자들임에 틀림 없다.

 

오로지 지금 여기서 현존만 강조하며 업과 윤회를 부정하면 단멸론자이다. 또 우리의 오감과 느낌과 지각과 인식의 배후에 이를 아는 자가 있다고 본다면 영원론자가 된다. 오로지 지금 여기서 이것만 강조한다면 단멸론이나 상주론에 빠지기 쉽다. 왜 그런가? 거기에 연기법이 없기 때문이다. 연기를 말하지 않는 자들이 이것만을 강조하였을 때 단멸론 아니면 상주론이 될 수 밖에 없다.

 

연기법이 보이지 않는다

 

연기법은 원인과 조건과 결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연기송의 정형구를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iti imasmi sati ida hoti, Imassuppādā ida uppajjati)” 라 표현된다.

 

여기서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 (若有此卽有彼)라는 말은 연기의 일반원리로서 상호의존적연기라 한다.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若生此卽生彼)”라는 말은 연기의 특수원리로서 조건발생적연기라 한다.

 

이렇게 연기법은 일반원리와 특수원리로 설명된다. 이를 잘 표현 한 것이“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로 사작되는 12연기 정형구이다. 그런데 이것을 말하는 자들은 연기에 대하여 일체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 대신 반야심경의 무무명 내지 무노사진이라 하여 본래 없는 것이라 한다.

 

이것을 말하는 자들은 금강경의 여몽환포영을 말하면서 꿈의 비유를 한다. 꿈을 깨는 것이 깨달음이라 한다. 그래서 현실도 꿈과 같다고 한다. 그런데 꿈에서는 연기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꿈속에서 어떤 짓을 해도 꿈을 깨면 그만이다. 이렇게 본다면 꿈의 비유로 깨달음을 설명한다면 그런 깨달음에 연기법이 적용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부처님이 연기법으로 깨달을을 이룬 것과 대조적이다.

 

현법열반론자들인가?

 

이것을 강조하는 자들은 단멸론자 아니면 영원론자이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서 현존만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아 현법열반론자들이라 볼 수 있다. 디가니까야 브라흐마잘라경(D1)에서 보는 62가지 사견중의 일부에 해당된다.

 

지금 여기서 열반을 실현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현법열반론자 (diṭṭhadhamma nibbānavāda)’들이라 한다. 주석에 따르면 지금 여기(diṭṭhadhamma : 現法)’란 눈앞에 직접 보이는 법(dhamma:현상)을 말한다. 오로지 눈앞에 보이는 것, 오로지 귀에 들리는 것 등이 해당된다.

 

그런데 주석에 따르면 놀랍게도 여기서 감각기능[]에 대상[]이 아닌 선의 경지등도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감각기능의 대상처럼 간주될 수가 있다.”라고 했다. 선정수행에서 체험 역시 현법열반론에 해당됨을 알 수 있다.

 

오감이 그때 그때 직접 경험되면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열반과 현법열반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결정적으로 자아를 들 수 있다. 자아를 상정하며 오감을 지금 여기에서 즐긴다든가 선정에 든다면 가짜열반 또는 유사열반이라 볼 수 있는 현법열반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어떤 수행자나 성직자들은 현세열반론자로서 다섯 가지 근거를 통해서 현존하는 뭇삶은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을 성취한다고 주장한다. 수행승들이여, 그 존귀한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무엇 때문에 무엇에 의거하여 현세열반론자로서 다섯 가지 근거를 통해서 현존하는 뭇삶은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을 성취한다고 주장하는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수행자나 성직자는 이와 같은 이론을 갖고 이와 같은 견해를 갖고 있다. ‘벗이여, 이 자아는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소유하고 구족하여 즐긴다. 벗이여, 이러한 한, 그 자아는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에 도달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떤 자들은 현존하는 뭇삶은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을 성취한다고 주장한다.

 

(하느님의 그물의 경, 디가니까야 D1, 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이 자아는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소유하고 구족하여 즐긴다.”라는 표현이 있다. 이는 오온에 실체가 없다고 말씀 하신 부처님 가르침과 다른 것이다.

 

현법열반론자들은 자아가 있다고 여겨 이 자아가 다섯 가지 감각을 소유하고 즐긴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 자아는 지금 여기에서 최상의 열반에 도달해 있다고 주장한다. 마치 술을 마시고 술이 취하여 이것이 열반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지금 여기를 뜻하는 ‘diṭṭhadhamma’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현세라고 번역하였다. 이는 문맥에 따른 것이다. 각묵스님은 ‘diṭṭhadhamma’에 대하여 지금여기라 하여 지금과 여기를 붙여쓰기로 하였다. 그런데 현법을 뜻하는 ‘diṭṭhadhamma’는 직접경험해서 보여지는 것을 말한다.

 

죽비소리를 들었을 때 들을 줄 아는 것 역시 직접경험해서 보여지는 것이다. 배고픈 것이나 졸리는 것 역시 직접보여지는 현상()이다. 이렇게 눈과 귀, , , 몸 등 오감이 그때 그때 직접 경험되면 이를 자기존재와 동일시한다. 자신이 경험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자아에 기반한 직접경험이다.

 

그런데 이런 오감을 즐긴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현법열반론자들은 벗이여, 이 자아는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소유하고 구족하여 즐긴다. 벗이여, 이러한 한, 그 자아는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에 도달해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아에 기반을 둔 선정의 성취

 

현법열반론은 자아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래서 눈, 귀 등 오감으로 지금 여기서느끼고 지각하고 인식하는 것에 대하여 큰 의미를 부여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현법열반론을 보면 네 가지 선정도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경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

또한 다른 자는 그것에 관하여 이와 같이 말한다. ‘벗이여, 그대가 말한 자아는 있는 것이라고 나는 말하지, 없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말한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에 도달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벗이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으로 그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을 원인으로 태어남,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벗이여, 그래서 이 자아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여의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나서, 사유를 갖추고 숙고를 갖추어,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으로 가득한 첫 번째 선정을 성취한다. 벗이여, 이러한 한, 그 자아는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에 도달한 것이다.’ 이와 같이 어떤 자들은 현존하는 뭇삶은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을 성취한다고 주장한다.”

 

(하느님의 그물의 경, 디가니까야 D1, 전재성님역)

 

 

이 구절은 초선정에 대한 것이다. 오감으로 느끼고, 지각하고, 인식하며 즐기지만 오욕락은 무상한 것이다. 그래서 선정에 들면 변함으로 인한 괴로움을 여읠 수 있음을 말한다.

 

초선정에 들었을 때 희열과 행복으로 가득한 첫 번째 선정을 성취한다.”라 하였다. 그러나 이는 자아에 기반을 둔 선정의 성취이다. 그래서 자신이 희열과 기쁨을 즐기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현법열반론자들은 현존하는 뭇삶은 현세에서 최상의 열반을 성취한다.”라고 하였다. 마치 진짜 나와 합일 하는 것이 깨달음이라 말하는 것과 같다.

 

합일하였을 때

 

자아에 기반한 자가 선정에 들었을 때 진짜 나와 합일에 이르렀다고 볼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깨달음이라 하고 또 열반이라 착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새김 있고 청정한 네 번째 선정을 성취하였을 때 역시 지금 여기에서 구경의 열반을 실현한 것입니다.” (각묵스님역) 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 각묵스님은 다음과 같이 각주 하였다.

 

 

불교의 바른 삼매로 일컬어지고 있는 4선이 여기서 지금여기에서 열반을 실현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견해로 언급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본문을 잘 살펴보면 여기서 주장하는 이러한 현법열반론자들의 견해는 어떤 존재론적 자아가 있어서 그 자아가 이런 삼매 혹은 선의 경지를 구족하여 머문다고 주장이다. 그러므로 자아에 대한 견해, 초기불교에서 거듭 강조하는 유신견이 극복되지 않는 한 아무리 지고한 선정에 경지에 머물러도 그것은 견해의 그물에 걸린 것일 뿐이라는 설명이다.”

 

(각묵스님, 초불연 디가니까야 153번 각주)

 

 

현법열반론자들은 존재론적 자아에 기반한다. 그것이 가짜 나이든 진짜 나이든 간에 자아가 있다고 본다면 모두 유신견에 빠진 것으로 본다. 누군가 꿈의 비유를 들며 꿈꾸는 나와 꿈속의 나를 설명하면서 꿈깨는 것이 깨닫는 것이라 말한다면 이 역시 자아에 기반한 것이다. 이렇게 자아론에 기반한 유신견을 가지고 있는 한 결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각주에서 달리 표현하자면 통찰지로써 제법의 무상--무아를 통찰해서 자아에 대한 모든 고정관념을 극복하지 못하면 결국은 있다-없다, 영속한다-단멸한다는 견해의 그물에 걸리고 만다는 것이다.”라 하였다.

 

불교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기준

 

불교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기준이 있다. 그것은 삼법인이다. 그래서 ‘일체의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Sabbe sakhārā aniccā)’라고 보는 ‘제행무상’이 있고, ‘일체의 형성된 것은 괴롭다(Sabbe sakhārā dukkhā)’라고 보는 일체개고가 있고, ‘일체의 사실은 실체가 없다(Sabbe dhammā anattā)’라고 보는 제법무아가 있다. 이와 같은 삼법인은 법구경 277, 278, 279번 게송에도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법구경 게송을 보면 공통적으로 세 가지 법인에 대하여 지혜로 본다면(yadā paññāya passati라 하여 지혜(paññā)’를 강조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모든 현상에 대하여 무상, , 무아로 통찰할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하였을 때 나라고 할 만한 것도 없고 집착할 만한 것도 없을 것이다.

 

제행무상에서 일체의 형성된 것(Sabbe sakhārā)’무상하다(aniccā)’라고 하였다. 이는 가짜 나뿐만 아니라 진짜 나도 해당된다. 어느 것 하나 예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금 여기를 강조하며 꿈을 비유를 들며 참나를 찾자고 말하는 자들을 불교인이라 볼 수 있을까?

 

 

 

2016-02-2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