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에 대하여
요즘은 카톡시대
요즘은 SNS시대이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의 약자로서 사교적 연결망을 제공하는 서비스를 말한다. 트윗, 페이스북, 카카오톡, 밴드 등이 대표적이다. 블로그나 카페, 게시판도 이 범주에 들어간다. 이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소통수단이 ‘카톡’이다. 실시간 통신이 수단으로서 개인 또는 집단적 소통이 가능하다.
아이나 어른할 것 없이 두 세 개 이상의 단체카톡방이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대부분 열어 보기만 할 뿐 글을 올리지 않는다. 이곳에도 20대 80법칙이 적용되서일까 일부 소수의 사람들만이 여론을 주도한다.
카톡방에 글을 올렸을 때 반응을 기대하지 않는다. 글이나 사진, 동영상을 올릴 때 공감하는 글은 고사하고 ‘좋아요’이모티콘이라도 기대하지만 이마저도 희망사항이다. 그저 긴 침묵만이 흐를 뿐이다. 어쩌다 ‘좋아요’이모티콘이라도 올라 오면 공감하는 것으로 알아 흡족해 하는 것이 보통이다.
글을 쓰면서 관심있게 보는 것이 ‘공감’이다. 이전에는 추천이라 했다. 글을 읽고 난 다음 추천버튼을 누루는 것으로 공감을 표시 하는 것이다. 더욱 더 공감한다면 댓글을 작성한다. 그러나 시간과 노력과 함께 정성들여 글을 작성하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침묵이 길어질 때
카톡방에 글을 올렸을 때 긴 침묵이 이어진다. 이럴 때 참으로 햇갈린다. 공감하는 것인지 공감하지 않는 것인지 의사표현을 하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다. 침묵이 더 길어지면 안절부절 못할 때가 있다. 혹시 올린 글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것이 아닐까도 생각해 본다. 이런 걱정은 문자를 보냈을 때도 나타난다.
침묵이 길어질 때 동의하지 않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반대로 찬성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어떤 의견이든지 부정과 긍정 두 가지 견해가 있기 때문에 부정아니면 긍정이라 볼 수 있다.
글을 쓸 때 부정문과 긍정문이 있다. 상대방에 대하여 비판하려 할 때 부정문이 되기 쉽다. 반대로 상대방을 칭찬하려 할 때 자연스럽게 긍정문이 된다. 댓글도 마찬가지이다. 부정문과 긍정문으로 확연하게 갈라진다. 부정적 견해를 가지고 있다면 부정적 어투일색이다. 반면 긍정적 견해를 가지고 있다면 공감하는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침묵은 부정 아니면 긍정이다. 중간입장도 있을 것이다. 느낌에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 무덤덤한 느낌이 있듯이 세 가지 입장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올린 글에 대한 반응이 없을 때 동의 하는 것인지 반대하는 것인지는 표현하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침묵이 길어 질 때 공감일까 비공감일까?
긍정적 침묵과 부정적 침묵
초기경전에 따르면 침묵은 크게 긍정과 부정으로 크게 갈린다. 외도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감격하여 “존자 고따마여, 수행승의 무리와 함께 저의 공양을 받아 주십시오.”(M35) 라고 했을 때 경에서는 “세존께서는 침묵으로 허락하셨다.”라 했다. 공양수락요청을 받았을 때 침묵하면 허락한 것으로 간주 하는 것이다. 이런 침묵은 긍정적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이 장자 뽀딸리야를 보았을 때 “장자여, 자리가 있으니 원한다면 앉으십시오.”(M54) 라고 말했다. 이 말에 장자 뽀딸리야는 “화가 나고 불만족해서 침묵했다.”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침묵은 분노와 불만족 상태를 나타내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뽀딸리야는 장자라고 부른 것에 대하여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처님이 뽀딸리야에게 장자라고 부른 이유가 있다. 돈이 많은 부자가 세속일을 더 이상 하지 않고 수행자처럼 지내는 것에 대하여 부처님은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불만을 가진 장자에게 부처님은 “장자여, 그대가 세속적인 일을 그만 두는 것에 대하여 말하는 것과 고귀한 님의 계율에 비추어 세속적인 일을 그만 두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라 했다. 이런 말을 듣고 장자는 침묵했는데 그것은 불만족과 분노에 따른 것이다.
꾸지람을 들었을 때
침묵에는 긍정과 부정 두 가지 뜻이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외 침묵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그 중 하나가 꾸지람과 관련이 있다.
부처님이 “수행승들이여, 훌륭한 가문의 아들들이 나에 대한 믿음으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했는데, 수행승들이여, 그들 수행승들이 청정한 삶에 대하여 기뻐하는가?” (M68) 라고 물었다. 이에 “그들 수행승들은 침묵했다.” 라고 되어 있다.
수행승들은 왜 침묵했을까? 그것은 청정한 삶을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런 침묵은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마치 선생님이나 부모에게 꾸지람을 들을 때 침묵하고 있는 것과 같다. 침묵으로서 스승이나 부모의 말에 동의 하는 것이다.
무지의 침묵
맛지마니까야 근본법문의 경을 보면 말미에 “그 수행승들은 세존께서 하신 말씀에 기뻐하지 않았다.”(M1) 라고 되어 있다. 부처님으로부터 고귀한 법문을 듣고서도 ‘환희용약’하지 않고 기뻐하지 않은 것일까? 이런 침묵은 긍정일까 부정일까?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수행승들이 만족하지 않은 것은 분명히 이 법문이 그들 자신의 자만심에 상처받기 쉬운 영역까지 너무 깊이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Mdb.1165) 라 했다. 좀더 구체적인 설명은 다음과 같다.
한때 3베다에 통달한 오백명의 바라문 학도들이 세존의 법문을 듣고는 감각적 욕망에서 위험을 보고 출리에서 이익을 보면서 세존의 곁으로 출가했다. 출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부처님의 말씀을 모두 습득하고서는 그 배움에 의지하여 자만이 생겼다.“세존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즉시에 안다.”라고 생각하면서 세존을 존경하지도 않았고, 그때부터 세존께 문안드리지도 않았고 법문을 들으러 가지도 않았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바로 이 ‘모든 법들의 뿌리에 대한 법문’을 설하셨고, 그들은 도무지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부처님은 위대하시고, 견줄 이 없다고 자만심이 꺽여 부처님께 문안드리고 법을 듣는 것에 성심을 다했다. …
그 뒤 한때 세존께서 지방을 순회하시다가 웨살리에 도착하여 고따마까 탑묘에 머무실 때 이 오백명의 비구들의 지혜가 익은 것을 아시고 ‘고따마까 경(A3;123)을 설하셨다. 이 경을 듣고 이 오백명의 비구들은 그 자리에서 무애해를 갖춘 아라한이 되었다.” (MA.i.56~59)
바라문출신 부처님제자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성계급의 정점에 있었던 바라문들은 잘 배운 자들이다. 그들이 부처님교단으로 출가하였을 때 자만심으로 가득하였을 것이다. 어렸을 적부터 베다를 공부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설법을 들으면 모두 아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부처님이 근본법문을 설하자 침묵한 것이다.
바라문출신들이 침묵한 것은 알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심오한 가르침을 이해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침묵한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으면 환희용약 해야 하나 그 뜻을 전혀 이해 하지 못하니 기뻐하지도 않고 꿀먹은 벙어리처럼 가만 있었던 것이다. 이때 침묵은 모르기 때문에 무지의 침묵이라 볼 수 있다.
침묵의 벌(罰)
침묵이 ‘벌(罰)’로서 활용되는 경우도 있다.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바나경(D16)에 따르면 부처님은 부처님의 마부이었던 찬나에게 ‘범벌(梵罰)’을 내렸다. 부처님이 “아난다여, 내가 가고 난 뒤에 수행승 찬나에게 하느님의 처벌이 주어져야 한다.”(D16) 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 하느님의 처벌이란 한자어로 범벌을 말한다. 하느님의 처벌이란 무엇일까?
아난다가 “세존이시여, 하느님이 처벌이란 무엇입니까?”라며 물었다. 이에 부처님은 “아난다여, 수행승 찬나가 원하는 것을 이야기하더라도, 수행승들은 그에게 이야기하거나 충고하거나 가르침을 주어서는 안된다.”(D16) 라고 하셨다. 내용을 보면 일종의 ‘왕따’와 같다.
율장에도 범벌이야기가 있다. 율장소품 ‘11장 오백결집의 다발’을 보면 아난다가 찬나에게 “벗이여 찬나여, 참모임은 그대에게 하느님의 처벌을 내렸습니다.”라고 통보 했다. 쟁사가 생겼을 때 대중이 모여 갈마 하는데 찬나의 경거망동에 대한 벌이 내려진 것이다.
찬나는 부처님의 마부출신으로서 사리뿟따나 목갈라나와 같은 상수제자들도 무시하기 일쑤이었다. 그것은 “내가 부처님의 유성출가를 도왔는데”라며 자만심에 가득한 행위를 하였기 때문이다.
“저는 죽은 것이 아닙니까?”
승가에서는 찬나에게 하느님의 처벌을 내렸다. 하느님의 처벌을 빠알리어로 brahmadaṇḍa라 한다. 영어로는 “punishment by stopping all conversation and communication with one”라 설명된다.
하느님의 처벌이 내려지면 어느 누구도 말을 붙이지 않는다. 오로지 침묵으로 대하는 것이다. 봐도 본체 만 체 하고 들어도 들은 체 만 체 하는 것이다. 이렇게 침묵으로 대했을 때 어떤 기분이 들까? 니까야에는 없지만 율장에 따르면 찬나는 “존자여 아난다여, 제가 수행승들로부터 말을 받을 수 없고 충고를 받을 수 없고 가르침을 받을 수 없으면 저는 죽은 것이 아닙니까?”(율장소품 11장 하느님의 처벌에 대한 논의) 라 했다.
왕따 당하면 사실상 죽은 것이나 다름 없다. 이런 현상은 종종 뉴스에도 다루어진다. 학교에서 왕따 당한 아이가 자살했다는 뉴스를 말한다. 부처님 당시에도 자만에 가득 찬 자가 승가의 질서를 어지럽혔을 때 아무도 얘기 하지 말라는 처벌이 내려졌다. 어느 누구도 상대해주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였을 때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라 사실상 죽은 목숨과 같았다.
범벌, 하느님의 처벌을 받은 자는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왕따 당했다. 어느 누구도 가르쳐 주려 하지 않고, 어느 누구도 상대해 주지 않았다. 모두 자신에게 침묵했을 때 당사자가 받는 고통을 극에 달했을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처벌은 최상의 처벌에 속한다. 담마다야다 스님에 따르면 범벌에 대하여 “일시적인 사형선고라고 할 수 있는 아주 엄중한 처벌이다.”(율장소품 1300번 각주) 라 했다.
묵언에 대하여
묵언수행이 있다. 입을 닫고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이다. 이런 침묵에 대하여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부정적인 것이고 또하나는 긍정적인 것이다.
부정적 견해로서 맛지마니까야 ‘하느님의 초대의 경(M49)’에 “참으로 침묵은 착하고 건전한 것들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악마 빠삐만이 하였다. 경에 따르면 악마 빠삐만이 어떤 하느님 세계의 하느님의 권속인 신에게 들어와 부처님에게 한 말로 되어 있다. 악마의 말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악마]
“존자여, 그대가 이와 같이 안다면, 그대가 이와 같이 깨달았다면, 그대의 제자나 출가자들을 지도하지 마십시오. 그대의 제자나 출가자들에게 설법하지 마십시오. 그대의 제자나 출가자들을 열광하게 만들지 마십시오.
수행승이여, 그대 이전에 이 세상에는 거룩한 이,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이라고 선언한 수행자나 성직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자나 출가자들을 지도했고, 제자나 출가자들에게 설법했고, 제자나 출가자들을 열광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몸이 파괴되고 목숨이 다한 뒤에 열등한 몸을 받았습니다.
또한 수행승이여, 그대 이전에 이 세상에는 거룩한 이,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이라고 선언한 수행자나 성직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자나 출가자들을 지도하지 않았고, 제자나 출가자들에게 설법하지 않았고, 제자나 출가자들을 열광하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몸이 파괴되고 목숨이 다한 뒤에 훌륭한 몸을 받았습니다.
수행승이여, 그러므로 나는 그대에게 이와 같이 ‘벗이여, 자 무관심하라. 여기 지금의 즐거운 삶에 헌신하라. 벗이여, 참으로 침묵은 착하고 건전한 것이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 하지 말라.’라고 말합니다.”(M49)
악마 빠삐만은 부처님에게 “가르치려 하지 말라”라고 했다. 뭇삶들을 위해 가르침을 펼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참으로 침묵은 착하고 건전한 것이다.”라 했다. 진리를 깨달은 것을 향유하면서 조용히 열반에 들기를 바라는 것이다. 선정삼매의 즐거움을 향유하면서 보내라는 말과 같다. 그래서 “무관심하라”라고 했다.
수행자의 침묵은 금일 수 있다. 쓸데 없는 말을 하지 않았을 때이다. 그렇다고 입을 다물고 있으라는 말은 아니다. 법에 대하여 치열하게 논하라고 했다. 이는 율장에서 “저희들은 닷새마다 밤을 새며 법담을 나눕니다.” (율장대품, 10장 꼬삼비다발) 라고 아누룻다가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진리나 가르침, 법에 대한 것 까지도 묵언으로 일관한다면 이는 악마의 말이나 다름 없다.
고귀한 침묵
부처님은 고귀한 침묵을 말씀 하셨다. 맛지마니까야 ‘고귀한 구함의 경(M26)’에 따르면 “법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고귀한 침묵을 지키는 일이다.” (M26) 라 하였다.
수행승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모여서 어떠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그 가운데 어떠한 부분에서 중단되었는가?” (M26) 라고 물었다. 이에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세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 때에 세존께서 들어오셨습니다.” 라 했다. 그러자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믿음으로써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그대들 훌륭한 가문의 자제들이 법담을 위하여 모였다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수행승들이여, 모임은 두 종류로 이루어져야 한다. 법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고귀한 침묵을 지키는 일이다.” (M26)
수행승들은 잡담을 해서는 안된다. 세상돌아 가는 이야기, 신변이야기 등이 잡담이다. 수행승들은 부처님과 가르침과 승가에 대한 이야기는 얼마든지 해도 좋다. 특히 가르침과 관련해서는 밤새도록 토론해도 좋다. 그 외에는 침묵해야 한다. 어떻게 침묵해야 하는가?
부처님은 고귀한 침묵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주석에 따르면 “두 번째 선정과 근본적인 명상주제가 모두 이 고귀한 침묵에 해당된다. 두 번째 선정을 성취할 수 없는 자들에게 근본적인 명상의 토대를 닦게 함으로써 고귀한 침묵을 유도한다.” (Pps.II.169) 라 되어 있다.
고귀한 침묵에 대하여 상윳따니까에서는 “수행승이 사유와 숙고를 멈춘 뒤 내적인 평온과 정신의 통일과 무사유와 무숙고와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두번째 선정에 들면 그것을 고귀한 침묵이라고 부른다.”(S21.1) 라 되어 있다. 그러나 2선정에 들지 못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명상의 토대를 닦게하는 것이라 했다. 여기서 ‘근본적 명상주제(mūlakammaṭṭhāna: 根本業處)’란 무엇일까? 주석에서는 설명되어 있지만 사마타 명상 주제 40가지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불수념’ 같은 것이다. 부처님의 아홉가지 공덕을 계속 생각하는 명상을 말한다.
침묵은 두려운 것
입다물고 살 수 없다. 묵언이라 하여 쓸데 없는 말을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가르침마저 말하지 않는다면 악마 빠삐만이 “벗이여, 자 무관심하라. 여기 지금의 즐거운 삶에 헌신하라. 벗이여, 참으로 침묵은 착하고 건전한 것이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 하지 말라.”(M49)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할 말은 해야 한다. 말을 하되 좋은 말을 해야 한다. 상대방을 무너뜨리기 위한 중상모략, 권모술수, 마타도어 등 이간질은 세치 혀를 이용하여 마치 도끼를 든 것처럼 상대방을 난자 하는 비열한 행위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온화하여 귀에 듣기 좋고 사랑스럽고 흐뭇하고 우아하고 많은 사람이 좋아하고 많은 사람이 마음에 들어 하는 그러한 말을 합니다.”(M76) 라 했다.
침묵할 때는 침묵해야 한다. 그런 침묵도 침묵나름이다. 어떤 침묵은 동의하지 않음을 표하는 부정적 침묵일 수 있고, 또 어떤 침묵은 허락을 뜻하는 긍정적 침묵일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내용을 파악하지 못함으로 인한 무지의 침묵도 있다. 또 한편으로 명상주제와 함께 하는 고귀한 침묵도 있다.
침묵도 의사표현 중의 하나이다. 침묵으로 동의할 수도 있고 침묵으로 거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자 등 인터넷으로 소통되는 세상에서 침묵은 두려운 것이다. 침묵하였을 때 소통을 거부하는 것과 같다. 상대방이 문자 등으로 의사표현을 했을 때 어떤 식으로든지 알려 주어야 한다. 그럼에도 침묵으로 일관한다면 오해 살 수 있다.
침묵을 ‘금’이라 한다. 할말은 하는 사람에게 해당된다. 그러나 침묵이 ‘똥’이 될 수도 있다. 할말을 못하는 침묵은 똥이다. 침묵이 금이 될지 똥이 될지에 대해서는 표현에 달려 있다.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이럴 때 초기경전을 열어 보아야 한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참사람은 첫째, 잘 설해진 것만을 말하고,
둘째, 가르침만을 말하고 가르침이 아닌 것은 말하지 않으며,
셋째, 자애로운 것만 말하고, 자애롭지 않은 것은 말하지 않고,
넷째, 진실한 것만을 말하고, 거짓은 말하지 않네.”(S8.5)
2016-05-2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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