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생에서 거듭 태어나려면
“너, 몇 살이니?”
아이들이 얘기 하는 중에 “너, 몇 살이니?”라는 말을 듣는다. 나이로 서열을 구분하려 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성인들에게서도 발견된다. 자신을 기준으로 하여 연장자와 연소자에 대한 대우가 달라지는 것이다.
육체적 나이는 그 사람의 현재를 나타내는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한다. 그래서일까 TV를 보면 사람 소개를 할 때 자막에 나이가 표시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특별한 직업이나 지위를 가지지 않는 일반사람들이 그렇다. 그러나 세상이 인정하는 직업을 가졌거나 지위를 가졌을 경우 나이를 따지지 않는다. 직장과 직위가 나이를 대신하기 때문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육체적 나이와 정신적 나이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나이를 많이 먹었어도 하는 행위를 보면 미숙한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반면 나이가 어려도 하는 행위를 보면 어른 같은 경우도 있다.
육체적 나이는 들었어도 정신적 연령은 낮은 케이스가 있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비록 나이가 들어 여든 살이나 아흔 살이나 백 세가 되었더라도 때 맞춰 말하지 못하고,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의미 있는 말을 하지 못하고, 가르침에 맞는 말을 하지 못하고, 계율에 맞는 말을 하지 못하고, 기억에 남는 말을 하지 못하고, 알맞은 말을 하지 못하고, 이유가 분명한 말을 하지 못하고, 한계가 있는 말을 하지 않고, 내용이 있는 말을 하지 못한다면, 그를 두고 ‘어리석은 장로’라고 한다.” (A4.22) 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여기 백살 먹은 노인이 있다. 그런데 행동하는 것을 보면 철부지 같다. 육체적 나이는 백살이지만 정신적 연령은 매우 낮음을 말한다. 이는 말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경에서는 때 맞춰 말하지 못하는 것’ 등 열 가지를 들고 있다. 이런 자에 대하여 ‘어리석은 장로’라 하였다. 이와 같은 내용을 요즘 식으로 한다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예가 하나 더 있다. 나이 어린 자가 ‘장로’처럼 보였을 때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비록 젊고 머리카락이 아주 검고 행복한 청춘을 부여 받은 인생의초년생일지라도 때 맞춰 말하고, 진실을 말하고, 의미 있는 말을 하고, 가르침에 맞는 말을 하고, 계율에 맞는 말을 하고, 기억에 남는 말을 하고, 알맞은 말을 하고, 이유가 분명한 말을 하고, 한계가 있는 말을 하고, 내용이 있는 말을 한다면, 그를 두고 ‘슬기로운 장로’라고 한다.” (A4.22) 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나이는 확실히 숫자에 불과하다.
법구경 인연담에 재미 있는 이야기가 있다. 법구경 260번 인연담을 보면 부처님께서 “한 장로가 이곳에서 나가는 것을 보았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보지 못했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부처님은 “그대들은 보지 못했다고?” 라고 재차 물었다.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 한 사미를 보았습니다.” 라 하였다. 그러자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그는 사미가 아니라 장로이다.”라 하였다. 수행승들은 믿기지 않는 듯 “세존이시여, 지나치게 작았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나는 나이가 들었다고 장로라 부르지 않고 장로의 자리에 앉았다고 장로라 부르지 않는다. 진리를 꿰뚫고 많은 사람에 대하여 불살생을 확립하면, 그를 장로라 한다.”라 하였다.
누가 손위인가?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지혜를 깨닫지 못하면 장로라 부를 수 없다. 그러나 사미라도 깨달으면 장로라 부를 수 있다. 결국 누가 먼저 깨달았느냐는 것이다. 먼저 깨달은 자가 손위가 되는 것이다. 율장비구계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세존]
“바라문이여, 예를 들어 한 마리의 암탉이 있는데 여덟 개나 열두 개나 계란을 올바로 품고 올바로 온기를 주고 올바로 부화시킬 때, 어떤 병아리가 병아리들 가운데 첫 번째 발톱이나 부리의 끝으로 알껍질을 쪼아서 안전하게 알껍질을 깨고 나온다면, 그 병아리를 손위라고 할 수 있습니까, 손아래라고 할 수 있습니까?”
(Verañjakaṇḍo-베란자의 이야기, 제1장 승단추방죄법, 율장비구계 90P, 전재성님역)
병아리 부화이야기는 맛지마니까야에서도 볼 수 있다. 이외 상윳따니까야, 앙굿따라니까야 등 도처에서도 볼 수 있다. 맛지마니까야야 ‘마음의 황무지에 대한 경(M16)’에 따르면 선종에서 말하는 ‘줄탁동기(啐啄同機)’와는 다른 것이다.
줄탁동기(啐啄同機)에 대하여
선종에서는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새끼와 어미닭이 안팎에서 서로 쪼아야 한다는 뜻으로 ‘줄탁동기’라 하였다. 하지만 니까야에서 병아리 부화의 비유를 보면 어미 닭이 부리로 쪼았다는 이야기가 보이지 않는다. 이는 “예를 들어 수행승들이여, 한 마리의 암탉이 있는데 여덟 개나 열 개나 열두 개나 계란을 올바로 품고 올바로 온기를 주고 올바로 부화시키면, 그 암탉은 ‘오! 나의 병아리들이 발톱이이나 부리의 끝으로 껍질을 쪼아서 안전하게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할텐데.’라고 원하지 않더라도 병아리들이 발톱이나 부리의 끝으로 껍질을 쪼아서 안전하게 껍질을 깨고 나올 수 있다.” (M16) 라는 말로 알 수 있다.
깨달음이란 스스로 깨닫는 것이지 남이 도와 주어서 깨달음에 이를 수 없음을 말한다. 한 존재의 정신세계에 남이 개입하여 깨우쳐 줄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스승은 마치 어미닭이 알을 품어 주는 것처럼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조건을 만들어 줄 수 있다. 그래서 상윳따니까야 ‘도끼자루 비유의 경’ 에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여덟 개나 열 개나 열두 개의 계란이 있는데, 닭이 그것을 올바로 품지 못하고, 올바로 온기를 주지 못하면, 올바로 부화시키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 닭은 발이나 발톱이나 머리나 부리로서 계란의 껍질을 부수어 병아리로 안전하게 부화시키고 싶어도 발이나 발톱이나 머리나 부리로서 계란의 껍질을 부수어 병아리로 안전하게 부화시킬 수 없다.” (S22.101) 라고 분명히 말씀 하셨다.
깨달음은 자력으로 가능한 것이다. 어미닭이 부리로 알 껍질을 깨 주듯이 타자가 대신 깨달아 줄 수 없다. 깨달음은 철저하게 자력에 따른 것이다. 대승이나 선종에서 말하는 것처럼 타력적인 요소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병아리가 스스로 알 껍질을 깨고 나오듯이 수행자 역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단단한 무명이라는 알껍질을 스스로 깨고 나와야 한다. 오로지 자신만이 자신의 세계를 파괴 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는 거듭 태어남이다. 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지만 다시 한번 더 태어남이다. 이는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서도 나타난다.
거듭 태어남
소설 데미안은 맛지마니까야 병아리부화의 비유를 모티브로 쓰여졌다고 한다. 젊은 시절 헤르만 헤세가 삼촌의 집에 있었던 맛지마니까야를 읽고 나서 감동을 받아 쓴 것이 일종의 ‘성장소설’이라 볼 수 있는 데미안이라는 것이다.
소설 데미안에서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구절이 있다. 거듭 태어나려는 자는 먼저 자신의 세계를 파괴 해야 된다는 것이다.
거듭 태어남은 알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것이다. 이런 거듭 태어남은 깨달아서 성자가 되는 것이다. 이는 ‘앙굴리말라경(M86)’에서도 발견된다. 이는 부처님이 앙굴리말라에게 “앙굴리말라여, 그렇다면, 그대는 지금 싸왓띠로 가라. 가서 그 부인에게 ‘자매여, 내가 고귀한 태어남으로 거듭난 이래 나는 의도적으로 뭇 삶의 생명을 빼앗은 적이 없습니다. 이러한 진실로 당신이 잘 되고 당신의 아이가 잘 되길 바랍니다.’라고 말하라.”(M86)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연쇄 살인자 앙굴리말라는 부처님 교단에 들어 와서 거듭 태어났다. 살인자에서 성자의 삶으로 극적인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 앙굴리말라는 더 이상 연쇄 살인자가 아니었다. 성자로서 거듭 태어난 것이다. 그럼에도 두려움을 느끼자 부처님이 “자매여, 내가 고귀한 태어남으로 거듭난 이래 나는 의도적으로 뭇 삶의 생명을 빼앗은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라고 한 것이다.
앙굴리말라는 거듭 태어났다. 비록 얼굴 모습과 육체적 형태는 살인자 이었을 때와 변화가 없었지만 정신적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마치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나오듯이 자신이 구축해 온 한세상을 파괴한 것이다.
“나는 참으로 손위고 세상의 최상자입니다”
부처님은 율장비구계에서도 병아리 비유를 들었다. 이유는 ‘손위’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여러 개의 알이 있지만 먼저 깨고 나온 병아리가 가장 손위라는 것이다. 마치 쌍둥이가 있는데 먼저 세상에 나온 아이를 손위로 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병아리 부화 비유를 들어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Evameva kho ahaṃ brāhmaṇa avijjāgatāya pajāya aṇḍabhūtāya pariyonaddhāya avijjaṇḍakosaṃ padāletvā eko'va loke anuttaraṃ sammāsambodhiṃ abhisambuddho. Svāhaṃ brāhmaṇa, jeṭṭho seṭṭho lokassa.
[세존]
“이와 같이 바라문이여, 나는 무명에 빠진 계란의 존재와 같은 뭇삶들을 위하여, 둘러싸인 무명의 껍질을 깨고 홀로 세상에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바르고 원만히 깨달았습니다. 바라문이여, 나는 참으로 손위고 세상의 최상자입니다.”
(Verañjakaṇḍo-베란자의 이야기, 제1장 승단추방죄법, 율장비구계 90P,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바라문 웨란자의 질문에 “나는 참으로 손위고 세상의 최상자입니다.”라 하였다. 이 세상에 부처님 보다 더 높은 자가 없음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고귀한 님들 가운데 선구적으로 태어난 자이기 때문이다.”(Smp.140) 라고 하였다. 여기서 고귀한 님들은 부처님과 벽지불과 부처님 제자들을 의미한다.
부처님과 견줄 자는 이 세상에 없다
부처님은 이 세상에서 부처님 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자가 없다고 하였다. 왜 이런 말을 하였을까? 이는 경에서 바라문 웨란자가 바라문들로부터 “수행자 고따마가 늙고 노쇠하고 고령인데다가 만년에 이른 바라문들에게 인사하지도 않고 일어나 맞이 하지도 않고 자리를 권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행위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사성이 밝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부처님은 고령의 바라문들에게 왜 인사도 하지 않고 자리도 권하지 않았을까? 바라문 입장에서 본다면 젊은 고따마가 무례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세존]
“바라문이여, 나는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에서,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내가 인사를 하고 일어서서 맞이하고 자리에 초대할 만한 자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바라문이여, 여래가 누군가에게 인사를 하고 일어서서 맞이하고 자리를 권한다면, 그의 머리가 부수어질 것이다.”
(Verañjakaṇḍo-베란자의 이야기, 제1장 승단추방죄법, 율장비구계 90P,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깨달은 자이다. 그것도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위없이 깨달은 자이다. 더구나 그 깨달음은 바르고 원만하여 흠 잡을 데가 없다. 이런 깨달음에 대하여 ‘아눗따라삼마삼보디(anuttaraṃ sammāsambodhiṃ)’ 라 한다. 한자어로 무상정등정각이라 한다. 이런 깨달음을 성취한 자를 정득각자로 한다.
정등각자로 서의 부처님은 사성제에 대하여 앎과 봄이 ‘세 번 굴려서 열두 가지 형태’로 있는 그대로 청정해졌기 때문에 선언하였다. 어디에 선언하였는가? 그것은 “수행승들이여, 나는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에서,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바르게 원만히 깨달았다고 선언했다.”(S56.11) 라고 나타난다.
부처님에게 스승은 없다. 그래서 사명외도 우빠까를 만났을 때 “나는 모든 것에서 승리한 자, 일체를 아는 자. 모든 상태에 오염되는 것이 없으니 일체를 버리고 갈애를 부수어 해탈을 이루었네 스스로 알았으니 누구를 스승이라 하겠는가.” (M26) 라고 말씀 하셨다. 스스로 깨달은 자이니 스승이 없는 것이다. 마침내 부처님은 “나에게는 스승도 없고 그와 유사한 것도 없고 천상과 인간의 세계에서 나와 견줄만한 이 없네.” (M26) 라 하신 것이다.
머리가 부수어질 것
부처님과 견줄자는 이 세상에 없다. 이 세상을 창조하였다는 하느님(범천: 브라흐마)도 대상이 아니다. 당연히 범천을 따르는 바라문도 대상이 아니다. 바라문이 제 아무리 나이가 들어 고령이어도 부처님 보다 손 아래 인 것이다. 그래서 인사도 하지 않고 자리도 권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인사를 하고 일어서서 맞이하고 자리를 권한다면 “그의 머리가 부수어질 것이다.”라 하였다.
여기서 ‘머리가 부수어진다’는 것은 호법신장의 ‘금강저’를 연상케 한다. 맛지마’삿짜까에 대한 작은 경’에 따르면 “악기베싸나여, 자, 해명해 보십시오. 그대는 지금 침묵할 때가 아닙니다. 악기베싸나여, 여래가 여법하게 세 번 질문할 때까지 답변하지 않으면, 머리가 일곱 조각으로 터질 것입니다.” (M35) 라 하였다. 이는 부처님이 직접 머리를 일곱조작 낸다는 것이 아니라 야차가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경에 따르면 야차 바지라빠니가 불타고 불꽃이 이글거리고 빛을 방출하는 쇠로 된 금강저를 가지고 있었다. 부처님과 대론을 하고 있는 자이나교도 삿짜까에 대하여 “악기베싸나여, 여래가 여법하게 세 번 질문했는데 답변하지 않으면, 내가 여기서 그대의 머리를 일곱 조각으로 터지게 할 것이다.” (M35)라 하였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손위인 이유 여덟 가지
부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손위’라 하였다. 더구나 누군가 고령의 바라문에게 일어나서 예를 표하고 자리를 권하라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머리가 부수어질 것이라 하였다. 이런 말에 위축 되어서일까 바라문 웨란자는 바라문들이 부처님에 대하여 부정적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하여 알려 준다. 경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여덟 가지이다.
1) 존자, 고따마께서는 멋이 없습니다. (Arasarūpo bhavaṃ gotamoti.)
2) 존자, 고따마께서는 즐김이 없습니다. (Nibbhogo bhavaṃ gotamoti.)
3) 존자, 고따마께서는 무작을 설합니다. (Akiriyavādo bhavaṃ gotamoti.)
4) 존자, 고따마께서는 단멸을 설합니다. (Ucchedavādo bhavaṃ gotamoti.)
5) 존자, 고따마께서는 혐오를 설합니다. (Jegucchī bhavaṃ gotamoti,)
6) 존자, 고따마께서는 제거를 설합니다. (Venayiko bhavaṃ gotamoti.)
7) 존자, 고따마께서는 학대를 설합니다. (Tapassī bhavaṃ gotamoti.)
8) 존자, 고따마께서는 입태를 거부합니다. (Apagabbho bhavaṃ gotamoti.)
(전재성님역)
여덟 가지 항목은 앙굿따라니까야 ‘웨란자의 경(A8.11)’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여덟 가지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고따마 존자는 맛이 없는 분입니다.”
“고따마 존자는 재물이 없는 분입니다.”
“고따마 존자는 [업]지음 없음을 말하는 분(도덕부정론자)입니다.”
“고따마 존자는 단멸을 말하는 분(단멸론자)입니다.”
“고따마 존자는 혐오하는 분입니다.”
“고따마 존자는 폐지론자입니다.”
“고따마 존자는 고행자입니다.”
(초불연 대림스님역)
멋인가 맛인가
첫 번째 항목을 보면 빠알리어 ‘rasa’에 대하여 ‘멋’과 ‘맛’으로 서로 번역이 다르다. 그래서 부처님에 대하여 ‘멋이 없는 사람(전재성님역)’과 ‘맛이 없는 사람(대림스님역)’이라 하였다.
빠알리어 ‘rasa’는 ‘taste; juice; flavour; quick-silver’의 뜻이다. 제1의 뜻이 ‘맛’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초불연 번역이 원뜻에 가깝다. 그런데 전재성님의 각주에 따르면 “여기서 ‘arasarūpo’는 선견율비바사나 한역경전에서는 색무미(色無味)라고 번역 하는 것으로 바라문은 ‘인사를 하고 일어서서 맞이하고 자리에 초대하는 것’을 멋있다 즉 색미(色味)가 있다.’라고 표현하기 때문이다.”(율장비구계 11번 각주) 라 하였다. 이는 주석에 근거하지 않는 전재성님 견해이다.
멋과 맛은 다른 말이다. 빠알리어를 직역하면 ‘맛’이라 볼 수 있지만 전체적인 문맥을 보면 ‘멋’이라는 말이 타당해 보인다. 빅쿠보디는 “Master Gotama lacks taste”라 하여 ‘맛’의 의미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부처님에 대하여 “맛이 없는 분입니다”라고 하면 어색해 보이지만 “멋이 없습니다”라고 하면 인격에 대하여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덜 어색해 보인다는 사실이다.
바라문들은 부처님에게 왜 멋이 없다고 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해명하고 있다.
[세존]
“바라문이여, 어떠한 이유로 나에 대하여 ‘수행자 고따마는 멋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렇게 말하는 마땅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라문이여, 형상의 멋, 소리의 멋, 냄새의 멋, 맛의 멋, 감촉의 멋, 사실의 멋이 있는데, 여래에게는 그것들이 끊어지고, 뿌리째 뽑혀, 종려나무 그루터기처럼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되고, 미래에 다시는 생겨나지 않습니다. 바라문이여, 어떠한 이유로 나에 대하여 ‘수행자 고따마는 멋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렇게 말하는 마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대가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닙니다.”
(Verañjakaṇḍo-베란자의 이야기, 제1장 승단추방죄법, 율장비구계 87P,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바라문들이 ‘수행자 고따마는 멋이 없다.’라고 오해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여섯 가지 감각적 대상으로 설명하였다. 이를 형상의 멋, 소리의 멋, 냄새의 멋, 맛의 멋, 감촉의 멋, 사실의 멋이라 하였다. 이런 대상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뿌리 뽑은 것이다. 즐기지 않기 때문에 ‘멋이 없다’라고 설명해 주었다.
bhoga, 즐김인가 재물인가?
두 번째 항을 보면 ‘nibbhogo’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즐김이 없습니다”라 하였고, 초불연 대림스님은 “재물이 없는 분입니다”라 하여 다르게 번역하였다. 빠알리어 ‘nibbhogo’는 ‘Deprived of enjoyment, miserable’의 뜻이다.
여기서 bhoga는 ‘possession; wealth; enjoyment’의 뜻이다. 복합어로 사용 되었을 때 즐김이 없음의 뜻이다. 무엇을 즐기지 않는 것일까? 이는 경에서 형상의 즐김, 소리의 즐김 등 여섯 가지로 표현 되어 있다.
그런데 초불연에서는 형상의 재물, 소리의 재물 등으로 표현 하였다. 빅쿠보디는 “Master Gotama is not convivial”이라 하였다. 여기서 ‘convivial’은 오락적 요소를 말한다. 따라서 빅쿠보디역은 “고따마는 오락적이 아니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즐김과 재물은 다른 것이다. bhoga라는 말이 소유, 재물, 즐김의 뜻이 있기는 하지만 문맥적으로 보았을 때 ‘nibbhogo’는 여섯 가지 감각 대상을 즐기지 않음을 말한다. 따라서 부처님은 바라문에게 “어떠한 이유로 나에 대하여 ‘수행자 고따마는 즐김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렇게 말하는 마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대가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닙니다.”라고 하신 것이다.
무작을 설한 부처님
세 번째 항을 보면 “고따마께서는 무작을 설합니다. (Akiriyavādo bhavaṃ gotamoti.)”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고따마 존자는 [업]지음 없음을 말하는 분(도덕부정론자)입니다.”라 하여 괄호를 이용하여 주석적 번역을 하였다. 여기서 아끼리야와다(akiriyavāda)는 무작론자를 말한다. 인간행위에서의 해야 할 도덕적 책임을 부정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도덕부정론자라 한다. 부처님 당시 뿌라나 깟싸빠와 막칼리 고쌀라가 이에 된다.
바라문은 왜 부처님이 무작을 설한다고 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그렇게 생각한다면 마땅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하였다. 그 마땅한 이유에 대하여 “나는 신체적인 악행, 언어적인 악행, 정신적인 악행의 무작을 설하고 여러 가지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의 무작을 설합니다.”라 하였다.
단멸을 설한 부처님
네 번째 항을 보면 “고따마께서는 단멸을 설합니다. (Ucchedavādo bhavaṃ gotamoti.)”라 하였다. 여기서 빠알리어 웃체다와다(ucchedavāda)는 단멸론자를 말한다. 인과적 연속성을 담보 할 수 없는 허무주의자를 말한다. 이런 오해에 대하여 부처님은 “바라문이여, 나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단멸을 설하고 여러 가지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의 단멸을 설합니다.”라 하였다.
혐오를 설한 부처님
다섯 번째 항을 보면 고따마께서는 혐오를 설합니다. (Jegucchī bhavaṃ gotamoti)”라 하였다. 어떤 혐오를 말할까? 주석에 따르면 맞지마니까야에서 부처님이 스스로 ‘극단적인 구차한 삶’이나 ‘극단적인 혐오의 삶’이라고 표현한 6년 고행을 말한다. 이런 오해에 대하여 “바라문이여, 나는 신체적인 악행, 언어적인 악행, 정신적인 악행의 혐오를 설하고 여러 가지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의 혐오를 설합니다.”라 하였다.
제거를 설한 부처님
여섯 번째 항을 보면 “고따마께서는 제거를 설합니다. (Venayiko bhavaṃ gotamoti.)”라 하였다. 어떤 제거를 말할까? 주석에 따르면 “바라문은 세존께서 인사하는 것 등을 보지 못하고 세상에서 최상의 행동을 억제했다는 의미에서 말한 것이다.”(Smp.135) 라 하였다. 바라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부처님이 무례하게 보였던 것이다. 여기서 빠알리어 ‘venayika’는 ‘調伏者, 持律者, 虚無論者’를 뜻한다. 이와 같은 오해에 대하여 “바라문이여, 나는 신체적인 악행, 언어적인 악행, 정신적인 악행의 제거를 설하고 여러 가지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의 제거를 설합니다.”라 하였다.
학대를 설한 부처님
일곱 번째 항을 보면 “고따마께서는 학대를 설합니다. (Tapassī bhavaṃ gotamoti.)라 하였다. 어떤 학대를 말할까? 여기서 빠알리어 Tapassī는 학대론자 또는 고행주의자라는 뜻이다. 한자어로는 ‘献身于宗教性的苦行’라 한다. 바라문들에게 있어서 부처님은 고행승의 이미지인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바라문이여, 나는 신체적인 악행, 언어적인 악행, 정신적인 악행에 대한 학대를 설하고 여러 가지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의 학대를 설합니다.”라 하였다.
입태를 거부한 부처님
마지막으로 “고따마께서는 입태를 거부합니다. (Apagabbho bhavaṃ gotamoti.)”라 하였다. 여기서 Apagabbho는 ‘Free from rebirth’의 뜻이다. 바라문들이 보기에 부처님은 저열한 태에서 태어난 자로 보았다. 그래서 입태를 거부한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바라문이여, 누군가에게 미래에 모태에 들어 다시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 끊어지고, 뿌리째 뽑혀, 종려나무 그루터기처럼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되고, 미래에 다시는 생겨나지 않는다면, 그를 두고 입태를 거부한 자라고 나는 말합니다.”라 하였다.
무명의 알껍질을 깨기 위하여
바라문들은 부처님을 오해 하였다. 그것이 여덟 가지로 나타난다. 그 중에는 단멸론자로 오해한 것도 있다. 이는 부처님이 열반에 대하여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이런 오해에 대하여 단멸론자들이 말하는 허무주의와 다름을 “나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단멸을 설하고”라 하여 번뇌의 소멸로 말씀 하셨다.
부처님은 여덟 가지 오해를 불식시키며 병아리부화의 비유를 들었다. 알에서 가장 먼저 나온 병아리가 손위라 볼 수 있듯이, 무명이라는 두터운 한 세상을 파괴하고 나온 자가 ‘최상자’라 하였다. 그런 이유로 부처님이 ‘누군가에게 인사를 하고 일어서서 맞이하고 자리를 권할 수 없다.’고 하였다.
부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에 대하여 ‘무명에 빠진 계란’과 같은 존재로 보았다. 부처님이 최초로 무명에 덮인 한세계를 파괴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스스로 “나는 참으로 손위고 세상의 최상자입니다. (Svāhaṃ brāhmaṇa, jeṭṭho seṭṭho lokassa.)”라 하였다.
세상에서 제일자 jeṭṭho) 또는 최상자(seṭṭho)로서 부처님은 모든 것이 선구이다. 그것은 무명이라는 알 껍질을 최초로 깨뜨렸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알껍질을 깨고 나온 것에 대하여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숙명통과 천안통과 누진통이다.
네 가지 선정에 들기 전에
부처님은 모든 존재들의 손위이고 또한 세상의 최상자가 된 것에 대하여 네 가지 선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네 가지 선정에 들기 위한 조건으로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Āraddhaṃ kho pana me brāhmaṇa, viriyaṃ. Ahosi asallīnaṃ. Upaṭṭhitā sati asammuṭṭhā. Passaddho kāyo asāraddho. Samāhitaṃ cittaṃ ekaggaṃ.
“바라문이여, 나는 열심히 노력하고 정진하여 권태로움이 없었고 새김을 확립하여 미혹에 떨어지지 않았고 몸이 고요하여 격정이 없었고 마음은 집중되어 통일되었습니다.”
(Verañjakaṇḍo-베란자의 이야기, 제1장 승단추방죄법, 율장비구계 90P, 전재성님역)
위 문장은 네 가지 선정을 설명하는 정형구에서 좀처럼 보기 힘들다. 위나야(율장)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구절이다. 그런데 네 가지 선정을 성취하기 위한 조건으로 열심히 노력하고 정진함(Āraddhaṃ viriya), 사띠의 확립(Upaṭṭhitā sati), 몸의 고요(Passaddho kayo), 마음의 집중(Samāhitaṃ cittaṃ) 이렇게 네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이런 네 가지 조건으로 불퇴전(asallīnaṃ), 불혹 (asammuṭṭhā), 무격정(asāraddho), 심일경(ekaggaṃ)이라는 결과가 생겨난 것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조건과 네 가지 결과로서 네 가지 선정을 이룰 수 있는데, 그 중에서 네 번째 선정 단계에서 숙명통과 천안통과 누진통에 대하여 알껍질을 깨는 것으로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숙명통으로 첫 번째 무명의 알껍질을 깨고
숙명통에 대해서는 자신의 전생을 볼 수 있는 능력으로 설명한다. 어떻게 전생을 알 수 있을까? 이는 남겨진 흔적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 흔적은 다름 아닌 현재 가지고 있는 몸과 마음이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특정한 시간적 계기에 따라 조건지어진 존재의 계기가 흔적으로 남는다는 사실을 조건의 소멸에 수반되는 여실지견에 의해 전생으로 기억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율장비구계 25번 각주) 라고 설명되어 있다. 아주 작은 흔적이나 실마리로도 대상을 파악할 수 있듯이 이 몸과 마음에 남겨져 있는 흔적으로 이전의 조건 발생과 소멸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생을 알 수 있는 능력은 인과론적으로 알 수 있는 직접지각이 아니라 하였다. 다만 네 번째 선정상태에서 다중적인 전생의 삶을 회상 할 수 있는 능력에 불과한 것이라 하였다. 이와 같은 숙명통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Ayaṃ kho me brāhmaṇa, rattiyā paṭhame yāme paṭhamā vijjā adhigatā, avijjā vihatā, vijjā uppannā, tamo vihato, aloko uppanno, yathā taṃ appamattassa ātāpino pahitattassa viharato. Ayaṃ kho me brāhmaṇa, paṭhamābhinibbhidā ahosi kukkuṭacchāpakasseva aṇḍakosamhā.
“나에게 한 밤의 초야에 첫 번째 밝음을 얻자 무명이 부서지고 명지가 생겨나고 어둠이 부서지고 광명이 생겨났습니다. 바라문이여, 이것이 병아리가 알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과 같은 나의 첫 번째 깨고 나옴 이었습니다.”
(Verañjakaṇḍo-베란자의 이야기, 제1장 승단추방죄법, 율장비구계 90P,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초야에 자신의 전생을 모두 보았다. 전생의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기억하고 초야에 첫번째 밝음을 얻자 ‘무명이 타파됐다(avijjā vihatā)’고 했다. 이어서 ‘명지가 생겨났다(vijjā uppannā)’고 했다. 이것이 숙명통이다. 숙명통으로 전생을 보자 어둠이 부서지고 광명이 생겨났다고 하였다. 이를 ‘무명의 껍질(avijjaṇḍakosaṃ)’ 을 깬 것에 대하여 알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천안통으로 두 번째 무명의 알껍질을 깨고
무명의 껍질은 모두 세 번에 걸쳐서 깨졌다. 두 번째 무명의 껍질이 깨진 것은 천안통에 의해서이다. 부처님이 숙명통으로 자신의 무수한 삶의 전생을 보고 명지를 얻었다면, 이번에는 천안통으로 타인의 삶의 모습을 보고서 중야에 두 번째 명지를 얻은 것이다. 그런 천안통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천안통은 자신의 행위와 업보에 미루어 타자의 행위와 업보에 대해 파악하는 능력이 정제되고 확장된 것이라 설명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현재의 뭇삶들의 다양성을 그들의 업보의 다양성에 따른 인과응보의 관계로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숙명통은 자신에 관련된 것이고, 천안통은 타인의 다양한 업보에 따라 등장하는 운명에 대한 것이다.
천안통은 자신의 숙명을 미루어 타자의 숙명에 관해 아는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천안의 계발은 초감각적 초시간적 실재를 토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육안을 토대로 한다고 했다. 따라서 천안통은 현재적 사건을 보는 목적을 위해서만 수행될 수 있는 것이지 그것을 통해 과거와 미래를 직접 지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천안통을 통하여 뭇삶들을 관찰하였다. 중생들의 생사와 미추, 행불행에 대하여 ‘업보에 따른 뭇삶들’에 관하여 분명히 안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천안통으로 무명의 껍질을 부수었다고 하면서 “병아리가 알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과 같은 나의 두 번째 깨고 나옴 이었습니다.”라 하였다.
누진통으로 세 번째 무명의 알껍질을 깨고
부처님은 누진통으로 무명의 껍질을 완전히 부수어 버렸다. 이는 다름 아닌 번뇌의 소멸이다. 사성제의 진리를 곧바로 알아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번뇌에서 마음을 해탈하고, 존재의 번뇌에서 마음을 해탈하고, 무명의 번뇌에서 마음을 해탈했습니다.”라 하였다.
부처님은 마음의 의한 해탈을 이루자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 것을 알게 되었다. 후야에 세 번째 무명의 껍질이 타파 되었을 때 “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은 해 마쳤으며,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라고 스스로 알게 된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병아리가 알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과 같은 나의 세 번째 깨고 나옴 이었습니다.”라 하였다.
이 생에서 거듭 태어나려면
율장비구계를 보면 가장 먼저 바라문 웨란자와의 대담이야기가 나온다. 외도 웨란자가 부처님의 무례함에 지적하자 부처님은 이 세상에서 손위라 하였고 또 최상자라 하였다. 그런 이유로서 병아리부화의 비유를 들었다.
부처님은 무명에 빠진 뭇삶들에 대하여 계란의 존재와 같다고 보았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최초로 무명의 껍질을 깬 것에 대하여 세 가지 명지, 즉 숙명통과 천안통과 누진통으로 설명하고 하고 있다.
부처님은 네 번째 선정에서 삼명으로 세 번에 걸쳐 무명의 껍질을 부수었다. 그래서 “나에게는 스승도 없고 그와 유사한 것도 없고 천상과 인간의 세계에서 나와 견줄만한 이 없네.” (M26) 라 하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인사를 하고 일어서서 맞이하고 자리에 초대할 만한 자를 보지 못하였습니다.”라 하였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무명의 껍질은 홀로 부수는 것이라 하였다. 누군가 대신 깨우쳐 줄 수 없음을 말한다. 이는 병아리 비유로 알 수 있다. 또 소설 데미안에서도 확인 된다. 이 생에서 거듭 태어나려면 자신을 둘러 싸고 있는 무명의 두터운 알껍질을 부수어야 함을 말한다. 새롭게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2016-02-08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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