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두 법우님과 오프라인 모임을 갖고
불도(佛都)부산으로
일요일 불도부산에 갔다. 우리나라에서 불자비중이 가장 높아서 불도(佛都)라 하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신심 있는 불자가 많다고 해서 불도라 한다. 서울이 정치의 수도라면 부산은 한국불교의 수도와 다름 없다.
일요일 오전 7시 20분 부산행 무궁화에 몸을 실었다. 4시간 40분 걸리는 무궁화호는 이제 완행열차가 되어 버렸다. KTX를 이용하면 두 시간 반이면 도착하지만 표를 구할 수 없어서 기차를 이용하기로 했다. 그 결과 반 값에 가게 되었다.
부산에 간 것은 조카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이다. 형님은 타지역 출신이다. 그러나 조카는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부산이 고향과도 같다. 작고한 백부 두 아들, 즉 첫 째 형님과 셋 째 형님은 40여년 전 부산에 정착했다. 그래서일까 두 형님 가족들은 부산이 제2의 고향이나 다름 없다.
조카의 결혼식은 부암역 부근 웨딩홀에서 열렸다. 조촐한 결혼식이다. 배운 것 없이 노동으로 살아 온 사촌형님은 홀로 세 자녀를 키웠다.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막내인 아들이 결혼 것이다. 이렇게 홀로 된 것은 형수가 가출하였기 때문이다. 막내 조카가 유년기일 때 집을 나가 버린 것이다. 이후 형님이 아이들을 홀로 키웠다. 그 아이가 이제 성년이 훌쩍 지나 결혼식을 하게 된 것이다.
홀로 살아온 백부의 셋째 형님은 부처님 같은 사람이다. 사람이 좋아서 착하기만 하다. 인정도 많아 벌이가 뻔함에도 경조사에서는 형편에 맞지 않게 많은 금액을 내기도 한다. 그런 형님이 한번도 화를 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또 욕심 부리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형님은 처음 정착해서 연탄을 지게에 지고 배달 일을 하는 등 힘겹게 살았다. 지금도 여전히 가난하고 힘겹게 살아 간다. 그런 형님에게 아들의 결혼은 최고로 기쁜 날인 것 같아 보였다.
두 법우님과 오프라인 모임
불도부산에 간 두 번째 이유는 법우님들을 뵙기 위해서였다. 형님으로부터 조카 결혼식 참석 요청 전화를 받았을 때 부산에 살고 있는 법우님들이 생각났다. 이왕 가는 김에 만나 보고지 한 것이다. 오래 전부터 블로그에 글을 주셨던 필명 ‘무설자’님과 필명 ‘날고집이’님이다.
두 법우님은 부산에 내려 오면 꼭 찾아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부산은 거리도 멀 뿐만 아니라 내려 갈 일이 없었기 때문에 혹시 내려 갈 일 있으면 반드시 찾아 뵙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조카결혼식이 있게 됨에 따라 좋은 기회가 생긴 것이다.
먼저 무설자님에게 연락하였다. 무설자님은 동아대 바로 앞 ‘에피소드인커피’라는 커피전문점카페를 가지고 있다. 부인이 운영하고 있지만 일터도 같은 건물에 있기 때문에 만남의 장소로는 최적이다.
약속시간은 오후 4시로 잡았다. 무설자님도 흔쾌히 동의하였다. 마침 일요일 오전에 해외출장에서 돌아온다고 하니 오후에 가능하다고 하였다. 이런 사실을 날고집이님에게도 알렸다. 날고집이님도 “꼭 뵙겠습니다.”라는 문자를 보내 왔다.
에피소드인커피에서
부페에서 식사를 마치고 곧바로 부민동 ‘에피소드인커피’로 향하였다. 부산지하철1호선 ‘토성역’에서 하차하여 약속장소를 찾아 갔다. 약속장소는 대학가라 하지만 북적이지 않고 분위기가 차분하다. 새로 형성된 거대한 시가지가 아니라 부산의 긴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고즈넉한 곳이다. 마치 서울의 북촌처럼 격조 있고 또 한편으로 아카데믹한 곳이다.
에피소드인커피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1층에서 무설자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온라인에서 문자로만 소통 하였는데 첫눈에 그 분인 줄 알아 보았다. 서로 얼굴은 모르고 있었지만 이미 글로서 수 년 동안 소통하였기 때문에 오래 된 친구를 만난 듯이 반가워했다.
2층으로 자리를 옮겼다. 1층과 2층을 커피점으로 활용하고 있는데 2층 한켠에 마치 서재처럼 생긴 방이 하나 있다. 무설자님의 전용공간이라 볼 수 있다. 무설자님의 블로그에서 종종 본 차 마시는 곳이다. 그래서일까 차를 마실 수 있는 차도구가 갖추어져 있다.
무설자님은 건축사이다. 그럼에도 차와 관련하여 수 많은 글을 써서 차전문가로알려져 있다. 이날 역시 무설자님은 차부터 대접하였다. 마셔보니 ‘보이차’이다. 보이차와 관련하여 수 많은 글을 쓴 바 있다고 했다.
차를 마시는 도중에 날고집이님이 도착했다. 부산에서 치과를 하고 있다. 초면임에도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익숙하다. 그런데 무설자님과 날고집이님은 초면이다. 그럼에도 차를 마시자 금방 구면처럼 되었다.
보이차를 마시며
무설자님이 팽주가 되어 끊임 없이 차를 주었다. 차를 마시면 조금 남아 있음에도 즉시에 차를 따라 주는 것이었다. 그런 차맛은 달랐다. 이제까지 차담을 하며 많은 차를 마셔 보았지만 차전문가가 만들어 주는 차맛은 깊고 그윽한 느낌이 들었다.
보이차 특유의 향내가 났다. 무엇보다 목에 부드럽게 넘어 갔다. 일반적으로 보이차는 쓴 것이 특징이지만 전혀 달랐다. 이에 대하여 무설자님은 좋은 차는 향도 좋아야 하지만 마시기에도 부드러워야 함을 강조하였다.
처음에는 주로 차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비록 온라인에서 글로서 소통하였지만 초면이기 때문에 공통적인 화제를 끌어 가는데 있어서 차만한 것이 없다. 더구나 보이차에 대하여 일가견이 있어 보이는 무설자의 차에 대한 이야기는 흥미를 끌었다. 실제로 차를 만들어 주었을 때 이제까지 맛 보지 못한 것이었다.
“바로 이맛이야!”
무설자님의 에피소드커피는 커피전문점이다. 이번에는 커피를 대접하겠다고 했다. 만들어 온 커피 맛을 보았다. 아마 이런 맛은 처음이다. 이제까지 수 많은 커피를 마셔 보았지만 이처럼 깊고 그윽한 맛은 느낄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맛이 가능할까? 무설자님에 따르면 원두를 직접 볶아서 갈은 것이라 했다. 더구나 달콤하기 했는데 설탕이나 시럽을 전혀 타지 않은 것이라 했다. 그래서 진짜 커피맛을 원한다면 커피점에 가서 직접 볶은 것을 조금 사라고 했다. 이것을 갈아서 마시면 커피 특유의 맛이 난다고 했다.
무설자님으로부터 보이차와 원두커피를 제공받았다. 이제 까지 마셔 본 것 중에 가장 독특한 맛이었다. 말로서는 설명이 가능하지 않다. 마셔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그래서일까 “바로 이맛이야!” 또는 “니들이 이 맛을 알어?”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을 때
차와 커피는 훌륭한 대화도구라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차가 단연 돋보인다. 왜 그럴까? 무설자님에 따르면 커피를 마시면 어색한 침묵이 흐를 수 있다고 했다. 대화 하다가 중단 되었을 때 일시적 침묵이 매우 어색한 것이다. 그러나 차를 마시면 어색한 침묵은 없다고 했다. 왜 그럴까? 이에 대하여 무설자님은 이런 글을 쓴 바 있다.
이렇게 차가 우리의 건강을 지켜주는 약리적인 효과뿐만 아니라 차를 마셔서 얻을 수 있는 일상의 여유가 더 중요하다고 본다. 이 ‘일 없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나에게는 무료함이란 없다. 앞에 사람이 있어서 차를 마시면 ‘차를 우리는 일’을 하고 혼자서 마시면 ‘일 없는 일’을 통해 빈 시간을 채우는 충만함을 얻는다.
(무설자의 차이야기① ‘차’를 아십니까?, 건축사신문 2010-05-17)
차를 하면 어색한 침묵이 없다. 커피를 놓고 마주하였을 때 대화가 끊어지면 어색하기 그지 없지만 차를 마주하면 그럴 일이 없다. 왜 그럴까? 차는 나누는 것이기 때문이다. 팽주가 끊임 없이 차를 리필해 주는 것이 큰 이유일 것이다. 그래서 대화가 끊어져도 어색할 여유가 없다. 오히려 침묵속에서 침묵의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
침묵의 대화는 가능할까?
침묵의 대화는 가능한 것일까? 유행가 가사 중에 “눈으로 말해요”라는 말이 있듯이 침묵의 대화는 가능하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카레니나’에서 순수한 관계의 레빈과 키티는 성장하는 커플이다. 반면 불륜관계의 안나와 브론스키는 성장하지 않는 커플이다.
신뢰에 바탕을 둔 성장하는 커풀은 눈빛으로 말 할 수 있다. 굳이 대화 하지 않아도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륜관계는 늘 대화를 필요로 한다. 늘 사랑을 확인 하는 것이다. 그래서 끊임 없이 말을 필요로 한다. 말이 끊어지면 어색해하고 불편해 한다. 신뢰에 바탕을 둔 사이라면 굳이 말을 재잘재잘 끊임 없이 지껄일 필요가 없다. 침묵속에서도 눈빛이나 손짓으로도 대화가 가능한 것이다.
날고집이님에 따르면 침묵의 대화로서 어느 스님의 예를 들었다. 부산에서 존경하는 스님이 있는데 같이 차를 마시면 매우 편안하다고 했다. 말이 끊어져도 어색한 침묵이 아니라 했다. 침묵속에서도 대화가 있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이는 청정함에 있다고 본다.
잔뜩 오염된 자와 함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어색하고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뭇삶들은 세계에 따라 관계를 맺고 어울린다.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은 저열한 경향을 가진 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 탁월한 경향을 가진 자들은 탁월한 경향을 가진 자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과 어울린다.”(S14:4) 라 했다. 청정한 자는 청정한 자들끼리 어울리고, 오염된 자들은 오염된 자들끼리 어울리는 것이다. 유유상종이다.
신뢰를 바탕을 한 스승과 제자사이에서는 굳이 말이 없어도 대화는 성립된다. 질문을 하지 않아도 청정한 스승과 자리를 함께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설법이 되는 것이다. 청정한 자와 함께 있으면 동시에 청정해지는 것이다.
글쓰기에 대하여
에피소드인커피에서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오프라인에서 만나 서로 초면임에도 오랜 친구처럼 이야기가 잘 통했다. 이는 불자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고 또한 블로그의 글이 매개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무설자님은 블로그에 올려진 글에 대하여 조언하였다. 이전에도 댓글에 남긴 바 있는데 글이 너무 길다고 했다. 가급적 짧게 하여 요점 위주로 해 줄 것을 주문 하였다. 또 한번쯤 쉬는 기간도 필요하다고 했다. 마치 매일 주식하는 사람이 잠시 휴식기간을 가졌을 때 더 넓은 안목으로 보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그래서 글을 한달 정도 쉰다면 독자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라 했다.
무설자님은 건축사이자 수필가이다. 글을 쓸 때 네 줄 정도로 하여 일곱단락으로 쓴다고 했다. 반드시 기승전결의 원칙을 지킨다고 했다. 전형적인 수필을 쓰는 방식이다.
경전을 근거로 하여 글쓰기를 하였을 때 길어질 수밖에 없다. 경전을 인용하고 인용한 것에서 또 인용하다고 보면 A4로 열 페이지가 훌쩍 넘어 버린다. 이런 긴 글을 읽는데는 인내가 필요할 것이다. 바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긴 글을 다 읽어 볼 시간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날고집이님은 올린 글에 대하여 큰 문제가 없다고 했다. 길면 긴 대로 읽는 맛이 있다고 했다. 글이 길어도 경전을 근거로 하면 그다지 지루하지 않다고 했다. 경전을 근거로 올린 글이 많은 도움이 된다고도 했다.
아직까지 한번도 글에 대하여 구체적인 의견을 들어 보지 못하였다. 간혹 알고 지내는 법우님들은 대체로 ‘글을 잘 읽고 있다’라는 말을 했다. 또한편으로 글이 너무 길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글을 짧게 하여 요점만 쓰는 것도 요령일 것이다. 그렇게 하였을 경우 온전한 내글이 된다. 나의 생각이 반영된 진정한 글쓰기가 되는 것이다. 무설자님이 바라는 글쓰기라 본다.
게을러지지 않기 위해서
매일 글을 쓰고 있다. 하루 라도 글을 쓰지 않으면 찜찜해서 견딜 수 없다. 일이 바빠 하루 걸렀을 때는 안절부절 못한다. 그런 경우 그 날 밤 늦게까지라도 남아서 글을 완성하고야 만다. 이렇게 집착아닌 집착을 하는 것은 ‘습관화’ 하기 위해서이다. 엄밀히 말하면 게을러지지 않기 위해서이다.
게으름은 죽음의 길이라 했다. 이는 법구경에서 “방일하지 않음은 불사의 길이고 방일하는 것은 죽음의 길이니, 방일하지 않은 사람은 죽지 않으며 방일한 사람은 죽은 자와 같다.”(Dhp21) 라는 게송에서도 알 수 있다. 지금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다 보면 결국 못하게 된다. 그래서 “언제 해도 할 일이면 지금 하자”라는 구호가 나왔을 것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라 본다.
글쓰기에 대하여 게으름과의 전쟁으로 본다. 오늘 써야 될 것을 미루면 게으름에 지는 것이다. 오늘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미래가 보장 되지 않는다. 그래서 방일하는 자, 즉 게으른 자는 사실상 죽은 자와 같다고 했다.
법구경에 따르면 게으름의 길에 대하여 결국 오온의 죽음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했다. 그러나 부지런함의 길로 죽 가게 되면 불사를 성취할 수 있다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게으르고, 무기력하고, 나태하고, 권태를 느끼고, 하품을 하는 나날을 보낸다면 살아 있어도 사실상 죽은 목숨과도 같다고 볼 수 있다.
보이차를 선물받고
글쓰기를 인연으로 법우님들을 만났다. 온라인에서만 소통하다가 오프라인에서 만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부담이 없었다. 그것은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이다. 같은 불교인이라는 것과 글로 맺어진 인연인 것이다. 여기에 차가 곁들였다.
무설자님은 차에 대하여 일가견이 있다. 차와 관련하여 수 많은 글을 쓰고 차를 잘 만들기도 한다. 이제 까지 마셔 본 보이차 중에 가장 그윽하였다. 그런 보이차를 선물했다. 자리를 일어서려 하는데 귀한 보이차를 선물로 준 것이다.
저녁식사를 대접받고
오후 6시에 에피소드인커피를 나섰다. 날고집이님이 저녁식사를 사겠다고 했다. 무설자님은 저녁에 개인적인 약속이 있어서 참석하지 못했다. 날고집이님 차로 이동했다. 광안리 해수욕장이 보이는 고급식당이다. 손님이 오면 접대하는 곳이라 했다.
날고집이님과 식사하면서 이런 저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치과의사이지만 특이 하게도 패러글라이딩을 취미로 가지고 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선수이다. 전국대회에 선수로서 나선 적도 있다고 했다. 이날도 패러글라이딩을 한 후에 모임에 참석한 것이다.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날고집이님은 부산역까지 태워다 주었다. 저녁 9시 45분에 무궁화 열차를 타기 까지 무려 5시간 이상 대화를 나눈 것이다. 그래서 부산에 오면 또 다시 만나기로 했다. 만나는 장소는 무설자님의 에피소드인커피가 될 것이다.
일요일 불도부산에서 하루를 보냈다. 조카결혼식에 참석하여 부산을 제2고향으로 여기며 사는 친족들을 보았다. 무엇 보다 온라인에서만 소통하는 법우님들을 만나 보았다. 따뜻한 환대를 받았고 더구나 선물까지 받았다. 이른 아침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긴 여정이었다.
2016-04-04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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