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많이 아는 것 보다 하나라도 제대로 알아야

담마다사 이병욱 2016. 4. 8. 16:09

 

많이 아는 것 보다 하나라도 제대로 알아야

 

 

선무당이 사람잡는다는 말이 있다. 미숙한 사람이 괜히 설치다가 오히려 일을 그르쳐 놓는다는 말이다. 불교에 대하여 많이 안다고 자부하는 자들이 잘못 이해 하는 경우도 있다. 또 가르침을 왜곡하는 자들도 있다. 깨달았다고 하여 무애행을 하며 막행막식하는 자들도 해당된다.

 

불교를 얼치기로 배운 자들이 있다. 불교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 자들이다. 차라리 배우지 아니함만 못하다. 맛지마니까야에 따르면 수행승 아릿타도 그런 케이스에 해당된다.

 

아릿타가 이해하기로는

 

예전에 독수리조련사였던 수행승 아릿따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내가 세존께서 가르치신 진리를 이해하기로는, 세존께서 장애라고 설하는 것들도 그것을 수용하는 자에게는 장애가 되지 않는다.”(M22) 라는 말이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각주에 따르면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yeme antarāyikā dhamma antarāyikā vuttā bhagavatā, te paisevato nāla antarāyāyāti : 여기서 수용(paisevato)이라는 말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단지 실천없이 관념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전체적으로는 이 문장은 MN.12에서 등장하는 싸리뿟따여, 수행자든 바라문, , 악마, 하느님이든 이 세상의 어떤 자이든, 나에 대해 그대가 장애가 되는 사실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것들을 수용하는 자에게는 장애가 될 수 없다.’라고 나를 비난할 수 있는 근거가 없음을 가르침에 견주어 안다.”라는 내용과 모순이 되지 않는다. Mdb.1207에 따르면, 아릿타는 홀로 명상하면서 만약 수행승들이 여인과 성적인 관계를 맺도록 허락되었다면, 그것은 장애가 될 수 없었을 텐데라는 결론에 도달했고, 그는 그것이 승원의 계율로 금지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맛지마니까여 386번 각주, 전재성님)

 

 

아릿타는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을 근거로 들어 자신의 생각을 정당화 하였다. 부처님이 네 가지 두려움 없음(사무외심)’을 설하였는데 그 중에 하나가 설장법무외(說障法無畏)’이다.

 

설장법무외(說障法無畏)

 

설장법무외는 사자후에 대한 큰 경(M12)’에서 볼 수 있다. 이는 부처님이 사리뿟따여, 수행자든 바라문, , 악마, 하느님이든 이 세상의 어떤 자이든, 나에 대해 ‘그대가 장애가 되는 사실이라고 말하는 것들도 그것들을 수용하는 자에게는 장애가 될 수 없다.’라고 나를 비난할 수 있는 근거가 없음을 가르침에 견주어 안다. 사리뿟따여, 나는 여전히 근거가 없음을 알기 때문에, 나는 안온한 상태에 있었고, 공포를 여의었고, 두려움을 여의었다.”(M12)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참고로 사무외심은 정등무각외, 누영무진무외, 설장법무외, 설출도무외를 말한다. 여기서 세 번째 설장법무외는 장애가 되는 사실이라고 말하는 것들도 그것들을 수용하는 자에게는 장애가 될 수 없다.”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각주에서는 성적교섭으로 설명하고 있다.

 

성적교섭이 깨달음의 길에 방해가 되고 장애가 되는 것임은 분명하다. 수행승 아릿타는 부처님가르침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그것들을 수용하는 자에게는 장애가 될 수 없다.”라는 악견이 생겨났다. 마치 깨달은 자에게 있어서는 어느 것도 걸림이 없어서 무해행을 하며 막식막식하는 것과 같은 개념이다. 그래서 만약 수행승들이 여인과 성적인 관계를 맺도록 허락되었다면, 그것은 장애가 될 수 없었을 텐데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그래서 승원의 계율로 금지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깨달으면 대자유인?

 

깨달으면 대자유인이 되는 것일까? 깨달으면 걸림 없이 살아도 되는 것일까?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등 마음 내키는대로 행동해도 되는 것일까? 자칭타칭 깨달았다는 사람, 자칭타칭 한소식했다는 사람 중에는 땡기는대로사는 사람들이 있다.

 

출가자이든 재가자이든 한소식 했다고 알려져 있는 사람들의 행위를 보면 걸림 없다. 이른바 무애도인들이다. 그들은 본래 없는 것이라 하며 어떤 행위를 해도 구애 받지 않는다. 술을 마셔도 되고 걸림 없고, 도박을 해도 걸림이 없고, 음행을 해도 걸림이 없는 것이다. 내키는 대로 땡기는대로 살기 때문일 것이다.

 

MDB에서는

 

전재성님의 각주에 따르면 영역 맛지마니까 MDB를 언급하여 “Mdb.1207에 따르면, 아릿타는 홀로 명상하면서 만약 수행승들이 여인과 성적인 관계를 맺도록 허락되었다면, 그것은 장애가 될 수 없었을 텐데라는 결론에 도달했고, 그는 그것이 승원의 계율로 금지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라고 설명했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MDB를 보면  “As I understand the Dhamma taught by the Blessed one, those things called obstructions by the Blessed one are not able to obstruct one who engages in them.”라 되어 있다. 이에 대한 각주는 다음과 같다.

 

 

In making this assertion he directly contradicts the third of the four intrepidities of the Tathagata - see MN 12.25. According to MA, while reflecting in seclusion he came to the conclusion that there would be no harm if bhikkhus were to engage in sexual relations with women and he maintained that this should not be prohibited by the monastic rules. Though his statement does not expressly mention the sexual issue, the similes about sensual pleasures brought forth by the bhikkhus lend credence to the commentary.

 

(249번 각주, MDB)

 

 

MDB각주를 보면 맛지마니까야 ‘MN 12.25’를 보라고 되어 있다. 이는 사자후에 대한 큰 경(M12)’ 25절을 말한다. 관련 구절에 대한 초불연 각주를 보면 주석서에 의하면 그는 외딴 처소에서 한거하는 중에 비구가 여인과 성관계를 가져도 아무런 잘못이 아니다고 생각하였고 이것을 첫 번째 바라이죄의 항목으로 막아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고 한다.(MA.ii.103) 물론 본 문단에 나타난 그의 주장에서 이러한 것은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아래 3절에서 비구들이 감각적 욕망에 관계된 비유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주석석의 이런 설명은 신빙성이 있다고 여겨진다.”(초불연 맛지마1 710번 각주) 라 되어 있다.

 

세 번역서의 각주를 보면 수행승 아릿타는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깨달은 자에게 있어서 장애는 문제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아릿타는  장애라고 설하는 것들도 그것을 수용하는 자에게는 장애가 되지 않는다.”라는 가르침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외딴 곳에서 홀로 사는 수행승이 여인과 성적교섭을 가져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악견을 가진 것이다.

 

“어리석은 자여, 누구에게 내가 그러한 가르침을 설했다고 하는가?”

 

수행승 아릿타의 악견에 대한 이야기는 맛지마니까야 뱀에 대한 비유의 경(M22)’에 실려 있다. 이는 잘못된 견해로 인하여 어설프게 가르침을 파악하였을 때 해가 될 수 있음을 알려 주기 위함이다. 뱀을 잡을 때 뱀의 머리를 잡아야 하나 몸통이나 꼬리를 잡았을 때 물릴 수 있음을 말한다.

 

수행승 아릿타는 자신의 견해를 굽히지 않았다. 동료수행승들의 거듭된 충고에도불구하고 잘못된 견해를 가지게 되었을 때 처벌을 받았다. 이에 대한 내용이 율장소품에 실려 있다. 이를 악견을 버리지 못하는 것에 대한 권리정지조치의 갈마라 하여 참회죄로 처벌 받았다. 부처님은 가르침을 잘못 이해한 아릿타를 다음과 같이 꾸짖었다.

 

 

“어리석은 자여, 누구에게 내가 그러한 가르침을 설했다고 하는가? 여러 가지 법문으로써 나는 장애가 되는 것들이 어떻게 장애가 되는가와 그것들을 수용하는 자에게도 어떻게 장애가 되는가에 대해 설했다.

 

나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는 즐거움은 적고 괴로움이 많고 근심이 많으며, 재난은 더욱 많다고 설했다. 또한 나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관해 해골의 비유를 설했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관해 고깃덩어리의 비유를 설했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관해 건초횃불의 비유를 설했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관해 숯불구덩이의 비유를 설했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관해 꿈의 비유를 설했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관해 빌린 물건의 비유를 설했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관해 나무열매의 비유를 설했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관해 도살장의 비유를 설했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관해 칼과 창의 비유를 설했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관해 뱀머리의 비유를 설했는데,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는 즐거움은 적고 괴로움이 많고 근심이 많으며, 재난은 더욱 많다고 설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여, 그대는 스스로 잘못 해석하여 오히려 우리를 왜곡하고 스스로를 파괴하고 많은 해악을 쌓는다. 어리석은 자여, 그것은 실로 그대를 오랜 세월 불이익과 고통으로 이끌 것이다.

 

(Alagaddūpamasutta-뱀에 대한 비유의 경, 맛지마니까야 M22,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장애에 대하여 감각적 욕망(kama)’의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감각적 욕망은 개뼈다귀 같은 것이라는 것 등 여러 가지 비유를 들었다. 그러나 율장 인연담에서는 주석서에 말하는 것처럼 외딴 처소에서 한거하는 중에 비구가 여인과 성관계를 가져도 아무런 잘못이 아니다.”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주석서에서는 감각적 욕망에 대하여 여인과의 성적교섭을 예를 들어 설명했다. 그런데 감각적 욕망은 성적교섭을 뿐만 아니라 오욕락이 모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눈과 귀, 코 등 다섯 가지 감각능력으로 대상을 즐겼을 때 감각적 욕망을 즐기는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감각적 욕망은 개뼈다귀같다는 것이다. 개뼈다귀는 먹음직스럽게 보이지만 막상 먹을려고 하면 먹을 것이 없다. 마찬가지로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는 즐거움은 적고 괴로움과 근심과 재난이 많다는 것이다.  

 

거죄갈마(擧罪竭磨)를 행한 부처님

 

부처님은 장애가 되는 것들이 어떻게 장애가 되는지에 대하여 설하였다. 그러나 아릿타는 그대가 장애가 되는 사실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것들을 수용하는 자에게는 장애가 될 수 없다.”라고 말한 것을 잘못 이해 하여 홀로 외딴 곳에서 사는 수행승에게는 여인과 성적교섭을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잘못 이해 하였다. 마치 깨달은 자에게 있어서 어떤 행위도 걸림이 없고 본래 없는 것이라 하며 막행막식을 일삼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잘못된 견해, 악견을 가진 아랏타에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그렇다면 참모임은 예전에 독수리조련사였던 수행승 아릿타에 대하여 악견을 버리지 못한 것에 의한 권리정지조치의 갈마를 행해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행해야 한다. 먼저 예전에 독수리조련사였던 수행승 아릿타는 비난받아야 하고, 비난 받은 후에 기억이 확인되어야 하고, 기억이 확인된 후에 죄거 추징되어야 하고, 죄가 추징된 후에 총명하고 유능한 수행승이 참모임에 알려야 한다.”

 

(권리조치의 갈마의 인연, 율장소품 제1장 갈마의 다발, 전재성님역)

 

 

아릿타는 자신의 잘못된 견해에 대한 굽히기를 거부하였다. 이에 부처님은 죄를 고치지 않은 아릿타에게 자격정지에 대한 승단회의(擧罪竭磨)에 부쳤다. 아릿타는 승단을 떠나 자격정지가 폐기 될 때 까지 승단으로 돌아 올 수 없었다. 율장 (Vin.II.133)에 따르면 충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잘못된 견해를 버리지 않은 아릿타에게 참회죄(Pācittiya)를 선고했다는 내용도 있다.

 

수행승 아릿타이야기는 맛지마니까와 율장소품에서 보여진다. 부처님이 잘못된 견해를 가진 아릿타에게 감각적 욕망의 위험성을 알려 준다. 개뼈다귀 등으로 비유된 감각적 욕망에는 즐거움은 적고 괴로움이 많고 근심이 많으며, 재난은 더욱 많다고 설하신 것이다. 여기까지는 맛지마니까야와 율장소품의 내용은 동일하다. 그러나 뱀의 머리 비유에서부터는 달라진다.

 

최봉수교수 말하기를

 

맛지마니까야에 뱀의 머리에 대한 비유가 있다. 부처님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대한 위험으로 뼈다귀, 고깃덩이, 건초횃불, 숯불구덩이, , 빌린 물건, 나무열매, 도살장, 칼과 창, 뱀의 머리의 비유를 들었다. 이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실려 있는 뱀의 머리 비유는 감각적 욕망의 위험성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지만 악견에 떨어진 자의 위험성을 설명한 것이다.

 

유튜브에서 본 최봉수의 교수의 강연을 보았다. 대원정사 일요통합법회 동영상에 따르면 무엇이든지 제대로 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최후의 일념을 보장받으려면 그냥 염불해서는 안되고 염불을 제대로 해야 합니다. 그냥 불살생계를 지켜서는 안되고 불살생계를 제대로 지켜야 합니다. 그냥 보시를 해서는 안되고 보시를 제대로 해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고자 함일까? 그냥 하는 것 보다 제대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대로 못할 것 같으면 아예 하지 말라라고 말한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뱀의 머리비유를 들고 있다.

 

 

뱀에 두 가지가 있습니다. 독이 있는 뱀과 없는 뱀이 있어요. 독을 가진 뱀중에도 출혈독을 쓰는 뱀과 신경독을 쓰는 뱀이 있어요. 신경독은 신경을 마비시켜 죽기 때문에 그다지 괴롭지 않습니다. 출혈독은 혈관을 터뜨리기 때문에 굉장히 괴롭다고 합니다.

 

출혈독을 가진 뱀중에서도 육상뱀과 바다뱀이 있어요. 육상뱀은 지형지물을 이용하기 때문에 맹렬하지 않는데 바다뱀은 오직 독으로 상대를 제압해야 하기 때문에 독이 굉장히 맹렬합니다. 뱀중에서는 독뱀, 독백중에서는 출혈독을 쓰는 뱀, 출혈독을 쓰는 뱀중에서도 바다뱀을 알라갓다뱀이라 합니다.”

 

(최봉수교수, 대원정사 최봉수교수 일요통합법회 G6)

 

 

최봉수교수는 알라갓따에 대하여 출혈독을 가진 바다뱀이라 했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뱀에 대한 비유의 경에 나오는 알라갓두빠마경(Alagaddūpamasutta)을 설명한 것이다. 빠알리어 ‘alagadda’는 어떤 뜻일까? 사전을 찾아 보니 ‘snake’라 되어 있다. Ūpama는 비유를 뜻한다. 그래서 Alagaddūpamasutta 뱀에 대한 비유의 경또는 뱀의 비유 경이라 한다. MDB에서는 원어를 사용하여 ‘Alagaddupama Sutta - The Simile of the Snake’라 했다.

 

뱀을 잡으려면 뱀잡는 법을 알아야

 

alagadda에 대하여 맛지마주석서에 따르면 ‘a watersnake(물뱀)’이라 했다. 또 산스크리트어로 alagarda가 있는데 이는 독사(毒蛇)’를 뜻한다. 종합해 보면 알라갓다(alagadda)독이 있는 물뱀이라는 말이다. 이어지는 최봉수 교수의 강연은 다음과 같다.

 

 

부처님께서 내 법은 알라갓다뱀이라고 말한 것에서 이 경은 시작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온화하고 풍요롭고 부드럽다고 느끼죠. 그런데 사납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알라갓다뱀을 무시무시하게 내 법이다고 얘기해요. 뱀의 독이 강렬하면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다라고.

 

어떤 사람이 죽을 병에 걸렸는데 알라갓다뱀독이면 낫는다고 처방을 받아요. 아는 사람이 잡으러 갈 것 아닙니까? 우연히 바다에 갔는데 그 뱀이 나와 있어요. 귀하죠. 잡는데 귀한 뱀이라고 급하게 몸통이나 꼬리를 잡으면 어떻게 되요. 고개를 돌려 잡은 자의 팔목을 물게 되면 그 독이 출혈독이 되어가지고 혈관이 터뜨려져서 본인이 죽게 됩니다.”

 

(최봉수교수, 대원정사 최봉수교수 일요통합법회 G6)

 

 

뱀을 잡는 요령에 대한 것이다. 독이 없는 뱀은 물어도 죽을 정도는 아니지만 독사에게 물리면 치명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뱀을 잘못 잡았기 때문이다. 몸통이나 꼬리를 잡았을 경우 뱀의 머리가 돌아서 팔을 물을 수 있다는 말이다.

 

뱀을 잡을 때는 뱀잡는 법을 알아야 한다. 뱀잡이 도구로 뱀의 목 뒤를 누르고 한쪽 손으로 뱀의 턱밑을 꼭 쥔다음에 독니를 뽑아가지고 독을 짠 다음에 뱀을 멀리 던져 버리면 된다. 일련의 뱀잡는 절차에 대한 것이다. 이렇게 뱀을 잡는 것에 대하여 부처님은 제대로 잡는 것이라 했다. 부처님 가르침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법을 잘못 파악했을 때

 

부처님은 뱀을 잡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뱀을 제대로 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부처님가르침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알려면 제대로 알아야 함을 말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어떤 어리석은 사람들은 경ㆍ응송ㆍ수기ㆍ게송ㆍ감흥어ㆍ여시어ㆍ전생담ㆍ미증유법ㆍ교리문답과 같은 가르침을 두루 배우지만, 그 가르침을 배워서 그 가르침에 관해 지혜로써 그 의미를 규명하지 않고, 가르침에 관해 지혜로써 그 의미를 규명하지 않아서 성찰을 얻지 못하고, 남을 비난하기 위하여 가르침을 두루 배우고, 논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가르침을 두루 배우므로 그 참다운 의미를 경험하지 못한다.

 

그들이 잘못 파악한 가르침은 자신들에게 오랜 세월 불이익과 고통이 될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가르침에 관해 잘못 파악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수행승들이여, 어떤 사람이 뱀을 원하고 뱀을 구하여 뱀을 찾아서 가는데, 큰 뱀을 보고는 그 몸통이나 꼬리를 잡으면, 그 뱀은 되돌아서 그 사람의 손이나 팔이나 다른 사지를 물 것이고, 그 때문에 그는 죽거나 죽음에 이를 정도의 고통을 맛볼 것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뱀을 잘못 붙잡았기 때문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 세상에 어떤 어리석은 사람들은 경ㆍ응송ㆍ수기ㆍ게송ㆍ감흥어ㆍ여시어ㆍ전생담ㆍ미증유법ㆍ교리문답과 같은 가르침을 두루 배우지만, 그 가르침을 배워서 그 가르침에 관해 지혜로써 그 의미를 규명하지 않고, 가르침에 관해 지혜로써 그 의미를 규명하지 않아서 성찰을 얻지 못하고, 남을 비난하기 위하여 가르침을 두루 배우고, 논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가르침을 두루 배우므로 그 참다운 의미를 경험하지 못한다. 그들이 잘못 파악한 가르침은 자신들에게 오랜 세월 불이익과 고통이 될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가르침에 관해 잘못 파악했기 때문이다.”

 

(Alagaddūpamasutta-뱀에 대한 비유의 경, 맛지마니까야 M22,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가르침을 잘못 파악하였을 때 독사에 물린 것과 같다고 했다. 수행승 아릿따도 마찬가지 케이스일 것이다. 부처님의 사무외심중의 하나인 설장법무외의 예를 들어 장애가 되는 사실이라고 말하는 것들도 그것들을 수용하는 자에게는 장애가 될 수 없다.”라고 말한 것을 잘못 받아 들인 것이다. 이는 가르침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가르침에 관해 잘못 파악했기 때문이다.(duggahītattā bhikkhave dhammāna)”라 한 것이다.

 

S법우님 참회의 글

 

가르침에 대하여 제대로 알지 못하였을 때 남을 비난하기 쉽다고 했다. 실천 없이 개념으로만 파악된 지식으로 남을 비난하고 논쟁에서 이기려하는 것이다. 이런 예를 인터넷시대에 많이 볼 수 있다.

 

어느 법우님은 자신의 블로그에 다음과 같은 참회의 글을 올렸다. 뱀의 비유 경을 인용하며 이 글은 우선먼저 제 자신의 참회로 부터 시작하고자 합니다. 뱀의 비유경의 부처님의 가르침처럼 저자신 또한 논쟁하고 논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부처님 법을 배우고 그리고 세상의 먼지보다 작은 지식을 가지고 대단한 것인냥 뽐내고 남을 깔보고 아상과 아견에 사로잡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뱀을 잘못 잡아 기나긴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되돌아 보기도 합니다.”라 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써 놓았다.

 

 

자유로운 야단법석방에 보면 자주는 아니지만 간혹 어떤 주제를 놓고 논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진흙속의연꽃님의 글을 옮겨와서 그분의 글의 잘잘못은 얕은 불교지식을 앞세워 나름대로 지적하기도 합니다. 특히 위 경전의 내용대로 부처님의 법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해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 경전의 내용(부처님의 가르침)과 뜻이 그런것이 아니다라고 비판을 합니다. 아마도 제가 그런 글을 쓸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는 것은 이곳 초기불교권에서 살고 있고 직.간접적으로 경전의 내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 때문이라고 스스로 지은 구업에 대해서 위안을 삼기도 합니다.”

 

(S법우님, 토론을 하면서 느낀 생각)

 

 

글을 쓰면서 토론을 하지 않는다. 인터넷에서 토론할 만한 능력도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시간적 여유가 없다. 댓글 달기도 벅차기 때문에 본문에 매일 새로운 글을 올리는 것으로 대신 하고 있다.

 

S법우님은 인터넷상에서 유명하다. 초기불교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다 안다. 우리나라 초기불교 산 역사와 같은 분이다. 인터넷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2000년대 초반부터 재가의 법사로서 활약을 해 왔기 때문이다. 더구나 교학의 나라 스리랑카에서 오랫동안 살고 있기 때문에 부처님 근본 가르침에 대한 지식도 해박하다. 그러나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올린 글에 대하여 수 없는 비난을 받았다.

 

경전을 근거로 하여 글쓰기를 하였음에도 가혹한 비난하는 것에 대하여 이해 할 수 없었다. 그저 그려려니하면서 해야 할 일을 다 할 뿐이었다. 그런데 S님은 남을 비난하기 위하여 가르침을 두루 배우고, 논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가르침을 두루 배우므로 그 참다운 의미를 경험하지 못한다.”라는 경전문구에 자극받은 것 같다. 진흙속의연꽃님의 글을 옮겨와서 그분의 글의 잘잘못은 얕은 불교지식을 앞세워 나름대로 지적하기도 합니다.”라 했다. 그래서 참회한다고 했는데 매우 의외로 여긴다.

 

구업을 참회하며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참회 한 바 있다. 올린 글로 인하여 누군가 피해를 보았을 때 구업을 짓는 것이 된다. 그래서 언어로 진실을 희롱한 죄, 깊이 참회합니다(2013-12-30)”라는 제목으로 참회글을 올린 바 있다.

 

참회를 하면 받아 주어야 한다. 이는 부처님이 진정으로 참회할 때 참회를 받지 않고 울화를 품고 분노가 무거운 자는 원한에 묶이네. 나는 원한을 즐겨하지 않기에 그대들의 참회를 받아 들이네. (S1.35) 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비록 넷상으로 참회를 한 S님이지만 참회를 받아 들인다. 그리고 참회한다. 혹시라도 올려진 글로 인하여 불편한 마음을 가졌다면 깊이 참회한다. 이렇게 참회를 하고 참회를 받아 들였을 때 원한은 쌓이지 않는다. 만일 참회 없이 비난하기 위하여 부처님 가르침을 이용한다면 독사의 몸통이나 꼬리를 잡는 것과 같다.

 

알려면 제대로 알아야

 

알려면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했다. 어설프게 알면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어설프게 알아 떠들고 다닌다면 구업만 짓는 것이 된다. 그럴 경우 차라리 경전에 근거하여 말하는 것이 낫다. 그러나 경전의 내용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자의적으로 판단하였을 때 이 어리석은자여라는 말을 듣기 쉽다.

 

사띠라는 수행승이 내가 세존께서 설하신 가르침을 알고 있기로는 바로 이 의식이 유전하고 윤회하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M38) 라고 떠들고 다녔다. 이는 가르침을 알긴 알지만 제대로 모르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이 어리석은 자여, 누구에게 내가 그런 가르침을 설했다는 것인가?”라며 꾸짖었다. 가르침을 어설프게 안 것을 꾸짖은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어리석은 자여, 조건에서 의식이 생겨난다는 것, 즉 조건 없이는 의식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차례 법문으로 설하지 않았던가?”라며 일깨워 주었다.

 

아릿타라는 수행승 역시 부처님 가르침을 잘못 이해 하고 있었다. 부처님의 사무외심 중의 하나인  설장법무외를 예를 들어 내가 세존께서 가르치신 진리를 이해하기로는, 세존께서 장애라고 설하는 것들도 그것을 수용하는 자에게는 장애가 되지 않는다.”(M22)라 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어리석은 자여, 누구에게 내가 그러한 가르침을 설했다고 하는가? 여러 가지 법문으로써 나는 장애가 되는 것들이 어떻게 장애가 되는가와 그것들을 수용하는 자에게도 어떻게 장애가 되는가에 대해 설했다.”(M22)라고 일러 주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알려면 제대로 알라는 것이다.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를 알아도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어설프게 알면 오랜 세월 불익과 고통을 당할 것이라 했다. 뱀 잡는 법을 모르고 뱀을 잡는 것과 같다. 가르침을 제대로 모르고 잘못된 견해를 가졌을 때 독사에 물리는 것과 같다.

 

많이 아는 것 보다 하나라도 제대로 알아야

 

부처님의 가르침은 잘 설해져 있다. 가르침을 실천 없이 단지 관념적으로만 받아 들였을 때 악견이 되기 쉽다. 누군가 깨달았다고 하여 무애행과 막행막식한다면 가르침을 제대로 모르는 것이다. 제대로 모를 것 같으면 아예 행하지 말아야 한다.

 

많이 아는 것 보다 하나라도 깊이 있게 제대로 알아야한다. 박학다식한 것 보다 한분야를 깊이 있게 아는 것이다. 이렇게 깊이 들어가면 분야는 달라도 서로 통하게 되어 있다. 어설프게 많이 아는 것 보다 하나라도 제대로 알자는 것이다.

 

 

2016-04-0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