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아는 만큼만 여러분들 깨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능력껏 보시하였을 때
필자소개란을 보면
불교평론이 있다. 불교계의 ‘고품격’ 계간지이다. 학자들이나 스님들, 그리고 불교계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만드는 잡지를 말한다. 논문이나 수필등 여러 가지 볼 거리가 있다. 여기서 유심히 보는 것이 있다. 그것은 ‘필자소개항목’이다.
불교계의 리더는 얼마나 많을까? 수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매스컴에 알려져 있는 인사는 ‘이백여명’ 될 것이라 한다. 불교방송이나 불교TV에 등장하는 단골 법사스님들을 보면 그 스님이 그 스님이다. 불교평론도 마찬가지이다. 주로 학자들이 등장하는데 그 사람이 그 사람인 것 같다. 인재풀이 좁아서일까 아니면 소수만이 활약해서 일까 그 법명 또는 그 이름을 본다. 그런데 필자소개란을 보면 늘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것이 있다. 그것은 학력과 경력, 그리고 현재의 지위에 대한 것이다.
최근 불교평론을 열어 보았다. 기획특집으로 주로 학자들의 논문이 여러 편 실려 있다. 한번도 본적이 없지만 이름을 보면 익숙하다. 어느 유명교수의 필자소개란을 보면 현재 모대학 교수이다. 학위를 받은 대학교와 대학원명이 나온다. 이와 더불어 외국에서 수학하여 박사학위를 가진 경력도 소개 되어 있다. 그리고 주요 저서가 소개 되어 있다.
이번에는 이름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학자의 소개란을 보았다. 역시 현재 지위와 학위를 받은 대학교, 그리고 저서가 소개 되어 있다. 스님의 소개란을 보았다. 이 스님의 경우 명문대출신이다. 이 사회에서 최고학부라 일컬어지는 대학을 졸업하였다. 또 졸업한 강원이 소개 되어 있고 득도하게 한 은사스님도 소개 되어 있다. 다른 필자와 마찬가지로 저서와 논문이 소개 되어 있다.
불교계 유명인사들의 필자소개란을 보면 길게 설명되어 있다. 주로 학력에 대한 것이다. 국내는 물론 국외에서 수학하였다면 더욱 더 길어진다. 이럴 때 하는 말이 “가방끈이 길다”일 것이다. 그런데 공통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은 ‘나이’이다. 어느 필자소개란에서도 나이는 보이지 않는다.
실명을 쓰지 않는다고
인터넷에 글을 쓰고 있다. 필명으로 글을 쓴 지 10년 되었다. 2006년부터 쓰기 시작하였으니 햇수로 11년이고 만 10년이 된 것이다. 요즘은 거의 매일 쓰다시피 하고 있다. 더구나 교계신문사이트에 칼럼도 올리고 있어서 세상 밖으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교계사이트에 올리는 글은 블로그에서 선별한 것이다. 선별한 것을 다시 한번 읽어 본다. 문제 될 것이 없다고 판단 되었을 때 기고한다. 그런데 종종 댓글을 보면 악의적인 비난을 받기도 한다.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비난하고 비방하는 것이다. 물론 건전한 비판은 수용한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여 일단 “다 엉터리이다”라고 하였을 때 그 순간만큼은 불선심에 지배되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더구나 본문 내용도 파악하지 않은 채 있지도 않은 사실을 언급하며 비방한다면 ‘구업’을 짓는 것이 된다.
교계사이트에 ‘진흙속의연꽃’이라는 필명으로 글을 올리고 있다. 이에 대하여 어떤 이는 왜 실명으로 올리지 않느냐고 지적한다. 그래서 “도대체 언론에서 실명이 아닌 익명의 글을 머리에 올리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미디어붓다의 언론 자격이 의심스럽다. 실명이 아닌 글로 지면을 채우는 짓거리를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미디어붓다는 언론 대접을 받기 어려울 것이다. 실명으로 쓰고 자기 글에 책임지게 하는 것이 언론의 기본 아닌가.”(O법우님) 라 하였다.
요즘은 인터넷시대이다. 인터넷에 누구나 글을 쓰고 공유할 수 있는 시대이다. 그런데 인터넷시대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익명성’이다. 자신의 본명을 밝히지 않고도 인터넷필명으로도 글쓰기가 가능한 것이다. 이런 글쓰기가 교계신문사이트라고 하여 허용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럼에도 어떤 이는 실명을 공개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정보를 ‘오픈하라’는 말과 같다. 마치 불교평론에 실린 논문 필자소개와 같은 것이다.
보통불자로서 2006년 이래 글을 쓰고 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돈벌이를 목적으로 한 것도 아니다. 좋아서 한 일이기 때문에 돈도 되지 않지만 오늘도 내일도 그저 쓸 뿐이다. 교계신문사이트에 글을 올리는 것도 이런 사고의 연장선이다.
실명공개 등 필자의 정보공개를 요구하는 법우님의 주장은 일면타당하다. 독자의 알 권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불교평론에서의 논문필자소개란 처럼 내 세울 것이 없다. 가방끈이 길지도 않을뿐더러 불교에 입문한지도 오래 되지 않았다. 또한 대불련 등 불교계에서 활동한 경력도 없고 더구나 전공도 인문학 계통이 아니다. 여로 모로 보아 소개할 것이 없다. 그럼에도 오픈하라고 한다면 ‘이름’과 ‘나이’ 밖에 없을 것이다. 마치 TV에서 촌부들을 소개할 때 이름과 나이를 자막처리 하는 것과 같다.
책임론을 이야기하지만
필명으로 글을 써서 인터넷에 공개하고 있다. 그날그날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부처님가르침을 근거하여 마치 일기처럼 쓰고 있다. 그런 세월이 10년 되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한다. 정말 많은 것이 변했다. 처음 불교에 입문할 때가 2004년이다. 그때와 비교해 보면 불교와 불교계에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수행경력이 있지 않다. 단지 경전을 근거로 하여 느낀 것을 글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무언가 대단한 것이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 같다. 탈탈 털면 먼지 밖에 없는 아무것도 아닌 보통불자에 지나지 않음에도 올린 글에 대하여 비판을 넘어 비난하고 비방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필명으로 글을 쓰는 것에 대하여 ‘책임론’을 이야기한다. 필명으로 글을 쓰면 무책임한 것일까? 실명과 과거 경력을 모두 오픈하고 글을 쓰면 책임있는 글쓰기일까? 보통불자에게 있어서 공개할 ‘건덕지’가 없다. 인문학 계통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불교계에 있었던 것도 아니다. 어떻게 인터넷에 글을 쓰다 보니 알려지게 된 것일 뿐이다.
“침묵한다고 비난하고, 말을 많이 한다고 비난하고, 알맞게 말한다고 비난하니”
글쓰기도 일종의 구업으로 본다. 신구의 삼업 중에 글쓰기는 구업에 속한다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매일매일 ‘구업’을 짓고 있는 셈이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가급적 경전을 근거로 글쓰기하고 있다. 그것도 초기경전이다. 그런데 초기경전 입장에서 볼 때 타전통의 불교는 가르침에서 어긋난 것으로 본다. 이런 사실에 대해서도 글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대승불교와 선불교 전통이 다수를 점하고 있기 때문에 초기불교 관점에서 글을 쓰는 것에 대하여 구업이라 여기는 것 같다.
인터넷에 글을 쓴다는 것은 오픈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글이 세상에 공개되는 것이다. 혼자만의 글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함부로 글을 쓸 수 없다. 그래서 반드시 초기경전에 근거해서 글을 올리고 있다. 만일 누군가 비방한다면 그것은 부처님 말씀을 비방하는 것과 같다.
경전의 문구를 근거로 하여 느낀 점을 올리고 있다. 어떤 이는 이런 행위도 하지 말라고 한다. 단지 경전만을 올려놓으라는 것이다. 또 어떤 이는 경전문구를 근거하여 느낌을 적어 놓은 것에 대하여 자기생각이 없다고 비판한다. 그래서 “글이란 거는 자신의 생각을 담는 거지, 여기저기의 것을 짜깁기 하는 게 아닙니다.”(B법우님) 라고 점잖게 충고한다.
어떤 이는 글이 짧으면 짧다고 비난하고, 글이 길면 길다고 비난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법구경에서 부처님은 “침묵한다고 비난하고, 말을 많이 한다고 비난하고, 알맞게 말한다고 비난하니 세상에서 비난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 (Dhp227)라 하셨다.
분신과도 같은 글이기에
인터넷에 글을 쓰면서 강한 책임감을 느낀다. 잘못 쓰여진 글이 유통 되었을 때 잘못된 길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 보다 경전의 문구를 근거로 하여 글을 쓴다. 만일 경전문구만 올려 놓는다면 밋밋하고 무미 건조할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가미할 뿐만 아니라 관련 경을 찾아 보충해 놓는다면 가르침을 이해 하기 쉽다. 이런 작업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하루에 보통 A4로 10장 쓴다. 이렇게 하였을 경우 4~5시간 소요 된다. 이른 아침에 사무실에 도착하여 ‘미친듯이’ 글을 쓰다 보면 어느덧 점심시간이 된다. 이렇게 몰입하는 것은 오후에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생업을 가진 ‘일인사업자’로서 오전에 글을 쓰고 오후에 일을 한다. 일이 없으면 남는 시간에 글쓰기에 전념한다. 지난 10년간 이런 세월을 살아 왔다.
올린 글에 대하여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올린 글은 마치 ‘분신’과도 같다. 올린 글 만큼 시간이 잡혀 있기 때문이다. 올린 글에 투자한 시간이 그대로 실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글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어느 글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마치 글 하나하나가 분신 같은 것이고 자식 같은 것이다. 이런 글에 무한한 책임을 느낀다. 비록 필명으로 글을 쓰지만 무한책임을 지는 자세로서 글의 말미에 반드시 서명을 한다. 글을 올린 날자와 필명을 기입하는 것이다.
서명하는 버릇은 십년 전 처음 글쓰기 할 때부터 지켜온 습관이다. 이는 올린 글에 대하여 무한책임을 지겠다는 다짐이다. 그래서 혹시라도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설령 10년 전의 글이라도 수정에 들어 간다.
비주류, 비급, 삼류
지금은 정보통신시대이다. 네트워크가 방방곡곡에 깔려 있어서 누구나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다. 이런 시대에 불교계의 오피니언 리더들의 활약을 기대해 본다.
가방끈이 긴 학자들이나 수행을 많이 한 스님들이 인터넷공간에서 활약한다면 가르침에 목말라 하는 불자들의 갈증을 해소 시켜 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직까지 인터넷에 글을 꾸준히 올리는 리더들을 보지 못하였다. 더구나 매일 장문의 글을 올리는 사람을 아직까지 못하였다.
가방끈도 짧고 이쪽 분야 계통도 아닌 보통불자가 매일 글을 올리고 있다. 어떻게 보면 불교계에 있어서 ‘비주류’이다. 그리고 ‘비급’이고 ‘삼류’의 글에 지나지 않는다. 스님도 학자도 아니기 때문에 ‘비주류’이고, 논문도 법문도 아니기 때문에 ‘비급삼류’의 글이다.
강호에 숨은 고수가 많다는데
그런데 어떤 법우님에 따르면 이 땅에는 숨은 고수들이 많다고 한다. 교계신문사이트 칼럼에 어떤 법우님이 다음과 같은 댓글을 남겼다.
그가 니까야 번역본이 널리 유통되지 않았을 때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모을 수 있었나 봅니다. 자신의 블로그에 오는 사람들한테는 어필할 수 있는 글이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니까야 번역본이 상당히 유통되어 독점적 위치에 있지도 않고, 니까야도 읽는 사람의 근기에 따라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되거든요. 이젠 어설픈 짜깁기, 나열방식이 어필되지 않을겁니다.
글이란 거는 자신의 생각을 담는거지, 여기저기의 것을 짜깁기 하는게 아닙니다. 본인의 커뮤니티 안에서는 왕대접 받았을 지 모르지만 커뮤니티 밖에서는 얕은 지식은 금방 바닥을 드러내고 상당한 비판의 화살을 받아야 합니다.
강호는 넓고 고수는 많습니다. 살아가면서 고수인척 폼 잡지 말아야 할 분야가 몇개 있는데 '불교'도 그 중 하나죠. 불교는 아주 방대하고 심오해서 숨은 고수들이 많습니다. 불교학자들, 전문가연 하는 자들도 재야의 숨은 일반인들한테 얼마든지 발려버릴 수 있습니다.
불교지식인들이 겸손한 이유는 수행을 잘해서도 이겠지만 아는 척 했다가 이름모를 고수한테 역관광당할 수 있다는 정도는 알기 때문에 잘난척 못하는 것입니다. 소승들 모임내에서는 이 분이 글을 잘 쓰는 축에 속하나 보죠? 모임밖으로 나오니 실력을 제대로 평가받는 거죠.
(B법우님)
B법우님에 따르면 강호에는 고수들이 많다고 한다. 그것도 숨은 고수라 했다. 오랜 세월 수행한 고수가 이곳 저곳에 많음을 말한다. 아마 불교를 전공하는 학자들이나 수행을 전문으로 하는 스님일 것이다. 그런 고수들이 글을 보았을 때 보통불자의 글은 ‘발려질 수 있다’라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늘도 내일도 내 방식대로
불교계의 고수들은 왜 침묵하고 있을까? 오랜 세월 갈고 닦았다면 가르침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을 위해 ‘회향’해야 하지 않을까? 회향하는데 있어서 가장 좋은 방법은 ‘글쓰기’라 본다.
‘시간이 곧 돈인 시대’에서 고수들을 찾아 먼 곳까지 찾아 다니기 힘들다. 인터넷 시대에 글을 올리면 가르침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에게 ‘감로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학자들이나 스님들, 그리고 불교계의 유명인사들이 매일 글 올리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아무 배경도 없는 보통불자가 매일 글을 올리고 있다. 이에 대하여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진흙속의 연꽃은 불교학자도 아니고 더우기 수행을 한 사람도 아닙니다.. 불교는 교학과 수행이 함께 해야합니다.” (K법우님) 라고 말한다. 글만 쓸 뿐이지 수행이 없다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어떤 이는 “진흙속의 연꽃은 초기불교 자료을 구하기 힘들던 때에 니까야 번역자료를 많이 갖고 있어서 초기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준 것을 사실입니다만, 거기까지 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교학만 있지 수행이 없음을 말한다.
이것은 사실이다. 일인사업자로서 자리를 비울 수 없다. 집중수행프로그램에 참여 하고 싶어도 생업 때문에 쉽지 않다. 물론 핑계일 수 있다. 마음 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지적에 고맙게 생각한다.
아무 배경도 없는 보통불자가 매일매일 글을 생산해 내고 있다. 십년 째 쓰고 있는 글이 3천개에 달하고, 블로그 누적조회수가 5백만명에 육박하고 있다. 그러나 보통불자가 아무리 글을 써 보았자 비주류, 비급, 삼류 글에 지나지 않는다. 스님도 학자도 아니기에 절대 주류에 속할 수 없고, 법문도 논문도 아니기에 비급이고 삼류 글이 될 수밖에 없다. 앞으로도 이와 같은 기조는 계속 유지 될 것이다. 그리고 인터넷필명으로 소통할 것이다.
아무 것도 내세울 것 없는 보통불자이다. 학력이나 경력도 보잘 것 없는 불자가 매일매일 글을 쓰는 것은 좋아서 하는 일이다. 글을 쓰다 보니 알려지게 되었지 처음부터 의도를 가지고 쓴 것이 아니다. 돈도 되지 않는 글에 매일 A4로 10페이지 가량쓰고 하루 일과의 반을 보내고 있다. 이런 글쓰기에 대하여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늘도 내일도 내 방식대로 글을 쓸 뿐이다.
“저는 제가 아는 만큼만 여러분들 깨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어느 유튜브동영상에서 감명깊은 말을 들었다.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 불자인데 위빠사나 강연을 할 때 이런 말을 하였다.
“제 강의를 들으시다가 내지는 듣고 나신 뒤에 부족하다 생각하시면 더 고매하고 높으신 분들한테 찾아 가셔가지고 더 공부를 하시고 수행을 하시는데 도움을 얻으시면 되겠습니다. 저는 제가 아는 만큼만 여러분들 깨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H님, 위빠사나 수행1)
H님은 여성강사이다. 학력이나 경력은 알 수 없다. 인터넷시대를 맞이하여 강연한 것을 유튜브에 올려 놓은 것이다. 그런데 강연을 시작하기에 앞서 가장 먼저 “저는 제가 아는 만큼만 여러분들 깨 알려드리고자 합니다.”라는 말을 했다. 바로 이 말에 ‘필’이 꼽혔다.
초기경전을 보면 ‘능력껏’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상윳따니까야에서 “모든 재산과 함께 이 몸은 끝내는 버려야 하네. 슬기로운 자여, 잘 알아 즐기며 또한 보시하세. 능력에 따라 보시하고 또한 즐기면 비난받지 않고 하늘나라를 성취하리.” (S1.41) 라는 말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 “능력에 따라 보시하고”라는 말이 있다. 능력껏 보시하라는 말이다.
보시는 ‘능력껏(yathānubhāvaṃ)’ 하는 것이다. 이는 빠알리어 yathānubhāvaṃ가 ‘yathā(as; like)와 ānubhāva(power; splendor,威力)’의 합성어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힘 닿는데 까지 보시하는 것이다. 나중에 돈을 많이 벌어 한꺼번에 보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능력에 맞게 보시하는 것이다.
의문이나 궁금한 것이 있으면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이가 젖이 나는 소를 가지고 있었다. 몇 달 후 잔칫날에 많은 우유를 사용하기 위하여 매일 젖을 짜주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잔칫날이 다가 왔을 때 소에서 우유가 나오지 않았다. 매일 짜 주지 않아 우유가 말라버린 것이다. 보시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자신이 현재 처한 능력껏 보시하는 것이다. 수입이 많은 자는 그 수입에 걸맞게 보시하면 된다. 수입이 적은 자는 역시 그 수입에 적합하게 보시하면 된다. 능력껏 보시하는 것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강호에는 숨은 고수들이 많다고 한다. 그런 고수 중에는 가방끈이 길어 외국에서 학위를 받은 자들도 있을 것이다. 또 깊은 산중에서 수 십 년 수행에만 전념한 고수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고수들이 세상에 나와야 한다. 그래서 가르침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을 위해 법을 설해야 한다.
불자들이 고수를 찾아 산중으로 찾아 갈 여유가 없다. 시간이 돈인 세상에서 생업에 바쁜 불자들은 시간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고수들이 저자 거리에 나오라는 말은 아니다. 인터넷시대에 얼마든지 글로서 소통할 수 있다. 가방끈이 긴 학자들과 오랜 수행경력을 가진 스님들이 매일 글을 올려 준다면 이보다 좋은 ‘법보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직까지 그런 고수는 한명도 보지 못하였다.
가방끈도 짧고 수행경력도 없는 비주류의 보통불자가 매일 비급삼류의 글을 양산해 내고 있다. 이런 행위에 대하여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글을 쓸 때 반드시 날짜와 필명으로 서명하고 있다. 올린 글에 대하여 무한책임을 지는 것이다.
돈도 안되는 글쓰기를 하는 것은 좋아서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내일도 능력껏 글을 올린다. H님이 말한 것처럼 “아는 만큼”알려 주는 것이다. 의문나는 것이나 궁금한 것은 강호의 숨은 고수들에게 물어 보면 될 것이다.
2016-03-24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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