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직전에 귀에다 대고 예경지송을
사람들 사는 곳에 행복과 불행, 이익과 불이익, 칭찬과 비난, 명예와 불명예가 있다. 삶의 과정에서 늘 발생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행복과 불행이 직접적으로 와 닿는다. 요즘 갑자기 연락을 받으면 ‘경사’와 ‘조사’에 대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
장례식장에서
가능하면 조사에는 참석하려고 노력한다. 경사는 즐거운 일이기 때문에 하객도 많고 참석하는 사람도 많지만, 조사의 경우 슬픈 일 이어서일까 특별한 관계가 아니면 참석을 꺼려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소식을 접하면 특별한 약속이 없는 한 참석한다. 같은 모임의 어느 위원의 부친상도 그런 케이스중의 하나였다.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불교관련 단체의 장을 맡고 있는 위원의 부친상은 불교식이었다. 스님과 함께 참석하였다. 스님은 목탁을 들고 염불을 했다. 얇은 법요집이 있는데 그 중에 ‘무상게’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한글로 되어 있는데 꽤 긴 길이의 게송이다. 내용을 보니 불교경전에서 보았던 것들이 많다. 이외 이곳 저곳에서 가져왔는데 주로 무상과 극락왕생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다.
대승무상게를 보면
무상게를 찾아 보았다. 장례식장에서 보았던 한글로 된 게송과는 다르다. 한문으로 되어 있는데 우리말로 번역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말 무상게(無常偈)
오늘 열반의 세계로 떠나시는 OOO영가이시여, 내 이제 영가와 인연이 깊어 무상게의 미묘한 법문을 다시 또 설하오니 일심으로 마음 비워 받아지니옵소서。 무상게는 열반에 드는 중요한 문이며 고통바다 건너가는 자비로운 배라,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도 이 게를 의지하여 열반에 드셨고, 모든 중생들도 이 게로써 고통바다를 건너 갑니다。
OOO 영가이시여, 그대 이제 육근과 육진을 벗어 버리고 신령한 아름아리(心識)만
그대로 드러나 부처님의 위없는 깨끗한 가르침을 받게 되니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OOO영가이시여, 겁(劫)의 불길이 활활 불타오를 때는 삼천대천세계가 다 무너지고 수미산도 쓰러지고 큰 바다도 말라 없어져 남을 것이 없거늘, 어찌 하물며 이 몸의 나고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근심과 슬픔과 괴로움을 멀리 떠나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OOO영가여, 털과 손톱과 이빨과 가죽과 살과 힘줄과 뼈와 골수와 때와 빛은 모두 땅으로 돌아가고, 침과 가래와 콧물과 고름과 피와 진액과 땀과 눈물과 정기와 대변과 소변같은 것은 모두 물로 돌아가고, 따뜻한 기운은 불로 돌아가고, 움직이고 숨쉬는 기운은 바람으로 돌아가서, 네가지 원소(四大)가 각각 흩어져 가는 것이니, 오늘의 죽은 몸은 어디에 있습니까?
OOO영가이시여, 네가지의 원소로 이루어진 그대의 몸은 허망하고 거짓된 것이니
애석하게 여기지 마십시요。영가께서는 비롯함이 없는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무명으로 인하여 행이 있고, 행을 인연하여 식이 있고, 식을 인연하여 명색이 있고, 명색을 인연하여, 육입처가 있고, 육입처를 인연하여 감촉이 있고, 감촉을 인연하여 느낌이 있고, 느낌을 인연하여 애착이 있고, 애착을 인연하여 취함이 있고, 취함을 인연하여 생존이 있고, 생존을 인연하여 태어남이 있고, 태어남을 인연하여 늙고 죽고 근심하고, 슬퍼하고, 번민하고, 괴로워하나니, 무명이 없어지면 행도 없어지고 , 행이 없어지면 식이 없어지고, 식이 없어지면 명색도 없어지고, 명색이 없어지면 육입처도 없어지고, 육입처가 없어지면 감촉도 없어지고, 감촉이 없어지면 느낌도 없어지고, 느낌이 없어지면 애착도 없어지고, 애착이 없어지면 취함도 없어지고, 취함이 없어지면 생존도 없어지고, 생존이 없어지면 태어남도 없어지고, 태어남이 없어지면 늙고 죽고 근심하고 슬퍼하고 번민하는 괴로움도 없어지나니라。
모든 존재는 본래부터 항상 스스로 적멸한 모습을 가졌으니 불자가 도를 행해 다하면 오는 세상에는 부처님이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무상하며 그 모두가 생겼다가 없어지는 현상이로다。 생겼다가 없어짐이 다 없어지면 열반의 즐거움이 되나니라。 거룩하신 부처님께 귀의하오며, 거룩하신 가르침에 귀의하오며, 거룩하신 스승님께 귀의하오며 과거의 보승여래이시며, 마땅히 공양받을 성인이시며, 모든 것을 바르게 다 아시는 성인이시며, 밝은 지혜와 바른 행을 고루 갖추셨으며, 성스러운 열반에 드셨으며, 세상의 모든 일을 아시며, 사람 가운데 가장 높으시며, 자기를 잘 다스리는 대장부이시며, 하늘과 인간의 스승이신 부처님 세존께 귀의하옵소서。
OOO영가이시여, 몸과 마음의 두꺼운 껍질을 벗어버리고 신령하게 아는 것이 그대로 들어나 부처님의 위없는 깨끗한 계를 받으니 어찌 기쁘지 않으며 어찌 기쁘지 않으리요。 천당이나 부처님의 세계에 생각 따라 가서 태어날 것이니 어찌 기쁘고 기쁘지 않겠습니까。 서쪽에서 오신 달마조사 깊은 뜻이 가장 분명하니 자기 마음 맑히면 마음의 고향 나타나리라。 오묘한 본체 맑고 맑아 머무는 곳 없으니 산과 물과 땅 모든 것이 참 모습을 보이도다。
(대승무상게)
대승무상게를 보면 육신도 무상할 뿐만 아니라 삼천대천세계도 무상함을 말하고 있다. 사대로 이루어진 육신은 사대로 흩어지고 말지만 신령한 알음알이, 즉 심식(心識)만은 남는다고 했다. 어떤 변하지 않는 마음의 실체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어긋난다.
조건발생한다고 했건만
맛지마니까야 ‘갈애의 부숨에 대한 큰 경(M38)’에 따르면 어부의 아들 사띠(sati)가 부처님에게 들은 것이라면서 사람들에게 “의식이 유전하고 윤회하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M38) 라고 떠들고 돌아다녔다. 이에 부처님은 “이 어리석은 자여, 누구에게 내가 그런 가르침을 설했다는 것인가? 어리석은 자여, 조건에서 의식이 생겨난다는 것, 즉 조건 없이는 의식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차례 법문으로 설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어리석은 자여, 그대는 스스로 잘못 해석하여 나를 잘못 대변하고, 스스로를 해치고 많은 해악을 쌓는다. 그것은 실로 그대를 오랜 세월 불이익과 고통으로 이끌 것이다.”(M38) 라고 사띠비구를 나무랐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마음은 조건발생하고 조건소멸함을 말한다. 그럼에도 ‘마음이 내것’이라 하거나 ‘마음안에 자아가 있다’는 등 ‘유신견’을 갖는다면 어떤 변치 않는 마음이 유전하고 윤회하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승무상게를 보면 연기의 가르침도 보인다. 연기의 순관과 역관이 설명되어 있다. 부처님은 이 연기법으로 깨달음을 이루었다. 무상게에서도 연기법을 알게 되면 부처가 될 것이라 했다. 그러면서 유명한 한문게송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무상하며 그 모두가 생겼다가 없어지는 현상이로다。 생겼다가 없어짐이 다 없어지면 열반의 즐거움이 되나니라.(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를 소개하고 있다. 사실상 이 한문게송이 무상게의 핵심이다. 이 한문게송을 말하기 위해 전후로 교훈적 이야기를 배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경지송을 보니
최근 책을 한권 샀다. 전재성박사가 편역한 ‘예경지송’이다. 초기불교경전에서 가려 뽑은 138개의 경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종의 법요집이라 볼 수 있다. 내용을 보면 불자들의 신행생활과 관련이 있다. 사원에서 행하는 예불문에서부터 불자들의 삶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통과의례에 대한 것이다.
예경지송을 보면 통과의례와 관련 된 내용들이 나열 되어 있다. 즉, 갓난아이의 명명식, 생일, 결혼식, 장례식, 이사, 집이나 가게의 개업, 건물의 신축이나 개축 등이다. 이뿐 만 아니라 액난의 소멸, 악령의 퇴치, 전승의 기원, 전쟁에서 무사, 심지어 국가단체의 안녕이나 국태민안 등에 대한 것도 포함 되어 있다.
예경지송은 열 가지 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일반예불품, 수호경전품, 지송경전품, 성찰수행품, 명상수행품, 아비담마품, 공덕회향품, 통과의례품, 추모경송품, 요청헌사품 이렇게 열 개의 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중 장례식과 관련하여 ‘추모경송품’을 열어 보았다.
추모경송품이 있는데
테라와다불교에도 장례식용 게송이 있다. 추모경송품을 보면 모두 열 한 개의 경송이 소개 되어 있다. 이를 나열해 보면 ‘죽음에 대한 새김의 이치’, ‘아라까의 경’, ‘산의 비유의 게송’, ‘담장 밖의 경’, ‘가신 님들을 위한 공덕회향’, ‘고귀한 부의 게송’, ‘원리의 결정에 대한 경’, ‘세 가지 특징 등의 게송’, ‘연기의 경송’, ‘보리수 아래에서의 게송’, ‘한밤의 슬기로운 님의 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경송의 특징은 철저하게 초기경전을 근거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초기경전에서 경송을 그대로 가져 온 것도 있지만 이곳 저곳에서 필요한 것을 가져와 조합해 놓은 것도 있다.
무서운 업(業)의 법칙
예경지송에서 추모경송품은 마치 대승무상게를 보는 듯 하다. 대승무상게가 장례식장에서 염불할 때 사용되듯이 테라와다에서는 추모경송품을 독송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추모경송품 해제글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불교도들에 의해 거행되는 장례의식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배경에 놓인 철학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러한 이해가 없이 단지 형식적으로 치루는 것은 가신 님에게나 장례를 치루는 자에게나 유익하지 않다. 그 가르침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인간은 사후에 서른 한 가지 존재의 세계에 다시 태어나며 윤회한다. 그의 윤회는 현재의 삶 혹은 전생의 삶에서 행한 선악의 행위에 조건지어져있다. 즉, 그의 삶은 이 생이나 과거의 생에 행한 선악에 달려 있어, 그가 이 생에서의 삶 동안에 도덕적으로 선행을 했다면, 천상세계에 태어나 안락한 삶을 보낼 것이다. 그렇지 않고 그가 악한 삶을 살았다면, 네 가지 악처인 지옥이나 축생계나 아귀계나 아수라계에 태어날 것이다. 그래서 다양한 고문이나 기아나 갈증 등에 시달릴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업사상에 따르면, 선행을 행한 자도 그가 보다 높은 세계에 태어날지 아니면 악처에 태어날지, 그가 어디에 태어날 지를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만약에 과거생에서 행한 악업이 영향을 끼치면, 그는 악처에 태어날 수 있다. 만약 그가 천상계에 태어났다면, 우리는 그의 삶을 위해 도울 것이 없다. 또한 그가 지옥이나 축생계나 아수라계에 태어났다면, 우리가 그를 도울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아귀계에 태어났다면, 우리는 그를 도울 수 있다. 아귀계에서는 충분히 먹을 것, 마실 것과 입을 것이 없어서 항상 굶주리고 기갈이 있고 생필품은 모자란다. 이때에 장례후 의례를 통해 그러한 존재를 도울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가신 님이 어디에 태어났는지 모르므로 죽음이 일어날 때, 장례를 치루어, 만약에 그가 아귀계에 태어났다면, 우리는 적어도 우리 자신의 공덕을 쌓을 수 있다. 따라서 임종자의 죽음에 임박해서 수행승들을 초대하여, 임종자의 귀에 예경지송을 들려 주는 것이 중요하다.
(예경지송 추모경송품 해제, 전재성님)
해제글을 보면 업의 법칙이 매우 무서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생에서 선행공덕을 쌓았다고 하더라도 선처에 태어나는 것이 보장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과거생에 어떤 악업을 저질렀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망자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있다. 아귀계에 태어났다면 제사를 지내 주는 것이다. 이는 양자에게 이익이다. 굶주리고 헐벗은 망자는 배불리 먹어서 좋고 살아 있는 자는 공덕 지어서 좋은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 있을 때 도움을 주는 것이다. 임종직전에 귀에다 대고 ‘예경지송’을 들려 주는 것이라 했다. 예경지송을 듣고 편안한 마음을 가졌을 때 선처에 태어날 가능성이 더 높음을 말한다.
테라와다 무상게를 보면
테라와다 예경지송은 어떤 것일까? 추모경송품에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죽음에 대한 새김의 이치’이다. 마치 대승무상게처럼 이곳 저곳에서 경이나 게송을 가져와서 구성된 것이다. 해제에 따르면 “담마빠다 등의 여러 초기경전에 흩어져 있는 죽음에 대한 단상을 취합하여 만들어진 경송으로 죽음에 대한 명상이나 임종 시의 수호를 위한 수호경으로 사용된다.”(93p) 라고 설명되어 있다.
‘죽음에 대한 새김의 이치’경송은 죽음을 맞이 한 자에게 삶의 불확실성과 죽음의 확실성을 일깨워 주기 위한 것이라 했다. 또한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실천하기 위한 지각을 불러 일으키는 일종의 일종의 수호경이라 볼 수 있다. 경전적 근거는 청정도론(Vism.197), 법구경(Dhp41), 앙굿따라니까야(AN.V.288), 법구경(Dhp18), 상윳따니까야(SN.I,6)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경지송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죽음에 대한 새김의 이치’를 송출하오니
1.
나의 삶은 견고하지 않지만
나의 죽음은 견고하고
나의 죽음은 피할 수 없으니
나의 삶은 죽음을 끝으로 하고
나의 삶은 불확실하지만
나의 죽음은 확실하느니라.
2.
뭇삶은 행위의 소유자이고
행위의 상속자이고
행위를 모태로 삼는 자이고
행위를 친지로 하는 자이고
행위를 의지처로 하는 자로서
그가 지은 선하거나 악한 행위의 상속자이니라.
3.
선행을 하면, 두 곳에서 즐거워하니
이 세상에서도 즐거워하고
저 세상에서도 즐거워하나니
‘내가 선을 지었다’라고 환호하고
좋은 곳으로 가서 한층 더 환희하느니라.
4.
아! 머지않아 이 몸은
아! 쓸모없는 나무조각처럼
의식 없이 버려진 채
실로 땅 위에 눕혀질 것이니라.
5.
형성된 것들은 실로 무상하여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들이니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들의
지멸이야말로 참으로 지복이니라.
(죽음에 대한 새김의 이치, 예경지송, 전재성님역)
예경지송 추모경송품의 ‘죽음에 대한 새김의 이치(maraṇassatiya)’를 보면 초기 경전과 논서 등 이곳 저곳에서 가져와 이루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후대에 누군가 종합한 것이다. 이것을 테라와다불교전통에서는 장례용으로 활용하고 있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
게송을 보면 무상에 대한 것이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숫따니빠따 ‘화살의 경(Sn3.8)’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화살의 경’에 따르면 “이 세상에서 결국 죽어야만 하는 사람의 목숨은 정해져 있지 않아 알 수 없고, 애처롭고, 짧아 고통으로 엉켜있습니다.” (stn574) 라고 시작된다. 가슴에 와 닿는 말은 ‘목숨은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자연사 뿐만 아니라 사고사 등 죽음은 도처에 깔려 있음을 말한다. 이어지는 게송을 보면 “태어나 죽지 않고자 하나, 그 방도가 결코 없습니다. 늙으면 반드시 죽음이 닥치는 것입니다. 뭇 삶의 운명은 이런 것입니다.” (stn575) 라 되어 있다.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의 운명임을 말한다.
나는 업의 상속자
두 번째 게송을 보면 행위에 대한 것이다. 현재 나는 행위의 상속자임을 말한다. 여기서 행위는 빠알리어 ‘깜마(kamma)’를 말하는데 한자어로 업(業)이라 한다. 어떤 존재이든지 자신이 지은 행위에 의해 적합한 세계에 태어남을 말한다. 그래서 선업을 지으면 선과보를 받고, 악업을 지으면 악과보를 받는다는 것이다.
생멸의 이치를 알게 되었을 때
죽음에 이르면 오온이 멸하게 된다. 육체를 이루고 있는 지수화풍 사대는 흩어지고 남는 것은 업 밖에 없다. 각자 지은 업에 따라 적합한 세계에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태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청정한 삶을 살아야 한다.
생멸의 이치를 알게 되었을 때 다시 태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게송으로 “형성된 것들은 실로 무상하여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들이니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들의 지멸이야말로 참으로 지복이니라.”라 했다. 대승무상게의 뼈대를 이루는 “제행무상 시생멸법 생멸멸이 적멸위락(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과 같은 내용이다.
장례식장에서 염불을 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무상게이다. 한문무상게는 ‘모든 형성된 것들은 무상하여 생겨나고 사라지고 만다’라는 무상게에 근거하고 있다. 테라와다의 예경지송 역시 무상게가 핵심이다. 대승과 테라와다 모두 무상게가 뼈대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경조사에 예경지송을
각종 통과의례에서도 활용 될 수 있는 것이 예경지송이다. 특히 임종에 이른 자의 귀에 예경지송을 들려 주면 좋다고 했다. 또한 장례식장에서 예경지송을 독송하는 것은 커다란 공덕을 짓는 것이라 했다. 이런 예경지송은 갓난아이의 명명식, 생일, 결혼식, 장례식, 이사, 집이나 가게의 개업, 건물의 신축이나 개축 등에도 활용된다. 사실상 생활경전이다. 그리고 수호경이다.
한국의 불자들은 아침 저녁으로 천수경을 독송한다. 금강경 등 대승경전을 독송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생활경전은 각종 의식에도 활용된다. 그런데 부처님 당시부터 불자들을 위한 예경지송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를 최근 전재성님이 편역한 예경지송으로 알게 되었다. 앞으로 불자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경사나 조사에 이 예경지송을 활용하면 어떨까?
2016-06-30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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