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이 뭐냐고 묻는다면
깨달음이란?
종소리가 나면 종소리를 듣는다. 탁자를 탁 치면 역시 소리를 듣는다. 그런데 듣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 하는 것을 보았다. 유튜브동영상에서 어느 스님은 신도에게 종소리를 연신 들려 주며 깨우쳐 주려 한다. 소리를 듣는 것을 아는 놈이 있다는 것이다. 또 어느 도인은 탁자를 ‘탁’ 치면서 역시 소리를 듣는 것을 아는 놈이 있다고 하였다. 소리가 났을 때 소리를 듣는 것을 아는 놈을 아는 것이 깨닫는 것이라 한다. 마치 혜민스님의 시 ‘깨달음이란’ 시를 연상케 한다.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깨달음이란?
깨닫는다는 것은
깨달음이 뭐냐고 묻는 그 놈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말을 바로 알아채는 그 주인공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글씨를 보는 그 놈을 역으로 반조해서 보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눈 뒤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혜민스님, 깨달음이란?)
이 시를 보면 그 놈을 아는 것이 깨닫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일까 선사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배고프면 배고픈 줄 아는 그 놈, 졸리면 졸리는 지 아는 그 놈을 아는 것이 깨닫는 것이라 하였다.
유튜브동영상을 보면 깨달음에 대하여 한 마디씩 하는 자칭타칭 도인들이 많다. 스님도 있고 재가자들도 있는데 한결 같이 지금 여기에서 그것을 아는 것이 깨닫는 것이라 한다. 어떤 이는 깨닫는데 ‘5분’이면 족하다고 한다. 종을 치거나 탁자를 치면서 그 소리를 듣는 그 놈을 알기면 하면 된다고 한다. 알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어떤 이는 알고 났더니 ‘너무 허탈했다’고 한다. 지금 여기에서 일상이 모두 깨달음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허탈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5분 밖에 걸리지 않는 깨달음이지만 어떤 이는 10년 걸렸다고 했다.
선을 하는 사람들은 아는 그놈, 듣는 것을 아는 그놈을 아는 것이 깨닫는 것이라 한다. 그런 깨달음에 교리나 수행은 필요치 않다고 한다. 단지 먼저 깨달은 이들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그룹 모임을 갖는다. 모여서 이야기를 들어 보아야 알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런데 유튜브동영상을 들어 보면 내내 “이것뿐이야. 바로 이것뿐이거든.” “어쨌든 요거 하나거든”이라는 말을 한다. 선어록에 근거하여 법문하지만 결국 ‘이것뿐’이라는 것이다. 보는 것을 아는 그놈, 듣는 것을 아는 그놈, 본래 있었던 것, 진여, 참나, 본래면목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라 한다. 하지만 선가의 깨달음은 부처님 말씀 하신 것과 다르다.
바히야의 경에서
보는 것, 듣는 것을 아는 그놈을 아는 것이 깨달음일까? 일상에서 보고 듣고 냄새 맡지만 그 것을 아는 별도의 마음, 지켜 보는 마음, 또는 그놈이 있다고 생각하면 어떤 생각이 들까? 아마 이 몸과 마음 밖에 별도의 마음 또는 대상이 있다고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 몸과 마음 밖에서 찾지 말라고 하였다. 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리라고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다.
Tasmātiha te Bāhiya, evaṃ sikkhitabbaṃ:
“diṭṭhe diṭṭhamattaṃ bhavissati,
sute sutamattaṃ bhavissati,
mute mutamattaṃ bhavissati,
viññāte viññātamattaṃ bhavissatī”-ti.
Evaṃ hi te Bāhiya, sikkhitabbaṃ.
Yato kho te Bāhiya,
diṭṭhe diṭṭhamattaṃ bhavissati,
sute sutamattaṃ bhavissati,
mute mutamattaṃ bhavissati,
viññāte viññātamattaṃ bhavissati,
tato tvaṃ Bāhiya na tena, yato tvaṃ Bāhiya na tena, tato tvaṃ Bāhiya na tattha, yato tvaṃ Bāhiya na tattha, tato tvaṃ Bāhiya nevidha, na huraṃ, na ubhayam-antare, 23 esevanto dukkhassā”-ti.
[세존]
“바히야여, 그렇다면, 그대는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볼때는 보여질 뿐이며
들을 때는 들려질 뿐이며
감각할 때는 감각될 뿐이며
인식할 때는 인식될 뿐이다.
바히야여, 그대는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바히야여,
볼때는 보여질 뿐이며
들을 때는 들려질 뿐이며
감각할 때는 감각될 뿐이며
인식할 때는 인식될 뿐이므로
바히야여, 그대는 그것과 함께 있지 않다. 바히야여, 그대가 그것과 함께 있지 않으므로 바히야여, 그대는 그 속에 없다. 바히야여, 그대가 그 속에 없으므로 그대는 이 세상에도 저 세상에도 그 양자의 중간세상에도 없다. 이것이야말로 괴로움의 종식이다.”
(Bāhiyasutta-바히야의 경, 우다나 Ud1.10,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소리에 대하여 ‘들려지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듣는 것’과 다르다. 누구나 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듣는 것과 들려지는 것은 다른 것이다.
소리가 나서 듣지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는다. 주의를 기울여야 들려지는 것이다. 이는 보는 것, 감각되는 것, 인식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집착하였을 때
부처님은 “볼 때는 보여질 뿐이며 들을 때는 들려질 뿐이며 감각할 때는 감각될 뿐이며 인식할 때는 인식될 뿐”이라 하였다. 부처님은 왜 이렇게 말씀 하셨을까? 그것은 “그대는 그것과 함께 있지 않다”라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소리가 들려졌다는 것은 소리를 알아차렸음을 말한다. 알아차렸다는 것은 소리가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음을 말한다.
부처님은 “그대는 그 속에 없다(tvaṃ Bāhiya na tattha)”라 하였다. 이는 “그대는 그것 안에 있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과 같다. 집착해야 할 대상이 아님을 말한다. 소리의 배후에 아는 마음 또는 그 놈이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초불연 각주를 보면 “그대가 이러한 탐, 진, 치로 탐하고 성내고 어리석지 않게 되면 그대는 이러한 소리 듣고 감지하고 안 것에 묶이거나 집착하거나 확고하게 되지 않을 것이다.(SA.ii.384)” (초불 상윳따 4권 135번 각주) 라 하였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대상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소리가 들렸을 때 듣는 것이 아니라 ‘들려진 것’이어야 한다. 들리어져야 대상을 무상, 고, 무아로 알아 차려 집착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듣는 것이 아니라 들려지는 것이라 하였다. 소리가 났다고 하여 듣는 것 또는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보는 것과 보이는 것
듣기만 한다면 대상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듣고 싶은 것만 듣고자 한다면 ‘갈애’가 일어날 것이다. 따라서 듣는 것 또는 듣고 싶은 것을 듣는 것이 아니라 ‘들려 지는 것’을 들어야 한다. 그래야 알아차릴 수 있다. 알아차려야 무상, 고, 무아인줄 알아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런데 초불연 번역을 보면 듣는 것으로 번역하였다. 초불연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Ettha ca te māluṅkyaputta diṭṭhasutamutaviññātabbesu dhammesu diṭṭhe diṭṭhamattaṃ bhavissati, sute sutamattaṃ bhavissati, mute mutamattaṃ bhavissati, viññāte viññātamattaṃ bhavissati. Yato kho te māluṅkyaputta diṭṭhasutamutaviññātabbesu dhammesu diṭṭhe diṭṭhamattaṃ bhavissati, sute sutamattaṃ bhavissati, mute mutamattaṃ bhavissati, viññāte viññātamattaṃ bhavissati. Tato tvaṃ māluṅkyaputta na tena, yato tvaṃ māluṅkaputta na tena, tato tvaṃ māluṅkyaputta na tattha, yato tvaṃ māluṅkyaputta na tattha, tato tvaṃ māluṅakyaputta nevidha na huraṃ na ubhayamantarena esevanto dukkhassāti.
“말룽꺄뿟따여, 그대가 보고 듣고 감지하고 알아야 하는 법들에 대해서 볼 때는 단지 봄 만이 있을 것이고 들을 때는 단지 들음만이 있을 것이고 감지할 때는 단지 감지함만이 있을 것이고 알 때는 단지 앎만이 있을 것이면 그대에게는 ‘그것에 의함’이란 것이 있지 않다.
말룽꺄뿟따여, ‘그것에 의함’에 있지 않으면 그대에게는 ‘거기에’라는 것이 있지 않다. 말룽꺄뿟따여, 그대에게 ‘거기에’가 있지 않으면 그대에게는 여기 [이 세상]도 없고 저기 [저 세상도] 없고 이 둘의 가운데도 없다. 이것이 괴로움의 끝이다.”
(Māluṅkyaputtasutta-말룽끼야뿟따의 경, 상윳따니까야 S35.95, 각묵스님역)
각묵스님은 듣는 것에 대하여 “들을 때는 단지 들음만이 있을 것이고”라 하였다. 듣는 것이라 하여 능동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전재성님은 같은 경에서 “들린 것 안에는 들린 것 만이 있을 뿐이며”라 하였다. 이런 번역에 대하여 ‘오역’이라 하였다.
전재성님은 왜 스스로 오역이라 하였을까? 이는 각주에서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 있을 뿐이며’라는 구절은 역자의 구역에서는 ‘볼 때는 보여질 뿐이며’라고 했다. 그것은 주관적 측면과 객관적 측면의 일치를 염두에 두고 번역했으나 비구 보디의 신역을 통해 오역임을 알았다.” (각주, S35:95, 전재성님)라 하였다. 그러나 우다나 ‘바히야의 경’에서는 구역이 그대로 남아 있다. 시기적으로 우다나가 2009년에 초판이고, 상윳따니까야 개정판이 2006년이다. 아마 편집상 실수로 보인다.
빅쿠보디의 신역을 보면
전재성님이 스스로 오역이라 한 구역 ‘볼 때’는 주관적측면이고, ‘보여질 뿐’은 객관적 측면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각묵스님은 “볼 때는 단지 봄 만이 있을 것이고”라고 하여 모두 주관으로 번역하였다. 그렇다면 빅쿠보디의 신역은 어떤 것일까? Cdb를 찾아 보았다. 찾아 보니 다음과 같다.
“ When, Mālunkyāputta, regarding things seen, heard, sensed, and cognized by you, in the seen there will be mere1y the seen, the heard there will be merely the heard, in the sensed there will be merely the sensed, in the cognized there will be merely the cognized, then, Mālunkyāputta, you will not be ‘by that.’ When, Mālunkyāputta, you are not ‘by that,’ then you will not be ‘therein.’ When, Mālunkyāputta, you are not ‘therein,’ then you will be neither here nor beyond”
(cdb vol2, S35.95, 빅쿠보디역)
전재성님은 “볼 때는 보여질 뿐이며”고 번역한 것에 대하여 스스로 오역이라 밝혔다. 빅쿠보디의 신역을 참조하여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 있을 뿐이며”라며 바로 잡았다. 그 부분을 찾아 보면 “in the seen there will be mere1y the seen”이다. 이는 “보여진 것 안에는 단지 보여지는 것만이 있다”라는 뜻이다.
왜 보여진 것이라 하였을까?
빅쿠보디의 각주를 찾아 보았다.
The same advice is given to the ascetic Bāhiyas dārucīriya at Ud 8,5-12. The meaning is extremely compressed and in places the passage seems to defy standard grammar (e.g., by treating na tena and na tattha as nominative predicates). Spk gives a long explanation, which I translate here partly
abridged:
In the form base, i.e., in what is seen by eye-consciousness, “there will be merely the seen.” For eye-consciousness sees only form in form, not some essence that is permanent, etc. So too for the remaining types of consciousness [Spk-pt: i.e., for the javanas], there will be here merely the seen. Or alternatively: What is called “the seen in the seen” is eye-consciousness, which means the cognizing of form in form. “Merely” indicates the limit (mattā ti pumanaṃ). It has merely the seen; thus “merely the seen,”(an attribute of) the mind. T
he meaning is: ‘My mind will be just a mere eye-cansciousness.” This is what is meant: As eye-consciousness is not affected by lust, hatred, or delusion in relation to a form that has come into range, so the javana will be just like a mere eye-consciousness by being destitute of lust, etc. I will set up the javana with just eye-consciousness as the limit. I will not go beyond the limit and allow the mind to arise by way of lust, etc.
So too for the heard and the sensed. The “cognized” is the object cognized by mind-door adverting (manodvāravajjana). In that cognized, “merely the cognized” is the adverting (conconsciousness) as the limit.
As one does not become lustful, etc., by adverting, so I will set up my mind with adverting as the limit, not allowing it to arise by way of lust, etc. You will not be "by that" (na tena): you will not be aroused by that lust, or irritated by that hatred, or deluded by that delusion.
Then you will not be "therein" (na tena): When you are not aroused by that lust, etc., then you will not be “therein”-bound, attached, established in what is seen, heard, sensed, and cognized.
Spk's explanation of "neither here nor beyond nor in between the two" is the same as that summed up in n. 53 above, again proposed to avoid having to admit an intermediate state.
The verses that follow are intended to explicate the Buddha's brief dictum. From these, it seems that to go beyond "merely the seen" is to ascribe a pleasing sign (piyanimitta)-an attractive attribute--to the objects seen, heard, etc., and from this such defilements as attraction and annoyance result.
(cdb vol2, 75번 각주, 빅쿠보디)
전재성님은 빅쿠보디의 신역을 소개 하면서 주석을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주석에따르면 “시각의식에 보여진 형상속에는 오로지 보여진 것만이 있을 것이다.”라 하였다. 왜냐하면 시각의식은 오로지 형상속에서 형상만을 보고 영원한 어떤 본질을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를 순간적인 포착, 즉 자와나(속행)으로 설명한다. 그래서 순간적인 포착은 단지 시각의식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 경계를 지나쳤을 때 탐욕 등이 일어남을 말한다.
초불연의 각주를 보면 주석과 아비담마를 인용하여 설명해 놓았다. 초불연에서 “볼 때는 봄만이 있을 것이며”라 한 것은 모두 주관적이다. 이는 빅쿠보디가 “in the seen there will be mere1y the seen”라 하여 객관적으로 번역한 것과 다르다. 그래서 초불연 각주를 보면 “1) 눈의 알음알이로 형색의 감각장소를 보는 단지 봄만이 있다는 뜻이다. 2) 혹은 볼 때에 있는 봄(diṭṭhe diṭṭham)이란 것은 눈의 알음알이 인데 이것은 형색을 아는 것을 말한다. 3) 혹은 봄(diṭṭha)이란 눈의 알음알이로 보여진 형색이고 ‘볼 때는 봄만이(diṭṭhe diṭṭha-matta)’라는 것은 거기에서 일어난 받아들이는 마음 조사하는 마음 결정하는 마음이라 불리는 세 가지 마음을 말한다.”(초불상윳따4권 131번 각주) 라 하여 주관적이고 능동적으로 해석하였다.
세 번역을 비교하면
듣는 것과 관련하여 세 번역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구분 |
번 역 |
비고 |
빠알리어 |
sute sutamattaṃ bhavissati |
|
전재성님역 |
들린 것 안에는 들린 것만 있을 뿐이며 |
객관적이고 수동적 |
각묵스님역 |
들을 때는 들음만이 있을 것이고 |
주관적이고 능동적 |
빅쿠보디역 |
in the heard there will be mere1y the heard |
객관적이고 수동적 |
전재성님은 ‘들린 것’이라 하여 수동적이며 객관적으로 번역하였다. 반면 각묵스님은 ‘들을 때’라 하여 능동적이며 주관적으로 번역하였다. 빅쿠보디는 ‘the heard’이라 수동적이며 객관적으로 번역하였다. 이런 차이는 대상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다른 것이다.
누구나 소리를 듣는다.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한다. 길거리를 지나 가다 누군가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수 있고, 기차 지나가는 소리도 들을 수 있고, 차량의 소음도 들을 수도 있다. 그러나 주의를 집중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다. 지금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기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과 같다. 이렇게 본다면 소리는 듣는 것이 아니라 ‘들려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주의를 기울여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보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보고 있는 것과 보이는 것은 틀립니다”
보는 것과 보이는 것과 관련하여 빤냐와로 삼장법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보고 있는 것과 보이는 것하고는 틀립니다. 보고 있는 것은 내가 대상으로 마음이 향해 있는 것이고 보여지는 것은 저 대상이 나한테 다가오죠. 조금만 예리해져도 이 사실을 압니다. 보는 것 하고 보이는 것 하고는 느낌도 분명히 틀립니다.
볼 때는 어떤 느낌이 일어납니까? 억지로 대상에 맞추어야 되. 그러면 그거는 의도적으로 될 수밖에 없으니까 내가 볼 때는 느낌들이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일어나기는 나는데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보여질 때는 그거에 대한 느낌이 분명히 일어납니다.”
유튜브에 실려 있는 한국테라와다불교 빤냐와로 삼장법사의 법문이다. 삼장법사에 따르면 ‘보고 있는 것’과 ‘보이는 것’의 차이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보는 것은 의도적으로 될 수밖에 없어서 느낌이 잘 일어 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한마디로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때문일 것이다. 보이는 대상 중에 보고 싶은 것만 본다면 이는 ‘탐욕’이 개입 된 것이다. 그래서 대상을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하였다. 반면 보이는 것에 대하여는 대상에 대한 느낌이 분명히 일어난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있는 그대로 보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 보기 때문에 대상에 대하여 무상, 고, 무아로 알아 차릴 수 있음을 말한다.
위빠사나 수행의 측면으로 본다면 대상에 대하여 보는 것 보다 보이는 것이어야 한다. 듣는 것도 감각하는 것도 인식하는 것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누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면 이는 욕망이 개입 된 것이다. 욕망이 개입되면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빅쿠보디가 번역한 “in the seen there will be mere1y the seen” 번역이 타당해 보인다. 즉 “보이는 것 안에는 단지 보이는 것만이 있게 될 것이다”라는 뜻이다. 전재성님은 이에 대하여 “보인 것 안에는 보이는 것만 있을 뿐이며”라며 번역하였다. 반면 각묵스님은 “볼 때는 단지 봄만이 있을 것이고”라 하여 달리 번역하였다.
‘이것뿐’타령
유튜브 동영상을 보면 깨달음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는 것과 듣는 것을 아는 ‘그놈’이 있는데 그놈을 아는 것이 깨닫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혜민스님의 ‘깨달음이란?’ 시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혜민스님은 그놈에 대하여 “하나(뿐인) 님이 바로 그것”라 하였다. 마치 ‘요한복음1장’을 보는 것 같다. 더구나 그놈에 “그런데 그 앎안에는 부처도 사실 없습니다. 오직 앎만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도 알수 없습니다.”라 하였다. 이는 선가귀감에서 “옛 부처 나기 전에 홀로밝은 동그라미 석가도 알지 못한다 했는데 어찌 가섭이 전하랴.”라는 게송을 보는 듯 하다.
선가에서는 부처님도 알지 못하는 그놈이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일까 선가에서 깨달음을 말하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깨달음이 뭐냐고 묻는 그 놈을 깨닫는 것입니다.”라 하였다. 대체 그놈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어떤 이는 그놈을 아는데 5분이면 족하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종소리를 들려 주면서 종소리를 듣는 것을 아는 마음이 별도로 있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이는 그 공부하는데 10년 걸렸다고 한다. 둔한 자는 30년 걸리고 아주 둔한자는 평생걸릴 것이라 한다. 그런데 그놈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고 한다. 지금 여기에서 그놈이 있는 줄 알면 깨달았다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한결같이 “그냥 이것뿐”이라 하여 ‘이것뿐’타령을 한다.
정말 그놈은 있을까?
부처님은 그놈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않았다. 만약 그놈을 발견하였다면 가르침으로 설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경전을 찾아 보아도 그놈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 대신 “볼때는 보여질 뿐이며 들을 때는 들려질 뿐이며 감각할 때는 감각될 뿐이며 인식할 때는 인식될 뿐이다.” (Ud1.10, S35.95)라 하였다.
보기 싫어도 보이는 대상이 있을 때 보고 싶은 것만 보면 탐욕이 개입 된 것이다. 듣기 싫어도 들리는 대상이 있을 때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면 역시 탐욕이 개입 된 것이다. 이럴 경우 대상을 제대로 볼 수 없다. 그러나 보이는 것을 보여진대로 본다면, 즉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보았을 때 그 느낌에 대하여 무상, 고, 무아임을 통찰하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이다. 그래서 대상에 대하여 더 이상 집착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다.
[세존]
“말룽끼야뿟따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에게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고, 예전에도 결코 본 적이 없고, 지금도 보지 못하고,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도 할 수 없는, 시각에 의해 인식될 수 있는 형상들에 대한 어떤 욕망이나 탐욕이나 애착이 있는가?”
[말룽끼야뿟따]
“세존이시여, 없습니다.”
[세존]
“말룽끼야뿟따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에게는 지금까지 듣지 못했고, 예전에도 결코 들은 적이 없고, 지금도 듣지 못하고,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도 할 수 없는, 청각에 의해 인식될 수 있는 소리들에 대한 어떤 욕망이나 탐욕이나 애착이 있는가?
[말룽끼야뿟따]
“세존이시여, 없습니다.” (S35.95, 전재성님역)
2016-02-20
진흙속의연꽃
'담마의 거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향이나 기질은 바뀔 수 있을까? (0) | 2016.03.05 |
---|---|
십이입처는 공상해 낸 것이다 (0) | 2016.02.26 |
왜 험담하는가? 차라리 고귀한 침묵을, 마음에 새겨야 할 여섯 가지 수념(随念: anussati) (0) | 2016.02.10 |
업이 달리 익을 때, 업에 대한 위대한 분석 (0) | 2016.02.06 |
식과 명색의 상호의존적 발생연기에 대하여 (0) | 2016.0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