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십이입처는 공상해 낸 것이다

담마다사 이병욱 2016. 2. 26. 18:48

 

십이입처는 공상해 낸 것이다

 

 

이 세상은 꿈속의 세상?

 

이 세상은 꿈속의 세상일까? 자칭 깨달았다는 사람들의 강연을 들어 보면 한결 같이 이 세상이 꿈과 같다고 한다. 꿈속의 나와 꿈속의 기세간은 꿈꾸는 자가 만들어 내는 것과 같아서 꿈을 깨었을 때 꿈속의 세상인줄 알듯이 깨달음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본래 하나의 마음이라 한다. 마치 꿈꾸는 자가 꿈을 꾸면 꿈속의 나와 꿈속의 세상을 모두 알고 있듯이, 지금 여기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사실 하나라는 것이다. 정말 이 세상은 하나의 마음이 만들어낸 세상일까?

 

꿈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는 자칭 깨달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팔정도는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지금 여기에서 이것만 알면 된다고 한다. 지금 여기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사실을 알면 깨닫는 것이라 한다. 지금 여기에서 현존 하는 것이 있는 그대로의 진실된 세상이라 한다.

 

또 어떤 이는 일체유심조를 말한다. 이 세상은 모두 인식된 것이라 한다. 지금 보고 느끼고 지각 하는 것 역시 인식된 것이어서 이 세상은 인식하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심지어 오온에 있어서 색온마저 인식된 것이라 한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지각하는 세상이 금강경에서 말하는 여몽환포영과 같다고 한다.

 

범일스님 말하기를

 

사람은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몸과 마음을 물질정신이라고도 한다. 이를 다른 말로 오온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 색온과 수온, 상온, 행온, 식온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색온은 몸을 말하고 수온, 상온, 행온, 식온은 정신을 말한다. 그런데 색온은 몸뚱아리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참으로 놀라운 말이다. 이에 대하여 범일스님은 색이 물질, 즉 몸뚱아리가 아님을 분명히 말하였다. 색온에 대하여 범일스님은 다음과 같이 강연하였다.

 

 

6내입처, 6외입처, 6식이 있습니다. 자연에 있는 정보가 몸을 통해 가지고 감각기관을 통해서 의식공간에 저장이 되어 있어요. 안이비설신의 내입처에 저장되어 있고, 색성향미촉법이 외입처에 저장 되어 있어요. 이 저장이 색온입니다. 12처에 저장되어 있는 기본정보를 색온이라고 해요. 왜 색온이라 하는가? 외입처에 쌓여 있는 정보만 색온이 아닙니다. 색성향미촉법 모두 사대로 되어 있습니다. 사대는 물질입니다. 색을 물질로 보는 것 입니다. 물질이 바탕이 되어 축적 되어 있는 것이 색온입니다. 이것이 기본입니다.

 

의식공간안에는 물질이 없어요. 12처는 인식세계에서 인식공간안에서 일어나는 인식의 작용들이지 그 안에는 물질이라는 것이 존재하지가 않아요. 12처는 다 의식공간입니다. 일체는 내 안에 있는 인식공간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라고 이해 하자는 겁니다.

 

색온이 뭐냐? 몸뚱아리가 아닙니다. 인식공간에서 일어나는 것인데 이것이 물질을 바탕으로 되어 있는 인식의 정보를 색온이라 합니다. 그러면 색성향미촉이 사대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것을 색온으로 볼 수 있어요. 그런데 법도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되어 있죠. 그 다음에 안이비설신도 색을 봤다라고 해서 되어 있는 정보거든요. 색을 바탕으로 되어 있다고 봐야 되요. 그래서 안이비설신의 내입처에서 저장이 되어 있는 정보들도 색온이에요. 내입처와 외입처중에서 무엇을 더 강조했다? 외입처가 더 강조가 되 있다.

 

(범일스님, 니까야 제23 일체법 5)

 

 

 

 

Salayatana

 

 

범일스님이 강조한 것은 색온이 몸뚱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색온이 물질덩어리가 아님을 말한다. 색온은 “물질을 바탕으로 되어 있는 인식의 정보”라 하였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말이다. 이제까지 알고 있었던 상식을 깨는 것이기 때문이다.

 

범일스님에 따르면 십이처에 대하여 모두 인식된 것들이라 하였다. 특히 색온에 대하여 외입처가 더 강조 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새로운 이론에 대하여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이에 대하여 색온은 몸뚱아리가 아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십이처에서 이해해야(2015-12-02)’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그런데 최근 도향스님은 이를 비판하였다.

 

도향스님 비판하기를

 

도향스님의 수트라여시아독 비판글은 원담스님이 운영하는 카페 마음의 호숫가에서에 실려 있다. 모두 세 편의 글이 실려 있는데  첫 번째 글이 도향스님의 범일스님의 제일 착각 비판 -<수트라 여시아독, 범일스님 저>이고, 두 번째 글이 도향스님의 범일스님의 번째 착각에 대한 비판-1이고, 세 번째 글이 도향스님의 범일스님의 번째 착각에 대한 비판-2이다. 원담스님에 따르면 도향스님은 화엄사 세등선원에서 동안거 기간 중에 만난 도반이라 하였다.

 

도향스님은 범일스님이 지은 수트라여시아독을 혹독하게 비판하였다. 먼저 첫 번째 글을 보면 그렇다면 그대가 말하는 과거의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바른 인식이라는 말이 되고 과거를 인식해야 한다는 말이 되는데 과연 과거의 대상이 현재로 인식 될 수 있겠는가?”라고 묻고 있다. 이는 과거의 모습을 현재로 착각한다고 보는 수트라내용에 대한 것이다.

 

범일스님의 착각론에 대하여 도향스님은 어떠한 대상도 우리가 인식할 때는 현재로만 인식이 되는 것이지 어떻게 과거의 대상을 현재로 인식할 수가 있겠나? 그대가 인식해야 한다고 말하는 과거의 대상도 인식 할 수가 없고 지금 인식 하고 있는 대상이 과거의 대상이라고 말하는 것도 바르지가 않다.”라고 하였다. 과거의 대상을 인식할 수 없다는 말이다. 만일 과거의 대상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인식해야 하는 과거의 대상 또한 과거의 대상이 된다라는 것이다. 왜 그럴까? 과거는 지나간 것이고 인식은 항상 현재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모두가 인식의 영역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

 

도향스님에 따르면 이미 지나간 과거의 대상을 인식하는 것에 대하여 착각이라 한 것은 잘못이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우리의 지금의 인식이 맞고 다만 이 인식이 인식을 할 때 바깥 대경이 바깥에 있는 것으로 인식이 되는데 이 바깥 대경이 과연 우리가 생각 하듯이 밖에 있겠는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있는지를 논해야 하고 착각과 무착각은 대경이 독립적 존재로 인식이 되는지, 아니면 연기의 모습으로 인식이 되는 지를 논해야지, 그대가 시간이 지난 과거의 대경을 인식한다는 등으로 착각이라 말하는 것은 스스로 연기를 부정하게 되는 것이 된다. ? 그대가 말하는 바른 인식 속에는 모든 존재가 부정되기에 그런 것이다.

 

 

(도향스님의 범일스님의 제일 착각 비판 -<수트라 여시아독, 범일스님 저>)

 

 

모든 것을 인식된 것으로 보았을 때 그것은 다름 아닌 일체유심조가 될 것이다. 우리 몸이 색온으로서 사대와 그 파생된 물질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범일스님은 색온이 뭐냐? 몸뚱아리가 아닙니다. 인식공간에서 일어나는 것인데 이것이 물질을 바탕으로 되어 있는 인식의 정보를 색온이라 합니다.”라 하였다.

 

파생물질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내적인 물질적 감각능력과 거기에 대응하는 형상, 소리, 냄새, , 감촉의 외적인 대상을 말한다. 그런데 이를 육내입처와 육외입처라 하여 인식된 것으로 간주 하였을 때 우리 몸은 더 이상 몸뚱아리가 아닐 것이다.

 

이와 같은 범일스님의 견해에 대하여 도향스님은 모두가 인식의 영역이라고 말하는 말은 잘못이라고 분명하게 지적하였다. 설령 인식된 것이라 하더라도 거기에는 연기의 모습을 볼 수 없다고 하였다.

 

범일스님의 착각론에 대하여

 

도향스님은 범일스님의 책 수트라여시아독을 비판하면서 그대라는 표현을 하였다. 사전에 따르면 그대라는 말은 벗이나 아랫사람을 대접하여 점잖게 높여 가리키는 말이다. 주로 글에서 쓰여, 애인이나 어떤 대상을 친근하게 가리키는 말이라 하였다. 가까운 사이에 특히 아랫사람을 친근하게 대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같은 도반으로서 애정어린 비판이라 볼 수 있다.

 

도향스님의 두 번째 비판글은 범일스님의 두 번째 착각에 대한 것이다. 이는 바깥 대경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나의 인식 안에 있는 것이라는 주장을 비판한 것이다. 범일스님에 따르면 이미 지나간 과거의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첫 번째 착각이라 하였고, 인식 안에 있는 대경이 나의 바깥에 있는 것으로 인식 되는 것이 두 번째 착각이라 하였다.

 

도향스님은 두 번째 착각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형상이나 소리도 육외입처라 하여 인식된 것이라 보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도향스님은 그대가 말하는 바깥대경이 그대 인식의 안에 있는 것이라면 그대 속인 안이 밖인가?”라고 묻는다. 도향스님은 왜 이렇게 물었을까? 이는 밖이라는 말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혹평한다.

 

 

그렇다면 안이 밖이 되고 밖도 안이 되어 밖의 밖은 없어지게 된다. 밖의 밖이 없어지면 그대가 말하는 안도 없어지리라. ? 밖이 없기 때문이다. 밖이 없다면 안도 있을 수가 없다. 그대가 이 말을 이해 못한다면 그대는 유, 무의 개념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 이리라.”

 

(도향스님의 범일스님의 번째 착각에 대한 비판-1)

 

 

도향스님은 범일스님의 두 번째 착각론에 대한 모순을 지적하고 있다. 만일 지금 여기에서 모든 것이 인식의 현현이라면 밖의 대경은 없어지게 됨을 말한다. 그래서 그대가 말하는 밖은 없는 것이 되고 오직 식만 남게 된다.”라 하였다.

 

단견과 상견

 

모든 것에 대하여 마음의 작용이라 보는 것이 일체유심조이다. 또 오로지 마음 뿐이라 유식이라 한다. 이렇게 식만 남게 되었을 때 연기의 법칙은 작용하지 않는다. 식만 남게 되었을 때 밖의 것은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도향스님은 외경의 입장에서 무변(無邊, 없다는 단견)에 떨어지게 된다라 하였다. 범일스님의 착각론이 단멸론에 가까운 것을 말한다.

 

현상에 대하여 오로지 인식된 것으로만 보았을 때 단견에 떨어질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연기법과 맞지 않는 것이다. 왜 그럴까? 밖의 대경은 밖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래서 도향스님은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 밖의 대경은 그대가 오경, 법경과 의식의 관계에서 드러난 것이라고 말했기에 안인 의식만이 남게 되고 그렇다면 그 의식은 찾을 수 있어야 한다. ? 그것이 일체를 드러나게 하기에 그렇다. 그렇게 된다면 그대는 다시 또 유변(有邊, 있다는 단견)에 떨어지게 된다. ? 인식의 주체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도향스님의 범일스님의 번째 착각에 대한 비판-1)

 

 

이번에는 상견에 대한 것이다. 만일 인식된 것만이 있다면 그 인식한 것을 아는 놈이 있어야 할 것이다. 아는 것을 아는 마음, 또는 근원을 상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아는 것을 아는 마음 또는 궁극적 실재 또는 존재의 근원이 있다고 가정하면 이는 유변에 떨어지는 것이라 하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상견이다.

 

연기법이 적용되지 않았을 때

 

밖의 대상 즉, 형상, 소리, 냄새, , 감촉 마저 육외입처라 하여 인식된 것으로 보았을 때 이는 일체유심조이고 유식이다. 이렇게 오로지 인식된 세상은 마치 꿈속의 세상과도 같다. 꿈속에서 원인과 조건과 결과라는 연기법이 적용되지 않듯이, 오로지 식만 있는 세상 역시 연기법이 적용되지 않을 것이다. 연기법이 적용되지 않으면 두 가지 중의 하나가 되기 쉽다. 그것은 단멸론과 상주론이다. 이에 대하여 도향스님은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이 인식의 주체는 없다고 말하겠는가? 만약 없다고 말한다면 그대는 완전 단멸 논자이리라. 그렇기에 있게 된다. 그렇다면 또 다시 한 번 더 허물을 지어서 있다는 유변에 자연스레 떨어지고 나아가서 그대는 유부의 유변에 떨어진 모습을 지나서 있다는 유변과 없다는 무변 이 양변에 모두 떨어지는 자가 된다. 십이처 등으로 피곤하게 아무리 설명을 해도 이 상황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도향스님의 범일스님의 번째 착각에 대한 비판-1)

 

 

세상을 오로지 인식된 것으로 만 보았을 때 인식의 주체가 없다면 단멸론자가 될 것이라 하였다. 만일 인식하는 것을 아는 놈이 있다고 본다면 상주론자가 될 것이다. 단멸론과 상주론은 사견으로서 연기법으로 논파 된다.

 

그래도 그대가 계속 우긴다면

 

그래서일까 도향스님은 십이처 등으로 피곤하게 아무리 설명을 해도 이 상황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라며 강하게 압박한다. 더구나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그대가 계속 우긴다면 이렇게 묻겠다. 세상의 수많은 범죄와 범죄자가 그대 인식에서 드러난 것이라면 경찰이 도둑놈을 잡으러 밖으로 나갈 필요가 어디 있나? 그대 인식 안에서 해결하면 되지. 수많은 번뇌를 그대 인식에서 제거하면 모두가 평화로워 지리라. 그렇기에 두 번째 착각이 어떻고 운운하면서 바깥 대경이 인식의 영역이기에 안에 있다는 등으로 말하지 마라 그렇게 말하면 여래를 비방하게 된다. 왜 이겠나?”

 

(도향스님의 범일스님의 번째 착각에 대한 비판-1)

 

 

색온도 인식된 것이라 보고 육경에 대하여 육외입처라 하여 역시 인식된 것이라 보았을 때 오로지 식만 있게 된다. 마치 꿈꾸는 자가 꿈을 꾸는 것과 같을 것이다. 꿈속에서는 끔찍한 범죄를 저질러도 처벌받지 않듯이 오로지 식만 있다고 하였을 때 어떻게 될까? 연기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어떤 행위도 서슴없이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경우 여래를 비방하게 된다라 하였다. 이는 연기법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공상해 낸 것이 십이입처

 

도향스님의 두 편의 글을 읽어 보았다. 그것은 착각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오로지 인식된 것으로만 보았을 때 연기의 법칙을 어긋나기 때문에 부처님 가르침에 맞지 않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범일스님은 왜 색온에 대하여 인식된 것이라 보고, 또 육경에 대하여 육외입처라 하여 역시 인식된 것이라 보았을까? 이에 대하여 도향스님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지금 그대는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연기법이 마치 세상에 없는 법을 아신 것처럼 말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법은 세상에 있는 법을 아신 것이지 세상에 없는 것을 만드신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세상에 있는 무엇을 아셨겠는가?

그것은 바로 그대가 말하는 십이입처가 아닌 세상에 본래 그대로 있는 육경과 육근, 십이처와 여기에서 촉이 발생해서 생긴 십팔계 이것 밖에 없다는 것을 아신 것이다.

 

(도향스님의 범일스님의 번째 착각에 대한 비판-2)

 

 

부처님은 연기법으로 깨달음을 이루셨다. 그런 연기법은 부처님이 만든 것이 아니다. 부처가 출현하든 출현하지 않든 자연의 이법으로서 있었던 것이다.  이는 “여래가 출현하거나 여래가 출현하지 않거나 그 세계는 정해져 있으며 원리로서 확립되어 있으며” (S12:20) 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십이처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부처가 출현하지 않든 원리로서 확정되어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연기법을 만들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십이처 역시 만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육입처론을 보면 마치 부처님이기 때문에 특별한 것을 발견한 것처럼 또는 부처님이 만든 것으로 오해 할 수 있다. 특히 바깥 대상, 즉 형상, 소리, , 냄새, 감촉에 대하여 육외입처라 하여 인식된 것으로 보는 것이 그것이다.

 

육입처에 대하여 인식론적으로 보는 것은 연기법에 어긋난다. 이에 대하여 도향스님은 십이처는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이기에 설마 부처님이 이렇게 흔한 것을 아셨을까?” 라고 생각해서 공상해 낸 것이 십이입처라 하였다. 그러나 부처님은 원리로서 확립되어 있는 법을 바르게 아신 것 뿐이라 하였다.

 

마치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도향스님에 따르면 십이입처는 공상해 낸 것이라 하였다. 다름 아닌 창작물이다. 분명한 사실은 부처님이 십이입처에 대하여 말씀 하신 적이 없다는 것이다. 바깥 대상, 즉 형상, 소리, , 냄새, 감촉에 대하여 육외입처라 하여 인식된 것이라 보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마치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호들갑 떠는 듯 한 강연을 보았다. 이중표교수의 강연이 그것이다. 이에 대하여 공부가 안되면 그곳을 떠나라, 이중표교수의 불교강좌를 듣고(2016-01-03)’라는 제목의 글에서 비판한 바 있다.

 

이중표 교수의 불교관은 독특하다. 십이연기에서 ‘생(jati)’에 대한 것을 보면, 새로운 태어남, 즉 육체적으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남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삼세양중인과에 따른 윤회설은 불경 어디에도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럴 듯 하니까 여러분 들이 속아”라며 삼세양중인과를 강력하게 비판한다.

 

또 일체에 대하여 ‘인식작용’으로 보고 있다. 이런 인식작용은 오온에 있어서 물질도 인식되어진 것으로 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존재가 물질이냐 정신이냐 이런 식으로 세상을 봤던 거에요.”라 한다. 이는 “왜냐하면 세계라는 것은 여러분의 마음이 투사 된 것이니까”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중표 교수는 경을 보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부처님의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공사상과 유식론으로 초기불교를 재해석 하였다. 그러다 보니 부처님이 특별한 것을 발견한 것처럼 설명한다. 그런 특별한 가르침이 후대로 내려 갈수록 잊혀졌다고 한다.

 

이중표 교수에 따르면 자신이 심오한 부처님의 숨겨진 가르침을 발견 한 것처럼 말하였다. 초기경전을 자신의 방식으로 재해석 한 것이다. 이렇게 재해석된 것이 독특한 오온, 십이처, 십팔계이론이다.

 

25년만의 반향이라고

 

이중표교수의 이론은 범일스님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는 수트라 출간기념강연회에서 이중표교수가 초청연사로 등장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출간회에서 이중표 교수는 이렇게 말하였다.

 

 

범일스님의 수트라의 출간을 가장 기뻐하는 사람가운데 한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이 책을 저 보다 더 기쁘게 맞이 한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책은 제가 아함의 중도체계라는 박사학위 논문을 25년만에 처음으로 저에게 돌아온 반향입니다.”

 

(이중표교수, 범일스님 니까야 '여시아독 수트라' 출판기념회(제1부))

 

 

이중표교수는 서평에서 ‘25년만의 반향이라 하였다. 25년전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이 수트라의 출간으로 결실을 맺었기 때문이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이중표교수의 논문과 사상이 범일스님에게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십이입처에 대한 것이 그렇다. 이중표교수의 강연이나 범일스님의 강연을 들어보면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외도의 사상에 가깝다

 

도향스님은 범일스님의 수트라에 대하여 혹독하게 비판하였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외도의 사상에 가깝다고 하였다. 이에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지금 그대의 말하는 방식을 보면 그대는 외도와 불교도의 정확한 견해의 분기점을 짐작 못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왜냐? 지금 그대가 주장하는 것이 그렇게 가리키고 있다.

 

여러 외도의 사상이 있지만 여기서는 다 설명 할 수가 없고, 간단히 말하면 외도와 불교도의 분기점은 조물주가 있는가, 없는가와 오온 이외의 아가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차이이다. 다시 말하면 십이처, 십팔계 외에 다른 무엇이 있다, 아니면 없다는 말로 정리할 수가 있다.

 

외도의 견해를 가진 자들은 오온을 부리고 끌고 다니는 것이 오온 밖에 있는데 그것이 참나, 진아, 자성, 즉 아트만 등이라고 말한다. 아니면 이 말을 돌려 신이 있다, 창조한 누군가가 있다고 한다. 중국과 우리나라에 전래된 선종의 승려들도 이렇게 말하는 자들이 많다.

 

그들은 거듭거듭 오온 이외 무엇을 상정한다. 육근, 육경, 십이처 이외에 또 다른 무엇을 상정하는 이들이 외도의 견해를 가진 자들에 다름이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런 것들을 예견하시고 독립적일 수 있는 그러한 없다는 것과 나아가서 오온의 안이나 밖에서조차 어떤 얻을 수 있는 요소와, 이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아가 없다는 것을 아셨다.

 

그렇기에 다만 십이처, 십팔계를 말씀하신 것이고 그렇기에 有部유부는 말할 것도 없고, 식의 自證分자증분을 주장하는 경량부나 아뢰야식을 주장하는 유식학파와 勝義승의로 있다고 주장하거나 그대와 같이 십이처를 상정하는 등을 구경에는 다 논파 하신 것이다.

 

그렇기에 그대가 말했듯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러한 십이처들이 모두가 다 아는 보편적인 것이기에 설마 이렇게 흔한 것을 말씀하셨을까라고 생각하는 뒤집힌 견해를 가지면 안 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십이처 이외 또 다른 무엇을 상정해서 말하면 안 된다. 이것 밖에 없기 때문이다.”

 

(도향스님의 범일스님의 번째 착각에 대한 비판-2)

 

 

도향스님은 이것 밖에 없다라 하였다. 마치 요즘 유튜브에서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것뿐이야, 이것뿐, 다른 건 없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도향스님이 말한 이것뿐은 부처님 가르침에 바탕을 둔 것이다. 초기경전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공상한 것이 아님을 말한다.

 

사람들은 십이처에 대하여 부처님이 설마 이렇게 흔한 것을 말씀하셨을까?”라며 의문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안비설신의를 육내입처라 하고, 색성향미촉법을 육외입처라 하여 모두 인식된 것이라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론은 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과도한 상상력에 따른 것이다. 한마디로 외도의 사상에 가까운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구분교의 형태로

 

부처님의 깨달음 그 자체는 완전한 것이다. 더하고 뺄 것도 없다. 부처님이 그 날 밤 선언한 대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인 것이다. 그래서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밤부터, 잔여 없는 열반에 세계로 완전한 열반에 든 밤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대화하고 말하고 설한 모든 것이 이와 같고, 다른 것과 같지 않다. 그러므로 여래라 한다.”(It121) 라고 말씀 하셨다.

 

부처님은 처음 깨달음을 이룬 밤부터 열반에 이르기 까지 변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최초로 깨달음을 증득 한 후 젊었을 때 설한 것이 다르고 노년이 되어 설한 것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만일 설법내용이 다르다면 첫날 밤 깨달은 것은 완전한 깨달음이 될 수 없다. 만일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가 완전하지 않은 것이라면 선포하지 않았을 것이다. 부처님의 성격상 이를 허용할 리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유에 사유하고 검증에 검증을 거쳐 선포하였다. 이런 과정이 초전법륜경에서 ‘삼전십이행상’으로 나타난다.

 

부처님은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완전한 깨달음, 그리고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이루었다. 그래서 깨달은 밤부터 열반에 든 45년 동안 한결 같이 진리를 펼치셨다. 그래서 “그 사이에 대화하고 말하고 설한 모든 것이 이와 같고, 다른 것과 같지 않다. (It121) 라 하였다. 이는 구분교(九分敎)’로 나타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즉, , 응송 , 수기 , 게송 , 감흥어 , 여시어 , 전생담 , 미증유법 등 아홉 가지 부처님의 가르침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런 가르침은 잘 전승되어 왔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에 대하여 주석에 따르면의미상으로 형식상으로 비난의 여지가 없고, 모자라거나 넘치는 것이 없다. 또한 일체의 형태를 갖추고, 탐욕의 광기, 성냄의 광기, 어리석음의 광기를 쳐 부수고, 털끝만큼도 잘못도 없다. 그래서 설해진 목적과 완전히 일치하고, 그것과 일치하기 때문에 다른 것이 아니다.”라 하였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깨달음을 이룬 그날 밤과 열반에 든 밤에 이르기 까지 더하고 뺄 것이 없는 완전한 가르침이다. 그럼에도 후대 논사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덜 완성된 것이라 하여 새로운 사상을 계속 만들어 내었다. 그 결과 본래 가르침과 동떨어진 이야기가 난무 하고 있다. 모든 것을 인식된 것으로 보는 십이입처도 그런 것 중의 하나일 것이다.

 

 

2016-02-2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