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성향이나 기질은 바뀔 수 있을까?

담마다사 이병욱 2016. 3. 5. 13:47

 

성향이나 기질은 바뀔 수 있을까?

 

 

바탕에 있어서는

 

사람의 얼굴은 한번 태어나면 바뀌지 않는다. 세월에 따라 변해 가지만 기본 틀은 유지 하고 있다. 성형하였다고 하더라도 기본구조를 바꿀 수 없다. 사람의 성향 역시 한번 태어나면 여간해서 바뀌지 않는다. 개과천선했다고 하지만 경계에 부딪치면 본성이 나오는 것도 바뀌지 않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얼굴과 성향은 근본에 있어서는 바뀌지 않는다. 세월에 따라 조금씩 변화를 볼 수 있지만 바탕에 있어서는 그대로이다. 이는 동물도 마찬가지이다. 한번 개로 태어나면 개로서 일생을 살아야 한다. 도중에 개구리가 되거나 사람이 되는 일은 절대로 발생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한번 사람으로 태어나면 사람으로 살아 간다. 도중에 개나 개구리로 바뀌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살아 가면서 개처럼 산다면 죽어서 개의 과보를 받을 수 있다.

 

눈먼 자로 태어난 자는 도중에 눈이 좋아 질 수 없다. 죽을 때 까지 눈먼 자로 살아야 한다. 정신이상자로 태어난 자는 도중에 정상으로 돌아 올 수 없다. 죽을 때까지 정신이상자로 살아야 한다. 지능이 높게 태어난 자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높은 지능을 유지하며 죽을 때까지 살아 간다. 한번 약골로 태어나면 도중에 강골이 되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 약골로 살아 가게 된다. 한번 개구리로 태어나면 죽을 때까지 개구리의 모습과 습성대로 살아 가듯이, 한번 이 몸과 성향으로 태어난 자는 죽을 때까지 연속성이 유지된다. 이를 바왕가(Bhavaga)’로 설명할 수 있다.

 

개구리 만두까(maṇḍūka)이야기

 

개구리 만두까(maṇḍūka)이야기가 있다. 전생에 개구리어었던 천신에 대한 이야기이다. 청정도론에 이렇게 실려 있다.

 

 

세존께서 각가라 강변에서 짬빠 시의 주민들에게 법을 설하실 때 개구리 한 마리가 세존의목소리에서 표상을 취했다. 한 목동이 막대기에 기댄 채 그의 머리를 눌리면서 서 있었다.

 

그는 죽어 곧 바로 삼십삼천의 12유순이나 되는 황금 궁전에 태어났다. 마치 잠에서 깨어난 듯 그곳에서 천녀의 무리에 둘러싸인 자신을 발견하고‘오, 참으로 내가 여기 태어나다니! 내가 어떤 업을 지었을까.’하고 살펴보다가 세존의 목소리에 표상을 취한 것 말고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는 곧바로 궁전과 함께 세존께 가서 세존의 발아래 절을 올렸다. (Vism.51)

 

 

부처님이 설법할 때 한 개구리가 부처님의 음성에 반하였는지 아름다운 표상을 취하고 있었다고 했다. 부처님의 설법이 축생에게까지 감동을 준 모양이다. 그런데 목동의 막대기에 짓눌려 죽고 만 것이다. 개구리로서 일생이 끝난 것이다.

 

그런데 개구리는 죽자마자 천상의 신으로 태어났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놀란 개구리는 잠에서 깨어난 듯 그곳에서 천녀의 무리에 둘러싸인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대체 개구리는 어떤 업을 지어서 천신으로 태어나게 된 것일까? 한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개구리는 부처님의 목소리에 표상을 취한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한것이 없다. 바로 그것이다. 비록 축생이었지만 목동의 막대기에 짓눌려 죽는 순간 부처님의 아름다운 목소리에 표상을 취하여 청정해진 것이다. 그 청정한 표상을 대상으로 재생연결식이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이전의 개구리는 다음 생에서는 죽을 때까지 천신으로 복과 수명을 누리며 살아 갔다.

 

한번 키가 작은 사람은 도중에 키가 커지는 일이 없고, 마찬가지로 키가 큰 사람이 도중에 작아지는 경우는 없다. 노화에 따라 축소 되는 경우는 있지만 큰 틀에 있어서는 변화가 없다. 한번 총명하게 태어난 자는 늙어 죽을 때까지 총명함을 유지 한다. 특별한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한 도중에 바보처럼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 사람을 그 사람이게 하는 일관된 것이 있음을 말한다. 얼굴모습이나 성향 등 죽을 때까지 그 사람의 정체성을 유지시켜 주는 것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개는 개의 모습으로, 개구리는 개구리의 모습으로, 사람은 사람의 모습으로 죽을 때까지 정체성을 유지 시켜 주는 것을 아비담마에서는 바왕가라 한다.

 

재생연결식

 

현재 지금 이 모습과 성향이 유지 되고 있는 것은 태어나는 순간 결정된다. 늙어 죽을 때까지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 시켜 주는 것을 바왕가라 한다. 보통 바왕가의 마음이라 하는데 이는 재생연결식에서부터 시작 된다. 이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 빠띳짜사뭅빠다(12연기)’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무명을 원인으로 상카라[]가 생기고, 다시 상카라는 식()의 원인이 됩니다. 전생의 선업이나 불선업을 원인으로 하여, 새로운 생에서 재생연결식55을 시작으로 하는 식()의 흐름이 생깁니다.

 

예를 들면 악행은 네 가지 낮은 세계에 떨어지게 합니다. 재생연결식이 일어나고 난 다음에 바왕가의 마음(bhavaga-citta)56이라고 하는 식()의 흐름이 일어납니다. 이 바왕가의 마음이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감촉하고, 생각하는 여섯 가지 식()이 일어나지 않을 때 끊임없이 작용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바왕가는 잠들어 있을 때의 잠재의식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죽을 때도 이 잠재의식을 가지고 가는데 이를 죽음의 마음(cuti-citta)57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재생연결식, 바왕가, 죽음의 마음은 전생의 업에서 기인한 마음을 나타냅니다.

 

즐겁지 않은 안식(眼識)과 이식(耳識)과 같은 다섯 가지 괴로운 감각대상과 결부된 다섯 가지 마음은 불선업에 기인하고 (1) 받아들이는 마음(sampaicchana-citta)58 (2) 조사하는 마음(santīraa-citta)도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apuññā-abhisakhāra)에 기인하는 마음에는 모두 일곱 가지가 있습니다. 흔들림 없는 행위(aneñja-abhisakhāra)에는 네 가지 무색계 선법(arūpa-kusala-dhamma)이 있기 때문에 그 결과로 네 가지 무색계에서 초기에는 재생연결식, 중간에는 바왕가, 존재의 마지막 순간에는 죽음의 마음의 형태로 무색계 과보의 마음59이 생깁니다.

 

마찬가지로 다섯 가지 색계 선법(rūpa-kusala-dhamma)으로 인하여 색계 범천계에서 다섯 가지 색계과보의 마음(rūpa-vipāka-citta)이 생깁니다. 그리고 욕계의 여덟 가지 선업에 상응하는 여덟 가지 큰 과보의 마음(mahā-vipāka-citta)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계와 욕계천상의 재생연결식, 바왕가, 죽음의 마음을 이룹니다. 그것은 또한 즐거운 감각대상을 등록(tadārammaa)하는 기능도 합니다.

 

또한 욕계의 선업으로 인하여, 다섯 가지 즐거운 감각대상과 연관된 다섯 가지 종류의 마음, 받아들이는 마음, 기쁨이 함께하는 조사하는 마음, 평온이 함께하는 조사하는 마음, 모두 합쳐서 여덟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과보의 마음(vipāka-citta)에는 32가지, 즉 불선한 과보의 마음(akusala-vipāka-citta) 7가지, 무색계 과보의 마음(arūpa-vipāka-citta) 4가지, 색계 과보의 마음(rūpa-vipāka-citta) 5가지, 선한 과보의 마음(kusala-vipāka-citta) 16가지가 있습니다. 이 모든 32가지 과보의 마음은 상카라(sakhāra)의 결과입니다.

 

(마하시사야도, 빠띳짜사뭅빠다(12연기), 15. 상카라[]를 조건으로 식()이 일어난다)

 

 

십이연기에서 식에 대한 설명이다. 여기서 식은 재생연결로서의 식을 말한다. 법문에 바왕가의 마음(bhavaga-citta)’라는 말이 나온다. 이를 결생식 또는 재생연결식이라 한다. 한 존재의 새로운 생이 시작 되는 최초의 마음이다.

 

바왕가의 마음(bhavaga-citta)이란?

 

그런데 바왕가의 마음은 한 존재의 최초의 마음이자 잠재된 마음이고 한존재가 동시에 임종시에 일어나는 죽음의 마음이다. 그래서 바왕가의 마음은 한존재의 일생의 마음과 같다. 이와 같은 바왕가의 마음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바왕가의 마음(bhavaga-citta)은 한 개체의 존재 영속성을 유지시키는 마음, 즉 존재지속심이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life-continuum으로 옮기고 있고 중국에서 유분(有分), 유분심(有分心), 유분식(有分識)으로 한역하였다. 우리의 인식과정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아주 미세하고 수동적인 마음으로 서양 심리학의 용어로는 잠재의식이라 할 수 있다. 의식이 없어 보이는 깊은 잠속이나 기절했을 때도 이 바왕가는 흐르고 있다. 그리고 이 바왕가는 항상 강이나 흐름에 비유되며 바왕가의 흐름이란 뜻의 바왕가소따(bhavaga-sota), 또는 바왕가산따띠(bhavaga-santati)란 말이 주석서에 많이 나온다. 모든 마음은 대상 없이 일어나지 않듯이 이 바왕가의 마음(bhavaga-citta)도 임종직전 나타나는 업(kamma)이나 업의 표상(kamma-nimitta) 또는 태어날 곳의 표상(jāti-nimitta)중의 하나를 그 대상으로 가지고 흘러간다.

 

(마하시사야도, 빠띳짜사뭅빠다(12연기) 56번 각주)

 

 

Nimitta

 

 

 

바왕가의 마음에 대하여 개체의 존재 영속성을 유지시키는 마음이라 하였다. 개로 태어났다면 개로서 존재를 지속시켜 주는 마음이다. 한번 개구리로 태어났으면 죽을 때까지 개구리로 사는 것도 이 바왕가의 마음으로 본다. 사람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지금 이 모습과 이 성향이 죽을 때까지 유지되는 것은 바왕가의 마음으로 본다.

 

(kamma), 업의 표상(kamma-nimitta), 태어날 곳의 표상(jāti-nimitta)

 

바왕가의 마음은 십이연기에서 식으로 시작된다. 이전 생에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었던 행위에 대한 과보가 한 존재의 내생을 결정짓는다. 이는 업의 작용이다. 지옥이든 천상이든 자신이 지은 행위에 대한 과보가 다음 생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명을 원인으로 상카라[]가 생기고, 다시 상카라는 식()의 원인이 됩니다. 전생의 선업이나 불선업을 원인으로 하여, 새로운 생에서 재생연결식을 시작으로 하는 식()의 흐름이 생깁니다.”라 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식은 재생연결식이다.

 

재생연결식은 조건 발생하는 식이다. 어떤 조건으로 발생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세 가지로 들고 있다. 그것은 (kamma)이나 업의 표상(kamma-nimitta) 또는 태어날 곳의 표상(jāti-nimitta)’이다. 이 세 가지 중의 하나를 그 대상으로 하여 재생연결식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재생연결식이 한 존재의 최초의 마음이라는 사실이다. 이 마음은 한 존재의 모습과 성향을 결정한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유지된다. 이렇게 최초의 마음과 죽음의 마음은 동일하다. 그 중간에 삶이 있다. 그래서 개는 개의 모습으로, 개구리는 개구리의 모습으로, 사람은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 간다.

 

도중에 모습이 바뀌는 일은 없다. 죽어서 다른 존재로 태어나지 않는 한 이 모습과 이 성향을 그대로 유지한다. 그래서 바왕가의 마음에 대하여 한 개체의 존재 영속성을 유지시키는 마음또는 존재지속심이라 하는 것이다.

 

인터럽트 걸린 것처럼

 

한존재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이 바왕가라 하였다. 일생동안 유지 되는 마음이다. 그러나 눈, 귀 등 오감과 생각 등으로 인하여 바왕가의 마음은 일시적으로 중단 된다. 마치 CPU에서 인터럽트가 걸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인터럽트가 걸리면 먼저 처리하게 되어 있다. 처리가 되고 나면 CPU마치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프로그램 된 대로 정해진 루틴을 돈다. 그러다  제품의 키를 눌렀을 때 작동하게 된다. 인터럽트신호로 받아 들이고 이를 처리하는 것이다.

 

CPU는 메인 프로그램을 돌고, 인터럽트는 서브프로그램을 돈다. 인터럽트가 걸리면 서브루틴이 실행된다. 서브루틴이 끝나면 다시 메인루틴은 계속 돌아간다. 바왕가와 육식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마치 바왕가의 마음이 CPU의 메인루틴처럼 보이고, 육식이 인터럽트가 걸린 서브루틴처럼 보인다.

 

살아가면서 어떤 강한 대상을 보았다면 그 대상을 먼저 처리하게 된다. 보는 것, 냄새 맡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생각이 일어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보는 것, 듣는 것 등이 일어나지 않을 때 마지 잠을 자는 것처럼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때 우리의 마음은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 간다. 그것이 한존재를 지속시키는 바왕가의 마음이다.

 

인식과정 17단계

 

바왕가의 마음을 잠재의식이라고도 한다. 마치 잠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시각 등에 의하여 동요가 일어났을 때의 과정에 대하여 17단계 인식과정으로 설명한다. 도표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도표 9> 눈의 문[眼門]에서의 인식과정(매우 큰 대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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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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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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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왕가의흐름

지나간바왕가

바왕가의동요

바왕가끊어짐

오문전향

안식

받아들임

조사

결정

← 자와나 →

바왕가의 흐름

 

* []· 코[]· 혀[]· 몸[]의 문에서의 인식과정도 이와 동일

 

(마하시사야도, 빠띳짜사뭅빠다(12연기) 도표)

 

 

도표를 보면 바왕가의 마음은 재생연결이 일어난 순간부터 임종에 이르기 까지 계속 됨을 알 수 있다. 다만 눈, 귀 등 감각기관을 통하여 대상을 접할 때 동요가 일어나 안식, 이식 등이 생겨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대상이 지나가면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바왕가의 마음, 잠재의식 상태로 되돌아 감을 알 수 있다.

 

축생계가 다양한 것은

 

종종 TV에서 동물의 왕국을 본다. 볼 때 마다 매우 다양한 종이 있음을 알게 된다. 지구촌 곳곳에는 우리가 상상도 하지 못하던 갖가지 생명체가 있다. 심해에는 어떤 생명체가 살고 있는지 아직도 파악되고 있지 않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생명체는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축생계의 생물들처럼 그렇게 다양한 어떠한 다른 종류의 생물도 보지 못하였다. 수행승들이여, 그 축생계의 생물들조차도 마음에 의해서 다양해진 것이다.” (S22.100)

 

 

부처님은 마음을 말씀하셨다. 축생계가 다양한 것은 마음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음에 의해서 다양하게 태어난 것임을 말한다. 이런 논리를 사람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사람의 모습이 서로 다르고 또한 성향이 서로 다른 것은 마음 때문이라 볼 수 있다. 그것은 임종순간에 다시 태어남을 가져 오게 하는 재생연결식이다.

 

다시 태어나는 순간의 마음이 일생을 좌우한다. 이를 바왕가의 마음이라 한다. 한존재의 정체성을 지속시켜 주는 존재지속심이다. 그래서 죽을 때 까지 개는 개로서, 개구리는 개구리로, 사람은 특정한 모습과 성향을 가진 사람으로서 일생을 살아 가는 것이다

 

축생계의 동물들이 다양한 것은 축생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과거에 지은 그들의 업이 다양함을 말한다. 자신이 지은 적합한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났어도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몰라서 개처럼 살았다면 개의 과보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인간으로 살았을 때 알코올중독이나 마약중독으로 일생을 보냈다면 설령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멍청하게 태어날지 모른다. 모두가 자신이 지은 과보를 받는 것이다. 전생에 지은 업의 힘이 무르익으면 자신의 행위에 적합한 종이나 기질로 태어나는 것이다.

 

행실도가 있는데

 

인간으로 태어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당연히 인간으로 태어나기에 적합한 업을 지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월등한 신체적 정신적 조건으로 태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생에서 인간으로 태어나기에 유익한 업을 많이 지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업의 힘으로 태어난 것이다. 잠재적인 업이 무르익었을 때 유익한 과보를 받아 태어나는 것이다. 부모와 자식들이 일반적으로 비슷한 것도 이런 이유가 있는 것이다.

 

만일 이번 생에서 개처럼 살았다면 개로 태어날 해로운 업을 지은 것이다. 그 업이 무르익었을 때 개로 태어나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그런데 한번 개로 태어나면 개로서 일생을 마감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사람으로 태어났어도 귀하거나 천하게 태어날 수 있다. 모두가 마음의 작용에 따른다. 그것은 철저하게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행위에 대한 과보에 따른다.

 

사람의 모습이 각자 다르고 성향이 다른 것은 업의 차별성 때문이다. 이는 부처님이 업이 뭇 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M135) 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이처럼 천자만별의 뭇삶이 발생된 것은 마치 행실도를 보는 것 같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유행화’라는 그림의 그 다양성은 마음에서 생겨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마음은 그 걸작보다도 다양한 것이다.” (S22.100) 라 하였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유행화를 행실도라 한다. 부처님 당시 바라문들이 그들의 가르침을 가르치기 위하여 유행길에 들고 다녔던 그림을 말한다. 그런데 행실도를 보면 매우 다양한 삶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선처와 악처로 그려져 있는데 몽환적 이미지라 한다. 이런 그림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면서 만약 사람들이 이 업을 지으면 이러한 과보를 받고 저런 업을 지으면 저런 과보를 받는다.”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족성(gotrabhū)이 되었을 때

 

사람들을 교화 하기 위해 만든 것이 행실도라 한다. 그런데 부처님에 따르면 마음은 이것 보다 더 환상적이라 하였다. 왜 그럴까? 그림을 그리려면 그려야 할 이미지를 마음이 먼저 그려야 하기 때문이다. 또 그 이미지를 어떻게 구현해야 할지 상상을 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행실도로 지옥과 천상을 그려내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마음에 대하여 마음은 그 걸작보다도 다양한 것이다.” (S22.100)라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을 어떻게 마음을 닦아야 할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반조할 것을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므로 그대들은 반복해서 자신의 마음을 이와 같이 오랜 세월 동안 이 마음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물들어 왔다.’라고 관찰해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마음이 오염되므로 뭇삶이 오염되고 마음이 청정해지는 까닭으로 뭇삶이 청정해진다.”(S22.100)

 

 

부처님은 우리 마음이 오랫동안 오염되어 왔다고 했다. 그것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때문이라 하였다. 그런 오염된 마음은 다양한 존재를 만들어 내었다. 축생의 종이 다양한 것도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다.

 

사람의 성향이나 기질이 다양한 것 역시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다. 마치 행실도를 보는 것처럼 지옥이나 천상에서의 존재는 모두 마음이 만들어낸 행위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 오염된 자는 악처에 떨어지고 인간으로 태어나더라도 천하게 낮은 조건으로 태어나게 된다. 반면 마음이 청정한자는 천상에 태어나고 인간으로 태어나더라도 귀하게 높은 조건으로 태어나게 된다.

 

일생의 마음이라 볼 수 있는 바왕가의 마음은 일생동안 변하지 않는다. 사람의 얼굴이 도중에 바뀌는 일이 없듯이 한번 태어난 사람의 성향과 기질 또한 여간해서는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성향이나 기질이 바뀔 수 있다. 부처님의 족성 또는 종성(gotrabhū)이 되었을 때이다. 성자가 되었을 때 거듭 태어남을 말한다.

 

 

 

2016-03-0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