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장의 가르침

스님의 성담(性談)에 대하여

담마다사 이병욱 2016. 2. 12. 17:57

 

 

스님의 성담(性談)에 대하여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

 

수행승과 재가불자의 관계는 어떠해야 할까? 아마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관계이어야 할 것으로 본다. 너무 가까이 하지도 말고 너무 멀리도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런 관계는 종교와 권력이나 기업과 권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너무 가까이 하면 다칠 염려가 있고 너무 멀리 하면 잊혀질 염려가 있다. 그래서 항상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적절하게 관계를 유지해야 함을 말한다. 스님과 재가불자의 관계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상호가 단정한 것을 보고

 

상윳따니까야 숲의 품에 수행승과 재가신도의 밀착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한 때 한 수행승이 꼬살라 국에 있는 한 우거진 숲에 머물고 있었다. 그 수행승은 한 가정과 너무 오랫동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여기서 밀접한 관계 (ajjhogāhappatto’란 서로 신뢰하는 관계를 말한다. 그런데 숲에 사는 하늘사람이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늘사람은 그 수행승을 가엾게 여겼다.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수행승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수행승의 이익을 위해서 일깨워 주고자 그 집 가정주부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나타나서 그 수행승이 있는 곳으로 찾아 왔다. 하늘사람은 왜 이렇게 변신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일까? 주석에 따르면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한 수행승이 마을에서 걸식을 하는데 한 가정주부가 그 상호가 단정한 것을 보고 기뻐하며 집으로 초대했고 공양 후에 법문을 듣고 감동하여 보시를 했다. 그래서 그 수행승은 더욱 정진해서 아라한이 되었다. 그 후 은혜에 보답하려고 다시 그 집에 탁발하러 다녔다. 그러나 하늘사람은 이 수행승이 선악을 초월한 거룩한 님[아라한]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수행승과 가정주부의 관계를 사악한 것으로 본 것이다. (Srp.I.294)

 

(1865번 각주, 전재성님)

 

 

각주를 보면 어느 재가 가정주부가 수행승의 단정한 모습에 반하여 공양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초불연 각주를 보면 그의 반듯한 행동거지에 큰 신뢰가 생겨서 오체투지(pañca patiṭṭhita)로 탁발을 공양하면서” (828번 각주) 라 하였다.

 

당신과 나 사이에 무슨 일이

 

하늘사람은 오해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아라한이 된 수행승에게 감각적 욕망있을 리 없건만 사악한 마음을 가진 수행승과 역시 사악한 마음을 가진 가정주부의 은밀한 관계가 이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본 것이다. 이에 하늘사람은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는다.

 

 

Nadītīresu saṇṭhāne

sabhāsu rathiyāsu ca,
Jan
ā sagamma mantenti

mañca tañca kimantaranti,

 

[하늘사람]

강가에서나 장터에서나

집회당에서나 길 위에서나

사람들이 함께 모여

당신과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 떠드네.”

 

(Kulagaraīsutta-가정주부의 경, 상윳따니까야 S9.8, 전재님역)

 

 

이 경의 제목은 가정주부의 경이다. 이는 ‘Kulagaraīsutta’를 번역한 것이다. 초불연에서는 집안 안주인으로 번역하였다.

 

하늘사람은 가정주부로 변신하여 나타났다. 나타나서 당신과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 떠드네라며 마을에서 소문이 좋지 않게 나고 있음을 말하였다.

 

하수행승은 이미 번뇌 다한 아라한이다. 감각적 욕망이 뿌리 뽑혔기 때문에 전혀 걸림이 없었을 것이다. 수행승은 공양한 은혜를 갚고자 재가신도 집에 들렀을 뿐이다. 그럼에도 수행승과 재가신도와의 관계가 가까우면 문제가 될 것이다.

 

수행승이 오해 받을 때

 

수행승과 재가여신도와의 관계가 초기경전에 많이 등장한다. 앙굿따라니까야를 보면 후궁에 들어간 수행승 이야기가 있다. 수행은 이런 오해를 받았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여기 왕이 왕비와 함께 앉아 있는데, 그 때 수행승이 들어가면, 왕비는 수행승을 보고 미소를 보이고 수행승은 왕비를 보고 미소를 보인다. 그러면 왕은 이와 같이 틀림없이 이들 사이에 일이 있었거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수행승들이여, 후궁에 들어가는 데는 이와 같은 첫 번째 위험이 있다.”

 

(후궁에 들어감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10.45, 전재성님역)

 

 

경에서는 모두 열 가지 위험을 말하고 있다. 이런 위험은 궁녀를 방문해도, 물건이 없어져도, 내부 비밀이 밖으로 누설되어도 의심을 받는다. 가급적 홀로 후궁에 가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혹시 가더라도 누군가 함께 동행하면 나을지 모른다.

 

아름답고 우아하고 화사한 과부가 있었는데

 

율장비구계를 보면 탁발하러 나간 수행승과 재가의 여신도와의 관계가 매우 노골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승단잔류죄법 제4조를 보면 인연담과 함께 자신의 욕망 충족에 대한 학습계율이 매우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어떤 내용일까?

 

인연담에 따르면 한 때 존귀한 부처님께서 싸밧티 시의 제따바나 숲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그 때 장로 우다인은 싸밧티 시에 시주자가 있어서 자주 가정을 방문하곤 했다. 그런데 어떤 아름답고 우아하고 화사한 과부가 있었다.”(율장비구계 842P) 라고 이야기가 시작 된다.

 

수행승 우다인은 아침 일찍 탁발을 나가 과부가 사는 곳을 찾아 갔다. 가까이 가서 마련된 자리에 안자 과부도 인사를 드리고 한쪽으로 물러나 앉았다. 이에 우다인은 과부에게 법문을 해 주어 기쁘게 해 주었다. 과부는 교화받고 북돋아지고 고무되고 기뻐하여 우다인에게 이와 같이 말하였다.

 

 

[여인]

"vadeyyātha bhante yena attho. Paibalā maya ayyassa dātu yadida cīvarapiṇḍapātasenāsanagilānapaccayabhesajjaparikkhāra"nti.

 존자여, 원하는 것을 말해 주십시오. 의복 탁발음식, 와좌구, 필수약품과 같은 것을 존자에게 보시할 수 있습니다.”

 

[우다인]

"Na kho te bhagini ambhāka dullabhā yadida cīvarapiṇḍapātasenāsanagilānapaccayabhesajjaparikkhārā. Api ca yo ambhāka dullabho ta dehī"ti.

 자매여, 의복 탁발음식, 와좌구, 필수약품과 같은 것은 우리에게 얻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것을 주십시오.”

 

[여인]

"Ki bhante"ti

 존자여, 무엇입니까?”

 

[우다인]

"methuna dhamma"nti.

 성적 교섭입니다.”

 

[여인]

"Attho bhante"ti

 존자여, 원하십니까?”

 

[우다인]

"attho bhaginī"

 자매여, 원합니다.”

 

[여인]

"Ehi bhante"ti

 존자여, 오십시오.”

 

(자신의 욕망 충족에 대한 학습계율, 승단잔류죄법 제4, 율장비구계 843P, 전재성님역)

 

 

 

 

 

 

우다인이 바란 것은 여인과 성적교섭이었다. 여인이 최상의 공양을 하고 싶다고하자 성접교섭을 요구한 것이다. 이에 여인은 공양하기로 하였다.

 

여인은 내실로 들어가 옷을 벗고 침상에 누었다. 우다인도 내실로 들어갔다. 그러나 상황은 급변한다. 우다인이 누가 이 악취나는 비천한 것을 건드리겠는가?”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서 침을 뱉고 나와 버렸다.

 

모욕 당한 과부 말하기를

 

여인은 모욕을 당하였다. 수행승이 공양을 요청하자 얻기 어려운 공양이라는 말에 받아 들였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침과 함께 모욕적인 말뿐이었다. 이에 여인은 다음과 같이 분개하며 비난하였다.

 

 

[여인]

이 싸끼야의 아들인 수행자는 부끄러움이 없고 계행을 지키지 않고 거짓말을 일삼는다. 그들은 진리의 행자, 올바른 삶을 사는 자, 청정한 삶을 사는 자, 진실을 말하는 자, 계행을 지키는 자, 선법을 지키는 자라고 공언한다.

 

이들에게는 수행자의 삶이 없고, 이들에게는 성직자의 삶도 없고, 이들에게는 수행자의 삶이 부수어지고, 이들에게는 성직자의 삶도 부수어졌다. 어떻게 이들에게는 수행자의 삶이 있고 성직자의 삶도 있는가?

 

이들은 수행자의 삶을 떠났고, 이들은 성직자의 삶도 떠났다. 어떻게 수행자 우다인이 나에게 성적 교섭할 것을 요구해 놓고는 누가 이 악취나는 비천한 것을 건드리겠는가?’라고 타액을 뱉고 나갈 수가 있겠는가? 내가 무슨 악한 일을 저질렀는가? 내가 무슨 악취가 나는가? 무엇에 대해 내가 누구보다 열등하단 말인가?”

 

(자신의 욕망 충족에 대한 학습계율, 승단잔류죄법 제4, 율장비구계 843P, 전재성님역)

 

 

과부는 모욕을 당하였다. 이에 분개하여 무엇에 대해 내가 누구보다 열등하단 말인가?”라 하였다. 이 말은 보석이나 아름다움과 관련하여 어떤 여인에게 내가 열등하단 말인가? 누가 나보다 낫단 말인가?” (Smp.551) 라는 뜻이다. 

 

이런 사실을 다른 여인들도 알게 되었다. 여인들도 한결 같이 수행승들이 청정한 삶을 산다고 공언하지만 수행자의 삶은 부수어졌다고 비난하고 혐책 하였다. 이런 이야기가 다른 수행승들의 귀에도 들어 가게 되었다. 특히 욕망을 여읜 수행승들은 어찌 존자 우다인이 여인의 앞에서 자신의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충족을 위한 공양을 찬탄할 수 있단 말인가?”라며 분개 하였다.

 

성공양(性供養)을 요구할 때

 

욕망을 여읜 수행승들은 우다인에 대한 소문을 부처님에게 알렸다. 부처님은 우다인을 불렀다. 불러서 그대가 여인의 앞에서 자신의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공양을 찬탄한 것이 사실인가?”라며 물어 보았다. 이를 확인 하고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어리석은 자여, 그것은 적절하지 않고, 자연스럽지 않고, 알맞지 않고, 수행자의 삶이 아니고 부당하고, 해서는 안될 일이다. 어찌 그대가 여인의 앞에서 자신의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공양을 찬탄할 수 있단 말인가?

 

어리석은 자여, 내가 여러 가지 법문으로 가르침을 설한 것은 탐욕의 여읨을 위해서지 탐욕의 갖춤을 위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가르침을 설한 것은 결박의 여읨을 위해서지 결박의 갖춤을 위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어리석은 자여, 그런데 그대는 내가 탐욕의 여읨을 위하여 가르침을 설할 때에 탐욕의 갖춤을 위해 애쓸 수 있는가? 결박의 여읨을 위하여 가르침을 설할 때에 결박의 갖춤을 위해 애쓸 수 있는가? 집착의 여읨을 위하여 가르침을 설할 때에 집착의 갖춤을 위해 애쓸 수 있는가?

 

어리석은 자여, 내가 여러 가지 방편으로 탐욕의 여읨을 위하여, 교만을 부수기 위하여, 갈증을 제거하기 위하여, 경향을 제거하기 위하여, 윤회를 끊기 위하여, 갈애를 부수기 위해서, 사라지기 위해서, 지멸에 들기 위해서, 열반에 들기 위해서 가르침을 설하지 않았는가?

 

어리석은 자여, 내가 여러 가지 방편으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끊음에 관하여 설명하지 않았는가?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의한 지각에 대한 완전한 앎에 관하여 설명하지 않았는가?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의한 갈증의 제어에 관하여 설명하지 않았는가?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의한 사유의 제거에 관하여 설명하지 않았는가?

 

어리석은 자여, 그것은 아직 청정한 믿음이 없는 자를 청정한 믿음으로 이끌고, 이미 청정한 믿음이 있는 자를 더욱더 청정한 믿음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다. 어리석은 자여, 그것은 오히려, 아직 청정한 믿음이 없는 자를 불신으로 이끌고, 이미 청정한 믿음이 있는 자 가운데 어떤 자들을 타락시키는 것이다.”

 

(자신의 욕망 충족에 대한 학습계율, 승단잔류죄법 제4, 율장비구계 844P, 전재성님역)

 

 

이와 같이 말씀하시고서 긴 법문을 하였다. 마지막으로 우다인의 행위에 대하여 어리석은 자여, 그것은 오히려, 아직 청정한 믿음이 없는 자를 불신으로 이끌고, 이미 청정한 믿음이 있는 자 가운데 어떤 자들을 타락시키는 것이다.”라 하였다.

 

부처님은 여러가지 방편으로 우다인을 견책하였다. 또한 여러가지 법문으로 교화 하였다. 또한 부처님은 모든 수행승들에게 다음과 같이 알렸다.

 

 

"Yo pana bhikkhu otiṇṇo vipariatena cittena mātugāmassa santike attakāmapāricariyāya vaṇṇa bhāseyya: etadagga bhagini, pāricariyāna yā mādisa sīlavanta kalyāadhamma brahmacāri etena dhammena paricareyyāti methunūpasahitena, saghādiseso"

 

[세존]

누구든지 욕정을 일으켜 퇴락한 마음으로 여인의 앞에서 자신의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공양을 찬탄하여, ‘자매여, 나와 같은 계행을 지키는 자, 선법을 지닌 자, 청정한 삶을 사는 자에게 이러한 것으로 공양하면, 공양하는 자 가운데 최상자가 된다.’라고 말하면서 성적교섭과 관련시키면 승단잔류죄를 범하는 것이다.”

 

(자신의 욕망 충족에 대한 학습계율, 승단잔류죄법 제4, 율장비구계 844P,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자신의 욕망을 위하여 최상의 공양이라는 명목으로 성접교섭, 즉 성공양(性供養)에 대한 요구를 금하였다. 또한 그렇게 성공양이라는 말을 꺼내는 것자체에 대하여 승단잔류죄를 짓는 것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승단잔류죄란 무엇일까?

 

승단잔류죄(saghādisesa)?

 

승단잔류죄(saghādisesa)에 대하여 앙굿따라니까야 에서는 큰 가지를 부러뜨리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가장 큰 죄에 해당되는 승단추방죄(pārājika)뿌리 뽑아 뿌리와 가지를 뒤집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나무가 뿌리 뽑혀 뒤집혀 있다는 살기 힘들 것이다. 그것이 빠라지까(pārājika), 즉 승단추방죄에 해당된다. 그런데 큰 나무 가지 하나 부러진 것 같은 죄가 승단잔류죄라는 것이다. 나뭇가지가 부러져도 몸톰이 있기 때문에 가지는 새로 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상가디세사(saghādisesa), 즉 승단잔류죄라 한 것이다.

 

승단잔류죄를 저지르면 어떤 벌을 받아야 할까? 앙굿따라니까에서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나타내고 있다.

 

 

“여러분, 나는 몽둥이로 맞아야 하는,

비난을 받을 만한 악한 업을 지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원한다면, 그 대가를 달게 받겠습니다.( A4:242)

 

 

몽둥이로 맞아야 하는 죄가 승단잔류죄이다. 그렇다면 승단추방죄는 어떻게 표현 되어 있을까? 게송을 보면 “이 자는 머리가 잘릴 만한, 비난 받을 만한 악업을 지었구나.” 라 하였다. 승단추방죄를 저지른 자는 고백할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 타인의 입에서 머리가 잘릴 만한 죄를 지었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승단추방죄를 지으면 함께 살 수 없다. 왜 그런가? 청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 때문에 청정하지 못한 자와 더 이상 함께 살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이 “아난다여, 대중이 청정하지 못하다.(aparisuddhā Ānanda parisā, Ud.51)”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우다나에 따르면 부처님은 대중속에 마음을 읽었다. 그 중에 청정하지 못한 자를 발견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탐욕으로 가득차고 쓰레기로 오염된 사람을 보았다. (Ud.51)”라 하였다. 그래서 목갈라는 청정하지 못한 수행승에게 다가가서 “벗이여, 일어나라, 세존께서 보셨다. 그대는 수행승들과 함께 지낼 수 없다. (Ud.51)”라 하며 퇴장 시켰다.

 

청정하지 못한 자는 끌려 나갔다. 이를 우다나에서는 “그러자 존자 마하 목갈라나는 그 사람의 팔을 붙잡아 문밖으로 끌어내고 빗장을 잠그고 세존께 계신 곳을 찾아 갔다.” (Ud.51)라고 되어 있다. 청정한 수행자가 청정하지 못한 수행자와 도저히 함께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특히 승단추방죄를 지었을 때 그럴 것이다.

 

승단추방죄는 머리가 잘릴만한 죄에 해당된다. 그러나 승단잔류죄는 몽둥이로 맞아야 하는 죄에 해당된다. 대가를 달게 받고서 승단에 잔류 할 수 있는 것이다.

 

존자여, 저는 어떻게 임신할 수 있습니까?”

 

부처님은 어떤 수행승이 욕정을 일으켜 퇴락한 마음으로 여인의 앞에서 자신의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공양을 찬탄하는 것을 금하였다. 어기면 승단잔류죄를 범하는 것이라 하였다. 특히 최상의 공양에 대하여 성접교섭이라 하여 성공양하라고 말하는 것을 금하였다. 여기서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공양에 대한 여러 가지 예가 있다. 율장비구계에서는 교도인연담으로 소개 되어 있다. 그 중에 하나를 보면 다음과 같다.

 

Tena kho pana samayena aññatarā vañjhā itthī kulūpaga bhikkhu etadavoca

한 때 불임녀가 단월수행승에게 말했다.

 

[불임녀]

"kathāha bhante vijāyeyya"nti.

존자여, 저는 어떻게 임신할 수 있습니까?”

 

[수행승]

"Tena hi bhagini aggadāna dehī"ti.

그렇다면 자매여, 최상의 보시를 하십시오.”

 

[불임녀]

"Ki bhante aggadāna"nti?

““존자여, 어떤 것이 최상의 보시입니까?”

 

[수행승]

"Methuna dhamma"nti.

성적 교섭을 하는 것입니다.”

 

(교도인연담, 승단잔류죄법 제4, 율장비구계 849P, 전재성님역)

 

 

여기서 단월수행승(kulūpagabhikkhu)은 각주에 따르면 재가신도의 가정에 자주 방문하여 의존하는 수행승을 말한다. 이로 보아 수행승이 재가신도의 집을 방문하여 재가자의 고민을 들어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제 해결 방법이 매우 음탕하다. 자신에게 최상의 보시를 하면 아이가 생겨 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성공양에 대한 것이다.

 

단월수행승은 불임녀에게 성적교섭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후회하였다. 이는 세존께서는 학습계율을 시설하였다. 내가 승단잔류죄를 범한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에 부처님께 사실대로 알렸다. 그러자 부처님은 수행승이여, 승단잔류죄를 범한 것이다.”라고 말 하였다.

 

교도 인연담을 보면 여러 가지 케이스가 나온다. 가임녀가 어떻게 하면 아들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어 보자 단월수행승은 최상의 보시 이야기를 하며 성적교섭을 하는 것입니다.”라 하였다. 자신과 성관계를 하면 아들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어떤 여인이 수행승에게 물었다. 여인이 저는 어떻게 남편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자 단월수행승은 역시 최상의 보시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에게 성공양하라고 말한다. 이외에도 저는 어떻게 매력적일 수 있습니까?” “제가 무엇을 공양할까요?” “저는 무엇으로 시봉할 수 있습니까?”라며 갖가지 사항을 물어 본다. 심지어 어떤 여인은 어떻게 저는 하늘나라에 갈 수 있습니까?”라고 물어 보았다. 마치 요즘 유행하는 즉문즉설을 보는 것 같다. 이럴 때 마다 단월수행승은 자신과 성접교섭을 갖는 것이 최상의 보시라고 말한다.

 

번뇌 다한 수행승에게는

 

하늘사람은 수행승과 재가여신도와 관계를 오해 하였다. 재가의 가정주부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수행승을 깨우쳐 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수행승은 이미 번뇌 다한 아라한이었기 때문에 욕망이 일어날 리 없다. 이에 수행승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하였다.

 

 

Bahū hi saddā paccūhā

khamitabbā tapassinā,
Na tena ma
ku hotabba

na hi tena kilissati.

 

[수행승]
세상에는 귀에 거슬리는 말이 많네.

고행자들은 참아야 하리.

그 때문에 부끄러워해서는 안 되니

그로 인해 때묻지는 않기 때문이네.

 

 

Yo ca saddaparittāsī

vane vātamigo yathā,
Lahucittoti ta
āhu

nāssa sampajjate vatanti.

 

바람을 두려워하는 숲속의 사슴처럼

말을 두려워 하는 사람은

경박한 사람이라 부르니

그런 사람의 서원은 완성되지 않으리.”

 

(Kulagaraīsutta-가정주부의 경, 상윳따니까야 S9.8, 전재님역)

 

 

세상사람들은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다. 특히 청정한 삶을 살기로 한 수행승에 대해서 말이 많다. 그래서 향기도둑의 경(S9.14)’에 따르면 언제나 청정함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머리털만큼의 죄악이라도 구름처럼 크게 보이는 것이네.” (S9.14)라 하였다.

 

수행승에게 아주 작은 허물도 하늘의 구름처럼 커다랗게 보인다고 하였다. 따라서 소문은 수행승에게 소문은 민감한 것이다. 그러나 번뇌 다한 아라한에게는 문제 되지 않는다.  그래서 세상에는 귀에 거슬리는 말이 많네라 하였다.

 

스님들의 음담패설

 

스님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종종 음담패설을 이야기한다. 물론 방송에서는 들을 수 없는 내용이다. 신도들을 모아 놓고 교육시키는 자리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을 들으면 낯 뜨겁기 그지 없다. 주의를 집중하기 위하여 또는 비유를 들기 위하여 듣기에도 민망한 성적이야기를 여과 없이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담은 스님들 사회에서도 회자 되는 모양이다. 지대방에서 성적농담이 자연스럽게 얘기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얘기가 지나치면 어떻게 될까?

 

유튜브에서 흥미 있는 제목의 법문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성담스님의 배우자와의 성관계 기준에 대한 것이다. 제목이 흥미를 끌어서일까 조회수가 38000회가 넘었다. 대체 어떤 내용일까?

 

성담스님의 성담(性談)

 

성담스님에 따르면 신도들로부터 성문제에 대한 상담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 것 중에 하나가 배우자와의 성관계 기준이라 하였다. 이에 성담스님은 시대의 산물로 보라고 한다.

 

성담스님은 상담하면서 제일 괴로운 것이 성상담이라 하였다. 그러면서 어느 상담자에게 지가 지가 달린 것 가지고 지가 쓰는데 내가 뭐 샤신경 쓸 것 있냐. 이렇게 세게 나가라.”라고 충고한다는 것이다. 성담스님에 따르면 한사람이 한사람만 하는 것이 기준이 아니다.’라 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음과 양이 인연에 의해서 만났다 헤어지는 것이 기준이에요. 이것이 우주의 법칙이고. 그렇지만 한놈만 붙어 먹고 살아라는 기준이 아니다 이말이에요. 이런 걸 여러분들이 똑바로 알아라고.”

 

(성담스님_5. 배우자와의 성관계 기준)

 

 

어떤 여인이 바람 피는 남편에 대한 성문제를 상담한 것 같다. 이에 스님은 음과 양은 만났다 떨어졌다 하는 것이라 하며 지극히 자연스런 것이라 한다. 심지어 한놈과 붙어 먹고 살라는 법은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중동의 문화를 들고 있다. 중동에서는 한 남자가 여러 명의 여자와 관계를 맺는 것이 좋은 예라 한다.

 

음양의 법칙을 강조하는 스님

 

스님은 음양의 법칙을 강조한다. 음양은 인연에 의해서 돌아 간다는 것이다. 스님말 대로라면 남자와 여자는 인연만 맞으면 관계 해도 되는 것일까? 스님은 거기에 집착도 두지 말고 미련도 두지 말라고 한다. 마치 모든 남녀에게 해당되는 말처럼 들린다. 그래서 내 인연이 되서 같이 잘 때는 같이 자고 안 잘 때는 안잔다고 편하게 하시라고 편하게라 말한다.

 

스님은 마음에는 남녀가 없다고 한다. 그게 기준이라 한다. 그런데 인연이라는 것은 있다는 것이다. 인연은 만났다 헤어질 수 있고, 또 만남이 길어질 수도 있고, 만남이 짧아 질 수 있다고 한다. 스님은 인연을 강조한다. 인연이 되면 만날수도 있음을 말한다. 이런 인연은 음과 양이 만남을 말한다. 그런데 반드시 한명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인연이 되면 여럿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를 중동의 일부다처제의 예를 들고 있다.

 

성관계 기준은 마음 내키는대로?

 

스님은 상담자에게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고 한다. 자신을 사랑하기에도 시간이 없는데 자신을 괴롭히는 것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고 한다. 이는 상담자가 참기 힘든 것을 염려 해서 한 말이다. 대체 무엇을 참기 힘들다는 말일까?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성관계에 대한 기준도 정확히 알아라. 마음이 기준이다. 마음은 남녀가 없다. 그래 이세상은 인연이에요. 그래서 돌아 간다. 인연은 잘 관리하면 오래 가고 잘 관리 못하면 인연이 짧아진다.”

 

(성담스님_5. 배우자와의 성관계 기준)

 

 

스님은 성관계에 대한 기준에 대하여 마음이 기준이라 하였다. 마음 내키는 대로 하는 것이 기준일까?

 

성담스님은 신도로부터 성상담한 이야기를 하였다. 배우자와 성관계 기준에 대하여 인연으로 생각하라는 것이다. 배우자가 여러 명의 여자와 관계를 맺고 자신에게 소홀하게 하는 것에 대하여 너무 마음에 두지 말라고 한다. 남자나 여자나 언젠가 인연이 되면 내 인연이 되서 같이 잘 때는 같이 자고라 말하는 것이다.

 

음탕한 말은 승단잔류죄법

 

성담스님은 성에 대하여 자유롭게 말한다. 하지만 음탕한말을 하면 승단잔류죄법에 해당된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1)

한때 어떤 여인이 거친 털로 짠 모직옷을 입고 있었다. 한 수행승이 탐애를 가지고 그 여인에게 말했다.

 

[수행승]

자매여, 그대의 거친 털이요?”

 

그 여인은 해명하지 않고 말했다.

 

[여인]

존자여, 그렇지 않습니다. 거친 털로 짠 모직옷입니다.”

 

 

2)

한때 어떤 여인이 밭에 씨를 심고 돌아왔다. 한 수행승이 탐애를 가지고 그 여인에게 말했다.

 

[수행승]

자매여, 그대는 씨를 심었는가?”

 

그 여인은 해명하지 않고 말했다.

 

[여인]

존자여, 그렇습니다. 제가 씨를 심었습니다.”

 

 

3)

한때 어떤 수행승이 탐애를 가지고 한 여인에게 말했다.

 

[수행승]

자매여, 그대는 신심이 깊습니다. 왜 그대는 남편에게는 주어도 나에게는 주지않습니까?”

 

 [여인]

존자여, 무슨 말 입니까?”

 

[수행승]

성적 교섭입니다.”

 

(음탕한 말에 대한 학습계율, 승단잔류죄법 제3, 율장비구계 840P, 전재성님역)

 

 

성담스님의 유튜브동영상을 보면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있다. 즉문즉설식으로 어떤 질문에도 답을 하고 있다. 심지어 성에너지가 넘칠 어떻게 다스려야 하나요?라는 동영상도 있다. 여기서 스님은 저는 결혼을 많이 시킵니다라 하였다. 스님이 남녀를 소개하여 중매도 서는 것이다

 

스님이 중매행위를 하는 것은 죄업에 속한다. 율장비구계에 따르면 중매에 대한 학습계율을 위반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어떠한 수행승이든 여인에 대한 남자의 의중을 또는 남자에 대한 여인의 의중을 통해서 부부관계를 맺게 하거나 애인관계를 맺게 하면, 그것이 일시적 관계라도, 승단잔류죄를 범하는 것이다.” (승단잔류죄법 5) 라 하였다. 몽둥이로 맞는 죄를 말한다.

 

 

 

2016-02-1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