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빠알리성전협회를 방문하고
용기를 내어
용기를 내어 메일을 보냈다. 꼭 한번 만나 뵙고 싶은 분에게 편지를 쓴 것이다. 글을 쓰면서 신세를 많이 졌다고 생각하는 ‘전재성님’이다. 그래서 짤막하게 메일을 보냈다.
사실 전화로 만남을 요청할 수도 있었다. 이미 공개되어 있는 전화번호로 걸면 그만이다. 그러나 초면에 대뜸 전화로 말하는 것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먼저 메일로 완곡하게 의사를 타진하였다.
토요일 아침 전화가 걸려왔다. 전재성님의 전화였다. 많은 기대를 하였으나 그렇다고 쉽게 되리라고 생각지 않았다. 메일을 보낸지 이틀만에 전화를 받으니 기다리고 기다리던 님에게 전화를 받는 듯 했다. 선생님은 오후에 방문해달라고 했다.
간단히 점심을 때우고
오후 2시에 약속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남았다. 특별하게 걸린 일거리도 없어서 오전에 글을 하나 쓰기로 하였다. 한번 글을 쓰면 보통 너댓시간 걸린다. 12시가 넘어서야 간신히 완료할 수 있었다. 부랴부랴 글을 올리고 전철역으로 향하였다.
글을 쓰느라 점심을 먹지 못하였다. 시간을 보니 전철로 이동하는 시간 때문에 점심시간이 나지 않았다. 일단 전철부터 타기로 했다. 명학역에서 종로3가까지 1호선으로 이동하고, 종로3가에서 홍제역까지 3호선으로 이동했다. 일단 아파트 부근까지 갔다. 산비탈에 있는 세 동의 아파트 단지 부근에는 먹을 만한 식당이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편의점을 발견하여 빵으로 간단히 점심을 때웠다.
아파트에 도착하여
주소지에 도착했다. 아파트 1층에 위치해 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가 별도의 건물에 별도의 사무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아파트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무실 겸 주거공간이라 볼 수 있다.
초인종을 누르자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낯익은 얼굴이다. 이미 알려져있기 때문이다. 얼굴이 알려진 유명인사들은 초면이라도 낯설지 않다. 이미지가 익숙한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 입장에서 보았을 때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초면일 것이다.
서로 큰 절을 하고
선생님은 사진이나 TV에서 본 이미지 그대로이다. 머리가 긴 백발에 흰수염이 특징이다. 마치 도인처럼 보였다.
아파트에 들어 가 보니 책으로 가득하다. 30여평 되는 아파트 이곳 저곳에 온통 책뿐이다. 거실은 물론 작은 방, 심지어 부엌에 이르기 까지 벽이란 벽은 온통 책장이다. 그렇다고 하여 장식용은 아니다. 언제든지 꺼내 볼 수 있는 책이다. 그래서일까 약간은 산만하게 보인다. 마치 무언가 작업 하는 공간 같다. 작업하다 보면 정돈 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것이 진짜 일하는 모습일 것이다.
선생님의 집은 마치 작은 도서관처럼 보인다. 불교관련 서적이 총 집합되어 있는 듯 보인다. 국내외 불교경전에서부터 다양한 책이 있다. 아마 번역하는데 도움이 되는 책으로 판단된다.
거실에서 명함을 건네며 정식으로 인사를 하였다. 그런데 선생님이 갑자기 서로 큰절을 하자고 제안하였다. 순간 당황하였다. 큰절을 받아야 함에도 먼저 허리를 굽히는 것이었다. 엉겁결에 큰 절을 하였다.
거실에서 선생님과 마주 앉았다. 탁자는 큰 창호문틀로 만든 것이다. 불가에서 차담을 하다보면 흔히 볼 수 있는 탁자를 말한다. 탁자 한켠에는 출간된 경전이 쌓여 있다.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현장감을 느꼈다.
세 시간 동안 이야기하였는데
선생님은 원두커피를 제공하였다. 손수 만든 것이다. 불가에서는 차담을 하는데 아마 커피를 더 좋아 하는 것 같아 보였다. 원두 커피를 앞에 두고 대화를 하였다. 초면에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지 망설여 졌지만 방문하여 뵙는 것에 큰 의미를 두었기 때문에 아무 이야기나 했다.
오후 2시부터 5시 까지 세 시간 동안 이야기 하였다. 주로 선생님이 이야기 하였다. 상당부분은 세간에 알려진 이야기이다. 처음 번역을 시작하게 된 동기에서부터 출간 과정에서 어려웠던 이야기 등을 말한다. 그러나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도 꽤 있었다.
혼자 번역하였기 때문에
현재 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수 십권의 책이 출간 되어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인터넷 서점에서 키워드 검색하면 바로 알 수 있다. 최근에는 경장뿐만 아니라 율장도 출간 되었다. 그것도 세계최초로 완전복원 번역된 것이라 했다.
오늘날 이렇게 경장과 율장이 번역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 놀랍게도 혼자 번역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여러 사람이 함께 번역하였다면 책이 출간되지 못했음을 말한다. 왜 그럴까? 서로 논의만 하다가 끝나고 말 것이기 때문이라 했다.
번역에 착수한 것은 1988년부터라 한다. 그 때 당시 번역팀이 만들어져 활동했다고 한다. 그러나 논의만 무성하였지 진척이 없었다고 했다. 마치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속담을 연상케 한다.
홀로 되었을 때 비로소 책이 나왔다고 한다. 1999년에 처음으로 상윳따니까야 3권이 출간 되었는데 생각 보다 늦게 나온 것이라 한다. 만약 조건이 잘 맞았다면 아마 10년 앞당겨 졌을 것이라 한다. 시기적으로 따진다면 1990년이 될 것이다. 만일 이때 책이 출간 되었다면 한국불교에 있어서 초기불교 붐은 10년 앞당겨졌을 것이다.
3천만원을 후원한 어느 비구니스님
책을 출간 할 때 종단의 지원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지원이 있긴 하지만 코끼리 비스켓처럼 매우 미미한 것이라 했다. 그래서 책을 출간할 때 가장 애로가 많았다고 한다.
한번 책을 출간하면 보통 1,000권이라 한다. 금액으로 수천만원이다. 부자들에게는 해외여행 비용에 지나지 않은 금액일지 몰라도 아무 수입이 없는 번역가에게 있어서는 감당할 수 없는 돈인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출간할 때쯤 되면 후원자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가 어느 비구니스님이다. 상윳따니까야를 출간할 때의 일이라 한다.
선생님에 따르면 경전을 한번 찍으면 1,000권이라 했다. 이렇게 한 번 찍어 놓으면 7년 간다고 했다. 약 7년 정도 되면 재고가 소진된다고 한다. 단순한 계산으로 일년에 평균 142권이 팔리는 것이다. 실제로 한달에 10권 나간다고 한다. 우리나라 불자들이 얼마나 경전을 사 보지 않는지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한국에 천만 불자가 있다고 하지만 일년에 100여권 팔리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그 많은 도서관과 학교, 그리고 불교지성인들, 불교지식인들, 불교학자들, 양식 있는 불자들 1%만 경전을 사보아도 10만권이 될 것이다. 천만 불자중에 1%만 경전사보기에 동참해도 한국불교는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먹고 마시는 사회분위기일까 책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현실인 것 같다. 더구나 불교계를 이끌어 가는 불교오피니언리더들이 책을 멀리 한다면 한국불교는 절망적이다.
어느 비구니스님에게 연락이 왔다고 한다. 상윳따니까야를 새로 출간한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비구니 스님이 출간비용을 지불하겠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다음 날 계좌에 무려 3천만원이 입급되었다고 한다. 그 비구니 스님의 도움으로 상윳따니까야를 출간할 수 있었다고 한다.
비구니스님은 어떤 분일까? 비구니 스님이 사는 처소에 찾아 갔다고 한다. 대구작은 암자에서 어렵게 사는 ‘노비구니스님’이었다고 한다. 초기경전을 접하고 감동받아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돈을 출간하는데 사용하라고 맡긴 것이다.
통합본 상윳따니까야
한권으로 된 ‘통합본 상윳따니까야’는 어떤 책일까? 이 책에 대하여 서평을 쓴 바 있다. 그것은 어느 법우님이 책보시를 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인연담을 ‘일곱권이 한권으로, 진화를 거듭한 ‘단행본 쌍윳따니까야’(2015-03-11)’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작년 2015년 3월의 일이다.
통합본상윳따니까야는 획기적이다. 무려 7권에 이르는 방대한 경전이 마치 바이블처럼 가죽케이스로 하여, 그것도 작크가 달리고 금니를 하여 발간 된 것이다. 어떻게 한권으로 가능한 것일까? 두 칼럼으로 하여 매우 얇은 종이를 사용하였는데 2,800여 페이지에 달한다. 옆구리에 끼고 다니면 안성맞춤이다.
통합본상윳따니까야가 나오게 된 것은 노비구니스님의 후원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그 노비구니스님의 법명은 ‘벽안스님’이다. 통합본에 발간사가 실려 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통합본에 ‘진흙속의연꽃’ 필명이 들어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을 누군가 알려 주었을 때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선생님을 한번도 본 적도 없고 후원자도 아니었고 교정자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선생님의 머리말에 ‘진흙속의연꽃’ 필명이 들어가 있었다.
통합본상윳따니까야에 왜 필명이 들어가 있을까? 그것은 오류를 지적해 주었기 때문이라 한다. 언젠가 ‘고양이의 경(S20.10)’에 대하여 번역비교를 하였는데 정반대의 번역을 보고 글을 쓴 바 있다. 이에 선생님은 오류를 인정하고 바로 잡았다는 내용을 머리말에 써 놓았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가문의 영광인가? 통합본 상윳따니까야에 실린 ‘진흙속의연꽃’(2015-03-13)’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무단 배포는 범죄행위
번역가는 후원에 의존한다. 하루 종일 번역에만 몰두하는 번역가에게 달리 수입이 있을 리 없다. 그렇다고 책이 많이 팔리는 것도 아니다. 한종류의 니까야가 기껏해야 일년에 백여권 팔리는 것이 고작이라 한다. 그러다 보니 항상 쪼달릴 수밖에 없다고 한다. 더구나 새로 번역된 책이나 개정판을 출간하려 할 때 큰 돈이 들어 가는데 이를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럴 경우 주변 지인들이 도와 주거나 생각지도 않게 후원자가 나타날 경우 간신히 책이 나온다고 한다.
선생님은 사람들이 책을 사보지 않는 현실에 대하여 개탄한다. 더구나 부처님 원임이 실려 있는 초기경전을 사 보지 않는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사람들이 책을 사보기는커녕 무단으로 복사하여 돌려 보기도 하는 현실을 개탄한다. 이런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불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유명스타스님의 음악 사이트에 법구경 전문이 그대로 올라가 있었다고 한다. 이는 명백히 저작권 위반이라 한다. 요즘은 음악을 무단으로 사용해도 저작권 위반으로 벌금을 무는 시대이다. 책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어느 사이트에서 니까야번역본이 그대로 올라가 있는 것을 보았다. 사부니까야가 주석 없이 올려져 있는 것이다. 아마 누군가 사경한 것을 입수하여 인터넷에 공개한 것이라 본다. 하지만 이런 행위는 불법이다. 저작권 위반으로 크게 걸릴 수 있다.
음악을 무단으로 사용하거나 심지어 사진을 허락 없이 사용해도 처벌받는다. 비록 부처님 말씀이라 하더라도 수 년동안 심혈을 기울여 발간된 번역서를 번역자의 허락 없이 인터넷에 공개한다면 이는‘범죄행위’임에 틀림 없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부처님의 말씀이 담긴 경전의 저작권은 부처님에게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번역된 경전은 모두 공개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누가 목숨 걸고 번역을 할까? 출가한 스님들이나 가능할 것이다.
스님들 본분사는
스님번역가들도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출가자는 어떤 이득이 되는 상업적 행위를 할 수 없다고 되어 있다. 그럼에도 출가자가 번역을 하거나 글을 써서 책을 내는 행위는 정당한 것일까? 과연 율장정신에 맞는 것일까? 출가자의 역할은 수행과 교화가 본업이다. 그럼에도 본업 보다 부업에 열중한다면 출가자의 ‘본분사’를 잃는 것이다.
번역에 있어서 출가자와 재가자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누구든지 언어학적 소양과 인문학적 소양이 있으면 초기경전을 번역할 수 있다. 그러나 출가자가 출판사를 운영하여 이득을 취하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에 맞지 않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그것은 한국불교에서는 출가자의 부업이 허용되기 때문일 것이다.
종단에서는 문화사업단이라 하여 템플스테이와 사찰음식을 홍보 하고 있다. 심지어 스님들이 식당을 운영하기도 한다. 이렇게 스님들이 재가의 영역에 들어 가 있는 경우는 많다. 비록 포교를 위한 방편이라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이다.
스님들이 현실에 개입하면
스님이 대학교 이사를 하고 또 이사장을 하고 있다. 또 스님이 총장을 하고 있다. 스님이 기업의 사장을 하기도 한다. 불교방송이 대표적 케이스이디. 재가자에게 적합한 일을 스님들이 하고 있는 것이다. 스님이 하면 일이 더 잘 되는 것일까? 스님이 사업을 하였을 때 매출이 쑥쑥 올라가는 것일까?
어떤 조직이나 단체이든지 재정문제와 인간관계문제는 풀기 어려운 난제이다. 만일 스님들이 장을 맡아 재정문제나 인사문제에 부딛쳤을 때 어떻게 해결할까? 노조에서 파업하였을 때 스님이사장이나 스님사장이 이를 어떻게 풀어나갈까?
스님들은 현실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개입해서는 안된다. 스님으로서 본분사를 다해야 한다. 대체 스님들이 이사장을 하고 대학총장을 하고, 불교방송 등의 사장을 하여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이를 해결해 나갈 능력이 있는가? 조직내에서 인간관계에 따른 갈등을 해결해 나갈 수 있는가?
도시에서 포교당을 운영하던 스님이 재정문제와 인사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여 어느 날 갑자기 바랑메고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스님들은 본분사는 수행과 포교이다. 나머지는 재가자들에게 맡기면 된다. 스님이 이것 저것 다 하려고 해서 문제가 된다. 한마디로 죽도 밥도 안되는 것이다. 현재 한국불교가 그런 모습이다.
길고 짧은 것은 대 보아야
경전번역하는데 있어서 출가한 스님들이 유리하다. 처자식 등 부양해야 할 식구가 없어서 매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마음 놓고 번역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절에 가면 기본적으로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은 해결된다. 더구나 신심 있는 불자들의 보시도 기대된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의 은혜를 가장 많이 받는 사람들이 스님들이다.
스님들이 본래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럼에도 이것 저것 부업을 한다면 직무유기에 해당될 것이다. 번역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물론 언어학적 인문학적 소양이 있다면 예외가 될 수 있다. 과거 중국에서 역경가들은 대부분 스님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다. 불교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넘쳐 난다. 그럼에도 소양을 갖추지 못한 스님들이 나선다면 마치 달마도를 파는 스님들과 다름 없을 것이다.
재가번역자의 삶은 고달프다. 생계를 책임져야 할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학자로서 마음 놓고 번역할 수 있는 환경에 있지 않은 것이다. 초기경전 번역이라는 큰 불사를 하는데 있어서 스님번역가에 대한 지원은 있지만 재가번역가에 대한 지원은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
심지어 어떤 스님들은 재가번역가의 번역에 대하여 오류투성이라 말한다. 그런 이유로 스님번역가들이 번역한 것을 교재로 삼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영향이어서일까 사람들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 같다. 그러나 길고 짧은 것은 대 보면 금방 드러난다. 지금이라도 두 번역서를 사서 대조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예경지송
선생님에게 이것 저것 궁금한 것에 대하여 물어 보았다. 가장 궁금한 것은 최근 어떤 일을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이다. 최근 ‘예경지송’을 발간했다고 한다. 누군가의 요청으로 발간한 것이라 한다.
책을 파는 사이트에서 검색해 보았다. 예경지송이 출간 된 날은 2016년 2월 25일 이다. 채 한달도 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책이다. 어떤 내용일까? 책에 대한 리뷰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이번에는 인터넷뉴스 검색을 해 보았다. 딱 한군데 소개 되어 있다. 금강신문 3월 14일자 기사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언어로 표현된 빠알리대정경 가운데 일상생활에 필요한 소중한 가르침을 모은 책이 발간됐다.
<예경지송>을 독송하는 것은 내세를 위해 공덕을 쌓거나 자신의 정신을 고양시키며 수행하기 위한 것만이 아닌, 현세이익을 위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통과의례, 즉 갓난아이의 명명식, 생일, 결혼식, 장례식, 이사, 집이나 가게의 개업이나 건물의 신축ㆍ개축 등의 의례 뿐 아니라 액난의 소멸, 악령의 퇴치, 전승의 기원, 전생에서의 무사, 국가나 단체의 안녕, 국태민안 등의 목적으로 범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책은 학인의 질문을 제외한 소송경의 9개 경송이 포함돼 있으며, 상세한 해설과 세밀한 음성표기, 한글번역을 통해 138개의 경송으로 확대해 만들어졌다. △제1품 일반예불품 △제2품 수호경전품 △제3품 지송경전품 △제4품 성찰수행품 △제5품 명상수행품 △제6품 아비달마품 △제7품 공덕회향품 △제8품 통과의례품 △제9품 추모경송품 △제10품 요청헌사품 △참고문헌 등으로 구성됐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전재성 회장은 “불교의 모든 수행은 위빠사나이건, 대승의 수행이건, 금강승의 수행이건, 선불교이건 모두가 기본적으로는 그 근거를 원음의 부처님 말씀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서 “초기불교의 의식문을 단순히 의례적 의식문이 아니라 포괄적인 수행의 지침서”라고 강조했다.
(<예경지송>, 금강신문 2016-03-14)
불교계 신문중의 하나인 금강신문에 따르면 예경지송은 824면에 5만원이라 되어 있다. 모두 138개의 경송이 있는데 테라와다불교의 예불문이나 수호경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빠알리어로 외우면
테라와다불교 삼대 예경문이 있다. 그것은 숫따니빠따에 실려 있는 라따나경(보배경, Sn2.1), 멧따경(자애경, Sn1.8), 망갈라경(축복경, Sn2.4)이다. 이 경들을 모두 외운바 있다. 그것도 빠알리어로 외웠다. 이외 초전법륜경과 자야망갈라가타도 외웠다. 마치 천수경에서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처음 외울 때 처럼 빠알리어를 모른 상태에서 우격다짐으로 외웠다. 그러다 보니 빠알리어가 매우 친숙해졌다.
선생님에 따르면 예경지송에 실려 있는 경들은 오부니까야에서 선별한 것이라 한다. 늘 가까이 하며 수지하고 독송하기에 좋은 경들이라 한다. 그런데 빠알리어로도 표기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또 빠알리어를 우리말로 음역해 놓았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말 표기에서 다른 번역자의 것과 다름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발음의 문제이다.
빠알리어 ‘vipassna’라 했을 때 보통 ‘위빠싸나’라 한다. 그러나 선생님의 설명에 따르면 ‘비빠싸나’라 한다. vi에 대하여 ‘위’라 하지 않고 ‘비’라 한 것이다. 이렇게 한 것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우리나라에서 발음이 쉽게 되지 않는 것이다. ‘비’와 ‘위’의 중간 형태의 발음이기 때문이다. 만일 위빠사나 식으로 발음한다면 ‘Veda’라는 말도 ‘베다’라 하지 않고 ‘웨다’라 해야 할 것이다.
전량폐기하고
예경지송은 가장 최근에 발간된 책이라 했다. 그런데 책의 발간과 관련하여 하나의 에피소드를 들려 주었다. 그것은 오류에 대한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오타’에 대한 것이다. 누군가 빠알리성전협회의 책에 대하여 ‘오류투성이다’라고 험담 하였을 때 이는 본문의 내용이 잘못 된 것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 각주에 있어서 오타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예경지송의 경우 오타가 빠알리어를 우리말로 표기 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한글로 된 우리말은 교정자가 잡아 낼 수 있어도 빠알리원문과 그 원문을 우리말로 음역한 것에 대해서는 한계가 있음을 말한다.
무엇이든지 처음 나온 것은 만족스럽지 않다. 아무리 주의 깊게 살펴 보았다고 하지만 미쳐 보지 못한 것이 있다. 전자제품도 그렇다. 개발하여 첫 출시된 제품에 하자가 없지 않을 수 없다. 치명적 결함이라기 보다 사소한 것들이다. 필드에서 생각지도 못한 문제점이 발견되면 이를 즉각 수용하여 다시 생산한다. 이렇게 몇 차례 반복하다 보면 에러가 거의 없게 된다. 그래서 베스트셀러가 된다. 책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예경지송을 1,500부 찍었다고 했다. 그런데 오타가 발견된 것이다. 눈에 잘 띄지 않는 빠알리어 대한 것이다. 땜질 식으로 종이를 오려 붙였다고 한다. 그런데 계속 발견된 것이다. 발견될 때 마다 땜질처방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온통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것 같았다고 했다. 할 수 없이 ‘전량폐기’ 했다고 한다. 다시 한번 교정하여 재발간 된 것이 이번에 출시된 예경지송이라 한다.
테라가타와 테리가타를 번역중
선생님의 향후계획은 어떤 것일까? 그것이 궁금했다. 우선 현재 어떤 번역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현재 테라가타와 테리가타를 번역중이라 했다. 아직까지 한국에서 빠알리어로 번역되어 있지 않은 경전들이다. 일반적으로 장로게와 장로니게로 알려져 있는 두 개의 경전에 들어가 있는 게송은 약 1,500개 가량된다고 한다. 현재 10% 정도 진척 되었고 올해 안으로 출간 될 것이라 했다.
테라가타와 테리가타에 대한 번역은 듣던 중 반가운 말이다. 늘 장로게와 장로니게는 번역되지 않았을까라며 아쉬워 하였다. 뜻 밖에도 번역중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귀가 번쩍 뜨였다.
테라가타와 테리가타 게송에 대하여 간접적으로 접하였다.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을 통해서이다. 비록 몇 편 실려 있지만 부처님 제자들의 해탈과 열반의 기쁨에 대해서 노래 한 것을 보면 신심을 내기에 충분하다.
테리가타 로히니경을 보면 “그들은 재물을 창고나, 단지나, 바구니에 저장하지 않으며 완전히 조리된 음식만 탁발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문을 좋아합니다.” (Thig.283) 라는 게송이 있다. 사문을 좋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나열되어 있어서 마치 ‘청정한 수행자는 이런 것이다.’를 알려 주는 것 같다.
또 테리가타에 ‘나는자유!’라는 게송도 있다. 이 게송은 세 가지 굽은 것으로부터 벗어난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오! 자유! 정말로 나는 벗어났다. 세 가지 굽은 것들에서 벗어났다. 절구, 절구공이, 그리고 마음이 비뚤어진 남편으로부터 벗어났다. 나는 생사에서 벗어났다. 윤회로 이끄는 것은 뿌리째 뽑혔다.”(Thig.11) 라 되어 있다.
부처님의 제자들은 부처님을 만나서 생사를 벗어났다. 부처님을 만나 해탈과 열반의 기쁨을 노래한 것이 테라가타와 테리가타이다. 책이 연말 안으로 출간 된다 하니 기대가 무척 크다.
불설의 기준은 무엇인가?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경장과 율장을 거의 대부분 번역하였다. 특히 율장이 번역된 것은 경장번역 못지 않은 역사적 사건이다. 그 내용도 방대하여 경장 못지 않다. 그렇다면 율장은 어느 정도로 중요할까? 이는 율장에서 “만약에 경전과 논서를 잃어버리더라도 계율을 망가뜨리지 않으면, 교계는 언제나 지속합니다.”(율장대품. Vin.98)라는 게송에서도 알 수 있다. 율장대품 제1장 가장 마지막 단락에 실려 있는 후렴시 중의 일부이다.
흔히 불설이라 한다. 그렇다면 불설의 기준은 무엇일까? 최근 불교TV 사이트에서 본 김한상 박사에 따르면 경장과 율장에 실려 있으면 불설로 본다고 했다. 이는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바나경’에서 부처님이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아난다여, 내가 가고 난 뒤에 내가 가르치고 제정한 가르침과 계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 (M16)” 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불설의 진위여부는 경(經)과 율(律)에 의거하여 판단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경장과 율장에 모두 실려 있는 가르침이라면 불설이라고 보아도 틀림 없을 것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번역된 네 권의 율장을 모두 갖추고 있다. 열어 보면 경장에서 실려 있는 가르침과 중복되어 있는 가르침이 상당히 많다. 더구나 인연담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왜 그런 가르침을 설하였는지도 알 수 있다. 신심있는 불자라면 경장뿐만 아니라 율장도 보아야 함을 말한다.
율장은 금서가 아니다
현재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경장과 율장이 대부분 번역되어 있다. 불자들은 경장을 통하여 역사적으로 실재하였던 부처님의 생생한 모습을 본다. 그런데 율장을 보면 더욱 더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율장이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바탕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분 부처님을 더 가까이서 알고 싶다면 율장을 보아야 한다. 또 부처님 당시 생생한 사회의 모습을 엿 보고자 한다면 율장을 보아야 한다. 그런 율장은 재가자에게 금서가 아니다. 불자라면 누구나 보아야할 필독서이다. 왜 그런가? 모든 출자자는 재가자들로 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청정도론이 번역되어 나온다면
누구나 처음 접하는 것은 경장이다. 그러나 불교경전에 경장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삼장이라 율장, 경장, 논장이 있다. 이를 ‘빠알리삼장’이라 한다. 마치 세 개의 다리를 가진 향로가 매우 안정되어 있듯이 율장과 경장과 논장은 사실상 동등한 것이다.
어떤 이는 경장만을 중시하고 논장을 무시한다. 만일 논장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아마 아함경을 보는 듯 할 것이다. 아함경에는 주석서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에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더구나 한역으로 되어 있어서 갖가지 해석이 난무한다. 그러나 빠알리 경전의 경우 주석이 있어서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누구나 알 수 있다.
부처님 가르침을 체계화 시켜 놓은 것이 논장이다. 대표적으로 ‘아비담마논장’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논장은 어느 정도로 중요할까? 이는 빠알리삼장이라 이천 년 이상 율장과 경장과 논장이 함께 전승되어 온 것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수행자들은 논장을 경장이나 율장 못지 않게 목숨걸고 지켜 온 것이다.
논장을 대표하는 것이 아비담마이다. 그런데 아비담마 못지 않게 부처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분석해 놓은 논서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청정도론’이다. 스리랑카에서 5세기에 붓다고사가 편집한 것이다.
청정도론은 현재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다. 초기불교관련 서적 중에 가장 많이 팔리고 있어서 베스트셀러라고 한다. 그런데 선생님에 따르면 청정도론 번역 요청이 많다고 한다. 주로 스님들이라 한다. 좀더 쉬운 언어로 번역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만약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청정도론이 번역되어 나온다면 그야말로 빠알리삼장이 최초로 번역된 것이나 다름 없을 것이다.
도인처럼 보이지만
선생님과 긴 시간 얘기를 나누었다. 때로 가족사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 주었다. 그리고 가족에 대한 이야기,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이야기도 물었다. 그런 이야기를 할 때는 긴 백발에 흰 수염까지 나서 도인처럼 보이지만 겉모습일 뿐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 주었다.
선생님은 목소리에 힘이 있고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을 하고 있다. 하루에 6시간 이상 번역을 하는데 주말도 없고 명절도 없다고 했다. 심지어 해외의 가족과 함께 있는 기간 중에도 번역을 한다고 했다. 이렇게 오로지 한길을 파서일까 오늘날 놀라운 업적을 이루어내었다.
만일 공동작업하였다면 책을 한권도 내지 못했을 것이라 했다. 홀로 작업하였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독하고 외로운 작업이었다고 본다. 경제적 문제로 인하여 가족과 떨어져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두 아들을 훌륭하게 키웠다고 한다. 조만간 가장 큰 후원자는 아들이 될지 모른다고 했다.
오프라인 강연계획
선생님은 강연도 나간다고 했다. 그러나 번역 때문에 왕성하게 활동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고정적으로 나가는 곳이 있다고 했다. 노숙인들을 위한 자원봉사자의 모임에서 강연도 하고 때로 노숙인들을 위해 봉사도 하고 있다고 했다.
선생님은 최근 집과 가까운 곳에 사무실을 냈다고 한다. 아파트형공장이라 한다. 그곳에 출간된 책이 보관 되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요즘은 집과 사무실을 왕래한다고 한다. 그런데 공간이 되는 것 같다. 어느 정도 번역이 마무리되면 독자들을 위하여 강연을 열 계획이라 한다. 이는 요청이 많이 들어 오기 때문이라 한다. 번역하는데 있어서 방해 받지 않을 정도로 시간을 할애 하여 오프라인 모임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선물을 하나 받았는데
선물을 하나 받았다. 나가려는데 씨디를 한장 준 것이다. 제목은 ‘법구경-진리의 말씀’이다. 표지에 ‘퇴현 전재성번역 석혜능스님낭송’이라 되어 있다.
낭송자 석혜능스님은 ‘비니야연구원’ 원장스님이다. 작년 발간된 율장비구계와 율장비구니계에서 발간사를 쓴 바 있다. 율장이 출간되는데 있어서 최대의 후원자라 볼 수 있다. 현재 이 씨디는 시중에서 살 수 있다. 발매 된지 몇 일 되지 않는다고 했다.
씨디는 법구경번역서를 스님이 낭송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절에 가면 유명남성아나운서가 낭송하는 경전문구를 들을 수 있는데 이 씨디는 스님이 직접낭송하고 있다. 배경음악이 깔려 있어서 듣기에 부담 없다. 책으로 읽는 것과 또 다른 맛이다.
동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초면에 만나자고 하면 경계한다. 상대방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고 난 다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이메일로 먼저 만남을 요청하였다. 이렇게 먼저 만남을 요청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대부분 먼저 만나자고 해서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렇다고 많은 만남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손으로 꼽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선생님을 만나서 궁금한 것을 두서 없이 물어 보았다. 초면에 실례가 아니었는지 모른다. 또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은 것은 아닌지 모른다. 그러나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게 되어서 후련한 느낌이다. 언젠가 만나 뵙고 인사를 드려야겠다는 마음을 늘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 얼굴을 서로 익혔으니 다음 번에 뵐 때 좀더 낯익을 것이라 본다.
선생님과는 동시대를 살고 있다. 만일 다른 시대에 살고 있다면 만나지 못할 것이다. 누군가 100년 후에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발간된 번역서를 접했다면 어떤 분인지 매우 궁금해 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에 만남이 가능한 것이다.
항상 부처님의 가르침과 함께 사는 나날이다. 늘 열어 보는 것은 초기경전이다. 그런 번역가와 동시대를 함께 산다는 것은 행운일 것이다.
2016-03-20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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