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수행은 마음을 닦는 것? 자신을 바꾸어 나가는 것이 수행

담마다사 이병욱 2016. 2. 13. 13:10

 

수행은 마음을 닦는 것? 자신을 바꾸어 나가는 것이 수행

 

 

수행이라는 말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 특히 수행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 앞에서 수행또는 수행한다라는 말을 사용하면 비난 받기 쉽다. 잘 나가다 하나라도 삐끗 하면 대뜸 나오는 소리가 수행한다는 사람이또는 도 닦는다는 사람이라는 말을 하기 때문이다.

 

수행이란 무엇일까풀이 하면 닦을 수()’로 귀결 된다. 무언가 닦는 것을 수행으로 본 것이다. 방바닥을 닦거나 옷을 빠는 행위가 연상된다. 더럽혀지고 오염된 것을 세제를 이용하여 깨끗이 닦아 내듯이 마음을 닦는 것을 수행이라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최봉수 교수의 불교학 개론에서

 

그런데 최봉수교수에 따르면 한자어 수행이라는 말은 잘못된 번역어라 하였다. 왜 그런 것일까? 최봉수교수는 불교학 개론에서 인도말을 중국말로 옮기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입니다.” (최봉수교수의 불교학개론(제4강))라 하였다. 말이 너무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이는 구마라집의 말에서 알 수 있다.

 

서역 쿠차출신 구마리집은 산스크리트어를 중국어로 번역하였다. 가장 위대한 역경가로 알려져 있는 구마라집에 따르면 한역에 대하여 밥을 씹어서 먹으라고 주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누군가 씹어 내 뱉은 밥을 먹을 수 있을까? 한역이 그렇다는 것이다. 인도말과 중국말이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말한다. 문자체계가 다르기 때문에 의미를 바르게 전달 할 수 없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원전을 접하는 것은 따끈따끈한 밥을 직접 먹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한역된 경전은 남이 씹어 뱉은 밥을 먹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읽는 맛이 다른 것이다. 한자어로 번역된 수행이라는 말도 그런 것 중의 하나라 하였다.

 

수행은 마음을 닦는 것?

 

수행이라는 말의 원어는 바와나(bhāvanā)’이다. 그런데 빠알리어 바와나와 한자어 수행이라는 말은 그 의미가 아주 다르다고 하였다. 중국인들이 닦다라는 의미로 ()’라 하였으나 이는 원전의 뜻과 무관한 중국식 개념이라 하였다. 중국인들은 마치 오염된 거울을 닦는 것처럼 마음을 닦아 내는 것을 수행으로 본 것이다.

 

흔히 마음을 닦는 것을 수행이라 한다. 더럽고 오염된 마음을 마치 거울을 닦듯이 깨끗이 닦아 내면 본마음이 드러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 가르침에 본래마음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초기경전에 빛나는 마음이라는 구절이 있다. 앙굿따라니까야에서 수행승들이여, 이 마음은 빛나는 것이다. 그 마음이 다가오는 번뇌로 오염된다.” (A1:49)라는 구절을 말한다. 그렇다고 이 말이 대승불교나 선불교에서 말하는 객진번뇌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 하였다.

 

객진번뇌는 능가경에서 유래한다. 능가경에 따르면 “여래장은 청정한 모습을 지녔지만, 객진번뇌에 의해 오염되어 부정하다”라 하였다. 그러나 니까야에서 부처님이 빛나는 것이라 하였을 때 이는 밝고  청정한 것을 말한다. 마음이라는 것은 잠재의식으로 이해되는 존재의 흐름(bhavaga-citta: 有分心)’이라 하였다. 다가오는 번뇌로 오염된다.’라는 것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번뇌에 의해서 마음이 오염된다는 뜻이다.

 

초기불교에서 마음에 대한 이해는 대승불교와는 다른 것이다. 앙굿따라니까야에 표현된 빛나는 마음이 대승불교와 선불교에 영향을 준 것만은 확실하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후대 동아시아에서는 하나의 마음, 한마음, 일심이라 하여 어떤 근원적인 마음이 있다고 보았다. 마음을 실체화한 것이다. 그래서 수행에 대하여 우리 마음 속에는 청정한 거울과 같은 마음이 들어 있는데 때가 끼어서 이를 닦아 내는 것으로 본 것이다.

 

빠알리사전을 찾아 보니

 

한자문화권에서는 수행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원전에서는 바와나(bhāvanā)라 한다. 바와나는 무슨 뜻일까? 최봉수교수에 따르면 브후(bhū)’라는 동사에서 유래 되었다고 한다. 이를 사역명사화 한 것이 바와나라는 것이다. 여기서 ‘bhū‘being, creature’의 뜻이다. 한자어 수()와 너무 다른 내용이다.

 

 

수행을 뜻하는 빠알리어가 바와나이다. 바와나(bhāvanā)에 대하여 빠알리사전 PCED194를 찾아 보았다. 찾아 보니 “lit. 'calling into existence, producing'”라 되어 있다. 문자적으로 존재를 지칭하는 것이라 한다. 영어로는 ‘mental development’라 하였고 일반적으로 ‘meditation’이라 부른다고 되어 있다. PCED194에서 바와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Bhāvanā

 

: 'mental development' (lit. 'calling into existence, producing') is what in English is generally but rather vaguely called 'meditation'. one has to distinguish 2 kinds: development of tranquillity (samatha-bhāvanā), i.e. concentration (samādhi), and development of insight (vipassanā-bhāvanā), i.e. wisdom (paññā).

 

These two important terms, tranquillity and insight (s. samatha-vipassanā), are very often met with and explained in the Sutta, as well as in the Abhidhamma.

 

Tranquillity (samatha) is the concentrated, unshaken, peaceful, and therefore undefiled state of mind, whilst insight (vipassanā) is the intuitive insight into the impermanence, misery and impersonality (anicca, dukkha, anattā; s. tilakkhaa) of all bodily and mental phenomena of existence, included in the 5 groups of existence, namely, corporeality, feeling, perception, mental formations and consciousness; s. khandha.

 

Tranquillity, or concentration of mind, according to Sakhepavaṇṇana (Commentary to Abhidhammatthasagaha), bestows a threefold blessing: favourable rebirth, present happy life, and purity of mind which is the condition of insight. Concentration (samādhi) is the indispensable foundation and precondition of insight by purifying the mind from the 5 mental defilements or hindrances (nīvaraa, q.v.), whilst insight (vipassanā) produces the 4 supra mundane stages of holiness and deliverance of mind. The Buddha therefore says: "May you develop mental concentration, o monks; for who is mentally concentrated, sees things according to reality" (S. XXII, 5). And in Mil. it is said: "Just as when a lighted lamp is brought into a dark chamber, the lamp-light Will destroy the darkness and produce and spread the light, just so will insight, once arisen, destroy the darkness of ignorance and produce the light of knowledge."

 

(bhāvanā, PCED194)

 

 

존재를 뜻하는 바와나는 일반적으로 명상의 뜻으로 쓰인다. 이는 마음의 계발과 관계가 있다. 구체적으로 사마타수행과 위빠사나수행을 말한다. 사마타수행은 고요함을 계발하는 것이고, 위빠사나수행은 통찰을 계발하는 것이라 하였다. 고요함은 집중되고 흔들리지 않고 평화롭고 오염되지 않은 마음의 상태를 말하고, 반면에 통찰은 오온에 대하여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직관하는 것을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삼매를 닦아라

 

빠알리 사전에 따르면 집중은 5가지 정신적 오염원이나 잠재성향을 정화하기 위한 통찰의 토대가 된다고 하였다. 또 통찰에 대해서는 네 가지 출세간적 과보를 산출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다.

 

 

Samādhi bhikkhave, bhāvetha. Samāhito bhikkhave, bhikkhu yathābhūta pajānāti. Kiñca yathābhūta pajānāti? Rūpassa samudayañca atthagamañca, vedanāya samudayañca atthagamañca, saññāya samudayañca atthagamañca, sakhārāna samudayañca atthagamañca, viññāassa samudayañca atthagamañca.

 

[세존]

수행승들이여, 삼매를 닦아라. 수행승들이여, 삼매에 들면 수행승은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 무엇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아는가? 물질의 발생과 소멸, 느낌의 발생과 소멸, 지각의 발생과 소멸, 형성의 발생과 소멸, 의식의 발생과 소멸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

 

(Samādhi bhāvanā sutta-삼매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5,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동시에 닦을 것을 말씀 하셨다. 근거가 되는 경으로서 삼매의 경을 들 수 있다. 초불연 각주에 따르면 주석을 인용하여 여기서 말하는 삼매에 대하여 본삼매도 되고 근접삼매도 된다.”(SAT.ii.188) 고 였다. 삼매를 닦으면 어떤 이득이 있을까? 경에서는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고 하였다. 이를 yathābhūta pajānāti”라 한다. 초불연에서는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라고 번역하였다. 통찰은 삼매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세 가지 수행이 있는데

 

빠알리사전에 따르면 수행에 대한 정의를 소개 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디가니까야 ‘D.III,219 (three: kāya, citta, paññā)’를 근거를 들고 있다.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Tisso bhāvanā: kāyabhāvanā, cittabhāvanā, paññābhāvanā.

 

[싸리뿟따]

세 가지 수행 곧, 신체에 의한 수행, 마음에 의한 수행, 지혜에 의한 수행이 있습니다.”

 

(Sagītisutta-합송의 경, 디가니까야 D33, 전재성님역)

 

 

세 가지 수행(Tisso bhāvanā)이 있다고 했다. 먼저 신체에 의한 수행(kāyabhāvanā: 身修)’은 주석에 따르면 다섯 가지 감관으로 이루어진 몸에 의한 수행이다.”라 하였다. ‘마음에 의한 수행(cittabhāvanā: 心修)’여덟 가지 성취에 의한 수행을 말하고, ‘지혜에 의한 수행(paññābhāvanā: 慧修)’거룩한 경지에 대한 지혜 수행이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마음수행은 선정에 대한 것이고, 지혜수행은 위빠사나에 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수행방법은 사념처에서 잘 표현 되어 있다.

 

수행이란 바꾸는 것

 

수행이라 하여 마음만 닦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마음에 의한 심수도 있고, 몸에 의한 신수도 있고, 지혜의 의한 혜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바와나는 원래 의미가 존재를 뜻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바와는 ‘bhū를 어근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영어로 ‘become’으로무엇이 되다라는 뜻을 가진 것이다. 여기서 우리말 되다에 대하여 사역을 취하면 되게 하다가 된다. 이를 명사형으로 하면 되게 함이 된다. 이는 다름 아닌 바꿈이라는 것이다.

 

한자문화권에서는 수행이라는 것이 무언가 깨끗한 것이 마음 안에 들어 있다고 보고 더러운 것을 닦는 다고 본다. 그러나 원어를 풀이해 보면 바와나라는 말은 수행이라기 보다 본질적으로 바꾸는개념에 더 가깝다. 그렇다면 무엇을 바꿀 것인가?

 

습관을 고치려면

 

언젠가 어느 재가법사로부터 강연을 들었다. 90년대에 미얀마에서 수행하고 왔다는 재가법사에 따르면 수행에 대하여 수습(修習)’이라 하였다. 처음 이 말을 듣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이제까지 알고 있던 관념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수행이라는 것이 다리를 꼬고 앉아 좌선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나 습관들이기 라는 말에 공감하였다.

 

수행이라는 말 보다 수습이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못된 버릇이 있다면 이를 고쳐 나가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버릇을 고치기 위해서는 습관 들여야 할 것이다. 잘못된 습관은 한두달이 아니라 몇 년 걸릴 수 있다. 아니 평생 걸릴 수 있다. 그래서일까 최봉수 교수는 버릇 고치는 습관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수행, 수행 하는데 그 말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은 어떻게 하는 것이 수행이다? 일단 잠을 적게 자야 돼. 하루 세 시간 자면 안 되요. 그 다음에 밥을 적게 먹어야 돼. 오전에 한끼 이상 먹으면 안 돼, 그 다음에 말을 안 해야 합니다. 부처님의 경전을 읽고 법담을 나누는 것 외 성스런 침묵을 지켜야 합니다.”

 

(최봉수교수의 불교학개론(제4강))

 

 

최봉수 교수에 따르면 세 가지 조건이 있다. 그것은 잠, 식사, 침묵이다. 세 시간 자고, 한끼 먹고, 잡담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최봉수교수에 따르면 이렇게 30년을 해야 수행이라 말 할 수 있다는 것이다. 30년도 스무살부터 오십살까지의 30년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누가 이에 해당될까? 그것은 다름 아닌 출가수행자를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재가불자는 해당사항이 아닌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최봉수 교수는 여러분은 이미 텄어요라고 우스개 소리로 말한다.

 

수행은 젊을 때 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스무살 짜리가 세 시간만 자고 한끼 먹고 30년 동안 힘으로 밀어 부쳤을 때 바꾸어질까 말까 한 것이 수행이라 하였다. 그렇게 하였을 때 잘못된 습관이나 버릇을 고쳐 환골탈태할 수 있음을 말한다.

 

여보게 저승 갈 때 뭘 가지고 가지?”

 

자신을 바꾸어 나가는 것이 수행이라 하였다. 만약 습관대로 산다면 어떻게 될까? 이제까지 해온 버릇대로 한평생 살아 간다면 다음 생 역시 그 버릇대로 살아 갈 것이다. 그래서일까 최봉수교수에 따르면 다음 생에 갈 때 그 버릇을 그대로 가져 간다고 하였다.

 

어느 스님의 베스트셀러가 있었다. 그것은 여보게 저승 갈 때 뭘 가지고 가지라는 책이다. 대부분 저승 갈 때 업을 가지고 간다고 말할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좀더 좁혀 보면 버릇을 가지고 간다고도 볼 수 있다. 또 다른 말로 습관을 가져 가는 것이다. 왜 그런가? 이는 청정도론에서도 확인 된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다른 네 가지 업이 있다. 무거운 업, 습관적인 업, [임종에] 다다라 지은 업, 이미 지은 업이다.

 

①유익한 것이든 해로운 것이든 무겁거나 가벼운 업 중에서 어머니를 살해하는 등의 업이나 혹은 고귀한 경지(즉 선의 증득)의 업이 무거운 업이고, 이것이 먼저 과보를 준다.

 

② 그와 마찬가지로 습관적인 것과 습관적이지 않은 것 중에서 좋은 행위든 나쁜 행위든 습관적인 것이 먼저 과보를 준다.

 

[임종에] 다다라 지은 업이란 임종 시에 기억나는 업이다. 임종에 가까운 사람이 그 업을 기억할 수 있다. 그것에 따라 태어난다.

 

④ 이 셋에 포함되어있지 않고 자주 반복하여 지었기 때문에 이미 지은 업이라 한다. 앞의 세 가지 업이 없을 때 이것이 재생연결을 일으킨다.

 

( 19장 의심을 극복함에 의한 청정, 청정도론 Vism.19.15, 대림스님역)

 

 

임종시에 네 가지 업이 다음 생을 결정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그 중에 두 번째 항을 보면 습관적인 업이 있다. 선행이든 악행이든 반복적 습관으로 저지른 행위가 먼저 과보를 받는 것이다.

 

습관적으로 반복하였을 때

 

습관(bahula)이라는 말은 자주 하는 행위, 밥먹듯이 하는 행위를 말한다. 생명 죽이는 것을 밥먹듯이 한다든가, 거짓말을 일삼는 것, 음행을 일삼는 것, 술과 마약에 중독 되어 일생을 보내는 것 역시 습관에 따른 것이다. 이런 습관을 고치지 않고 임종을 맞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초기경전에서는 분명히 이렇게 경고 하고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추구하고 실천하고 자주 실천하는 자는 지옥에 태어나고 축생에 태어나고 아귀에 태어난다. 그리고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이 아주 경미한 자는 인간으로 태어나지만 단명하게 된다.”

 

(괴로운 곳으로 이끄는 것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8.40, 전재성님역)

 

 

살생에 대한 것이다. 생명을 죽이는 행위가 한 두 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되었을 때, 또는 습관이 되었을 때, 버릇이 되었을 때 그에 대한 과보는 악처에 나는 것이라 하였다. 설령 인간으로 나더라도 단명하게 될 것이라 하였다.

 

남의 생명을 죽였다면 단명의 과보를 받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본다. 이는 습관에 따른 것이다. 이 습관과 관련하여 초불연에서는 생명을 죽이는 것을 자행하고 습관적으로 행하고 많이 지으면라고 번역 하였다.

 

도둑질을 밥먹듯이 하는 자의 손은 늘 근질근질 할 것이다.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자의 입 역시 근질근질 할 것이다. 음행을 밥먹듯이 하는 자, 음주를 물마시듯이 하는 자 역시 잠시도 가만 있지 않을 것이다. 잘못 습관 들였기 때문이다. 버릇은 하루 아침에 고쳐지지 않는다. 평생가도 그 버릇 그대로 간다. 관성에 의해 내생으로 까지 이어진다.

 

그대, 목숨을 걸었는가?”

 

자주 반복적으로 하다 보면 습관이 된다. 습관이 되면 여간 해서 끊기 어렵다. 담배를 피운 자가 끊기 힘든 것과 같다. 수 십년 담배를 피운 자가 하루 아침에 끊었을 때 금단현상을 보이듯이 끊기 힘든 것이 습관이다. 이는 관성의 법칙에 따른다. 예전의 하던 버릇대로 계속 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게으른 자는 한없이 게으음을 피운다. 게으름을 고쳐 보기 위해서 노력을 해 보지만 작심삼일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드라마를 보았다. 놀기 좋아하는 자가 마음을 다 잡고 새로운 삶을 살고자한다. 절에 머물면서 몸과 마음을 닦으면서 보낸다. 그러나 주지스님이 보기에 여전히 게을러 보인다. 마음만 있을 뿐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것이다. 어느 날 주지스님이 그 자를 불렀다. 불러서 자네 게으름과 전쟁중인가?”라며 물어 보았다. 이에 그 자는 ,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 자는 말로만 게으름과 전쟁중이었다. 절박감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진척도 없어 보였다. 이에 주지스님은 그대, 목숨을 걸었는가?”라며 충고한다.

 

자신을 바꾸어 나가는 것이 수행

 

잘못된 습관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담배를 끊는 것도 담배와의 전쟁을 해야 하고, 술을 끊는 것도 술과의 전쟁을 해야 한다. 게으름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모든 전쟁은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낭만적으로 말로만 전쟁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서 패했을 때 죽음이라고 생각해야 함을 말한다. 그래서 게으름과 전쟁을 하는 자에 대하여 목숨걸고 해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전쟁은 목숨걸고 하는 것이다. 술과의 전쟁, 담배와의 전쟁, 게으름과의 전쟁은 사실상 진검승부와 다름 없다. 진검승부를 하면 한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하듯이, 습관과의 전쟁에서 목숨걸어야 한다. 자신을 바꾸어 나가는 것이 수행인 것이다.

 

 

宮本武臧

 

 

 

“수면에 빠지는 버릇이 있고,

교제를 즐기는 버릇이 있고,

정진하지 않고, 나태하며,

화를 잘 낸다면, 그것이야말로 파멸의 문입니다. (stn96)

 

 

 

2016-02-1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