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있을 때 조심해야
그날그날 기분이 다르다. 어떤 날은 기분이 들뜨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축 처지기도 한다. 이런 감정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분명한 사실은 ‘자극’받았기 때문이다. 눈, 귀, 코 등 여섯 가지 감각영역에서 발생한 것이다. 대상을 보았을 때 연상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에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이 일어난다.
돼지사육 동영상을 보고
유튜브에서 돼지사육에 대한 동영상 (Spanish Pig Farms | An Animal Equality Documentary) 을 보았다. 돼지공장을 연상케 하는 산업화된 축산농가를 촬영한 것이다. 돼지의 수태에서부터 출산, 성장에 이르기 까지 일련의 과정을 보면 돼지고기를 입에 대지 못할 것이다.
어미 돼지의 출산을 보면 마치 똥을 싸는 것 같다. 여러 마리의 돼지새끼가 연달아 쑥쑥 튀어 나온다. 새끼는 돼지로서 형상을 갖추었지만 태어나자 마자 버림받은 것 같다. 열악한 축사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가 하면 일부는 죽어 나간다. 부실하게 태어난 새끼는 부르르 떨며 죽을 듯이 보인다. 어떤 새끼는 어미돼지에게 깔려 압사당한다. 이런 장면을 아직까지 공중파방송에서 본 적이 없다.
돼지관련동영상을 보면 돼지로 태어난 것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보여주는 것 같다. 마치 똥 싸듯이 태어난 새끼는 용케 살아남았다고 하더라도 운명은 정해져 있다. 인간들의 식탁에 오를 ‘살코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살코기를 제공하기 위하여 태어난 돼지는 마치 공장에서 생산되는 상품과도 같다. 일반 상품과 다른 점이 있다면 ‘생명’이 있다는 것이다. 생명이 있어서 먹이만 주면 점점 커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공장식축사에서는 새끼돼지에 대하여 가혹한 조치를 취한다.
유튜브동영상을 보면 새끼돼지가 꽥꽥 소리를 지르는 장면을 보여준다. 돼지로 살아 가기 위해서는 몇 가지 과정을 통과해야 하는 것이다. 좋은 살코기를 만들기 위한 과정이라 볼 수 있다. 그 중에 ‘돼지꼬리자르기’가 있다. 컷터로 긴 꼬리를 최대한 짧게 ‘싹둑’자르는 것이다. 이때 새끼돼지는 ‘꽥’ 소리를 지른다. 또 ‘돼지이빨자르기’가 있다. 송곳니처럼 날카롭게 생긴 이빨을 역시 컷터로 ‘뚝뚝’ 자르는 것이다. 이때 역시 돼지가 소리를 꽥지른다.
여러 과정에서 압권이 있다. 그것은 ‘돼지거세하기’ 이다. 사육사가 새끼돼지를 안은 상태에서 컷터로 엉덩이의 특정부위를 ‘푹’ 가른다. 그리고 손으로 누르면 마치 밤처럼 생긴 것이 ‘툭’ 튀어나온다. 이것을 또 컷터로 쓱 자른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한쪽이 더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두쪽의 ‘고환’을 떼어낸다. 그리고 약품을 발라주면 끝이다. 이 과정에서 새끼돼지는 ‘꽥꽥’하며 소리를 질러댄다.
꼬리가 잘리고 이빨이 잘리고 고환이 제거된 새끼돼지는 ‘꼬리표’가 달린다. 정확하게 귀에 인식표가 달리는 것이다. 그래서 성장할 때 까지 관리 되는 것이다. 이것이 돼지의 일생이다.
어쩌다 돼지로 태어났을까?
돼지와 관련된 유튜브동영상을 보면서 내내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어쩌다 돼지로 태어났을까?”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측은한 마음으로 보았다. 마치 어미돼지가 똥을 싸듯이 불쑥 세상에 내 던져진 새끼의 운명이 가혹해 보였다. 그런 돼지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
돼지의 운명은 가혹한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은 돼지의 운명과는 다른 것일까? 인간과 돼지는 엄연히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돼지의 운명은 가혹한 것이고 인간의 운명은 덜 가혹한 것이라 볼 수 있을까? 분명한 사실은 불교에서는 인간도 돼지와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으로 계속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돼지로 태어날 수도 있음을 말한다. 이는 초기경전에서도 볼 수 있다.
상윳따니까야에 ‘시작을 알 수 없는 것의 모음(S15)’이 있다. 이 모음을 보면 인간이 돼지로서 삶을 살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동안 돼지로 태어나 돼지가 되어 목이 잘리고 흘린 피가 훨씬 더 많아 사대양에 있는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삼십명의 경, 상윳따니까야 S15.13, 전재성님역)
경에서는 돼지뿐만 아니라 소, 물소, 양, 염소, 사슴, 닭 등이 언급되어 있다. 육도윤회로 따진다면 축생에 해당되는 것들이다. 어떤 축생이든지 한번 태어나면 인간의 살코기가 될 운명에 처해져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한번으로 그친 것이 아니다. 시작을 알 수 없는 윤회의 과정에서 돼지로서 목이 잘려 흘린 피가 사대양 보다 더 많을 것이라 했다. 여기서 말하는 사대양은 불교적 우주관을 반영한 것이다. 수미산을 둘러싸고 있는 큰 바다를 말한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누구나 한번쯤 돼지로 태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한번이 아니라 한량없이 많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목이 잘려 흘린 피가 사대양 보다 많다면 과거전생에 수 없이 돼지로 태어났을 것이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유튜브동영상에서 본 돼지의 일생은 남의 일 같지 않아 보인다.
빛나던 범천도 돼지우리에서는 꿀꿀거리네
초기경전을 보면 부처님이 수 없이 경고하고 있다. 축생으로 태어날 수도 있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그것은 과거의 행위에 따른 것이다. 축생으로 태어날 만한 업을 지었을 때 소나 돼지 등으로 태어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대게 ‘우치’와 ‘탐욕’이 원인이다.
지혜가 없어 어리석게 사는 자들이 축생이 될 수 있다. 또 오로지 먹기만 좋아 하는 자들이나 오로지 감각적 쾌락만을 추구하는 자들도 축생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우치와 탐욕이 축생의 형성조건이 된다.
개를 좋아 하지 않는다. 개를 보면 가장 먼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왜 개로 태어나게 되었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개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이 왜 개로 태어났는지 이유를 알지 못할 것이다. 만일 사유할 능력이 있는 개라면 태어나보니 털이 있고 꼬리가 달린 자신의 모습을 보고서 기겁할 것이다.
개나 돼지 등 축생으로 태어남은 괴로움 그 자체라 볼 수 있다. 즐거움은 먹을 때 뿐이고 그 외는 모두 괴로움뿐이다. 자신이 어떻게 개나 돼지의 모습으로 태어났는지도 모르고 멍멍 짓거나 꿀꿀거리는 것이다. 그런데 육도윤회하는 중생이라면 누구나 축생으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에 선업으로 천상에 태어난 자도 그 공덕이 다하면 축생이 될 수 있다. 아라한이 되어 불생불사의 경지가 되지 않는 한 유전하고 윤회하게 되어 있는데 어떤 존재도 예외 없이 축생에 태어날 수 있다. 그래서 미얀마 속담에 “빛나던 범천도 돼지우리속에서는 꿀꿀거리네.”라 하였을 것이다.
선업공덕이 다 하였을때 남는 것은 악업 밖에 없을 것이다. 천상의 과보를 받아 안락하게 살던 존재도 선업공덕이 다하면 돼지로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빛나던 범천도 돼지우리에서는 꿀꿀거리네’라 하였을 것이다.
소극적 삶을 살았을 때
살아 가면서 과거에 대한 기억은 남아 있다. 유년기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삶의 과정에서 때로는 선행 또는 악행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것은 ‘이전 생’에 대한 것이다. 그것도 한량 없는 윤회하는 삶에서의 행위에 대한 것이다. 전생에 어떤 행위를 하였는지 알 수 없다.
인간의 앞날은 알 수 없다. 그래서 현실을 살아 가면서 어떤 과보를 받을지 알 수 없다. 지금 착하고 건전하게 살았다고 하여 반드시 선과보만 기대 되는 것은 아니다. 알 수 없는 이전 생에서의 악업이 지금 여기에 작용한다면 어떤 악과보가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내생도 기약할 수 없다. 지금 착하게 살았다고 하여 안심할 수 없다. 막연하게 선처에 나기를 기대하기에는 무리가 있음을 말한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착하게만 살면 된다’라는 말이다. 그래서일까 매우 소극적 삶을 살아 간다. 그런 한편 쾌락을 추구한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법의 테두리에서 살면서 자신을 위한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불교적 입장에서 본다면 결코 지혜로운 삶이라 볼 수 없다. 오히려 축생 같은 삶이다.
오로지 자신과 자신의 가족만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있다. 축생도 그렇게 살아 간다. 그래서 단지 먹기위해서 즐기기 위해서 사는 삶에 대하여 벌레와 같은 삶이라 한다.
조금 나쁜 업을 짓고 사는 사람들
일반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자신이 착하게 살기 때문에 선업을 더 많이 짓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지혜없이 단지 남에게 피해끼치지 않고 착하게 산다는 것은 축생과 같은 삶이다. 죽어서 악처에 나기 쉽다. 왜 그럴까? 최봉수교수는 이렇게 말하였다.
“대게의 사람들은요 아주 나쁜 짓도 안하고 아주 좋은 일도 못해. 그래요 안그래요. 여러분들 그렇습니까 안그렇습니까? 여러분들 누구 죽이고 한 적 있어요? 오늘 고백하세요. (웃음) 어디 굼뱅이 한마리 못죽이는 사람들이에요. 나쁜 일을 못해요. 그런데 좋은 일도 또 많이 못 합니다.
매일 피 뽑아 가지고 헌혈합니까? 피 뽑으로 오면 도망가죠? 보통사람들은 대게 어떤 업을 짓느냐면요 아주 나쁜 업도 짓지 못하고 아주 좋은 업도 짓지 못하고 쪼까 나쁜 업을 짓고 살아요. 굳이 이야기 하지만 조금 나쁜 업을 짓습니다. 평균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업이 아니고 대게 인간들이 일생동안 지은 업을 청정거울에 달아 보면 조금 안좋은 쪽으로 짓습니다.”
최봉수교수가 대원불교대학에서 강연한 것이 유튜브에 올려져 있다. 제1편 ‘최봉수교수의 초기불교개론1’의 14개의 동영상강좌는 바라문사상과 육사외도에 대한 것이다. 또 제2편‘최봉수교수의 초기불교개론2’에서 14개의 강좌는 부처님의 업에 대한 가르침이다.
제2편 첫 번째 강좌에 따르면 일반사람들의 삶의 행태에 대하여 알 수 있다. 일반사람들의 평균적 행위는 ‘약간 악한 쪽으로’ 추가 기울어 있다는 것이다. 비록 법의 테두리에 살며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며 착하게 산다고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악행이 약간 많다고 하였다. 그래서 일반사람들은 선업보다 악업을 조금 더 많이 짓는다고 했다.
대부분 아귀가 된다
조금 안좋은 업을 지었을 때 내생은 어떤 것일까? 최봉수교수의 말을 들으면 충격적이다. 그것은 ‘아귀계’이다. 아주 나쁜 짓을 하면 지옥이나 축생으로 가고, 아주 좋은 일을 하면 인간으로 재생하거나 천상으로 가는 것으로 본다. 그도 저도 아니고 조금만 나쁜 일을 하는 대부분 중생들은 아귀보를 받을 확률이 높다고 한다.
최봉수교수에 따르면 이미 죽은 조상들은 아귀보를 받을 확률이 매우 크다고 했다. 이는 일반사람들이 좋은 일 보다 약간 나쁜 일을 더 많이 하기 때문이라 한다. 아주 나쁜 업을 지으면 지옥이나 축생으로 떨어지지만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하고 어정쩡한 경우 대게 아귀가 됨을 말한다. 배고픔의 과보를 받는 것이다.
아귀는 일종의 조상신이다. 아귀계에 떨어진 자들은 악행이 선행보다 약간 많은 케이스에 해당된다. 그래서 사람들이 죽으면 대게 아귀로 태어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죽은 조상들이 아귀로 되어 있을 확률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제사를 부정하지 않았다. 배고픈 조상을 위하여 ‘시식’해 주는 것을 장려한 것이다. 그런데 시식은 반드시 음식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조상들 아귀보를 면하게 하려면
최봉수교수에 따르면 죽은 조상들에게 아귀보를 면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무엇일까? 최봉수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아귀가 먹어가지고 배고픔을 면할 수 있는 음식이 딱 한가지 뿐이라요. 그 한가지 음식이 뭘까요? 그것을 먹으면 목에서 불이 안되. 그게 산더미만한 배에 들어가면 어떻다? 포만감을 주면서 아귀보로부터 해탈시켜. 한가지 음식이 있어. 그 음식의 이름이 뭐다? 법식이라고 해도 되고 공덕식이라 해요.
누가 지은 공덕? 무슨 공덕? 인연 있는 후손이 지은 공덕만이 아귀보로부터 해탈시킬 음식이 된다말에요. 인연있는 자신의 후손 집 근처에 머무는 겁니다. 인연 있는 자기 후손들이 뭐란다? 선업을 지으면 공덕이 생기죠 그죠? 선업을 지어 공덕이 생기기만을 기대하면서 인연 있는 담벼락 밖에 인연 있는 아귀들이 모여 있다는 거에요.
지금도 여러분 따라 다닐지 몰라요. (웃음) 잘 오신거에요. 어디 씰데 없는 술이나 먹으로 가 봐요. 조상의 아귀가 땅을 치면서 통곡해요. ‘저놈이 술먹고 나쁜 짓만 이 과보를 어떻게 면할꼬?’ 근데 부처님 도량에 공부하러 슬슬가면 아귀들이 바깥에서 기분이 좋아가꼬.
자 좋은 일합니까 안합니까 여러분? 지금 앉아서 공부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에요.그런데 좋은 일만 해가지고는 아귀보를 못 면하고 이와 같은 스토리릴 듣고 내가 오늘 지은 선업에 조그마한 공덕이라도 있다면 ‘이 공덕이 나의 인연있는 조상아귀들의 업보를 해소시키는 공덕식이 되도록 회향하고자 합니다’라고 말을 하거나 머리속으로 염을 해야 되. 쉽게 말하면 ‘나의 선업에 의한 공덕식이 조상에게로 회향되기를 바란다’하고 말을 해야지 그 순간에 공덕이 아귀의 목구멍을 통해가지고 배로 들어가면서 아귀로부터 해탈시킨다. ‘아호’하고 날라 가 버린다.”
우리 조상들의 대부분은 아귀에 세계에 있다고 한다. 그것은 악행이 선행보다 조금 더 많기 때문이라 한다. 그런데 아귀가 되어 있는 조상은 항상 인연있는 후손의 주위를 멤돈다고 한다. 그것은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후손들은 죽은 조상들을 위해 제사를 지내준다.
제사를 부정하지 않은 부처님
부처님은 제사를 부정하지 않았다. 이는 초기경전에서 “수행승들이여, 바른 사람이 아닌 사람은 어떻게 바른 사람이 아닌 사람으로서 견해를 지니는가? 이 세상에서 바른 사람이 아닌 사람은 ‘보시도 없고 제사도 없고 공양도 없고 선악에 대한 과보도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홀연히 다시 태어나는 중생도 없고 이 세상에는 바르게 유행하고 올바로 실천하며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알고 깨달아 설명하는 수행자나 성직자도 없다.’라는 견해를 지닌다. 이와 같이 바른 사람이 아닌 사람은 바른 사람이 아닌 사람으로서 견해를 지닌다.”(M110) 라는 정형구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라고 보는 단멸론적 허무주의자들의 견해를 비판하였다. 그런데 단멸론자들은 제사도 부정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업을 부정하니 내생이 부정되고, 내세가 부정되니 육도윤회도 부정된다. 그러나 부처님은 육도윤회를 말씀 하셨다. 당연히 아귀계를 인정한 것이다.
부처님은 제사를 부정하지 않았다. 이는 숫따니빠따 ‘마가의 경(Sn3.5)’에서 바라문학인 마가가 “저는 부탁을 잘 들어주고, 재물을 베푸는 재가의 신자로서, 공덕을 구하고 공덕을 기대하며, 이 세상에서 남에게 음식을 베풀어 제사 지내는데, 세존이시여, 제게 완전한 제사에 대해 설해주십시오.” (stn505) 라 물었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마가여, 제사를 지내십시오.
제사를 지내면서 어떤 경우라도 마음을 청정하게 하여야 합니다.
제사는 제사지내는 자의 토대입니다.
여기에 참여하는 자신의 죄악을 버립니다.” (stn506)
바라문 학인의 질문에 부처님은 “제사를 지내십시오”라 하였다. 단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제사를 지내라고 하였다. 분노, 미움, 잘못, 타락, 부패에 기반한 제사를 지내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한량없는 자애의 마음을 닦아 모든 방향으로 한량없는 마음을 가득 채우는 제사를 지내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제사를 지내도 좋다고 했다. 그렇다고 모든 제사를 칭송한 것은 아니다. 어느 바라문이 부처님에게 “존자 고따마는 제사를 칭송합니까?”라며 물어 보았다. 이에 부처님은 “바라문이여, 나는 모든 제사를 다 칭송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바라문이여, 나는 모든 제사를 다 칭송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바라문이여, 예를 들어 제사에서 소들을 죽이고 양들과 염소들을 죽이고 여러 생명들을 죽인다면, 바라문이여, 이와 같은 살생을 포함하는 제사를 나는 칭송하지 않습니다.”(A4.39) 라고 말씀 하셨다.
법식으로 선업공덕을 회향하여야
최봉수교수에 따르면 아귀가 되어 죽은 조상을 아귀보로부터 해탈시키는 방법이 있다고 했다. 조상들에게 배고픔을 면하게 하기 위해 한상 거하게 차려 주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지은 ‘선업공덕을 회향’하는 것이라 했다. 그래서 ‘이 공덕이 나의 인연있는 조상아귀들의 업보를 해소시키는 공덕식이 되도록 회향하고자 합니다.”라고 발원하였을 때 비로소 조상들이 아귀보를 벗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이것에 대하여 ‘법식(法食)’ 또는 ‘공덕식(功德食)’이라 했다.
최봉수교수가 한말은 ‘믿거나 말거나’일 수 있다. 그러나 교훈적이다. 더구나 부처님은 초기경에서 제사의 중요성에 대하여 말씀 하셨기 때문에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는 수도 없이 내가 잘 하기를 바라는 조상들이 지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조상을 위하여 재일을 지키는 것도 선업을 짓는 것이라 한다.
최봉수교수에 따르면 천도재를 지내는 것 역시 제사의 개념으로 보고 있다. 아귀가 되어 배고픈 조상을 위하여 시식하게 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좋은 시식은 법식이라 했다. 선업공덕을 쌓아 아귀가 되어 배고픈 조상에게 회향하는 것이다.
혼자 있을 때 조심해야
조상들은 후손이 잘 되기만을 지켜 보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후손이 악행을 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무척 실망할 것이다. 후손이 잘되어서 그 공덕을 회향하면 아귀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데 못된 짓만 하고 다닌다면 같은 아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고 착하게만 살면 될까? 분명한 사실은 소극적 삶은 선행보다 악행이 더 많은 삶이 되기 쉽다는 것이다. 이는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지혜 없이 단지 착하게 피해끼치지 않은 삶은 즐거움만 추구하는 삶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마치 축생처럼 먹기위해서 사는 삶이 될 수 있다. 또 오감에 따른 쾌락을 추구하는 삶이 될 수 있다. 이렇게 되었을 때 선악의 추는 악으로 기울 가능성이 있다.
즐거움만 추구하는 삶을 살았을 때 그 결과는 인간 이하의 과보를 받기 쉽다. 그것은 혼자 있을 때 업을 짓기 때문이다. 왜 혼자 있을 때 위험할까? 이에 대하여 최봉수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남방불교도들은요 혼자 있을 때를 조심합니다. 우리 혼자 있으면 뭐합니까? 누가 안보니까 나쁜 일을 할 개연성이 생기죠? 그런데 혼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지금도 바깥에서는 인연있는 조상들 영가가 지켜 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혼자 있을수록 더 몸과 마음을 바로 하고 조금이라도 남에게 선업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 될려고 뭐한다? 노력한다.”
혼자 있을 때 조심하라는 것이다. 대중속에 있을 때는 자신의 행실에 조심하지만 아무도 없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을 때 못 된 생각을 가지기 쉽다. 가장 쉽게 일어나는 것은 아마 ‘음행’일 것이다. 도둑질도 역시 혼자 몰래 하는 것이다. 이렇게 혼자 몰래몰래 하였을 때 오계를 어기기 쉽다. 일반사람들이 선행을 한다고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악행이 약간 많은 것은 혼자 있을 때 몰래몰래 하는 습성 때문일 것이다.
천사의 메시지
유튜브동영상에서 본 돼지의 일생을 보면 비참하기 그지 없다. 우리나라 방송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이런 장면을 방송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고기소비량이 줄어 들 것이다. 또 공장식축사에 대하여 비난이 봇물처럼 일어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축산업이 타격을 받게 되어 국가경제에 부담이 될 것이다. 그래서일까 TV에서는 한상 잘 차려 맛있게 먹는 장면은 보여 주어도 축생들의 비참한 모습은 보여 주지 않는다.
불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누구나 축생으로 태어날 수 있다. 현생에서 지은 악업이 선업 보다 더 크다면 아귀, 축생, 지옥과 같은 악처에 태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지금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내생에 또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나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를테면 문이 달린 두 채의 집이 있는데, 거기에 눈 있는 자가 가운데 서서 사람들이 집에 들어오고 나가고 찾아오고 떠나는 것을 보듯이,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나는 청정해서 인간을 뛰어넘는 하늘눈으로 죽거나 태어나고 비천하거나 존귀하고, 아름답거나 추하고, 행복하거나 불행한 모든 뭇 삶을 본다.
존귀한 존재들 가운데 참으로 신체적으로 선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선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선행을 하고 고귀한 이들을 비난하지 않으며, 올바른 견해를 지니고 있고, 올바른 견해로 남에게 영향을 미치는 이들 존재들은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난다. 또한 존귀한 존재들 가운데 참으로 신체적으로 선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선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선행을 하고 고귀한 이들을 비난하지 않으며, 올바른 견해를 지니고 있고, 올바른 견해로 남에게 영향을 미치는 이들 존재들은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인간의 세계에 태어난다.
그러나 존귀한 존재들이더라도 참으로 신체적으로 악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악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악행을 하고 고귀한 이들을 비난하며, 잘못된 견해를 지니고 있고, 잘못된 견해로 남에게 영향을 미치는 이들 존재들은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아귀의 세계에 태어난다. 또한 존귀한 존재들이더라도 참으로 신체적으로 악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악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악행을 하고 고귀한 이들을 비난하며, 잘못된 견해를 지니고 있고, 잘못된 견해로 남에게 영향을 미치는 이들 존재들은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축생의 세계에 태어난다. 또한 존귀한 존재들이더라도 참으로 신체적으로 악행을 하고 언어적으로 악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악행을 하고 고귀한 이들을 비난하며, 잘못된 견해를 지니고 있고, 잘못된 견해로 남에게 영향을 미치는 이들 존재들은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
(천사의 경, 맛지마니까야 M130,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천안으로 세상의 뭇삶들의 사는 모습을 보았다. 아귀나 축생, 지옥과 같은 악처에 난 자들은 그 만한 이유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천사를 보내서 경고한 것이다. 그 천사는 다름 아닌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다. 늙은 사람,병든 사람, 죽은 사람을 말한다.
사람들이 천사를 보고서도 아무런 감흥이 없다면 막행막식하며 살 것이다. 그 결과는 악처가 될 것이라 한다. 그러나 천사의 메시지를 읽는다면 악처는 면할 것이라 했다. 그래서 “악한 행위는 그대가 스스로 행한 것이다. 그대가 과보를 겪어야 한다.”(M130) 라고 말씀 하셨다.
법을 지키는 자 법이 보호한다
최봉수교수의 아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혼자 있을 때 잘하라’ 것이다. 대게 혼자 있을 때 흐트러지기 쉽다. 집에서도 혼자 있을 때 자세가 나오는 것이다. TV를 볼 때 가장 편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또 혼자 있을 때 딴 생각하기 쉽다. 음탕한 생각도 혼자 있을 때 일어난다.
나홀로 토굴에서 독살이 하는 수행자가 있다. 그러나 토굴에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일반사람들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함께 모여 살아야 향상된다. 잘못을 지적하고 잘못을 참회하는 자자와 포살이 있어야 성장으로 이끈다. 그래서 혼자 있을 때 잘하라고 했을 것이다.
홀로 있을 때 몰래몰래 하면 죄업이 된다. 누가 보지 않는다 하여 내 마음대로 했을 경우 악행이 되기 쉽다. 설령 그 사람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착하게 산다고 할지라도 나중에 인생의 대차대조표를 비교해 보면 악행이 약간 더 많을 것이라 했다. 그럴 경우 대부분 아귀가 된다고 한다. 거기서 조금 더 악행을 하면 축생이 된다. 그래서 괴롭게 한 평생 살아 가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안전할까?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다. 가르침을 실천 하였을 때 삼악도에 떨어질 일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법을 지키는 자 법이 보호한다.”라 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였을 때 삼악도에 떨어질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Dhammo have rakikhati dhammacāriṃ
“부처님의 가르침은 진실로 가르침을 실천하는 자를 보호한다. (Thag.303)
2016-03-1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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