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소승 비방하고 대승 추켜세우고? 윤홍식님의 초기불교비방에 대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16. 2. 29. 16:01

 

 

소승 비방하고 대승 추켜세우고? 윤홍식님의 초기불교비방에 대하여

 

 

 

부처님 그분에 대하여 알려면

 

불자들은 부처님 그분을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역사적으로 실재 하였던 석가모니부처님에 대하여 얼마나 많이 알고 있을까? 부처님 그 분에 대하여 알려면 부처님 일생부터 공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중에 부처님의 일생에 대한 책이 여러 권 나와 있지만 그것 가지고는 부족하다.

 

부처님 그분에 대하여 더 알려면 말씀으로 남긴 경전을 열어 보아야 한다. 그런데 그 경전의 양이 엄청나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4부니까야를 구입해야 한다. 여기에 소부경전이라 불리는 쿳다까니까야중의 일부를 또 구입해야 한다. 십여 권에 달하는 쿳다까니까야는 법구경, 숫따니빠따, 우다나, 이띠붓따까 등이 대표적이다.

 

초기경전을 모두 구입하면 책장으로 가득하다. 그렇다면 그렇게 많은 경전 중에 부처님 그분에 대하여 가장 빠르게 알 수 있는 경전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디가니까야가 될 것이다.

 

디가니까야 특징은?

 

사부니까야와 쿳다까니까야를 보면 중복되는 내용이 적지 않다. 그런 니까야 중에 기본 중에 기본은 상윳따니까야일 것이다. 주제별로 잘 정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리와 수행에 대하여 깊이 알고자 한다면 맛지마니까를 보아야한다.  재가와 삶과 관련된 것이라면 앙굿따라니까야가 좋다. 그렇다면 디가니까야는 어떤 장점이 있을까? 이에 대하여 디가니까야 해제글을 보면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그 가운데 첫 번째로 편집된 디가니까야는 경전의 길이가 가장 길고 교리적으로 내용적으로 완벽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경전이 실제적으로는 성립사적으로 가장 늦게까지 보완되었기 때문에 역사적인 부처님의 말씀을 보다 깊이 체계적으로 살펴 볼 수 있는 풍부한 교학적 체계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디가니까야에는 다른 니까야들의 교리체계에서 미진하거나 부족했던 부분들이 상세하고 완벽하게 보완되어 있습니다.

 

(전재성님, 디가니까야 머리말)

 

 

 

 

전재성님의 머리말에 따르면 디가니까야가 교리적으로 가장 체계적 상태로 전승되어 왔다고 했다. 가장 늦게 성립된 것이 큰 이유일 것이다. 여기에 긴 길이로 웅대한 소설적 구성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초심자가 초기경전을 처음 접할 때

 

그렇다면 송출자들은 왜 이렇게 웅대한 소설적 구성에다 교리적으로 체계를 갖춘 니까야를 편집하게 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상윳따니까야 해제글에 따르면 디가니까야는 대외적으로 불교를 널리 알리기 위한 포교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사건적으로는 훨씬 소설적 구성에 문학적 상상력이  첨가되고 교리적으로는 가능한 한 종합적으로 구성되고 논리화 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초심자가 초기경전을 처음 접할 때 디가니까야부터 보는 것이 좋음을 뜻한다.

 

웅대한 스케일의 디가니까야를 읽으면 부처님 그분이 우리가 상상했던 것 보다 얼마나 위대한지 알게 된다. 이는 시중에서 판매 되는 부처님의 일생에 대한 이야기 보다 몇 배 더 감동적이다.

 

디가니까야는 긴 길이로 모두 34개의 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에는 부처님의 열반에 대한 것도 있다. 이를 마하빠리닙나나경(D16)’이라 하여 모두 124페이지에 달한다. 이경에 대하여 디가니까야를 가장 가치 있게 만든 경이라 하였다. 노년의 부처님에 대하여 사실적 묘사를 보면 그 감동으로 인하여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불교를 널리 보급하기 만들어진 것이 디가니까야이다. 그래서일까 가장 늦게 성립되었음에도 가장 빨리 송출되었다. 그래서 사부니까야를 순서대로 말할 때 반드시 디가니까야가 앞선다.

 

디가니까야의 웅대한 소설적 구성은 불교를 체계적으로 알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신심을 갖게 만든다. 경을 접하다 보면 그 분 부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인지 알 게 된다. 그래서 이처럼 세존께서는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명지와 덕행을 갖춘 님,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 세상을 아는 님, 위없이 높으신 님, 사람을 잘 길들이시는 님, 하늘사람과 인간의 스승이신 님, 깨달은 님, 세상에 존귀하신 님이다.” (S11.3) 라는 여래십호를 붙여 줄 만 한 것이다.

 

삿된 견해를 부순 부처님

 

모두 34개의 경으로 이루어져 있는 디가니까야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경이 브라흐마잘라경이다. 왜 이 경이 가장 앞서 나왔을까? 아마 부처님 당시 시대상황이 잘 반영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또 사상의 흐름에 대하여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 보다 삿된 견해를 부순 부처님의 가르침을 돋보이게 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부처님은 브라흐마잘라경에서 소개 되어 있는 62가지 견해를 연기법으로 모두 부수었다. 부처님 당시 바라문사상과 각종 사문사상이 난립하였는데 이 모두가 양극단에 치우친 것이고 양극단은 연기법적으로 성립할 수 없음을 밝힌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날 난무하는 각종 종교나 사상 역시 부처님의 연기법으로 부수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브라흐마잘라경에 소개 되어 있는 62견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영원주의 4가지, 부분적 영원주의 4가지, 유한무한론 4가지, 회의주의 4가지, 우연론 2가지, 사후지각론 16가지, 사후무지각론 8가지, 사후비유비무지각론 8가지, 허무주의 7가지, 현세열반론 5가지 이렇게 모두 62가지이다. 여기에 20가지 유신견이 합쳐 지면 모두 82가지 견해가 있다.

 

20가지 유신견은 오온에 자아를 보는 견해를 말한다. 오온 중에 식온에 대한 것을 보면 그는 의식을 자아로 여기고, 의식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고, 자아 가운데 의식이 있고, 의식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긴다.” (M109) 라는 정형구로 되어 있다. 이런 사견은 모두 연기법으로 논파되었다.

 

부처님을 비방하는 자가 있었는데

 

그렇다면 부처님이 62가지 삿된 견해에 대하여 설하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경의 초입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 라자가하 시에서 날란다 시로 가는 사이의 대로를 오백 명의 많은 수행승들의 무리와 함께 가고 계셨다. 그 때 유행자 쑵삐야도 라자가하 시에서 날란다 시로 가는 사이의 대로를 제자인 바라문 학인 브라흐마닷따와 함께 가고 있었다그 도중에 유행자 쑵삐야는 여러 가지 이유로 부처님을 비난하고 가르침을 비난하고 참모임을 비난했다. 그러나 제자인 바라문 학인 브라흐마닷따는 여러 가지 이유로 부처님을 칭찬하고 가르침을 칭찬하고 참모임을 칭찬했다. 이와 같이 그 스승과 제자 두 사람은 서로 정반대의 말을 하면서 세존과 수행승들의 무리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세존께서는 암바랏티까 왕립별장에서 수행승들의 무리와 함께 하룻밤을 묵으셨다. 그러자 유행자 쑵삐야도 암바랏티까 왕립별장에서 제자인 바라문 학인 브라흐마닷따와 함께 묵었다. 그 때에도 유행자 쑵비야는 여러 가지 이유로 부처님을 비난하고 가르침을 비난하고 참모임을 비난했다. 그러나 제자인 바라문 학인 브라흐마닷따는 여러 가지 이유로 부처님을 칭찬하고 가르침을 칭찬하고 참모임을 칭찬했다. 이와 같이 그 스승과 제자 두 사람은 서로 정반대의 말을 했다.

 

(Brahmajālasutta -하느님의 그물의 경, 디가니까야 D1, 전재성님역)

 

 

디가니까야 서문은 62가지 사견으로 시작되고 있다. 이런 사견을 소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불교가 유신론과 유물론, 우연론, 단멸론 등 모든 사상과 종교를 극복하였음을 말한다. 이는 인도불교사를 보면 알 수 있다. 그 중에 부처님당시 육사외도사상을 알면 확연하게 드러난다.

 

경에서 외도가 부처님을 비난하고 다님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외도의 제자는 반대로 부처님을 칭찬하고 다닌다. 어떤 차이일까? 그것은 부처님 그분에 대하여 자세히 아는냐 모르냐에 기인한다. 부처님 그분에 대하여 몰랐을 때 오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봉수 교수의 초기불교개론

 

부처님 그분에 대하여 알려면 부처님의 일생부터 공부해야 한다. 그래야 불교가 얼마나 위대한 종교인지 알 수 있다. 동시에 부처님 그 분이 출현한 이유를 또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인도사상사를 알아야 한다.

 

만일 부처님의 일생을 모르고 불교가 성립된 배경이 되는 외도 사상을 모른다면 외도가 될 수 있다. 부처님 그분에 대하여 알려면 외도에 대하여 완전하게 알아야 한다. 다행스럽게 유튜브에 외도사상에 대한 동영상이 올려져 있다. 그것은 최봉수 교수의 초기불교개론이다.

 

현재 유튜브에는 최봉수 교수가 대원불교대학에서 강연한 초기불교개론동영상이 올려져 있다. 1강은 을 소개 하면 최봉수교수의 초기불교개론(제1강)이다. 모두 14강으로 되어 있다. 비록 조회수가 몇 백회 밖에 되지 않지만 매우 소중한 자료이다.

 

흔히 말하기를 베스트셀러라고 하여 다 좋은 책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유명하다고 하여 반드시 훌륭한 사람은 아니다라는 말도 있다. 인기 연예인이나 스포츠스타가 유명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훌륭한 사람이라는 등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유튜브에서 조회수가 많다고 하여 모두 훌륭한 콘텐츠로 볼 수 없다.

 

비록 조회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내용이 알차고 건질 것이 있다면 훌륭한 콘텐츠이다. 최봉수교수의 불교학 개론이나 빤냐와로 삼장법사의 법문이 바로 그것이다.

 

정법을 비난하고 부처님을 욕보이는

 

부처님을 비방한 자는 유행자 쑵삐야라 했다. 주석에 따르면 회의론자싼자야의 제자라고 설명되어 있다. 쑵삐야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비난하였는지에 대한 구체적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쑵삐야의 제자가 부처님을 칭찬했다는 사실이다. 스승은 비난하고 제자는 칭찬한 것이다. 스승과 제자가 부처님에 대하여 정 반대의 말을 한 것이다.

 

부처님에 대한 비난은 부처님 당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인터넷이 발달된 정보통신의 시대에도 정법을 비난하고 부처님을 욕보이는 사람이 있다. 홍익학당 윤홍식님이 그렇다.

 

윤홍식님은 최근 홍익학당 일요대담이라는 동영상에서 부처님을 능멸하였다. 대담이라고는 하지만 주로 본인이 이야기 하는 형식이다. 대담에서 놀랍게도 필자의 글을 거론 하였다. 이전에 개구즉착 윤홍식님의 불교관련 동영상(2015-12-15)’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는데, 이 글에 대하여 자신의 입장을 밝힌 것이다.

 

왜 부처님과 가르침을 능멸하는가?

 

윤홍식님은 유튜브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매주 새로운 동영상이 올라 오는데 이제 까지 올린 동영상이 천 편이 넘는다고 한다. 더구나 조회수도 많아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들으면 들을수록 이야기가 빗나가고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 하게 된다. 마구 말한 이야기를 들어 보면 경전에 근거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개인적인 견해를 밝힌 것에 불과 하다.

 

윤홍식님의 말을 들어 보면 어느 것 하나 경전이나 주석 등 사실에 근거한 말을 찾아 보기 힘들다. 자신의 견해를 말하다 보니 부처님과 가르침과 불자를 능멸하는 말을 예사로 한다. 무엇 보다 가르침을 훼손하고 왜곡한다는 것이다.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말하는 것이다. 이런 예가 수도 없이 많지만 동영상에서 일부 녹취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제가 소승 많이 비방하니까 초기불교 연구하는 분들중에 저를 좀 비방하고 싶은 가 본데. 제동영상켰다고 모욕을 당한 기분이셨나.

 

-글 잘쓰기로 유명한가 봐요. 제가 보기에는 안타까운데이런 분들은 말 장난하지 마시고.  탐진치 입니다. 빨리 열반에 드세요. 부처님 보면 뭐라고 그러겠어요. ‘니가 그렇게 지껄이고 다니는 게 탐진치를 버리는데 도움이 되냐?’이렇게 말씀하실거에요. 초기불교의 부처님이라면.

 

-이분의 모습이 대승은 차치하고 초기불교에 맞는 모습입니까? 탐진치를 없애는 수행자의 모습입니까? 아니면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 본인이야말로 입만 열면 어긋나는 이야기 하고 계신데.

 

-이분은 대승이 전혀 이해안되시는 분이에요. 초기불교라도 공부하셔서 꼭 탐진치 버리는 쪽으로 가시길. … 아라한으로. 본인이 원하시는 것이 열반이라면 이렇게 구업지어도 됩니까?

 

-우리보다 소승이라 한다고 열이 뻗쳐 가지고. 그러면 중생을 위해 영원히 윤회 해 보실래요? 고건 싫죠?

 

-이런게 많은 피해자를 낳는 것 같으면 제가 대응 하죠. 지금은 몇 몇 분이 보시는 것 같으니까. 다 대응은 못 하거든요. 요글은 제 것을 오독한 것이니까 좀 이런 말을 할 수 있죠.

 

-저에 대해서 비방하는 글들 다 대응할 수는 없지만 피해자가 분명히 있고 그것 때문에 학당에 오해할 여지가 크면 저도 말을 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공개적으로 말을 하는 거죠.

 

-미얀마에서 수도하신 분들이 위빠사나 하다가 우연히 몇 번 든 열반상태를 한국에 와 가지고 제 강의 듣다가 이를 모르시죠할 때 들어가버요. 그래가지고 놀래서 오신 분들도 있어요. 미얀마에서 그렇게 고생했는데 어떻게 몰라 한마디에 들어요. 이게 그런 법이에요.

 

-알아차리는 자가 참나고 열반이에요초기불교에서 이걸 못하시는 이유가 육식밖에 없다는 거에요. ..사실 열반이 알아차리는 상태인데 그걸 못 받아 들이니까 육식이 지들끼리 알아차리고 있다는 거에요. … 찰라찰라 이러고 있다는 거에요. 이 작용만 있는데 에고가 없는데 갑자기 이것이 내것이다라고 나타난 에고가 나타났기 때문에 우리가 힘들어졌다는 거에요. 이 이론이 말이 되는 거 같아요?

 

-이런 이야기하면 제가 욕먹겠지만 저는 욕먹어도 좋아요. 여러분 머리가 밝아지는게 중요하지 제가 욕먹는게 중요한게 아니죠. 그런 얘기 제가 안하면 누가 하겠어요?

 

-초기불교사람들은 참나를 근본적으로 왜곡시켜서 이해해요. ‘알아차린자가 참나다. 그건 육식인데. 육식이 육식을 알차라려. 저것들 엉터리네.’라고.  열반이 참나라고 해도 아무리 안믿어요.

 

-열반이 알아차린다고? 열반에 들어 보았어야 알죠? 제 상상속에 있는 거에요. 열반은. 탐진치만 없으면 열반인데 알아차림이 없다는 것. 열반은 아무것도 없을 거라 생각해요.

 

-아무 것도 없으면 여러분 존재 소멸이에요. 그걸 원하신다고요? 그건 심각하게 정신에 병이 있는 사람아니고는 원하지 않을 겁니다.

 

-이런 얘기들을 아셔야 해요. 유튜브 강의 천 개가 돌고 있는 한국에서는 알아야지. … 이거 아시고 나면 여러분 인생문제가 풀린다니까요.

 

-잘못된 공식으로는 절대 여러분 문제 안풀립니다. … 존재 자체가 참나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뿌리 깊게 아셔야 합니다.

 

-제가 아라한 이론을 믿고 있다면 양심 안지켜도 됩니다. 몰라만 해서 열반만 계속 유지하면 제가 열반에 들지 양심적으로 사는 여러분이 열반에 들지 않아요. 열반이론으로는. 여러분이 아무리 양심적으로 살아도 열반은 제가 듭니다. 그게 과연 옳은 말일까요?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뭔가 찜찜한 것들이 막 나오잖아요.

 

-에고를 무시해요. 제가 제일 황당한 말은 스님들이 나란 없습니다아니 저렇게 얘기 하시면서 왜 없다고 하냔 말이에요. 그 말부터 찜찜하지 않아요? 그 말 듣고 진짜 나를 없앨 생각 드세요?...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나를 죽여야 해요. 진짜 나를 죽이고 싶으세요?

 

-이게 다 문제에요. 지금 석가모니 가르침은요 석가모니가 그 당시에 그렇게 가르치셨다는 게 증거로 있으니까 저도 더 옹호를 못해 드리는거에요. 석가모니 관심사는 7, 8식까지 가 있지를 않아요. 석가모니는 지금 괴로운 마음을 내려 놓는데만 관심 있었어요. 통증크리닉 같은 모토로 가르침을 폈어요.

 

-제자들이 더 파보다 보니까 공부하다 보니까 스승 보다 더 나간다. 스승얘기로 카바가 안된다. 그러니까 경전을 따로 써야겠다 해서 경전을 따로 쓴 거에요. 용궁에서 가져왔다고 둘러대지만 따로 쓴 거에요. 이해 되시죠?

 

-제자들 입장도 답답했을 겁니다. 지도교수 말만 믿고 논문 쓰다보니까 다른 결과가 자꾸 나오는 거에요. … 저는 그렇게 봅니다.

 

-대승은 온 우주를 육바라밀로 경영하자는 철학이고, 석가모니는 고통없애자는 철학이에요. 너무 달라요. 존중을 하지만 서로 섞지 말자는 거에요. 오히려 엉망이 되 버려요.

 

-8식이 없다면 열반을 붙잡고 있을 수 없어요. 8식은 7식을 낳는 것이 본성이고, 7식은 6식을 낳는 것이 본성이니까 여러분이 열반에 들어 간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얘기를 해 버려요. 대승은. 여러분이 열반에 들어 간다는 것 역시 의식 작용이고 석가모니는 그렇게 말하고 끝내 버려요. 우리 다 열반에 들어가면 되 하고 끝냈는데 열반에 들어간다구요?’ ‘들어 가는 놈이 있네요?’ 열반이 있고 열반이라는 과보를 누리는 과보를 있으려면 그 과보의 담당자인 아뢰야식이 있어야 하고 아뢰야식이 있으면 7, 나라고 여기는 7식이 나오는 거고, 6, 5식이 또 나온다 말이에요. 그러니까 열반이 오온이고 오온이 열반이구나 해버리고 끝내지 대승에서는 설명이 안되더라는 거죠.

 

-대승에서 의식을 더 파고 들어 보았더니 석가모니 말에 모순이 많이 드러나는거에요. .. 그 말씀 만으로 뭔가 부족한 부분이 나오더라는 거에요. 그걸 파들어가서 밝힌게 유식학이에요.

 

-소승은 좋은 업 짓는 것이 아니라 나는 간다에요나는 이판에서 빠질란다. 삼계밖에서 빠질란다. 발상이 그런데 좋은 업이 나옵니까? … 양심 없는 분은 무정하고요.

 

-지금 이순간 양심지키며 살려고 소승 비방하고 대승 추켜세우고 자꾸 제가 이 짓을 하는 이유가 뭐 겠어요? 이 얘기 할려고요. 소승식으로 가 버리면 양심지키자는 말이 별 힘을 못 가져여요. 강건너 집이 불이 타도 정말 강건너 불구경 하듯이 본단 말이에요…. 이런 논리로 가면 무서워져요. … 양심중한 줄 모르고 열반중한 줄만 알지. 몰라로 열반을 증득하시고 나머지 6바라밀로 양심을 구현하세요.

 

([홍익학당] 일요대담 : 보살과 아라한, 정확히 알고 길을 정하십시오!(160201)_A237(2016-02-24))

 

 

장문의 이야기를 녹취하였다. 이런 작업에 큰 의미를 두지 않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얼마나 왜곡하고 폄하 되고 있는지 보여 주기 위함이다.

 

경전에 근거하지 않는 이야기들

 

윤홍식님은 아는 것도 많고 말도 매우 빠르다. 그러나 초기불교에 대해서는 오해 하는 것이 많은 것 같다. 아마 초기경전이나 논장, 주석서 등을 많이 접하지 않아서 일 것이다.

 

윤홍식님은 참나와 열반이 같다든가 몰라하면 아라한이 된다든가 등의 이야기를 하였다. 하지만 이런 말은 경전에 없는 말이다. 부처님이 그렇게 말씀 하지도 않았다. 다만 윤홍식님 개인적인 견해를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윤홍식님은 부처님에 대하여 덜 깨달은 자, 미완성자로 보고 있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이 부처님이 발견하지 못한 것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유식도 그 중의 하나라 한다. 하지만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부처님 그 가르침 자체는 완전한 것으로 본다. 후기 대승에서 공사상, 유식사상, 여래장사상, 밀교 등이 나왔지만 모두 정법을 훼손하고 변질된 것으로 보고 있다.

 

후대로 갈수록 불교가 진화한 것이 아니라 퇴보하였다. 후대로 갈수록 공사상, 유식사상, 여래장, 밀교 등의 등장으로 퇴보를 거듭한 역사이다. 그 결과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졌다. 중국으로 건너 간 불교는 중국화 되어 전혀 다른 종교가 되었다. 부처님 당시를 기준으로 불교는 퇴보의 역사를 걸어 왔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이고 완성된 것이다.  

 

호잔님 말하기를

 

윤홍식님은 동영상을 보면 초기불교를 비방하고 있다. 동시에 석가모니 부처님을 능멸하고 있다. 이는 불교인에 대한 모욕이다. 부처님과 가르침과 거룩한 승가에 대한 모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소승 비방하고 대승 추켜세우고라 하여 삼보를 계속 비방할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 이와 같은 노골적인 비방에 대하여 인터넷필명 호잔님은 동영상을 보고 자신의 블로그에 이렇게 글을 올려 놓았다.

 

 

특히, 삼장을 자세히 공부하지 못하고 후기 대승경전 및 대승논서를 기준으로 붓다의 말씀을 이해하는 대승불자들은 테라와다불교 자체 또는 붓다 재세시의 붓다 가르침을 불완전한 가르침이라고 오해합니다.

발전논리를 바탕을 하고 있는 과학이나 철학를 전공했다고 하는 불자들 중에 이런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홍익학당을 운영하고 있는 윤홍식 대표라는 분의 강의를 들으면 테라와다불자로서는 할 말을 잃게 됩니다.

자신의 동영상에 대해 비판한 진흙속의연꽃님의 블로그 글에 대한 자기 입장을 밝힌 동영상( http://cafe.daum.net/wknd/9EhB/984 ) 을 미디어붓다의 댓글을 통해 알게 되어 한번 보게 되었는데, 처음에 자기의 입장을 피력한 것에 대해서는 좀 봐줄 수 있었지만, 이어지는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설명에서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한마디로, 윤홍식 대표님은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는 불자라고 할 수 없다고 봅니다. 지금까지 윤회를 통해 겪은 고통을 잊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그러한 견해로서는 앞으로 얼마나 윤회를 하면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저로서는 차마 말로 할 수가 없습니다.

현생에서는 사람으로 태어나 그런대로 고통을 견디고 있고 물론 천상에 태어나 괴로움을 모르는 경우도 있을 것이지만.... 사악처의 고통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않고 있는 그 사유에서는 사악처에서 겪은 고통을 기억할 수 있는 유정체(선천적으로 기억하거나 신통력을 통해 기억하는 유정체)가 되어보아야 그 견해가 바뀔 것이라고 봅니다.

윤홍식 대표님의 견해는 괴로움의 진리를 깊이 이해하지도 못하는 범부 중생의 어리석은 견해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일반 범부 중생들에게 괴로움의 진리를 사성제의 첫 진리로 항상 매우 강조하는 붓다의 가르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승불교의 보살도(붓다가 되기 위한 길)가 거의 대부분 범부 중생들에게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말한 적이 있습니다.

대승불교는 윤홍식 대표님이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바와 같이, 성자들의 사고방식(담마적 사고방식)이 아니라 갈애(또는 에고)를 버릴 수 없으므로 영원히 윤회하고자 하는 범부 중생들의 사고방식(존재적 사고방식)에 맞추어 일어난 불교입니다.


갈애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모르고(또는 열반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고) ‘몰라하면서 마음만 먹으면 아라한에는 쉽게 이를 수 있다는 황당한 말을 합니다. 윤홍식 대표님은 숭산스님의 선불교 영향도 받은 것 같지만, 강의 내용으로 볼 때 수행자인 숭산스님과는 전혀 다른 기질의 철학자라고 생각합니다.

윤홍식 대표님의 동영상에서 범부 중생들의 존재적 사고방식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대승불교의 뼈대를 이루는 참나의 논리, 7, 8식의 논리, 공의 논리 등은 존재적 사고방식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범부 중생의 논리입니다.

윤홍식 대표님 같은 사람들에게는 소귀에 경읽기가 될 것이므로, 아라한 및 붓다에 대해서 전혀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 노골적으로 아라한 또는 붓다를 비난하는 말을 하고 있는 자가 받아야 할 고통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예수불신 지옥과는 차원이 다른, 원인 조건과 결과의 법칙인 연기법 및 조건법에 따른 언급입니다.

수행하기 전에는 항상 알게 모르게 행한 해로운 업행에 대한 참회를 하고, 알게 된 것에 대해서는 그에 적합한 치유가 되어야 한다는 기본을 알고 있기는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중생들을 도와 줄 수는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붓다를 포함한 누구도 구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극소수의 중생을 제외한 대부분 중생은 아라한에 이르고 해탈 열반하는 것이 중생 구제에 가장 최선책이라는 것을 윤홍식 대표님은 현 상태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아라한 소승이라고 그렇게 이해할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홍익학당 윤홍식 대표님의 견해는 불교라는 말로 포장을 하고 있으므로, 기독교 등의 유일신 논리에서 말하는 견해와 표면적으로는 다르지만 근본적으로는 별 차이가 없는 철학자의 논리에 의한 견해라고 봅니다.”

 

(호잔님, 사고(생각)하지 않는다라는 말씀과 법문에 대한 오해(홍익학당 윤홍식 대표님의 견해에 대한 언급 포함), 2016-02-28)

 

 

호잔님에 따르면 초기불교에 대하여 잘 모르기 때문에 발생한 오류로 보고 있다. 이는 자신의 생각만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기불교와 테라와다불교에서는 철저하게 경전위주로 법문을 한다. 그래서 어느 법사가 말하든지 똑 같다.

 

경전에 바탕을 두지 않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 모두 딴 소리 할 것이다.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말이 모두 다른 것이다. 이는 경전을 무시하기 때문에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 문제라 본다.

 

초기불교와 테라와다는 철저하게 전승된 부처님원음만을 말한다. 그래서 딴 소리가 나올 수 없다. 만약 누군가 가르침에 대하여 얘기하면 가장 먼저 경전을 찾는다. 경전과 비교하여 내용이 맞으면 받아들이고 경전에 없는 개인적 견해를 말하면 내치는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상황을 예견한 듯

 

외도의 비난 대하여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부처님 가르침에 답이 있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부처님이 미리 말씀 하신 것 같다. 마치 부처님이 오늘날과 같은 상황을 예견한 것 같다. 외도 쑵삐야가 부처님을 비방하고 다니자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다른 자들이 나를 비난하고, 가르침을 비난하고, 참모임을 비난하더라도, 그것에 대하여 그대들은 적대하지 말고 낙담하지 말고 마음으로 분개하지 말아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다른 자들이 나를 비난하고, 가르침을 비난하고, 참모임을 비난한다고, 그것에 대하여 그대들이 적대하고 화내고 불쾌하게 여긴다면, 그대들에게 그것이 장애가 된다.

 

수행승들이여, 다른 자들이 나를 비난하고, 가르침을 비난하고, 참모임을 비난한다고, 그것에 대하여 그대들이 적대하고 화내고 불쾌하게 여긴다면, 다른 자들이 말을 잘했는지 말을 잘못했는지 그대들이 알 수 있겠는가?

 

(Brahmajālasutta -하느님의 그물의 경, 디가니까야 D1,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외도의 비난에 대하여 비난으로 맞대응 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고 적대하지도 말고 낙담도 말고 분개하지도 말라고 하였다. 왜 그럴까? 그것은 그 사람의 말을 들어 직접 들어 보아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바른 말을 했을 수도 있고 잘못 알고 말을 했을 수도 있다. 만일 상대방이 잘못 알고 있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어떻게 외도를 대해야 할까?

 

부처님 당시에 바라문사상뿐만 아니라 육사외도의 사상도 있었다. 이렇게 사상적으로 혼란스런 시기에 비난과 비방이 난무하였을 것이다. 외도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비방하였을 때 비난하지 말고 그 말을 분석해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대응하라고 말씀 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다른 자들이 나를 비난하고, 가르침을 비난하고, 참모임을 비난하더라도, 그것에 대하여 사실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사실이 아니라고 이와 같이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그것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그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라고 설명해 주어야 한다.

 

(Brahmajālasutta -하느님의 그물의 경, 디가니까야 D1, 전재성님역)

 

 

외도가 부처님을 비난하고 가르침을 능멸하고 성스런 승가를 모욕하였을 때 비난으로 맞대응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다만 사실이 아닌 것을 지적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이 아닌 것에 대하여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 진실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라고 역시 말해 주어야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잘못된 것을 보고서도 지나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요즘은 인터넷시대이다. 특히 유튜브에는 온 갓 것들이 다 들어 있다. 그 중에 종교와 사상에 대한 것도 많다. 불교에 대한 것도 부지기 수로 많다. 누구나 말을 하여 클릭 몇 번으로 유튜브에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옥석을 가려야 한다. 조회수가 많다고 하여 반드시 훌륭한 콘텐츠라 볼 수 없다. 만에 하나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라 하고,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이라 한다면 그 순간 그 동영상은 버려지게 된다. 설령 동영상이 천 개 또는 만 개가 돌아 간다고 해도 똑같은 취급 당할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잘 전승되어 왔다. 그리고 가르침 자체는 완전한 것이다. 완전하지 않았다면 선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결집을 통하여 방대한 가르침이 입에서 입으로, 또 경전으로 전승되어 왔다. 이렇게 전승되어 오늘날 빠알리삼장형태로 부처님원음을 접하게 되었다.

 

부처님 제자들이 목숨 걸고 지켜낸 부처님원음은 불자들 뿐만 아니라 인류의 소중한 자산이다. 그럼에도 있지도 않은 사실로 왜곡하고 폄하하고 조롱거리로 만들었을 때 이를 두고 볼 수 없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사실이 아닌 것은 사실이 아닌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진실이 왜곡하였을 때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라고 분명히 말해 주어야 한다고 했다. 우리에게 그것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그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라고 없는 사실을 말하는 것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려 주어야 한다. 그래서 더 이상 구업 짓지 말고 올바른 길로 가게 해 주어야 한다. 이것 또한 자비심의 발로일 것이다.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부처님 가르침에 이런 말이 있다. 그것은 알면서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자가 저지르지 않을 죄악은 없다.”라는 말이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자는 살아 가면서 앞으로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 하셨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두 가지 밝은 원리가 세상을 수호한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것이다.”(It.36) 라 하였다. 부끄러움(양심)과 창피함(수치심)을 아는 것이 이 사회를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과도 같다는 것이다.

 

만일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사회가 되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장’이 되어 짐승의 세계와 똑 같아 질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오로지 사실을 사실대로 말해야 하고 진실을 진실대로 말해야 한다.

 

 

[세존]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결코 알지 못한다면,

그들은 밝음의 근원에서 벗어나

다시 태어남과 죽음에 들어선다.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언제나 올바로 안다면,

그들은 청정한 삶을 성장시켜

적멸에 들어 다시 태어남을 부순다.”(It.36)

 

 

 

2016-02-2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