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걸 알면 모든 것이 다 풀려요” 심성일선생의 ‘이것’ 법문을 듣고
‘이것’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만 알면 깨닫는다’고 한다. 마치 로또에 당첨되면 ‘인생역전’되는 것처럼 이것만 알면 깨닫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스님들이 나한테 찾아와요”
이것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느 대화방에서 법우님의 간단한 글을 통해서이다. 법우님은 부산 무심선원 ‘김태완선생’을 말하면서 깨달음이 달리 있는 것이 아니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이것뿐이야. 바로 이것뿐이거든”무심선원 김태완님의 불이법문을 듣고(2015-11-230’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그런데 인터넷시대에 유튜브에는 이것을 말하는 사람들이 무척 많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관심을 가지고 지켜 보았다.
이것을 말하는 사람들 중에는 스님도 있고 재가자도 있다. 대체로 선종계통의 사람들이다. 그 중에 ‘벽공선생’이라 불리는 재가자가 있다. 유튜브동영상에서 벽공선생은 “알만한 스님이 나에게 배우고 갔어요.”라고 말했다. 대체 어떤 내용일까? 메모한 것을 짤막 하게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스님들이 나한테 찾아와요. 책보고. 두시간 이야기 하면 ‘알겠다’고 ‘정말고맙다’고. 내가 한 이야기가 자기가 이제 까지 경전을 읽고 봤던 수 많은 조사들의 이야기와 정확하게 일치가 된다는 거에요. 그런데 이것을 아무도 이야기 해준 사람이 없다고 해요. 암만 책보고 수행하고 헤매도 모르겠는데 당신이 얘기해 주니까 알겠다고. 이름 없는 스님도 아니고 책도 몇 권 내고 유명한 스님이에요.”
(진여문 벽공선생님 청주심우선원 특강(2014년07월04일))
요즘은 스님들이 재가자들에게도 배우는 모양이다. 한평생 깨달음을 추구하며 살아 온 스님이 벽공선생의 ‘이것’ 법문 두 시간 듣고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벽공선생은 “부처님 팔만사천 법문이 다 이 한가지, 이 한가지를 이야기한 것 뿐이에요. 이걸 알면 모든 것이 다 풀려요.”라고 말한다.
“이걸 알면 모든 것이 다 풀려요”
그렇다면 스님은 재가자에게 법문을 듣고 어떻게 깨달았을까? 벽공선생에 따르면 “내가 책상을 치면서 ‘왜 이걸 몰라요?’라고 말하는 순간에 알았다는 거에요.”라 한다. 그래서일까 벽공선생은 법문 중에 책상을 탁탁 치거나 죽비를 탁탁 치기도 한다.
벽공선생에 따르면 이것만 알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한다. 죽음도 극복할 수 았다고 한다. 그래서 “죽음이 있겠어요? 반야심경에서 불생불멸 그러잖아요. …우리 참나는 바뀌지 않아요. 이건 죽지도 나지도 않는 거에요.”라 말한다. 반야심경의 한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이렇게 반야심경을 말하는 것은 이것을 말하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때로 금강경이나 선어록, 심지어 도덕경, 더욱더 놀라운 것은 바이블구절도 인용한다는 사실이다.
“이 공부는 발을 디디면 뺄 수 없어요”
대체 이것이란 무엇일까? 유튜브에서는 수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말한다. 대체 이것의 마력은 무엇일까? 벽공선생은 이것의 매력에 대하여 “이 공부는 발을 디디면 뺄 수 없어요, 뭔가 이끌어 가는 그 힘이 작용해 가지고 다시금 찾게 되 있어요.”라 하였다. 마치 중독성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기 위하여 유튜브 이곳 저곳을 찾거나 더 적극적인 사람들은 오프라인 공부모임에 참석함을 말한다.
책상을 탁탁 치며
이것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면 별다른 것이 없다. 지금 여기 이렇게 실재하고 있는 것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라 한다. 그래서 “영원불멸하는 자기를 모르고 생겼다 사라지는 그림자와 물거품 같은 것을 자기라고 잘못 알고 있는 거에요.”라 한다. 이런 사실을 상기 시켜 주기 위하여 종소리를 들려주고 책상을 탁탁 치고 죽비를 탁탁 친다. 심지어 밖에서 떠드는 소리도 이것이라 한다.
이것법문에 따르면 지금 눈에 보이고 귀로 듣는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부처 아닌 것이 없다고 한다. 깨닫고 나면 평상심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공부를 하고 깨달으면 실망하게 된다고 한다.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는 줄 알았으나 배고프면 먹을 줄 알고 졸리면 잘 줄 아는 그것을 아는 것이라 한다. 또 한편으로 모르는 것을 아는 그 마음이 바로 깨달음이라 한다.
재가자들이 선을 대중화?
이것을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경전이 달리 필요 없다. 종종 반야심경, 금강경, 선어록, 도덕경, 심지어 바이블이 언급되긴 하지만 이것에 대한 보조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말하는 사람의 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특별히 법문주제도 없다. 특별히 준비한 것도 없다.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생각나는 대로 즉흥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수 많은 동영상이 돌아 가지만 대동소이하다. 어느 부분을 찍어도 늘 듣는 말은 이것만 깨달으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대충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알 것 같다. 선사들이 법문할 때 말하던 것을 현재 사용하는 말로 쉽게 풀이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같은 말이라도 한자어를 사용하면 고상해 보이는데 스님들의 본래면목에 대한 법문을 들으면 이해 하기 힘들다. 그래서 깨달음이 신비화 되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유튜브동영상에 본 이것을 말하는 재가자들의 말을 들어 보면 이해 하기 쉽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하기 위해서 스님들이 법상에 앉아 ‘할’과 ‘방’을 하고 ‘양구’를 하였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본다면 유튜브상에서 이것을 말하는 재가자들의 등장은 선을 대중화 시켰다고 볼 수 있다.
송담스님 법문에서
몇 년 전 송담스님의 법문을 열심히 듣던 때가 있었다. 매일 아침 불교방송 불교강좌시간에 송담스님의 오래된 법문테이프를 들려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들으면 들을수록 회의감만 들뿐이었다. 참나를 얘기 하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얘기 뿐이었다. 이에 대하여 느낌 소감을 ‘“내가 바로 영원과 하나된다”용화선원 송담스님의 불교방송 법문을 듣고(2012-03-24)’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이 법문에서 송담스님은 이렇게 말하였다.
“세상에는 성주괴공이 있고, 우리 몸에는 생노병사가 있고, 우리 생각에는 생주이멸이 있어 생겨났다 잠시 모습을 유지하다 얼마 안 가 그것이 변질이 되어 없어지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무상한 것입니다.
이렇게 무상하고 믿을 수 없고 허망한 것인데, 그 속에서 변치 않는 영원성이 있는데, 그 영원성을 우리는 그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영원성을 깨닫기 위해서 신심을 내고, 그것을 깨달음으로서 내가 바로 영원과 하나된다. 진리와 하나가 된다.”
(인천 용화선원 송담스님, 불교방송 불교강좌 2012-03-24일자 , http://www.bbsi.co.kr/)
이 법문에서 송담스님은 ‘영원’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불교에서 영원을 말한다는 것은 ‘삼법인’에 어긋나는 것이다. 제행무상이고 제법무아인데 영원한 그 무엇이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비불교적이다. 이런 점을 지적하여 비판한 바 있다. 그런데 송담스님의 법문을 들어 보면 ‘이뭐꼬’를 말하면서 바보 멍텅구리가 되어야 진리를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 진리라는 것은 참나를 말한다.
송담스님에 따르면 교리를 알 필요 없다고 하였다. 분별망상만 일어나기 때문에 공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법을 생사윤회로 할지언정 소승삶을 바라지 말라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라 하였다. 그래서 경전에 대하여 임시적으로 설해진 방편설이지 불교의 구경법이 아니라 하였다.
송담스님에 따르면 오로지 ‘이뭐꼬’하며 알 수 없는 의심만을 내면 된다고 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는 의정이 폭발하여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고 했다. 이런 법문에 식상하였다. 수 년간 지속된 법문에 새로울 것도 없는 똑 같은 내용의 반복이었기 때문이다. 선가에서 말하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을까 하여 들어 보았으나 부처님 가르침과는 정반대로 말하는 것이 실망감만 주었다. 그런 송담스님의 법문은 깨달음은 특별한 것이고 일종의 신비스런 것이라는 생각을 주기에 충분했다.
스님들이 왜 도박하는가?
한국불교에서 깨달음은 신비화 되어 있다. 재가불자들은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더구나 선을 전문으로 하는 스님들도 깨닫기 힘들다고 하니 재가자로서는 엄두가 나지 않은 것이다. 선종에서 깨달음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고 범접할 수 없는 것일까?
스님들의 말을 들어 보면 깨달음이란 것이 하루 아침에 단기간에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한다. 선방에서 10년, 20년, 30년, 아니 평생을 화두를 들고 깨달음을 추구하지만 깨달음을 이루기가 쉽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큰 뜻을 품고 출가하여 선방에서 10년 정진하였지만 성과가 없을 때 자포자기 한다고 한다.
스님들은 처음에는 한 3년만 하면 깨달을 것 같아 일종식하며 열심히 정진한다.그러나 10년 동안 공부해도 이루지 못하였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 아마 자포자기할 것이다. 자포자포자기 심정으로 술도 마시고 도박도 한다는 것이다.
스님들이 도박을 하는 이유는 간화선 수행을 해도 결과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화투나 카드는 뒤집거나 까기만 하면 결과를 바로 알 수 있다. 10년, 20년, 30년, 심지어 평생 선방에 앉아 있어도 한소식을 듣지 못하는 간화선 수행자가 자포자기 한 상태에서 화투나 카드놀이에 빠지는 것은 어쩌면 화투와 카드놀이가 즉각적 결과를 가져 올 수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화투나 카드는 단지 까거나 뒤집기만 하면 즉각적 결과를 알 수 있지만 화두선은 그렇지 않음을 말한다.
“갑갑해 미치겠다”
한국불교에서 깨달음이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스님들의 말을 들어 보면 정말 어려운 것 같다. 10년이 아니라 평생공부해도 깨달았다는 사람이 매우 드문 것이 이를 말해준다. 그래서일까 도법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계)종단 출가 수행자가 비구·비구니를 포함하여 대략 1만 2천 명이라고 한다. 50여 년 전체를 합치면 연인원 50여만 명이 수행에 진력해온 셈이다. ……그동안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함께 살기도 하고 쟁쟁한 소문을 듣기도 했다.
그런데 세월이 한참 지나고 나면 깨달았다고 큰소리쳤던 사람이 이상하게 된 경우가 의외로 많다. 실제 괜찮게 된 경우는 50만 명 중에 20여 명 정도를 넘지 않는다. 그 20여 명도 본인의 주장과는 달리 대중이 반신반의하는 것을 보면 깨달은 도인이 기대했던 것처럼 매력적이지 않은 듯하다. 그렇게 볼 때 수행하여 이루어낸 결과가 너무 초라하고 허망하다.”
(한국불교의 수행법, 무엇이 문제인가 / 마성, 불교평론 2011-09-01)
도법스님의 탄식을 보면 깨달음이라는 것이 한국불교에서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 수 있다. 이런 예는 많이 있다. 수경스님은 교계신문에서 상좌들의 고충을 이야기하였다. 수경스님에 따르면 “봉암사에서 20여년을 간화선 수행을 한 상좌가 얼마 전 토굴에 왔다. 묻더라. 답이 보이지 않는다고. 갑갑해 미치겠다고.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라 하였다.
간화선 수행을 한 스님이 ‘갑갑해 미치겠다’라고 했다. 그것도 한 두 해가 아니라 20년 했다는 것이다. 이런 소식을 접하였을 때 재가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깨달음이란 요원한 것이다. 그래서 이 번 생에서 깨달음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열심히 보시나 하여 다음 생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다’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런데 최근 유튜브에서 이것을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깨달음은 아무 것도 아니다. 바로 이것만 알면 깨닫는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심성일선생의 동영상을 듣고
유튜브에서 ‘이것’을 말하는 사람들은 많다. 주로 재가자들이다. 송담스님 법문처럼 게송을 구성지게 읊는 등 고상한 문자를 사용하여 신비화 시켜 놓지 않았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친근하게 이야기한다. 아마 이런 점이 스님과 재가자 법문자들의 차이점일 것이다.
재가자들의 이것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매우 쉽다. 너무 쉬어서일까 그 동안 스님들이 ‘이런 말을 왜 이렇게 고상하고 난해하고 어렵게 말하였을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이다.
이것을 말하는 사람 중에 들을만한 것이 있다. ‘벽공선생’과 ‘심성일선생’이야기이다. 특히 심성일선생의 이것 이야기를 들어 보면 깊이가 느껴진다. 선사들이 어렵게 얘기한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를 매우 쉬운 언어로 알기 쉽게 설명하는 것이다.
유튜브에는 심성일선생에 대한 동영상이 수 없이 깔려 있다. 매주 새로운 동영상이 업로드된다. 그 중 최근 동영상을 보았다. 매번 들을 때 마다 똑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지만 경청할 만하다. 그렇다고 심성일선생의 이야기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비판하기 위해 소개한 것일 뿐이다.
라마나 마하리시의 책에서
심성일 선생은 가장 최근 동영상에서 ‘라마나 마하리시’ 이야기를 하였다. 인도 힌두교 명상가이자 성자로 알려진 마라리시의 책 ‘있는 그대로’의 문구를 읽어 가며 이것에 대하여 설명한 것이다.
라마나 마하리시는 “그대가 깨달음이다.”이라 했다. 심성일선생에 따르면 이 말에 대하여 “선승하고 뭐가 달라요?”라 말한다. 힌두교 성자의 말이나 선승의 말이나 다름 없다는 것이다. 선승들이 “부처가 뭐야?” “그대는 누구입니까?” 라고 말하는 것과 하등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불자들이 선을 공부한 스님과 대화 하다 보면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 있다. 그것은 “그대는 누구입니까?”라는 말이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불자들은 답을 못한다. 마치 허를 찌르듯이 묻는 질문에 전혀 답을 하지 못하는 것은 선의 세계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대는 누구입니까?”
만약에 스님이 “그대는 누구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최근 이것을 말하는 사람들의 동영상을 접한 결과 “나는 나일 뿐입니다.”라고 말하면 정답에 가깝다. 이에 대하여 심성일 선생은 “그대가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그대의 다른 이름이다.”라 하였다. 내가 그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가 이걸 1988년도에 읽었어요. 이호준 선생이 번역한 ‘나는 누구인가?’ 청하출판사에서 나온 얄팍한 책이었는데, 제목에 혹해 가지고 읽었어요. 밑줄도 치고 읽었어요. 나름대로는 이해 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고 15년쯤 지나서 다시 읽고 깜짝 놀랐어요. 내가 그건데.”
(2016년 03월 05일 몽지릴라 서울 공부모임 - 2)
심성일선생은 자신이 오래 전에 읽었던 마하리시 책을 나중에야 이해 할 수 있었다고 했다. 처음 읽었을 때 이해했다고 생각했으나 진짜로 이해한 것은 한참 후에 다시 읽었을 때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에 대한 것이다. 내가 그라는 것이다.
“오직 모를 뿐!”
이것을 말하는 사람들은 ‘공’에 대해서도 말한다. 이것이 공과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내용물이 없는 의식’이라 한다. 이를 ‘참나’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이것은 맛보고 싶어도 맛 볼 수 없고 알고 싶어도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아무리 이걸 맛 보고 싶어도 맛 보지 못해요. 그래서 숭산 같은 이는 ‘오직 모를 뿐!’ . 아이비리그 출신 그 똑똑한 애들을 골탕먹인게 뭐냐면 스스로 모르게 인정했던 거에요. 소크라테스가 썻던 방법이에요. 넌 모른다. 모른다는 사실만 지켜라. 알려고 하지 마라. 그 아는 마음이 속임수다. 내가 뭘 알었어. 내가 뭘이해했어, 아니에요. 죽음으로 가는 길이에요. 안다는 모른다와 짝이에요. 아무리 많이 안다 해도 그 반대편에 모른다가 있어요. 그래서 아는 자들은 우유부단할 수밖에 없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이 용감할 수 있어요. 왜? 목숨도 바칠수 있으니까.”
(2016년 03월 05일 몽지릴라 서울 공부모임 - 2)
숭산스님은 눈 푸른 외국인 스님들을 제자를 많이 양성하였다. 그 때 자주 하던 말이 ‘오직 모를 뿐’이라는 말이다. 원래 이말은 간화선 3요체 중에서 대의심에 해당되는 말이다. 그런데 심성일선생에 따르면 “넌 모른다. 모른다는 사실만 지켜라.”라는 뜻이라 한다. 왜 그럴까? 모르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라 한다. 아무리 많이 안다고 해도 모르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오직 모를 뿐’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모르는 것을 아는 것도 깨달음이라 한다. 매우 역설적인 말이다.
화계사에 가면 숭산스님추모비가 있다. 추모비에서 두 구절이 눈길을 끌었다. 하나는 “Only don’t know(오직 모를 뿐)”이고, 또 하나는 “Only doing it(오직 할 뿐)”이다. 두 문구는 간화선 삼요체에서 대의심과 대분심에 해당된다.
유튜브에서 이것을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선사들의 법문을 보니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다. 결국 본래의 마음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주장자로 탁자를 탕탕치거나 법문중에 고함을 지르거나, 침묵으로 일관하는 양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숭산스님 역시 제자들에게 이것을 알려 주고자 하였을 때 무언가를 탁탁 쳤음을 알 수 있다.
“예, 그렇습니다.” “아멘”
심성일선생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든 것이 명쾌하다. 그동안 궁금하게 생각하였던 선에 있어서의 깨달음이나 선사들의 할과 방의 의미를 분명하게 알게 해 준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스님들이 본래면목이나 본래불에 대한 막연한 가르침 보다는 훨씬 이해 하기 쉽다.
그렇다면 선에서의 깨달음은 이렇게 쉬운 것일까? 심성일선생에 따르면 매우 쉽다고 한다. 실망할 정도로 쉽다고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 공부 이 가르침에 반신반의해요. 또는 불신하는 마음으로 들어 올 수 있어요. 그런데 나중에 지나고 보면 이것은 ‘예, 그렇습니다.’ ‘아멘’밖에 남는 것이 없어요.”라 했다.
“초기불교에서 부처님이 사성제를 이야기 하셨는데…”
어떤 이가 심성일선생에게 질문했다. 질문자는 “초기불교에서 부처님이 사성제를 이야기 하셨는데 정진할 필요도 없다고 말씀 하시네요. 죽는 순간까지도 정진을 이야기 하셨는데…”라 하였다. 누구나 이것 법문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며 질문할 수 있는 내용이다. 이에 대하여 심성일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두 가지로 말씀 드릴께요. 이런 질문이 왔을 때 지금 부처님 말씀을 근거로 하셨잖아요. 부처는 어디 있습니까? (질문자 우물쭈물) 그럼 이걸 닦을 필요 있어요? 얻을 수 있어요? (질문자 우물쭈물) 그래서 제가 두 번째 답도 준비했어요.
경전이 온갖 모순된 이야기 투성이죠. 그래서 교외별전, 경전에 의지 하지 말라고 그랬어요. 초기불교든 뭐든 어떤 것을 의지해서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하는데 그게 실제로 뭐냐 이말이에요?
예를 들어서 빠알리어 장경이 있다고 칩시다. 빠알리어 장경이 여기 있어요.(죽비를 들고). 빠알리어 장경이 여기 있습니까? 진짜 자기가 초기불교를 했다면 빠알리어 장경이 어디 있나요? 그건 헛거에요. (죽비를 내려 놓고) 그게 부처님 가르침 아니에요. 눈에 보이고 만져지고 헛거다. 그게 초기불교지 여기는 그게 아니라니까요. 이거는 내가 이것을 실제로 여기는 착각을 부서 주기 위한 처방전에 불과한 거에요. 처방전에 의지해서 이것만 쥐고 있다고 해서 병이 낫는 건 아닙니다. 이걸 통해서 실제로 약을 먹어야지. 그래서 경전에 의지하지 말라고 했어요. 모두 방편설일 뿐이에요.”
(2016년 03월 05일 몽지릴라 서울 공부모임 - 2)
마치 준비된 답변을 듣는 것 같다. 아마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질문에 대한 답변을 보면 첫 마디가 “부처는 어디 있습니까?”라는 말이다. 이런 ‘역질문’을 받았을 때 누구나 명쾌하게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아마 머리를 굴려서 이것 저것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할 것이다. 역질문을 받은 질문자 역시 우물쭈물 하며 궁시렁 거리는 것 같았다.
선을 닦았다는 스님들과 대화 하다 보면 받게 되는 질문이 “부처는 어디 있습니까?”라든가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말이다. 이런 질문 또는 역질문을 접하면 상대방은 당황하게 마련이다. 이런 질문 또는 역질문에 초기불교 경전에 의거하여 답하면 무조건 틀린 것이 된다. 심성일선생 역시 그런 취지로 말하였다. 경전에 의지 말라는 것이다. 경전은 방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라 한다.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은 말이나 문자가 아니라 마음과 뜻으로 스승과 제자 사이에 전승되었음을 말한다.
경전을 이야기하면 하수중의 하수
선을 공부하는 선사들이나 이것을 말하는 사람들과 경전에 대하여 이야기하면 무시 당하기 쉽다. 경전의 문구를 들어 이야기 하면 하수 중의 하수로 보는 것이다.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은 언어나 문자로 표현 할 수 없는 것임에도 문자로 기록된 경전의 문구를 곧이 곧대로 믿는 것에 대하여 하수 중에 최하수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심성일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전에 의지하는 사람, 생각에 의지하는 사람들은 이 선(禪)을 비합리다 넌센스다 이렇게 생각해요. 그게 아닌 거에요. 이게 엄밀한 과학이에요. 지금 이렇게 밝아 있는 이걸 부정하고 2500년 석가모니 붓다가 어디 있냐 이말에요? 바로 지금 여기 아니면 있을 수가 없어요. 2500년 전 그림이 여기서 그려지는 거에요.
초기경전이라는 그림이 여기서 대승경전이라는 그림이 여기서. 여기서는 일체의 상이 파해지는 거에요. 그래서 일로(여기로) 수렴하는 거에요. 그래서 이것을 진리라 하는 거에요.
그래서 여기서는 부처도 필요 없어요. 부처도 죽여 조사도 죽여. 이것일 뿐인데. 그래서 의지하지 않게 되요. 부처님 똘마니 되지 않는 거에요. 큰스님 팬클럽 안되는 거에요.
그렇다고 버릇 없이 아만을 떠는 건 아니에요. 이것은 누구나 똑 같이 가지고 있는 거니까. 그제서야 부처님의 참뜻을 알아요. 경전의 말에 안속아요.
(2016년 03월 05일 몽지릴라 서울 공부모임 - 2)
심성일 선생에 따르면 경전에 속지 말자고 했다. 경전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고한 방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선에서는 팔만대장경은 고름닦는 휴지라 그랬어요. 해인사 대장경 판은 빨래판만도 못한 거에요. 산부처가 죽은 부처 꼬붕노릇 해요.”라 하였다. 언어와 문자로는 이것을 알 수 없음을 말한다.
‘이것’을 말하는 사람들의 공통점 세 가지
이것을 말하는 수 많은 사람들, 자칭타칭 깨달았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런데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이것을 말하는 사람들의 첫 번째 특징은 모두 ‘이것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다’라 한다. 이것만 알면 깨닫는 것이고 모든 것이 일거에 해결된다고 한다. 지금 겪고 있는 고통도 해결되고 과거의 업으로 인한 괴로움도 해결되고 미래의 괴로움도 없을 것이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이것은 ‘만병통치약’과도 같다.
이것을 말하는 사람들의 두 번째 특징은 ‘이야기만 들어도 깨달을 수 있다’는 말이다. 깨닫기 위하여 경전을 보거나 수행을 하지 말라고 한다. 심지어 무심선원 김태원선생의 경우 선방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을 “내 몽뎅이로 때려 주고 싶어”라 했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수행한다고 앉아 있는 것이 한심해 보여서 일 것이다.
이것을 말하는 사람들의 세 번째 특징은 ‘이것이 참나이다’ 라 한다. 이것에 대하여 본래불, 본래면목, 진여, 불성 등 여러 이름을 붙일 수 있는데 대체적으로 ‘참나’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그런데 참나는 불교에서만의 참나가 아니다. 기독교에서의 하느님도 참나라 하고, 노자에서 존재의 근원도 참나와 같은 것이라 한다. 그래서 진리의 보편성을 이야기 한다. 모양도 형태도 없는 이것에 대하여 각 문화전통에 대하여 이름 붙이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반야심경이 소의경전?
‘이것’에 대해 수 많은 이야기가 있다. 대체로 이것은 참나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면 거기에는 교리도 없고 당연히 경전도 수행도 없다. 당연히 계율도 없다. 또 거기에 불교도 없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도 없다.
이것을 말하는 모임에서 누군가 경전을 근거로 사성제나 팔정도를 말하면 웃음거리가 된다. 본래 없는데 무슨 사성제나 팔정도 타령하느냐는 식이다. 그러나 ‘없을 무(無)’자와 ‘아닐 비(非)’자 행진으로 이루어진 반야심경은 사실상 교과서와 같은 것이다. 유일하게 믿고 유지할 수 있는 경전이 불과 200 여자 밖에 되지 않는 반야심경이다. 반야심경이 사실상 소의경전이라 볼 수 있다. 금강경이나 선어록도 종종 언급된다.
부처님이 참나를 깨달았다고
이것을 말하는 사람들은 초기경전에 대하여 대체로 무지한 것 같다. 대표적으로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이 새벽별을 보고 이것을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송담스님도 불교방송 불교강좌에서 그렇게 주장했다. 하지만 부처님이 이것, 즉 참나를 깨달았다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만일 이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면 부처님이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이것을 말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영원불멸의 참나이다. 참나는 반야심경에서 진공묘유와 같은 것이다. 모든 현상의 근원이라 한다. 그런데 이것을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과 매우 동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과 정반대의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참나가 그렇다. 그렇다면 참나를 말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과학적 유물론자 강병균교수에 따르면
불교닷컴에 포항공대 강병균교수의 칼럼이 실렸다. 평소 과학에 근거하여 불교를 재해석한 글을 올리고 있는데 잘 보면 유물론이다. 부처님 당시 아지따 께사깜발린의 유물론과 흡사하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유전자에 의한 연기론처럼 생물학적 기반에 근거를 둔 진화연기론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유물론이다. 모든 과학이 그렇듯이 물질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진화연기론 역시 유물론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업과 윤회, 삼계를 부정하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
과학적 유물론에 바탕을 둔 강병균교수는 최근 칼럼에서 참나를 비판하였다. 참나는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와 같다는 것이다. 오늘날 힌두교에서 말하는 것과도 같다. 그래서 참나를 말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아래 소개하는 진제·서암·청담·혜국·혜민의 참나에 대한 발언들을 켄 윌버의 참나에 대한 발언과 비교해 보라. 이들의 참나는 순진한 불교신도들이 생각하듯이 ‘부처가 될 능력’인 불성(佛性)이 아니다:
‘미약한 시작을 창대한 끝으로 만드는 가능태(可能態)’로서의 부처가 아니다. 보고 듣고 생각하고 슬퍼하고 분노하는, 감각작용·사고작용·감정의 주체인, 구체적인 존재이다.
현대의 깨인 기독교인들은 구약에 쓰여 있는 ‘분노와 시기와 질투의 하나님’을 즉 ‘감정을 가진 인격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비인격적인 이신(理神)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무신론과 무아론을 가르친 부처님의 제자인 한국선사들이, ‘보고 듣고 슬퍼하고 분노하는 인격적인 존재인 참나’를 가르치는 것은 가히 충격 그자체이다.
기독교가 인격신에서 비인격신으로 진화를 하고 있는데, 불교는 거꾸로 무신론에서 사실상의 유신론으로 그것도 인격신론으로 후진하고 있다! 누가 6신통을 가지고 하늘을 날아다니며 영원히 산다면 그리스 신화의 신들과 뭐가 다른가.
‘맨몸으로‘ 하늘을 날다니, ‘마차를 타고’ 하늘을 질주하는 포세이돈보다 더 신답지 않은가? 참나론자들은 참나에게 이런 능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참나는 신이다.
그런데 조계종 전(前)종정 서암에 의하면 주인공 참나는 슬퍼하고 분노하므로 인격신이다. 그것도 사실은 자기들이 우주의 창조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아래 인용한 청담 스님의 주장에 의하면 태양 등 우주만물은 진아 즉 참나에서 나온다. 그의 불교사상은 힌두교적 유아론의 극치이다. 청담은, 근대한국불교정화운동의 주역으로서, 한국불교에서 대처승들을 몰아냈지만 동시에 무아론을 몰아내고 대신 인격신과 창조신을 불러들였다. 불교를 외적으로는 정화를 했지만 내적으로는 오염시켰다. 현재한국불교는 유아론이자 유신론이다.
(아래)
1)진제:
몸뚱이가 아니라 참나가 보고 듣는다.
헌 몸뚱이를 버리고 새 몸뚱이로 들어가는 것은 주인공인 참나이다.
주인공인 참나가 몸뚱이를 떠나면 사흘 안에 몸뚱이가 썩기 시작한다.
주인공인 참나는 우주가 생기기 전에도 있었고, 우주가 멸한 후에도 여여하게 있다.
2)서암:
슬퍼하고 분노할 줄 아는 이 주인공이 소멸하는 법이 있겠습니까?
3)청담:
진아(眞我 참나)가 생각을 한다.
진아는 모든 것을 다 기억한다.
진아에서 태양 등 우주만물이 나온다.
진아는 불생불멸이다. 우주가 생기기 전에도 있었고 우주가 사라진 뒤에도 있다.
4)혜국:
몸뚱이(몸)는 듣는 주인공이 아니다.
우리 몸 안에 들을 줄 아는 놈이 있다. 안에서 귀를 통해서 듣는 놈이 있다.
5) 혜민:
지켜보는 놈은 사라지지 않는다.
(강병균교수, 켄 윌버의 참나, 불교닷컴 2016-02-29)
강병균 교수의 글에서 괄호를 모두 삭제 하였다. 그리고 알기 쉽게 문단을 나누었다. 강교수에 따르면 한국불교는 ‘유신교’와 다를 바 없다고 했다. 유일신교에서나 볼 수 있는 창조주사상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한국불교를 대표 하는 선사들의 입에서 나온 참나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마치 기독교의 하나님이나 부처님 당시의 브라만교, 그리고 오늘날 힌두교의 창조신을 보는 듯 하다. 그래서일까 오늘날 한국불교에 대하여 ‘대한불교기독종’이니 ‘대한불교힌두종’이라 했을 것이다.
한국불교는 요지경
한국불교에 대하여 알면 알수록 요지경이다. 인터넷과 교통이 발달한 글로벌 시대에 모든 정보는 오픈되고 공유화 된다. 더구나 유튜브시대를 맞이 하여 갖가지 불교관련 동영상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부처님 근본 가르침과 멀어진 것들뿐이다.
어떤 이는 말한다. 부처님이 발견하지 못한 것을 후대에 발견했다고 한다. 공사상이나 유식사상 등을 말한다. 부처님이 이런 사상을 몰랐을까? 부처님당시 사상사를 보면 모든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유튜브에 ‘최봉수교수의 초기불교개론 강좌시리즈(1편 14강, 2편 14강)’를 보면 모든 것이 드러난다. 부처님은 부처님 당시 브라만사상과 육사외도 사상을 모두 논파 하였다. 이것 또는 참나라 불리우는 사상은 브라만교사상에 가깝다. 요즘으로 따지면 힌두교사상이다.
부처님은 브라만교의 영원주의를 논파 하였다. 그리고 브라만교를 부정하며 발생한 로까야따(유물론), 로까야따를 부정하여 발생한 아지위까, 아지위까를 부정하여 발생한 자이니즘, 자이니즘을 부정한 회으론을 모두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으로 부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사상의 평정을 하였다.
한국불교에서는 브라만사상과 육사외도의 사상이 부활한 듯 하다. 오늘날 유튜브에서 볼 수 있는 ‘이것’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마치 불교백화점을 보는 듯 하다. 한국불교는 알면 알수록 요지경이다.
큰 것 한방을 노리는 사람들
큰 것 한방을 노리는 사람이 있다. 야구에서 홈런을 노리는 타자도 해당된다. 홈런을 염두에 두고 크게 휘둘렀을 때 ‘헛스윙’하기 쉽다. 제조업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제조업에서는 큰 것 한방이 있다. 열심히 개발하여 히트치면 크게 성장할 수 있다. 코스닥 꿈을 가지고 열 개를 개발하여 한 개만 성공해도 다 죽어 가던 회사도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좀처럼 기회는 오지 않는다. 아무리 개발을 잘해도 열심히 마케팅 해도 수주가 쉽지 않다. 그러다 한방 터지면 회사는 급성장하게 된다. 이렇게 제조업에는 큰 것 한방에 대한 희망이 있다.
제조업에서는 큰 것 한방의 매력 때문에 온갖 시련을 참고 견딘다. 그런데 불교에서도 큰 것 한방이 있는 것 같다. 이것만 깨달으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것 같은 착각이다. 화두를 들고 10년, 20년, 30년 앉아 있는 것도 큰 것 한방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요즘 유튜브동영상을 보면 수행을 하지 않고도 스승의 입만 바라 보고 있어도 깨달을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마치 만병통치약처럼 이것만 깨달으면 모든 고통에서 벗어 날 수 있다고 한다. 이것 역시 큰 것 한방이라 볼 수 있다.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부처님은 ‘자귀의 법귀의’를 말씀 하셨다. 자신에 의지하고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말은 이어지는 말이다. 이어지는 말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는 말이다. 마치 2500년 전 오늘날과 같은 상황을 예견하여 말씀 하신 것 같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수행승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않으며,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않는 다면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은 무엇을 원인으로 하고 무엇에서 발생하는가’ 라고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일으켜야 한다.” (S22:43)
불자들은 누구에게 의지해야 하는가? 당연히 부처님에게 의지해야 한다. 부처님과 가르침과 성스런 상가에 의지해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라”고 하셨다. ‘자귀의(attasaraṇānaṃ)’와 ‘법귀의(dhammasaraṇānaṃ)’를 말씀 하신 것이다. 더구나 부처님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anaññasaraṇānaṃ)”고 하셨다. 이것은 ‘부처님의 명령(Buddha sāsana)’ 이다. 부처님의 준엄한 명령을 불자라면 지켜야 할 것이다.
불자들은 삼보를 의지처, 귀위처, 피난처로 삼아야 한다. 그럼에도 중국조사 스님에게 의지처로 삼는다면 불자라고 볼 수 있을까? 만약 조사스님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조사(祖敎: 조사사불교)’의 ‘조자(祖子)’가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유튜브에서 ‘이것만 깨달으면’이라 말하는 사람들에게 의지한다면 그 사람의 교의 그 사람의 제자가 될 것이다. 그 사람이 교주가 되고 그 사람의 입만 바라보는 사람들은 그 사람의 신도가 될 것이다.
스승의 주먹(師拳: ācariyamuṭṭhi)
부처님의 가르침은 잘 설해져 있다. 더 이상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다. 2500년 동안 제자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 온 것이다. 그런 가르침은 비밀스런 가르침이 아니다. 말로서 설해진 것을 문자화 하여 오늘날 누구나 볼 수 있는 가르침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비밀리에 전승된 것은 없다. 만일 누군가 마음과 뜻으로 전승된 비밀스런 가르침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스승의 주먹(師拳)’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는 안팍의 차별을 두지 않고 가르침을 다 설했다. 아난다여, 여래의 가르침에 감추어진 사권은 없다.”(D16) 라 하셨다. 부처님은 가르침을 남김 없이 다 설했다고 하셨다. 염화미소등 마음에서 마음으로, 뜻에서 뜻으로 비밀리에 전승된 가르침이 있음을 수 없음을 말한다. 부처님이 비밀리에 제자를 불러 별도로 전달한 가르침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경이나 게송, 응송 등 구분교의 형태로서 오늘날 까지 전승되어 왔다. 구전으로 또는 문자로 전승된 가르침은 인터넷시대를 맞이하여 누구나 접할 수 있도록 인터넷에 올려져 있다. 이런 대명천지의 시대에 비밀스런 가르침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이들은 말이나 문자가 아니라 뜻과 마음으로 스승과 제자사이에 비밀리에 전승된 가르침이 있다고 한다. 그런 비밀스런 가르침에 대하여 이것 또는 참나라 한다. 이런 우려를 미리 예견하신 것일까 부처님은 “나는 안팍의 차별을 두지 않고 가르침을 다 설했다. 아난다여, 여래의 가르침에 감추어진 사권은 없다.”라고 분명히 말씀 하신 것이다.
이것을 말하며 때로는 책상을 탁탁 치며 “이것만 알면 모든 것이 다 풀려요”라고 말하는 선생들이 있다. 스승의 꽉 쥔 주먹에 무언가 있을 듯 보인다. 하지만 ‘스승의 주먹(師拳: ācariyamuṭṭhi)’ 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 있다면 공허한 스승의 ‘빈주먹’만 있을 뿐이다.
2016-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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