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종요법(同種療法: homeopathy)과 깨달음의 관계는?
욕망을 욕망으로써
종편에서 중국영화 서유기를 우연히 보았다. 거의 끝나갈 무렵 의미 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를 메모해 두었다. 잊어 버리기 전에 스마트폰 메모앱에 저장한 곳이다. 그것은 “욕망을 가져봐야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라는 말이다. 서유기 엔딩자막이 올라 오기 전 나레이터가 한 말이다.
욕망을 가져봐야 욕망에서 벗어 날 수 있다라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욕망에서 벗어나려면 욕망을 맛 보아야 한다는 말로 들릴 수 있다. 이런 논리를 모든 것에 적용할 수 있다. 성냄에서 벗어나려면 성냄을 가져 봐야 한다든가, 도둑질을 벗어나려면 도둑질을 해 보야 한다는 등을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욕망을 욕망으로써 제어 해 보겠다’는 발상일 것이다.
동종요법(同種療法: homeopathy)
욕망을 욕망으로써 제어할 수 있을까? 이런 논리는 동종요법(同種療法: homeopathy)과 유사하다. 동종요법이란 무엇일까? 인터넷백과사전에 따르면 19세기에 특히 널리 쓰인 치료법의 하나로 “같은 것이 같은 것을 치료한다. (like cures like)”라는 말이다. 이 원칙에 기초하여 건강한 사람에게 투여하면 현재 치료하고 있는 질병과 동일한 증상을 일으키게 될 약물이나 치료제를 환자에게 처방하는 치료법이라 한다.
동종요법전문가들은 매우 소량이 투여되어도 작용을 일으킨다고 믿는다. 병을 치료 하기 위하여 의사들이 아주 소량의 독극물을 사용하여 몸의 질병 극복반응을 촉발시켜 병을 치료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몸에 안 좋은 독약을 사용하여 보다 심각한 질병을 낫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주 극소량의 비소를 사용하는 것이다. 이때 비소는 아주 위험한 독소이다.
실생활에서 유사동종요법의 예도 있다. 술꾼들에게는 상식으로 알려져 있는 ‘해장술’ 같은 것이다. 술꾼이 아침에 숙취로 인해 생기는 기분 나쁜 증세를 없애는 방법으로 전날 저녁에 마셨던 양보다 아주 적은 양의 술을 마시는 것도 일종의 동종요법이다. 커피를 너무 많이 마시면 카페인으로 인하여 잠을 못 이룬 사람들이 많다. 이럴 때 동종요법은 어떤 것일까? 아주 적은 양의 커피, 즉 한 두방울을 마시면 잠이 오지 않는 각성상태를 없앨 수 있다는 것이다.
동종요법은 오래 전부터 전승되어온 의학요법이라 했다. 대부분 이종요법을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오늘날 유럽과 인도에서 성행하고 있다고 한다. 프랑스와 영국의 경우 전국민의 36-37% 가량이 동종요법을 사용하고 있을 정도라 한다.
극미량의 우두바이러스를 접종해서 천연두를 퇴치한다든가, 알레르기 환자에게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극미량 반복해서 투여함으로써 면역력이 생기게 하는 것 등 동종요법은 매력적이다. 그러나 잘못 사용하면 치명적일 수 있다.
간화선도 일종의 동종요법
동종요법은 치료법에만 있는 것일까? 놀랍게도 불교에도 볼 수 있다. 불교TV에서 강연한 로버트 버스웰 교수에 따르면 간화선도 일종의 동종요법이라 했다. 의심이라는 작은 번뇌를 이용하여 보다 큰 번뇌를 해결 하고자 하는 것이다. 화두를 이용하여 사량분별과 개념화를 방지함으로서 선종식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을 말한다.
의심은 오장애중의 하나로서 반드시 극복해야 할 해로운 마음의 작용이다. 그럼에도 대혜종고는 오히려 의심을 깨달음으로 이끄는 주요한 힘으로 착상한 것이다. 그런 의심은 어떤 것일까?
선종에서 의심은 우리가 믿음을 가졌다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런 믿음은 다름 아닌 ‘우리가 본래 부처이었다’라는 사실이다. 이를 ‘대신근(大信根)’이라 한다. 우리가 본래불이기 때문에 이미 깨달은 존재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이미 깨달은 존재라면 따로 깨달을 것이 없다. 단지 수행을 통하여 증명만 하면 된다. 그럼에도 마음 한켠에서는 의심이 들 것이다. 정말 내가 깨달은 존재인지 의심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깨달은 자와 증명하려는 자, 이 둘 사이에 긴장이 조성된다는 것이다. 이를 ‘대분지(大憤志)’라 한다. 이 둘 사이의 긴장이 열정적 의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본래불이라는 대신근과 본래불을 향한 대분지 사이에는 항상 긴장 관계가 조성되어 있다. 그것은 내가 이미 깨달은 부처라는 사실을 받아 들이는 믿음과 “왜 깨달은 존재처럼 행동하지 못하는 거지?” “나는 부처야” 하는 믿음과 “나는 망상에 빠져 있어”라는 의심을 말한다. 이것이 ‘대의정(大疑情)’이다. 불안하고 두려워 하는 마음상태를 말한다. 이런 의심으로 깨달음을 이루는 촉매로 활용하는 것이다.
고봉선사에 따르면 이런 믿음과 의심이 일종의 ‘공생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보았다.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는 것이다. 고봉은 의심이 일어나는 정도는 믿음을 일으킬 수 있는 정도와 일치하며, 믿음의 본질은 의심이라고 한 것이다. 이처럼 의심을 계발하면 깨달음을 이끌어 낼 수 있고, 또 의심을 촉매제로 활용하여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의심이라는 해로운 마음의 작용을 이용하여 더 큰 의심을 해결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선종에서 말하는 동종요법일 것이다
성숙이론과 성장이론
선종에서는 대의정을 폭발시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부처님은 선종에서와 같은 동종요법을 말씀 하셨을까? 초기경전을 근거로 하여 동종요법을 살펴 보았다.
첫 번째로 외도의 ‘성숙이론’이다. 성숙이론이란 무엇일까? 부처님 당시 불을 섬기는 외도가 있었다. 이 외도는 부처님에 대하여 “성숙의 파괴자(bhūnahuno)”라고 비난했다. 여기서 성숙(bhūna)이라는 것은 ‘이미 경험한 것에 집착하지 않고 예전에 결코 경험하지 못한 어떤 감각대상을 경험함으로써 여섯 감역에서 지혜의 성장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견해를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감각적인 모든 고통과 쾌락을 경험함으로써 우리의 감각능력 속에서 지혜가 성숙한다는 이론을 말한다. 마치 욕망을 욕망으로써 제거 하는 일종의 동종요법과 같은 것이다.
부처님은 성숙이론에 대하여 전도된 지식이라 했다. 이를 문둥병환자를 비유로 설명했다. 숯불구덩이에 몸을 태워도 그 쾌감에 만족하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이런 이유로 부처님은 감각적 쾌락속에서 성숙한다는 이론을 부정하였다. 그 대신 우리의 감각능력을 제어하고, 지키고, 수호하고, 다스려서 참다운 기쁨을 맛보야 함을 말씀 하셨다.
부처님의 성장이론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세속의 성숙이론과 정반대이다. 세상의 성숙이론은 욕망을 최대한 추구함으로써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정반대로 욕망에서 벗어나야 성장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형상에 탐닉하거나 음악에 탐닉하거나 맛에 탐닉하여 최고의 행복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비워 내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 하셨다.
[세존]
“나는 감각적 쾌락의 탐욕을 버리지 못하고 감각적 쾌락의 갈애에 사로잡혀, 감각적 쾌락의 타는 듯한 고뇌에 불타,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다른 뭇 삶들을 봅니다. 나는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고 그 속에 있는 것들을 즐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마간디야여, 참으로 그 감각적 쾌락의 착하지 못하고 건전하지 못한 것들을 떠나면, 천상의 즐거움을 능가하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속에서 기쁨을 누리므로 그 보다 못한 것을 부러워하지 않고 그 속에서 즐거워하지도 않습니다.” (M75,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천상의 즐거움을 능가하는 기쁨이 있다’고 했다. 천상의 즐거움이란 욕계의 즐거움과 비할 바가 아니라 했다. 그런데 천상의 즐거움을 능가하는 기쁨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주석에 따르면 “네 번째 선정의 기쁨”이라 했다. 사선정에 들었을 때 기쁨과 행복, 평온은 오욕락이 극대화 된 천상의 기쁨과 비할 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기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세상에서 추구하는 것과 정 반대로 욕망을 버리는 데서 온다.
고행자의 오염
두 번째로 외도고행자의 오염이다. 고행자는 고행을 통하여 욕망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이는 욕망이 개입된 것이다. 고행자가 고행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과 의도가 개입 되었을 때 고행을 하면 할수록 더 오염 될 뿐이라는 것이다.
오욕락을 경험한 자는 오욕락에서 벗어 날 수 있을까? 욕망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갈애만 일어날 뿐이다.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어 본 자가 맛있는 음식에 대한 갈애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 세상에서 원없이 감각적 쾌락을 누려 본 자가 감각적 쾌락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마치 욕망으로 욕망을 벗어나려 하는 것과 같다.
욕망은 갈애와 동의어이다. 마셔도 마셔도 갈증 나는 것과 같다. 만족이란 없는 것이다. 식욕, 성욕, 재물욕, 안락욕, 명예욕을 벗어나기 위해 마음껏 누려 보지만 갈증만 일어날 뿐이다. 결코 만족할 수 없다. 그렇다고 고행으로 해결될까? 고행으로 해탈할 수 있을까?
부처님 당시 외도들은 극단적 고행으로 본래 청정한 삶을 실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고행함으로써 해탈하고자 하는 것이다. 어떤 고행자들일까? 부처님은 “니그로다여, 세상의 고행자는 벌거벗고, 편의를 거부하고, 손바닥을 핥고, 오라는 초대를 거부하고, 머물라는 환대도 거부하고…”(D25.6) 라 했다. 오로지 생야채만을 먹거나, 머리카락과 수염을 뽑아 버리거나, 못이 박힌 침대를 사용하거나, 앉는 것을 거부하고 계속 서 있거나, 하루 세 번 목욕을 실천하며 사는 삶 등을 말한다. 자신의 몸을 학대하여 본래청정으로 돌아 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부처님은 극단적 고행을 부정하였다. 이는 초전법륜경에서 “스스로 고행을 일삼는 것도 괴로운 것이며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S56.11)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더 구체적으로 “니그로다여, 이와 같이 고행에 의한 싫어하여 떠남이 성취되었다고 하더라도, 고행에 의한 싫어하여 떠남에는 여러 가지 오염이 있다고 나는 말합니다.”(D25.7)
부처님은 고행자의 ‘오염’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고행으로 청정해지고자 하지만 고행에 의하여 싫어하여 떠남, 즉 해탈을 이룰 수 없음을 말한다. 그 중에 ‘의도’가 있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니그로다여, 세상에 고행자가 고행을 실천하며, 그 고행으로 의도하는 것이 이루어졌다고 만족합니다. 니그로다여, 세상에 고행자가 고행을 실천하며, 그 고행으로 의도하는 것이 이루어졌다고 만족한다면, 니그로다여, 이것도 고행자의 오염인 것입니다.”(D25.7, 전재성님역)
이는 고행자의 의도에 대한 것이다. 의도를 가지고 고행한 것 자체가 오염이라는 말이다. 왜 그런가?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른 누가 나와 같은 이 고행을 하겠는가.’라고 만족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만으로 충분하다.’라고 이와 같이 의도하는 것이 완결된다.” (Smv.836) 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것은 이교도들과 관계된 것이다.
의도에 관한 고행은 불교의 관점에서도 설명될 수 있다. 대표적으로 ‘두타행’을 들수 있다. 두타행자 중의 일부는 “‘다른 누가 나처럼 두타행을 할 수가 있겠는가?’라고 만족하여 의도한 것을 채울 수 있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의도적 고행, 이득과 명예와 칭송을 위한 고행 등을 비판하였다. 이런 고행은 해탈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괴로움과 오염으로 이끄는 것이라 했다.
세속에서는 욕망을 욕망으로 제어할 수 있다고 한다. 또 외도들은 고행으로 욕망을 제어하여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모두 극단적 방식이다. 욕망과 관련해서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탐착을 일삼는 것은 저열하고 비속하고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의 소행으로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S56.11) 라고 분명히 말씀 하셨고, 의도를 가진 고행과 관련해서는 “스스로 고행을 일삼는 것도 괴로운 것이며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S56.11) 라고 분명히 말씀 하셨다. 이렇게 본다면 두 극단은 모두 갈애에 기반을 둔 것이다.
법도의 파괴(setughāto)
세 번째로 법도의 파괴이다. 성교를 성교로서 극복할 수 있을까? 성교를 해보지 않은 사람이 성교에 대한 갈애가 강렬할 때 성교를 하면 갈애가 극복될 수 있을까? 아난다는 “누이여, 이 몸은 성교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성교를 법도의 파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A4.159) 라 했다. 왜 성교에 대하여‘법도의 파괴(setughāto)’라 하였을까?
아난다는 아픈 수행녀의 요청으로 처소에 갔다. 그런데 수행녀는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아픈 채 하고 있었다. 아난다는 의도를 알아차리고 이렇게 말하였다.
[아난다]
“누이여, 이 몸은 자양분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자양분에 의존하여 자양분을 극복해야 합니다. 누이여, 이 몸은 갈애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갈애에 의존하여 갈애를 극복해야 합니다. 누이여, 이 몸은 자만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자만에 의존하여 자만을 극복해야 합니다. 누이여, 이 몸은 성교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성교를 법도의 파괴라고 말씀하셨습니다.”(A4.159, 전재성님역)
우리 몸이 부모의 성교에 의해서 태어났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래서 갈애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라 했다. 그런데 자양분, 자만, 성교 이렇게 세 가지 중에 동종요법으로 극복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성교이다.
몸을 지탱하려면 음식을 먹어야 하는데 적당량을 알고 먹으면 “자양분에 의존하여 자양분을 극복해야 합니다.”라는 말이 성립된다. 자만은 아라한이 되면 소멸된다. 그래서 “자만에 의존하여 자만을 극복해야 합니다.”라는 말도 성립된다. 그러나 성교는 성교로서 극복 될 수 없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이와 같이 일어난 현재의 갈애를 통해 윤회의 뿌리가 되는 이전의 갈애를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그 현재의 갈애는 비록 궁극적로는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지만 해탈에 기여하는 것이므로 섬겨야 하는 것인데, 그것은 결생(結生: patisandhi)을 초래하지는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은 현재의 갈애마저 극복해야 한다.” (Mrp.III.136 라 되어 있다.
성교를 제외한 음식과 자만은 동종요법식으로 극복 될 수 있다. 음식을 먹는 것이 욕망에 따른 것이긴 하지만 몸을 지탱해 주기 때문에 해탈에 기여 해 주는 측면이 있다. 자만 역시 해로운 마음의 작용이긴 하지만 해탈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서 자만에 의존하여 자만을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성교는 성교에 의존하여 성교를 극복할 수 없다. 따라서 청정해지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해탈할 수도 없다. 성교를 하면 할수록 갈애만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성교하는 것에 대하여 음식과 자만과 달리 ‘법도의 파괴’라 했다. 수행승이나 수행녀가 성교를 하면 승단추방죄로 처벌하였다.
계율에 바탕을 둔 삶을 살았을 때
세상에서는 “욕망을 가져봐야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라는 말을 한다. 이 말이 맞는 것일까? 맞는 말이긴 하지만 매우 위험한 요소가 있다. 이는 일종의 동종요법이기 때문이다.
한잔의 해장술은 이전날 과음으로 인한 숙취를 해소해 준다. 이것도 일종의 동종요법이다. 미량의 독으로 독을 다스린다는 식의 동종요법은 “같은 것이 같은 것을 치료한다”라는 데서 유래했다. 그런데 이런 동종요법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세계에서도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간화선은 대표적인 동종요법이다. 의심이라는 작은 번뇌를 이용하여 보다 큰 번뇌를 해결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빠알리니까야에 따르면 동종요법은 외도에서 볼 수 있다. 이미 경험한 것에 집착하지 않고 예전에 결코 경험하지 못한 어떤 감각대상을 경험함으로써 여섯 감역에서 ‘지혜의 성장’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성숙이론’과 고행에 의하여 청정한 삶이 실현될 수 있다고 보는 ‘규범과 금계에 대한 집착’이 대표적이다. 이와 같은 양극단에 대하여 부처님은 성현의 가르침도 아니고 무익한 것이라 했다.
부처님도 동종요법을 말씀 하셨다. 그러나 향상과 성장을 가져 올 때 가능한 것이다. 자양분을 섭취하고 자만을 갖는 것이 갈애가 개입되어서 해로운 것이긴 하지만 궁극적으로 향상과 성장으로 이끈다면 ‘갈애에 의존하여 갈애를 극복 할 수 있다’(A4.159)고 말씀 하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영화에서처럼 “욕망으로 욕망을 벗어날 수 있다”라는 말은 성립한다.
갈애에 의존하여 갈애를 극복 할 수 있으려면 성장으로 이끄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은 계율에 바탕을 둔 삶이다. 그래서 네 가지 금계에 의한 제어, 즉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지 않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산출된 것을 갈망하지 않는 삶을 산다면 상승하지 퇴락하지 않는다고 했다. 또 상승하는 삶을 살려면 “고귀한 계율가운데 잘못을 잘못으로 보고 앞으로 그러지 않도록 여법하게 대처하면, 성장이 있기 때문입니다.”(D25.14) 라 했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사는 것만이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2016-04-1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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