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 논쟁은 지속되어야
깨달음 논쟁이 있다. 한국불교에서는 여전히 깨달음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논의 하고 있다. 그런데 각자 처한 위치에 따라 깨달음이 다르다. 어떤 것이 맞는 것일까?
어떤 이들은 깨달음 논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한다. 한국불교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바로 잡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한다. 일부는 동의 하지만 전부 동의할 수 없다. 왜 그런가? 부처님이 깨달은 내용이 무엇인지 안다면 자동적으로 해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깨달음과 관련하여 최봉수의 교수의 강연(최봉수교수의 불교학개론(제4강))을 들었다. 강연내용을 중심으로 초기경전을 근거로 하여 정리해 보았다.
깨달음이 진리가 되려면
깨달음이 진리가 되려면 충족되어야 할 조건이 있다. 그것은 가슴에만 있어서는 안된다. 모든 사람들이 만날 수 있는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자기만 깨달았다고 해서는 안되고 남도 똑같이 “그것이 맞네!”라며 누구나 객관적으로 받아 들여져야 한다. 사성제가 대표적이다.
만약 깨달음이 ‘느낌’에 불과하다면 그것이 남에게 전달될 가능성이 있을까? 그럴 수 없다. 느낌은 당사자의 고유한 경험이기 때문이다. 여인이 아이 낳을 때 그 고통은 출산경험이 있는 여인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남자들은 그 고통을 알 수 없다. 다만 추론 할 수 있을 뿐이다.
깨달음이 감정적이고 정서적 경험이라면 오로지 그에게만 해당될 것이다. 그의 깨달음이 그의 느낌에 대한 것이라면 그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우리하고는 동떨어져 있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깨달음이 객관성을 띠는 이유는 무엇일까? 부처님의 깨달음은 본질적으로 ‘아는 것(知:ñāṇa)’이기 때문이다.
아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있다. 그리고 전달할 수 있다. 또 하나 깨달음이 있다. 아는 것과 더불어 ‘보는 것(見:dassana)’이다. 단순히 아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되고 분명하고 뚜렷하게 경험되어야 하고 체험되어야 하고 보아야 함을 말한다. 그것이 단순한 관념의 유희이어서는 안되고 살아 있는 구체적적인 대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지견(佛知見)에 대하여
부처님은 깨달음에 대하여 지와 견이라는 두 글자로 자주 표현하였다. 이는 해탈지견이라는 말로도 알 수 있다. 오분향례에서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에 이어 해탈지견향이라 한다. 해탈지견은 더 이상 태어남이 없음을 스스로 아는 것이다.
해탈지견에 대하여 초전법륜경에서는 “이와 같이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나의 앎과 봄이 세 번 굴려서 열두 가지 형태로 있는 그대로 청정해졌기 때문에, 수행승들이여, 나는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에서,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바르게 원만히 깨달았다고 선언했다. 나에게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는 앎과 봄이 생겨났다.”(S56.11) 라고 설명되어 있다.
부처님의 지와 견에 대하여 ‘불지견’이라 한다. 부처님이 알고 본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불지견은 경험되어지는 것이고 또한 전달되어 지는 것이다. 이는 가르침을 설할 때에 존자 꼰당냐에게 “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라고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S56.11) 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다. 불지견은 객관적인 것으로 전달될 수 있는 것이고 이해 될 수 있는 것이고 볼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지와 견은 불지견 또는 ‘여실지견(yathābhūtaṃ ñāṇadassanaṃ)’ 등으로 표현 된다. 여기서 여실지견은 있는 그대로 알고 본는 것이다. 그것은 ‘완전한 지혜’이다. 그런데 여실지견은 청정해졌을 때 가능한 것이다. 이는 “앎과 봄이 있는 그대로 청정해졌기 때문에(yathābhūtaṃ ñāṇadassanaṃ suvisuddhaṃ ahosi)”(S56.11) 라는 구절로 알 수 있다. 이렇게 청정해졌을 때 더 이상 윤회하지 않음을 스스로 알게 되는 해탈지견이 생겨나는 것이다.
해탈지견은 깨달음과 동의어라 볼 수 있다. 깨달음을 달리 표현 한 것이 해탈지견인 것이다. 그래서 깨달은 자만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고 선언 할 수 있는 것이다.
깨어남에 대하여
깨달음은 아는 것과 보는 것을 말한다. 이외에도 깨달음과 동의어가 더 있다. 그것은 ‘깨어남’과‘깨뜨림’과 ‘꿰뚫음’이다.
첫째, 깨어남은 깨달음과 동의어이다. 깨어남이란 잠에서 깨는 것 또는 꿈에서 깨어남이란 뜻도 있다. 선종계통의 스님들이나 법사들이 주로 꿈의 비유를 들어 깨달음을 설명한다. 이 세상은 꿈속과 같다는 것이다. 꿈속의 나와 꿈속의 세상은 꿈꾸는 자가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에 허상이라고 본다. 이 현실세계도 사실상 꿈속의 세계와 같다고 한다. 그래서 본래의 나를 찾자고 한다.
초기경전에서 꿈속의 비유를 들어 깨달음에 설명해 놓은 가르침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깨어 있음에 대한 가르침은 있다. 이는 “깨어있음에 철저한 것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은 낮에는 거닐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것들로부터 마음을 정화시킨다.”(A3.16) 라 했다.
정화한다는 감각능력의 문을 수호하고 음식을 먹을 때 알맞은 분량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깨달은 자에 대하여 “계행을 갖추는 것과 감각능력의 문을 수호하는 것과 음식을 먹을 때 알맞은 분량을 아는 것과 깨어 있음에 전념하는 것이다.” (A4.37) 라 하여 네 가지 원리를 갖춘 자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깨어남 또는 깨어있음은 깨달음과 동의라 볼 수 있다.
깨뜨림에 대하여
둘째, 깨뜨림은 깨달음과 동의어이다. 깨뜨림은 부수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부수는가? 그것은 갈애의 부숨이다. 이는 법구경에서 “집짓는 자여, 그대는 알려졌다. 그대는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 서까래는 부서졌고 대들보는 꺽였다. 많은 생애의 윤회를 달려왔으나, 마음은 형성을 여의고 갈애의 부숨을 성취했다.”( Dhp 154)라는 게송에서 알 수 있다. 윤회의 직접적인 원인인 갈애를 부수었을 때 깨달음은 완성되는 것이다.
부처님은 갈애의 부숨에 의한 해탈을 말씀 하셨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은 갈애를 부숨으로써 해탈하며, 궁극적으로 목표에 이르며, 궁극적으로 평화를 얻으며, 궁극적으로 청정한 삶을 얻으며, 궁극적으로 완성을 얻어, 신들과 인간 가운데 가장 훌륭한 자가 됩니다.” (M37) 라 했다. 이렇게 본다면 깨뜨림은 깨달음과 동의어라 볼 수 있다.
꿰뚫음에 대하여
셋째, 꿰뚫음은 깨달음과 동의어이다. 꿰뚫음은 관통하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관통하는가? 이는 부처님의 ‘꿰뚫음에 대한 법문’으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꿰뚫는 대상으로서 감각적 쾌락의 욕망, 느낌, 지각, 번뇌, 행위, 괴로움이라 했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것을 보면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하여 알아야 하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원인에 대하여 알아야 하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다양성에 대하여 알아야 하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결과에 대하여 알아야 하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소멸에 대하여 알아야 하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소멸로 이끄는 길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A6.63) 라고 말씀 하셨다.
부처님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사성제의 구조로 설명한 것이다. 다만 다양성과 결과가 추가 되어 있어서 여섯 가지이다. 이렇게 꿰뚫어 아는 것도 깨달음이다.
네 가지 원리
깨달음에 대하여 앎과 봄, 깨어남, 깨뜨림, 꿰뚫음이라 했다. 모두 깨달음이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그렇다면 이들 말의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무엇일까? 이는 ‘깨달음의 경(anubuddhasutta, A4.1)’에 잘 표현되어 있다.
부처님은 깨달음에 “수행승들이여, 네 가지 원리에 대하여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해서 이와 같이 나뿐만 아니라 그대들은 오랜 세월 유전하고 윤회하였다.” (A4.1) 라고 말씀 하셨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고귀한 계율에 대하여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해서 이와 같이 나뿐만 아니라 그대들은 오랜 세월 유전하고 윤회하였다. 수행승들이여, 고귀한 삼매에 대하여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해서 이와 같이 나뿐만 아니라 그대들은 오랜 세월 유전하고 윤회하였다. 수행승들이여, 고귀한 지혜에 대하여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해서 이와 같이 나뿐만 아니라 그대들은 오랜 세월 유전하고 윤회하였다. 수행승들이여, 고귀한 해탈에 대하여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해서 이와 같이 나뿐만 아니라 그대들은 오랜 세월 유전하고 윤회하였다.”
(Anubuddhasutta-깨달음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4.1,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네 가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어서 윤회했다고 한다. 그것은 계행, 삼매, 지혜, 해탈이다. 이 네가지를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해서 오랜 세월 윤회한 것으로 본 것이다.
부처님이 깨달은 것
부처님이 말씀 하신 계, 정, 혜는 계행의 다발, 집중의 다발, 지혜의 다발을 뜻한다. 이는 다름 아닌 팔정도이다. 그래서 계행의 다발은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을 뜻한다. 집중의 다발은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을 뜻한다. 지혜의 다발은 올바른 견해와 올바른 사유를 뜻한다. 부처님은 이와 같은 팔정도에 대하여 처음 설법할 때 말씀 하셨고 마지막 열반에 들 때도 설하였다.
해탈은 팔정도가 완성된 상태를 말한다. 윤회의 원인인 무명과 갈애가 완전히 제거된 열반의 성취를 뜻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깨달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씀 하셨다.
Sīlaṃ samādhi paññā ca
vimutti ca anuttarā,
Anubuddhā ime dhammā
gotamena yasassinā.
Iti buddho abhiññāya
dhammamakkhāsi bhikkhūnaṃ,
Dukkhassantakaro satthā
cakkhumā parinibbuto'ti.
[세존]
“최상의 계행과 삼매와
지혜, 그리고 해탈
이러한 것들을 명성 있는
고따마는 깨달았네.
깨달은 님, 괴로움을 종식시킨 님,
스승, 눈 있는 님,
적멸에 든 님은 곧바로 알아
수행승들에게 가르침을 설했네.”(A4.1)
깨달음 논쟁은 지속되어야
깨달음 논쟁은 지속되어야 한다. 서로 다른 불교관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다른 깨달음관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만 결국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노력한다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 일상에서 문제에 부딪쳤을 때 항상 “이럴 때 부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의문을 가지고 초기경전을 열어 본다면 답이 나온다. 깨달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2016-03-29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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