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초록에서 희망을

담마다사 이병욱 2016. 4. 15. 09:23

 

 

초록에서 희망을

 

 

 

이른 아침 학의천 길을 따라 일터로 향했다. 주변을 보니 온통 초록이다. 하루 밤 자고 나니 초록의 세상으로 변한 것이다. 개나리와 진달래가 피고 이어서 벚꽃이 절정을 이룰 무렵 느티나무와 은행나무에서 새순이 돋아 오른다. 세상이 초록의 새옷으로 갈아 입은 것이다.

 

 

 

 

총선결과를 밤 늦게 까지 보았다. 전에 보지 못하던 흥미진진한 게임이 펼쳐졌다. 아슬아슬한 시소게임에 이 채널 저 채널 돌려 가며 즐겼다. 역시 국민은 현명했다. 집단지성이 표로 나타난 것이다. 그 똑똑하다던 패널들, 팝캐스트진행자들의 말이 실언이었음이 드러났다. 양극단체제가 무너지고 중도의 시대가 온 것이다.

 

인물론

 

총선에 출마하여 금뱃지를 단 자들을 선량(選良)’이라 한다. 선량의 사전적 의미는 뛰어난 인물을 가려 뽑음의 뜻이다. 영어로는 엘리트(elite)라 한다. 일반적으로 국회의원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선거에서 당선이 되면 국회의원이 되고 선량이 되는 것이다. 인물이어야 가능한 것이다.

 

선량이 되려면 인물이 되어야 한다. 물건에도 가치가 있으면 상품이 되듯이, 같은 사람이라도 사람으로서 가치가 있는 자가 인물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선량, 엘리트, 인물은 모두 동의어라 볼 수 있다.

 

선량은 하늘의 별과 같다. 연예인스타, 스포츠스타 하듯이 이른바 정치스타를 말한다. 스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이돌스타의 예를 본다면 땀으로 얼룩진 것이다. 피와 땀과 노력이 있어야만 하늘의 별이 될 수 있다. 선량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국회의원이 된다는 것은 국회의원이 될 만한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은 해당분야에서 전문가라 볼 수 있다. 해당분야의 달인이 해당분야를 대표하여 권리와 이익을 위해 일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국회의원의 이전 직업을 보면 매우 다양하다.

 

시대의 흐름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자가 국회의원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국회의원들은 주로 정치꾼들이었다. 팟캐스트방송을 들으면 감옥 한 번 갖다 오지 않는 자가 없을 정도로 이념에 치우친 자들이 대부분이다. 어떤 이는 감옥에 여러 번 갖다 온 것을 마치 별을 단 것처럼 자랑하기도 한다.

 

민주주의를 위하여 온 몸을 바친 자들이 있다. 젊은 시절 그들의 고뇌가 있었기에 오늘날 이렇게 표현의 자유를 만끽하며 살고 있다. 산업화를 위하여 애쓴 자들도 있다.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날과 같은 풍요를 누리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그 시절 그 시대로 되돌아 갈 수 없다.

 

지금은 산업화시대와 민주화시대를 거쳐 정보화시대이다. 모든 것이 오픈되고 공유화 되는 시대에 흐름을 역행하여 살 수 없다. 그 시절 그 시대를 못잊어 향수에 젖어 산다면 시대를 역행하는 것이다. 인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정보통신시대에는 정보통신시대에 적합한 엘리트를 요구하고 있다.

 

불화와 갈등의 근원은

 

이제까지 한국인들은 양극단을 살아왔다. 정치적으로 보수와 진보로 확연히 갈리어 서로 미워하며 증오하며 살아왔다. 총과 칼만 들지 않았지 사실상 전쟁을 한 것이다. 모든 전쟁이 다 그렇듯이 증오심없이 싸움을 할 수 없다. 이념적으로 극과 극인 두 그룹은 최근 까지도 증오의 전쟁을 해 왔다.

 

현재 대한민국은 남북이 분단되고, 이념으로 갈리고, 지역으로 찢어졌다. 남북갈등, 남남갈등, 동서갈등 등으로 사분오열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 종교적으로도 믿는 대상이 다르다. 이런 갈등은 가정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갈등, 부모와 자식의 갈등으로 나타나고 조직이나 단체에서는 상사와 부하와의 갈등으로 나타난다. 이런 갈등의 밑바탕에는 성냄이 뿌리 박고 있다.

 

모든 불화와 갈등의 근원은 무엇일까? 그것은 명백하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다. 흔히 --라 부르는 해로운 마음의 작용에 따른다. 그렇다고 탐진치만 있는 것일까? 탐진치외에도 수 많은 해로운 마음이 있다. 다만 탐진치가 해로운 마음을 대표하고 있을 뿐이다.

 

해로운 마음의 대표주자

 

마치 국회의원이 해당 이익집단을 대표하듯이, 탐진치 역시 해당 해로운 마음의 대표주자이다. 그렇다면 대표선수 탐진치는 어떤 것을 뿌리로 하는 것일까? 아비담마에 근거하여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탐욕을 뿌리로 하는 해로운 마음 : 탐욕, 사견, 자만

성냄을 뿌리로 하는 해로운 마음 : 성냄, 질투, 인색, 후회

 

 

탐욕을 뿌리로 하는 것들을 보면 탐욕(greed), 사견(wrong view), 자만(conceit) 이렇게 세 가지이다. 특징은 주로 거머쥐려 하는 것이다. 성냄을 뿌리로 하는 것들을 보면 성냄(hatred), 질투(envy), 인색(avarice), 후회(remorse)이다. 특징은 주로 밀쳐내려 하는 것이다.

 

어떤 대상을 접촉하였을 때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면 거머쥐려 한다. 이것이 탐욕이다. 사견과 자만도 이에 해당된다. 또 어떤 대상을 접촉하였을 때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면 밀쳐 내려 한다. 이것이 성냄이다. 질투와 인색과 후회도 이에 해당된다. 이렇게 대부분 사람들은 좋은 느낌이 생겨나면 거머쥐려 하고, 싫은 느낌이 생겨나면 밀쳐내려 한다.

 

어떤 대상을 접하였을 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무덤덤한 느낌도 있다. 일종의 평온한 느낌이다. 그러나 그런 평온은 오래 가지 않는다. 대상은 변하기 때문에 언제 어떻게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에 휘말릴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또 다시 탐욕과 성냄이 일어난다. 그래서 좋지도 싫지도 않는 덤덤한 느낌일 때의 평온은 해로운 마음이 늘 잠재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어리석음(delusion)이다.

 

3당의 출현으로

 

선거철이어서일까 두 달 전부터 정치에 관심을 기울였다. 야당 분당사태가 난 이후로 정치에 관심을 가진 것이다. 이전에는 잊고 살았다. 잊고 산 것은 정치에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정치를 혐오한 것은 양극단 때문이다. 이념으로 확연하게 갈리어 보수와 진보가 마치 전쟁하듯이 증오심을 가지고 싸운 것이 못 마땅했다. 산업화시대와 민주화시대의 추억을 가진 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서로가 서로를 헐뜯는 모습이 보기에 좋지 않았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탐진치로 살아 가는 것이다.

 

이번 총선거에서 변화의 조짐을 보았다. 그것은 양극단을 멀리 하는 것이다. 3당의 출현으로 인하여 과거와 같이 날치기라든가 단상점거 등 극단적인 방식은 보기 힘들 것이다. 3당의 완벽한 캐스팅보트로 인하여 양극단은 사라질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정치는 일보전진했다고 볼 수 있다.

 

중도란 무엇인가?

 

정치에서 중도의 길을 걷는 것은 매우 험난하다. 필연적으로 사쿠라로 몰릴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과거 중도통합론이라 하여 정치이념이 있긴 하였지만 사쿠라로 몰려 오래 가지 못하였다. 정보통신시대의 정치중도는 과연 가능한 것일까?

 

불교에 중도가 있다. 부처님은 여래는 이 두가지의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 (S56.11)라 했다. 여기서 두 극단이란 감각적 쾌락의 욕망과 극단적 고행을 말한다. 이 두 가지 극단에 대하여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라 했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말씀 하신 중도(majjhimā paipadā)’는 어떤 것을 말할까?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 맛지마빠띠빠다는 문자적으로만 본다면 중간길이다. 영어로는 ‘Middle Path’가 된다. 그렇다고 왼쪽길과 오른쪽의 중간길이라 볼 수 있을까? 초전법륜경에 따르면 그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 ,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이다.”(S56.11) 라 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중도는 팔정도인 것이다.

 

팔정도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중도의 길이다. 계정혜 삼학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다름 아닌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처음 오비구에게 설법할 때도 팔정도를 설했고, 마지막 열반에 들 때 수밧다에게도 팔정도를 설했다. 팔정도의 삶의 방식대로 산다면 올바로 사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는 좌와 우의 중간길이 아니다. 극단적 쾌락과 극단적 고행의 중간 길도 아니다. 궁극적 행복의 길로 가는 것이다. 행복을 바라고 쾌락을 추구해 보지만 결국 괴로움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바른 길이 아니다. 영혼의 청정을 바라며 자신의 몸을 학대해 보지만 역시 바른 길이 아니다. 욕심을 내려 놓았을 때 성냄을 내려 놓았을 때 행복의 길로 갈 수 있다고 했다. 그 방법에 대한 것이 팔정도이다. 양극단을 떠나 팔정도의 길로 가는 것이 행복인 것이다.

 

조계종의 가격중도

 

중도는 원래 불교용어이다. 그럼에도 중도라는 말은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심지어 가격을 매길 때도 중도의 개념이 들어 간다. 가격에도 중도가 있음을 말한다 이런 현상은 세속에서 뿐만 아니라 종단에서도 볼 수 있다.

 

조계사에 가면 조계종총무원에서 직영하는 국수집이 있다. 이름하여 ‘승소(僧笑)’라 한다. 국수는 수도승도 미소 짓게 할 정도로 스님들이 즐겨 먹는 음식이라 한다. 그렇다면 가격은 얼마나 될까?

 

승소에서 국수를 가서 먹어 보았다. 국수가격은 4,000원이다. 국수를 기본으로 하지만 밥은 자유롭게 셀프로 먹을 수 있다. 그래서 한끼 식사로도 가능하다. 국수가격은 어떻게 정했을까? 이에 대하여 그 때 당시 주지 T스님은 한 그릇 값은 4000. 비싼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공짜도 아니다. 토진 스님의 독특한 '중도(中道) 실천 생산불교' 주장이 반영됐기 때문이다.” 국수 한그릇에 담은 中道… 탐욕 빼고 깨달음 팔다, 오마이뉴스 2011-07-22) 라 했다.  

 

조계종에서는 일반회사들과 마찬가지로 사업을 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생수사업, 사찰음식사업, 상조사업, 출판사업이다. 그 중에 사찰음식과 관련하여 국수집 승소도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가격을 정하는데 있어서 부처님의 중도사상의 정신을 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적정한 가격을 매겼다는 것이다. 우습게도 부처님의 중도사상이 가격중도로 구현된 것이다.

 

초록에서 희망을

 

정치권에서는 중도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정치권에서 말하는 중도는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와는 다른 말이다. 정치권에서 말하는 중도는 좌와 우의 이념스펙트럼에서 중간정도 위치를 말한다. 극단 적인 좌에도 치우치지 않고 역시 극단적인 우에도 치우치지 않아서 이념적으로 중간지대이다.

 

중도를 표방하는 정당이 오래 존재하려면 선거제도가 바뀌어져야 한다. 현재와 같은 소선구제하에서는 언제 어떻게 사라질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중도를 표방하는 정당이 출현하였다는 것은 양극단에 염증을 내는 사람들에게는 지지를 받을 수 있다. 합리적 보수와 양심적 진보를 갈망하는 자들에게는 희망이 될 수 있다.

 

시대는 변화를 원한다. 여전히 과거 산업화시대와 민주화시대에 향수에 젖어 있다면 시대를 역행하는 것이다. 종종 역사가 후퇴해 보이는 듯 하지만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일 수 있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앞으로 나아 가듯이 인류의 역사는 향상 되어 왔다. 지금은 정보통신시대이다. 그리고 글로벌시대이다. 광속으로 변하는 시대에서 시대의 흐름에 맞서려 하거나 역행하려 한다면 낙오자가 된다. 정치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정치에서 중도가 중간지대의 스펙트럼을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념적 스펙트럼은 중간길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님의 중도가 중간길이 아니듯이 정치중도 역시 좌와 우의 중간길이 될 수 없다. 국민 모두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 정치중도이다. 잠을 자고 나니 갑자기 세상이 초록으로 바뀌었다. 초록의 세상에서 희망을 보았다.

 

 

 

2016-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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