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어떻게 해야 마음의 장애를 제어할 수 있을까?

담마다사 이병욱 2016. 3. 22. 18:33

 

 

어떻게 해야 마음의 장애를 제어할 수 있을까?

 

 

이른 아침에

 

아침이 되면 정신이 맑다. 잠이라도 잘 잔 날이면 날아 갈 듯이 상쾌하다. 이른 새벽 잠에서 깨었을 때 마치 물이 정화 된 듯 하다. 이럴 때 주변 사람들의 얼굴이 떠 오른다.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조금 가까운 사람들, 그리고 조금이라도 인연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떠 오른다. 자연스럽게 자애의 마음이 일어난다. 그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른 아침에 몸과 마음이 불편할 때가 있다. 이전 날 좋지 않은 일이 있었을 때이다.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럴 경우 격정에 휩쓸리기 쉽다. 모욕이나 무시당했을 때 분노의 감정 같은 것이다. 후회의 감정이 일어 났을 때는 욕망에 휘둘린 것이다. 때로 부끄럽고 창피한 마음이 일어난 것은 불건전한 행위를 하였을 때이다.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이 드러난다. 잠에서 깨었을 때 평온한 마음이라면 대체로 건전한 행위를 하였을 때이다자애의 마음이 일어났다면 마음이 안정되어 있다. 자애의 마음이 일어 났을 때 가까운 사람들뿐만 아니라 먼 사람들, 심지어 모든 존재들이 평안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일어난다. 그러나 격정에 놓여 있을 때 마치 구름이 잔뜩 낀 것 같고 물이 흐린 것 같다.

 

왜 저녁에 일하기 싫을까?

 

봄이 되어서일까 아침에 일찍 일어난다. 정신이 맑을 때 일을 하면 매우 효율적이다. 그래서 주로 오전시간에 집중적으로 일을 한다. 그러나 오후가 되면 효율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마음이 오염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밤이 되면 일을 하기가 힘들다. 마음이 오염될 대로 오염이 되어 일할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럴 경우 차라리 일찍 자는 것이 낫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맑고 산뜻한 정신으로 밀어 붙이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다.

 

해만 넘어가면 일을 하기가 싫어진다. 해가 넘어가고 어두컴컴 해지면 일할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아무리 게으름을 탓해 보지만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같은 어둠이라도 새벽과 저녁은 다르다. 새벽의 어둠은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고 고요하게 한다. 저녁의 어둠은 사람의 마음을 들뜨고 혼란하게 만든다. 왜 그럴까? 새벽의 마음과 저녁의 마음이 다른 것이다. 새벽의 마음은 외부로부터 자극받지 않아 안정되어 있다. 저녁의 마음은 여섯 가지 감각대상으로부터 자극받아 잔뜩 오염되어 있다. 그래서 저녁에 일을 하기 힘들다.

 

다섯 가지 마음의 장애가 있는데

 

눈만 뜨면 늘 자극 받는다. 차라리 눈을 감으면 자극 받을 일이 없을 것이다. 눈을 감는다고 자극이 없을까? 이번에는 귀로 자극 받는다. 보기 싫어도 보아야 하고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눈과 귀를 통하여 자극 받는 것이 거의 대부분이다. 나머지 코와 혀와 몸을 통해서 자극 받는다. 그렇다고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코와 혀와 몸의 접촉을 차단하면 자극 받지 않을까? 이번에는 생각으로 자극 받는다. 생각의 문을 통하여 온갖 것들이 다 떠오르기 때문이다.

 

아침에 눈을 뜨자 마자 자극 받는다. 자극의 절정은 저녁이다. 마치 잔뜩 오염된 물과 같은 마음 상태가 된다.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후회하고 때로는 부끄러워한다. 온갖 부정적 마음의 요소들이 다 드러난다. 아비담마에서 말하는 탐욕, 성냄 등 14가지 해로운 마음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아비담마에서는 우리들의 마음이 52가지 마음의 요소(cetasika)’ 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52가지 중에 아름다운 마음의 요소는 25가지이고, 해로운 마음의 요소는 14가지이다. 나머지 13가지는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것들이다.

 

해로운 마음 14가지 중에 핵심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다섯 가지 마음의 장애라볼 수 있다. 신체에 장애가 있듯이 마음에도 장애가 있는 것이다. 이런 장애를 ‘nīvaraa’라 한다. 영어로 ‘hindrances’이다. 이는 방해, 장애라는 뜻이다.

 

다섯 가지 마음의 장애는 무엇일까? 그것은 감각적 욕망 (kāmacchanda), 악의(byāpāda), 해태와 혼침(thīna-middha), 들뜸과 후회(uddhacca-kukkucca), 회의적 의심(vicikicchā)이다. 이와 같은 마음이 있는 한 집중할 수 없고 또한 진리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런데 이와 같은 다섯 가지 마음의 장애, 즉 오장애는 종종 물의 비유로도 설명된다.

 

 

 

 

오색물감을 풀어 놓은 듯

 

오장애는 마음의 장애를 말한다. 시각장애나 청각장애가 있듯이 마음에도 장애가 있는 것이다. 그런 오장애는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상윳따니까야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비유로 설명 되어 있다. 먼저 감각적 욕망에 대한 것이다.  이를 까맛찬다(kāmacchanda)’라 한다.

 

 

Seyyathāpi brāhmaa, udapatto sasaṭṭho lākhāya vā haliddiyā vā nīlāya vā mañjeṭṭhāya vā, tattha cakkhumā puriso saka mukhanimitta paccavekkhamāno yathābhūta na jāneyya na passeyya.

 

 [세존]

바라문이여, 마치 물그릇이 붉거나 노랗거나 푸르거나 새빨간 색으로 물들었다면 거기서 사람이 눈으로 자신의 얼굴 모습을 관찰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알거나 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Samgarava-쌍가라바의 경, 상윳따니까야 S46:55, 전재성님역)

 

 

감각적 욕망에 대한 비유를 오색물로 비유하였다. 그래서 물그릇이 붉거나 노랗거나 푸르거나 새빨간 색으로 물들었다면(udapatto sasaṭṭho lākhāya vā haliddiyā vā nīlāya vā mañjeṭṭhāya vā)”라 하였다. 형상, 소리 등 다섯가지 감각대상의 갈애에 따른 물의 색깔을 말한다. 마치 세수대야에 오색물감을 풀어 놓은 것과 같다. 이 오색물감은 시각과 형상, 청각과 소리, 후각과 냄새, 미각과 혀, 촉각과 신체에 의해서 일어나는 마음과도 같다. 오욕에 사로 잡혀 있을 때 컬러풀한 오색물감과 같은 것이다.

 

오색물감의 대야에서 얼굴을 비추어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바라문이여, 이와 같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묶이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정복된 마음으로 지내고 이미 생겨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여읨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지 못하면, 그 때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그 때 타인에게 유익한 것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지 못하고, 그 때 양자에게 유익한 것을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알지 못합니다.”(S46:55) 라 했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 묶이면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고, 비추어 볼 수 없어서 장애라 한다. 이런 감각적 욕망은 부정관에 바탕을 둔 첫 번째 선정에서 제어되고 거룩한 길, 즉 아라한이 되어야 완전히 제거 된다고 했다. 주석에 따르면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욕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미세한 물질계(색계)와 비물질계(무색계)에 대한 탐욕을 포함해서 말하는 것이다.

 

뚜껑이 열릴 때

 

두 번째로 악의에 대한 것이다. 이를 빠알리어로 뱌빠다(byāpāda)’라 한다. 영어로는 ‘ill-will’이다. 이를 분노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성냄과 더불어 반드시 소멸해야 할 마음의 오염원이다. 이 분노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물의 비유를 들고 있다.

 

 

Seyyathāpi brāhmaa, udapatto agginā santatto ukkaṭṭhito ussadakajāto, tattha cakkhumā puriso saka mukhanimitta paccavekkhamāno yathābhūta na jāneyya na passeyya.

 

[세존]

바라문이여, 마치 물그릇이 불에 달구어져 끓어오르고 거품을 일으켰다면 거기서 사람이 눈으로 자신의 얼굴 모습을 관찰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알거나 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Samgarava-쌍가라바의 경, 상윳따니까야 S46:55, 전재성님역)

 

 

분노에 대하여 달구어진 물의 비유를 들고 있다. 그래서 물그릇이 불에 달구어져 끓어오르고 거품을 일으켰다면(udapatto agginā santatto ukkaṭṭhito ussadakajāto)”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마치 주전자에 물이 펄펄 끓는 것과 같다. 뚜껑이라도 닫혀 있으면 뚜껑이 들썩들썩 할 줄 모른다. 우리말에 뚜껑 열린다.”라는 말이 있는데 아마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부글부글 끓는 물에서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얼굴을 보기는커녕 언제 분노의 뚜껑이 열릴지 모른다. 부글부글 끓는 마음의 상태가 분노이고 악의이다. 이렇게 분노와 악의에 묵여 있을 때 제대로 보지 못할 것이다. 또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할 것이다. 주석에 따르면 분노는 자애의 바탕을 둔 선정에서 제어되고 돌아 오지 않는 길, 불환자가 되어야 제거된다고 했다.

 

녹조라떼가 되었을 때

 

세 번째로 해태와 혼침이다. 이를 빠알리어로 티나밋다(thīna-middha)’라 한다. 우리말로 나태함과 무기력함이라 볼 수 있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해태는 분발이 없는 특징이 있고, 혼침은 일에 적합하지 못한 특징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해태와 혼침은 게으름, 졸음, 수면, 권태, 하품 등으로 표현된다. 이에 대한 물의 비유는 어떤 것일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Seyyathāpi brāhmaa, udapatto sevālapaakapariyonaddho, tattha cakkhumā puriso saka mukhanimitta paccavekkhamāno yathābhūta na jāneyya, na passeyya.

 

[세존]

바라문이여, 마치 물그릇이 이끼낀 수초로 덮였다면 거기서 사람이 눈으로 자신의 얼굴 모습을 관찰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알거나 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Samgarava-쌍가라바의 경, 상윳따니까야 S46:55, 전재성님역)

 

 

 

게으름과 무기력의 대명사라 볼 수 있는 해태와 혼침에 대하여 이끼낀 물로 비유하였다. 그래서 물그릇이 이끼낀 수초로 덮였다면(udapatto sevālapaakapariyonaddho)”이라 했다. 물그릇에 이끼가 끼였다면 얼굴이 비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마음이 오염되어 있음을 말한다.

 

호수에 이끼가 끼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여름철 녹조류 같은 것이다. 강물이나 호수가 녹조라떼가 되었다면 이는 썩은 물이다. 왜 썩었을까? 고여 있기 때문이다. 흐름이 없이 막혀 있을 때 녹조라떼가 된다. 마음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마음을 계발하지 않고 사띠가 없을 때 게을러 빠지기 쉽다. 게으름은 필연적으로 무기력, 졸음, 수면, 권태, 하품을 가져 오게 한다. 이렇게 해태와 혼침으로 마음이 묶여 있을 때 제대로 보지 못할 것이다. 마치 이끼낀 물에서 얼굴을 비추어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이런 해태와 혼침은 빛에 대한 지각에 의해서 제어되고 돌아오지 않는 길, 즉 불환자가 되어야 제거된다고 했다.

 

일희일비할 때

 

네 번째 들뜸과 후회이다. 이를 빠알리어로 웃닷짜꾹꿋짜(uddhacca-kukkucca)’라 한다. 이는 마음이 심하게 동요하고 있음을 말한다. 어떻게 동요하는 것일까? 부처님은 물의 비유를 들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Seyyathāpi brāhmaa, udapatto vāterito calito bhanto ūmijāto, tattha cakkhumā puriso saka mukhanimitta paccavekkhamāno yathābhūta na jāneyya na passeyya.

 

[세존]

바라문이여, 마치 물그릇이 바람에 흔들리고 소용돌이치고 물결친다면 거기서 사람이 눈으로 자신의 얼굴 모습을 관찰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알거나 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Samgarava-쌍가라바의 경, 상윳따니까야 S46:55, 전재성님역)

 

 

들뜸과 후회는 마음이 요동치는 것을 말한다. 마음이 극히 불안정한 것이다. 쉽게 흥분하고 쉽게 한탄 하는 것이다. 마치 야구장이나 축구장에서 일희일비하는 것 같다. 이와 같은 마음 상태에 대하여 물그릇이 바람에 흔들리고 소용돌이치고 물결친다면(udapatto vāterito calito bhanto ūmijāto)”이라 했다.

 

마음이 극도로 흥분하였을 때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다. 쉽게 분위기에 휩슬려 버리기 때문이다. 지나간 일을 후회하는 사람도 있다. “좀더 잘 했어야 하는데라며 아쉬워한다. 그때 이렇게 했더라면하고 한탄한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다. 그때의 조건과 지금의 조건이 맞지 않음에도 걱정하고, 안절부절하고, 지나치게 세심하고, 양심의 가책을 하고 상심하는 것이다.

 

들뜸과 후회의 마음이 지배 하였을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이다. 마치 소용돌이 치는 강물이나 파도 치는 호수에서 주변 경치가 비치지 않는 것과 같다. 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주석에 따르면 들뜸과 후회는 안온에 의해서 제어된다고 했다. 회환은 돌아 오지 않는 길, 즉 불환자가 되면 제거되고, 들뜸은 거룩한 길, 즉 아라한 되면 제거 된다고 한다.

 

흙탕물처럼

 

마지막으로 회의적 의심이 있다. 이를 위찌낏차(vicikicchā)’라 한다. 마음이 혼란스런 상태를 말한다. 마음이 흔들리고, 결정하지 못하고, 분명하게 파악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마음상태에 대하여 물의 비유는 다음과 같다.

 

 

Seyyathāpi brāhmaa, udapatto āvilo luito kalalībhūto andhakāre nikkhitto. Tattha cakkhumā puriso saka mukhanimitta paccavekkhamāno yathābhūta na jāneyya na passeyya. Evameva kho brāhmaa, yasmi samaye vicikicchāpariyuṭṭhitena cetasā viharati vicikicchāparetena.

 

[세존]

바라문이여, 마치 물그릇이 혼탁하고 혼란스럽고 흙탕물이고 어둠속에 놓여 있다면 거기서 사람이 눈으로 자신의 얼굴 모습을 관찰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알거나 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Samgarava-쌍가라바의 경, 상윳따니까야 S46:55,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회의적 의심에 대하여 흙탕물에 비유하였다. 그래서 물그릇이 혼탁하고 혼란스럽고 흙탕물이고 어둠속에 놓여 있다면(udapatto āvilo luito kalalībhūto andhakāre nikkhitto)”이라 했다. 혼란스런 마음, 어둠 속의 마음임을 말한다.

 

고요한 호수에 돌을 던지면 파란이 일어난다. 바닥을 뒤집으면 흙탕물이 되어 보이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에 한번 의심이 일어나면 걷잡을 수 없다. 의심이 해소 될 때 까지는 어두운 마음이 될 수밖에 없다. 누군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의심한다면 어떤 마음이 들까? 부처님이 윤회를 말씀 하셨음에도 자신의 눈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믿지 않으려 할 것이다. 부처님이 열반을 말씀 하셨음에도 자신이 체험 해 보지 않았다고 하여 마음속으로 의혹을 가질 것이다.

 

의혹이 지배 하였을 때 가르침을 받아 들일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의심에 대하여 회의적 의심이라 한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 구체적으로 연기법에 대한 의심이다. 이런 의심은 결국 부처님에 대한 의심, 가르침에 대한 의심, 상가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진다. 회의적 의심은 원리에 대한 결정의 수용으로 억압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흐름에 드는 길, 즉 예류자가 되면 법에 대한 의심은 사라진다.

 

어떻게 해야 마음의 장애를 제어할 수 있을까?

 

부처님은 마음의 다섯 가지 장애에 대하여 세수대야에 있는 물의 비유로 설명하였다. 감각적 욕망에 대해서는 오욕에 따른 오색물감을 풀어 놓은 듯한 물로, 분노에 대해서는 부글부글 끓는 물로, 해태와 혼침에 대해서는 이끼낀 물로, 들뜸과 후회에 대해서는 소용돌이 치는 물로, 회의적 의심에 대해서는 흙탕물로 비유하였다. 이렇게 오염 되어 있는 물은 자기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없다.

 

어떻게 해야 자신의 오염원을 제어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감각적 욕망은 부정관으로, 분노는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으로, 해태와 혼침은 빛에 대한 지각으로, 들뜸과 후회는 안온으로, 회의적 의심은 원리에 대한 결정의 수용으로 제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상윳따니까 자양분의 경(S46.51)’에 따르면 더욱 더 구체적 가르침이 있다. 그것은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는 것(yoniso sammappadhāna)’ 이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첫째, 감각적 쾌락은 ‘부정의 인상(asubhanimitta)’에 이치에 맞게 주의를 기울이면 극복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부정의 인상은 ‘십부정’의 대상이 되는 것을 말한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부풀어 오른 시체에 대한 지각 등 열 가지를 말한다. 주석에 따르면 부정상 학습, 부정에 대한 수행에 몰두, 감각능력에 대한 감관의 수호, 음식의 양을 아는 것, 좋은 친구를 갖는 것, 적당한 대화를 하는 것이 감각적 쾌락을 포기 하게 만든다고 하였다.

 

둘째, 악의는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에 정신활동을 기울이라 하였다. 성냄이나 악의를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자애의 마음을 개발로 가능함을 말한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자비상의 학습, 자비에 대한 수행에 몰두, 행위에 대한 책임의 관찰, 자주 성찰하는 것, 좋은 친구를 갖는 것, 적당한 대화를 하는 것으로 설명 되어 있다.

 

셋째, 해태와 혼침은 ‘시작의 요소, 노력의 요소, 용맹의 요소’에 대하여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주석에 따르면, 과식을 하지 말 것, 자세를 변화시킬 것, 빛에 대한 자각의 정신활동, 야외에서 지내는 것, 좋은 친구를 갖는 것, 적당한 대화를 하는 것이라 설명되어 있다. 이 중에서 야외에서 지내는 것이 있다. 이는 방에서 지내는 것 보다 더 낫다고 볼 수 있다. 방에서 참선만 하면 졸음으로 인하여 집중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럴 때 야외에 있다면 해태나 혼침은 사라질 것이다.

 

넷째, 들뜸과 후회는 ‘마음의 안정’하는데 주의를 기울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주석에 따르면, 많이 배우는 것, 두루 질문하는 것, 계율에 숙달하는 것, 성숙한 사람을 섬김, 좋은 친구를 갖는 것, 적당한 대화를 하는 것이 흥분과 회한에 효과적이라 하였다.

 

다섯째, 회의적 의심은 ‘착하고 건전한 것과 악하고 불건전한 것, 비난 받아야 할 것과 비난 받을 수 없는 것, 열등한 것과 수승한 것, 어두운 것과 밝은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주석에 따르면, 많이 배우는 것, 두루 질문하는 것, 계율에 숙달하는 것, 자주 결정하는 것, 좋은 친구를 갖는 것, 적당한 대화를 하면 회의적 의심이 버려 질 수 있다고 하였다.

 

새벽의 마음으로

 

마음의 장애가 제거 되면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고 했다. 마치 흙탕물이 시간이 지나면 정화 되어 바닥이 깨끗이 보이는 것 같다. 물에 이끼가 제거 되어 역시 바닥이 보이는 것과 같다. 소용돌이 치는 물, 부글부글 끊는 물이 멈추었을 때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주변의 경치도 반영된다. 하늘에 떠 있는 달도 비칠 것이다.

 

이른 아침 새벽의 어둠에서는 정화된 마음을 보는 것 같다. 이렇게 마음이 정화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자애의 마음이 일어난다. 그리고 연민의 마음도 일어난다. 그러나 자애가 애정으로, 연민이 걱정으로 바뀌면 실패하고 만다. 마음이 또 다시 오염되는 것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매일 아침 새벽과 같은 마음이 되어라.

 

 

 

2016-03-2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