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K교수의 유전자연기론은 무작설(akiriya)

담마다사 이병욱 2016. 7. 27. 12:20

 

K교수의 유전자연기론은 무작설(akiriya)

 

 

 

승려들도 과학을 공부해야 한다?

 

과학만능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전의 것은 구식으로 보인다. 불과 이십여년 전까지만 해도 인터넷을 접하기 힘들었다. 또 휴대폰 역시 접하기 힘든 귀중한 물건이었다. 그러나 불과 이십여년 사이에 인터넷은 일상화 되고 사람들은 수시로 현실세계와 가상세계를 오가며 살아 가고 있다. 더구나 손안의 컴퓨터라 하여 이동통신단말기, 즉 스마트폰을 하나씩 가지고 다니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이십여년전 살았던 삶이 원시적이고 지혜가 없고 무지한 삶이었을까?

 

과학이 발달했다고 하여 정신세계까지 풍요로워진 것은 아니다. 고도정보화사회가 되었다고 하여 인성까지 고도화 된 것은 아니다. 물질과 정신세계는 엄연히 다르다. 과학은 물질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럼에도 물질을 기반으로 과학으로 모든 것을 재단하려는 자들이 있다. 그것도 과학적 시각으로 불교를 해석하려는 시도가 있다.

 

포항공대 K교수는 자신의 환망공상시리즈에서 승려들이 과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는 생물학·뇌과학·물리학 등 현대과학문명을 좇아가려면, 죽도록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라 했다. 그렇다면 과학이 무엇인가? 물질을 탐구하는 것이 과학이다. 정신영역인 종교와는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과학을 죽도록 공부해야 현대를 사는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출 수 있다는 것이다. 

 

유전자연기론은 단멸론

 

K교수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이는특히 진화론을 연구하는 스님들이 배출되어야 한다.”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불교를 진화론적 시각으로 보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업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이다. 업의 가르침을 부정하고 유전자로서 불교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진화연기론이다.

 

과학론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정한다. 삼법인 등의 근본인정할지 몰라도 업과 내생, 윤회와 같은 부처님의 핵심가르침을 부정한다. 이런 가르침이 실려 있는 초기경전에 대하여 낡아 빠지고 케케묵은 것으로 간주한다. 과학의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 보는 것이다.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과학의 시대에 2500년 전에 사유했던 것들을 전근대적 산물로 보는 것이다.

 

K교수가 간과한 것이 있다. 그것은 부처님이 물질에 대한 탐구 보다는 정신영역에 대하여 인식론적인 탐구를 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과학에 입각하여 유전자로 업의 가르침을 대체 하려는 것은 넌센스이다. 물질을 기반으로 한 과학은 정신적 현상이나 인식에 대하여 설명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교를 물질적인 것으로 환원하여 설명하려는 시도는 훼불하는 것과 다름 없고 사실상 외도의 사상이다. 물질을 기반으로 한 과학적으로 불교를 해석하려는 시도는 사실상 단멸론이나 다름 없다.

 

무작설(akiriya)이란 무엇인가?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물질을 기반으로 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단멸론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부처님 당시에도 단멸론이 기승을 부렸다는 사실이다. 이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앙굿따라니까야 이교도의 경에 이런 부처님의 말씀이 있다.

 

 

Tīimāni, bhikkhave, titthāyatanāni yāni paṇḍitehi samanuyuñjiyamānāni [samanuggāhiyamānāni (syā. ka. ka.)] samanugāhiyamānāni samanubhāsiyamānāni parampi gantvā akiriyāya saṇṭhahanti. Katamāni tīi?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세 가지의 이교도의 관점이 있는데, 그것들은 현자에 의해 조사되고, 탐구되고, 철저하게 연구되고, 단지 전승 때문에 그것들을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무작설로 드러난다. 세 가지란 무엇인가?”

 

(Titthāyatanādisutta-이교도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3.61,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말씀 하신 세 가지 이교도의 관점이란 숙작인설과 존우화작설과 무인론을 말한다. 그런데 이 세가지에 대하여 무작설(akiriya)’이라 했다. 아끼리야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지음 없음이라 번역했다. 빅쿠보디는 non-doing’이라 했다.

 

무작설이란 무엇일까? 각주에 따르면 인간의 도덕적인 삶을 부정하는 강한 결정론이나 강한 비결정론을 무작설이라 한다.”라고 정의해 놓았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외한 모든 사상은 사실상 무작설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은 자신을작론자라 했다. 작론자는 업과 업의 과보를 말하는 자를 말한다. 이는 머리털로 만든 옷의 경에서 부처님이 수행승들이여, 현세의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인 나도 업을 설하고 있고 정진을 설하고 있다.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어리석은 자, 막칼리는 업도 없고 업의 과보도 없고 정진도 없다고 그것을 거부한다.”(A3.135) 라 했다. 부처님은 나도 업을 설하고 있고라 했다. 업을 설한다고 하여 작론자(kiriyavādin)’라 하는 것이다.

 

무작론자는 업과 업의 과보를 부정하는 자들이다. 업과 업보를 부정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한마디로 도덕무용론이 된다. 업의 과보를 부정하는 자들은 도덕적으로 금하는 것들을 서슴없이 저지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 막칼리 고살라가 있다. 막칼리 고살라는 업도 없고 업의 과보도 없다.”(A3.135) 라고 했다. 이런 무작론자에 대하여 부처님은 어떠한 수많은 수행자의 설법자의 가르침 가운데 막칼리 고살라의 가르침을 최악이라고 한다.”라 했다. 업과 업보를 부정하는 단멸론이 최악임을 말한다.

 

세 가지 무작설이 있는데

 

경에서는 무작론에 대하여 대하여 세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공통적으로 느낌에 대한 것이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한 부류의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어떤 사람이 어떠한 느낌이라도, 즐겁거나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체험하더라도라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숙작인설(pubbekatahetūvāda)

그 모든 것은 전생이라는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sabba ta pubbekatahetū)

 

2) 존우화작설(issaranimmāahetuvāda)

그 모든 것은 절대자라는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sabba ta issaranimmānahetū)

 

3) 무인론(ahetuavāda)

그 모든 것은 원인 없이 조건 없이 만들어진 것이다.

(sabba ta ahetuappaccayā)

 

 

업과 업의 과보를 부정하는 세 가지 무작설은 대표적인 외도사상이다. 모든 것을 전생의 업보 탓으로 보는 숙작인설, 모든 것은 신의 뜻이라 보는 존우화작설, 모든 것은 원인과 조건 없이 생겨났다는 무인론을 무작설이라 한다. 이에 반하여 원인과 조건과 결과에 따른 연기법으로 업과 업의 과보를 설명하는 것을 작론이라 한다.

 

숙작인설은 무엇인가?

 

숙작인설은 자이나교 니간타사상에 대한 것이다. 자이나교주 마하비라는 사물들이 부분적으로는 결정되고 부분적으로는 비결정된다.”고 주장했다. 강한 결정론과 강한 비결정론의 조합으로서 업에 관한 한 강한 결정론적 입장을 취한다. 강한 결정론은 결국 무작설로 간주 된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전생이라는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숙작인론의 구체적 내용은 무엇일까? 경에서는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더라도 전생의 원인 때문일 것이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더라도 전생의 원인 때문일 것이고, 청정하지 못한 삶을 살더라도 전생의 원인 때문일 것이고, 거짓말을 하더라도 전생의 원인 때문일 것이고, 이간질을 하더리라도 전생의 원인 때문일 것이고, 욕지거리를 하더라도 전생의 원인 때문일 것이고, 꾸며대는 말을 하더라도 전생의 원인 때문일 것이고, 탐욕스럽더라도 하더라도 전생의 원인 때문일 것이고, 분노하더라도 하더라도 전생의 원인 때문일 것이고, 잘못된 견해를 지니더라도 하더라도 전생의 원인 때문일 것이다.’

 

(Titthāyatanādisutta-이교도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3.61, 전재성님역)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를 하는 것에 대하여 전생의 원인 때문이라 보는 것이다. 잘못된 견해를 지니더라도 전생탓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전생탓으로 돌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경에서는 이것은 해야 하고 이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도나 정진이 없는 셈이다.”라 했다. 모든 것을 전생의 원인으로 돌렸을 때 사실상 수행할 필요성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수행자라고 칭할 타당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라 했다.

 

동시적 인과에 대하여

 

숙작인론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MN36.21(IV230-31)을 참고하라고 했다. 찾아 보니 몰리야 씨바까의 경이다. 경에 따르면 씨바까가 부처님에게 느낌에 대하여 모든 것은 과거의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라는 견해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 본다. 이에 부처님은 느낌에 대하여 1)담즙, 2)점액, 3)바람, 4)체질, 5)계절의 변화, 6)불운한 사건, 7)우연한 피습, 8)업보의 성숙에 대해 설명한다. 부처님은 왜 이렇게 설명했을까? 지금 격고 있는 느낌은 업보의 성숙에 기인한 것도 있지만 반드시 과거의 행위에 의한 과보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인과가 반드시 선후관계만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동시적 인과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동차사고가 났을 때 전생의 업에 대한 과보로 본다면 숙명론이다. 그러나 동시적 인과로 본다면 불운한 사건 또는 우연한 피습으로 볼 수도 있다.

 

사람이 살다 보면 병이 나서 고통을 받을 수 있다. 또 불운한 사고로 인하여 장애가 일어날 수 있다. 또 장애자로 태어나 한평생 고통스럽게 살아 갈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전생에 지은 업 때문이라 볼 수 있을까? 분명한 사실은 부처님은 숙작인설을 부정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담즙 등 여덟 가지로 현재의 느낌을설명했다. 그 중에 업보의 성숙이 들어가 있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 각묵스님은 각주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물론 여기서 보듯이 세존께서는 이전에 지은 업이 병이 생기는 하나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으신다. 그리고 이것은 전생의 행위에 기인한 것이라는 그들의 주장과 같거나 유사해 보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업의 익음[業異熟]이라는 이 여덟 번째의 원인은 신통지에 의해서만 알아지는 것이기 때문에 담즙 등의 7가지 괴로움의 직접적인 원인에 대한 간접적인 원인이 된다고 밖에는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업의 익음은 괴로움의 발생에 충분조건이 아닌 필요조건일 뿐이며, 그것도 다른 여러 조건들과 결합하여 일어나는 것일 뿐이라고 이해해여 할 것이다.”(초불연 상윳따 4 390번 각주, 각묵스님)

 

 

즐겁과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 났을 때 느낌이 일어날 마한 조건이 성숙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몸에 병이 났다면 담즙, 점액, 바람, 계절 등의 영향이 있을 수 있다. 이런 조건은 전생에 지은 행위와 무관한 것이다. 또 예기치 못한 사고, 우연한 피습 등 역시 전생에 지은 행위와 무관한 것이다. 그렇다고 모두 무관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여덟 번째 항목에 업의 성숙항목이 들어가 있다.

 

각묵스님은 업의 익음(業異熟)에 대하여 충분조건이 아니라 필요조건이라 했다. 그것도 신통지가 있어야만 알 수 있는 것이라 했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 겪고 있는 즐거움과 괴로움, 행복과 불행은 반드시 전생 탓만 아닐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맛지마니까야 각주에서 숙명론에 대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은 느낌의 존재는 과거의 행위의 결과 때문이 아니라 현재의 행위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느낌은 업의 작용도 아니고 업의 결과도 아니다라고 말씀 하셨다.”(맞지마니까야 1888번 각주) 라고 설명했다.

 

지금 겪고 있는 행복과 불행은 전생에 지은 업에 대한 과보로 볼 수 없다는 것이 가르침이다. 그러나 무관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 또한 가르침이다. 행위를 하면 반드시 과보를 받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인과라는 것이 반드시 선후관계만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성도 있기 때문에 그때 그때 느낌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자동차사고가 우연히 발생할 수 있고, 간판이 떨어져 다칠 수도 있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맞을 수도 있는 것이다. 만일 모든 것을 전생탓으로 돌려 버린다면 자동차사고에 대해서도 액땜했다느니 하는 말을 할 것이다. 또 크게 다치지 않은 것에 대하여 관세음보살의 가피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사고는 사고가 일어날 한 조건이 형성되어서 발생한 것이다. 재수 없게 타고 간 차가 굴러 떨어져 모두 사망했을 때 하필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당한 것이다. 차를 탄 행위가 있었기 때문에 선후인과 관계가 성립된다. 그러나 운전자의 부주의로 인하여 사고나 났다거나 어떤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사고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면 동시적 인과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선후인과 동시인과가 복합되어 불운한 사건, 우연한 피습, 업보의 성숙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전생의 업을 고행으로 없애고자

 

자이나교에서는 모든 것이 전생의 업보로 보고 있다. 이런 숙작인설에 대하여 부처님은 강하게 비판했다. 맛지마니까야 데바다하의 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벗이여 니간타들이여, 그렇다면 그대들은 ‘우리는 전생에 존재했는지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고, 그대들은 ‘우리는 전생에 악업을 저질렀는지 저지르지 않았는지’도 모르고, 그대들은 ‘우리는 이러이러해서 악업을 짓는다.’는 것도 모르고, 그대들은 ‘이와 같이 악업이 소멸되었고, 이와 같이 악업이 소멸될 것이고, 이와 같이 괴로움이 소멸되었고, 이와 같이 괴로움이 소멸될 것이다.’라는 것도 모르고, 그대들은 지금 여기에서 악하고 건전하지 못한 법을 버리고 착하고 건전한 법을 성취하는 것에 대하여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대 니간타들이 이와 같이 ‘무릇 어떤 사람이 즐거움이나 괴로움이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것을 경험하는 그 모든 것은 전생의 업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생의 업을 고행으로 없애 버리고 새로운 업을 만들지 않음으로써 미래에 영향을 주지 않고 미래에 영향을 주지 않음으로써 업을 파괴하고, 업을 파괴함으로써 괴로움을 부수고 괴로움을 부숨으로써 감수를 부수고 감수를 부숨으로써 모든 고통이 사라진다.’라고 설명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M101)

 

 

자이나교의 숙작인설을 보면 모든 것은 과거에 만들어진 것이다.”(S36.21) 라 했다. 과거 전생에 어떤 짓을 했는지 알 수 없다. 과거에 지은 행위가 모두 업의 과보로 나타난다면 숙명론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업을 짓는 마음도 있지만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kiriya citta)도 있는 것이다. 작용만 하는 마음, 끼리야 찟따는 과보를 생산해 내지 않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모든 행위가 업보로 나타난다고 했을 때 몸에 병이 나서 아픈 것도 전생의 업보때문이고, 사고가 난 것도, 장애를 가진 것도 업보라 볼 것이다.

 

업보는 과거의 행위와 현재 행위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다. 인과라는 것이 반드시 선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일 수도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고행으로 과거에 지은 업을 파괴하여 청정에 이룰 수 있다는 견해는 타당하지 않음을 말한다.

 

당신 뜻대로 하소서

 

존우화작설은 오늘날 유일신교와 유사하다. 창조주가 있어서 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무작설이다. 원인 없이 결과가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절대자, 전지자, 창조자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된다고 보는 견해는 어떤 것일까?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존자들이여, 그렇다면 사람들은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며, 주지 않는 것을 빼앗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며, 청정하지 못한 삶을 살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며, 거짓말을 하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며, 이간질 하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며, 욕지거리하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며, 꾸며 대는 말을 하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며, 탐욕스럽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며, 분노하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며, 잘못된 견해를 지니더라도 절대자 때문일 것이다.

 

(Titthāyatanādisutta-이교도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3.61, 전재성님역)

 

 

지금 행복과 불행을 모든 것을 그분 창조주, 절대자, 전지자, 전능자에게 돌려 버리면 어떻게 될까? 해야 할 의도도 없고 정진도 없게 될 것이다. 또 이것을 해야 하는지 하지 말아야 하는지가 확인 되지 않는다면 새김을 잃게 되고 수호를 잃게 된다.’고 했다.

 

영화 밀양을 보면 목사가 여인의 유혹에 당신 뜻대로 하소서라고 말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모든 것을 신의 뜻에 맡겨 버리는 극단이라 볼 수 있다. 모든 것이 신의 뜻대로라 했을 때 행위에 대한 과보를 부정하게 된다. 그래서 무작설(akiriya: non-action)이라 했다.

 

원인 없이 조건 없이

 

무인론은 모든 것은 원인 없이 조건 없이 만들어졌다고 보는 견해를 말한다.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무인론은 우연론과 가깝다. 일상적 우연론이 아니라 절대적 우연론을 말한다. 전재성님의 각주에 따르면 깟싸빠의 비결정론에 대하여 그는 모든 원인과 결과는 무에서 유가 나오는 것처럼 초월적이고 완전히 우연적이어서 절대적으로 예측가능하지도 않고, 무법칙으로 변화하므로 인과관계는 애초부터 성립될 수 없으며, 인과적 연속성을 담보할 수 없으므로 단멸론에 속한다.”(앙굿따라니까야 3, 242번 각주) 라고 설명되어 있다.

 

절대적 우연론에 도덕적 책임감은 성립될 수 없다. 처음부터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리적 삶을 부정한다. 마치 무에서 유가 나오는 것처럼 모든 것을 우연으로 본다. 그렇다면 누가 우연론자로 되는가? 디가니까야 브라흐마잘라경에 따르면 우연론자 이야기가 있다. 우연론자가 되는 것에 대하여 무상유정천에는 마음은 일어나지 않고 오직 물질로 된 몸만이 있다. 그래서 마음이 없었던 경지 즉 무상유정천을 기억하는 자는 우연발생론자가 되는 것이다.”(초불연 디가니까야 1 126번 각주) 라 했다.

 

색계 4선천 무상유정천에 태어난 존재들은 이전 생에서 인식에 대한 혐오했기 때문에 그곳에 태어났다고 한다. 몸만 있을 뿐 마음이 일어나지 않은 삶을 살기 때문에 마치 삶과 죽음을 거꾸로 사는 존재들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무상유정천존재들은 죽어야 비로서 인식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전 생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치 무에서 유가 된 것처럼 홀연히 세상에 태어난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연론자가 되는 것이라 했다. 경에서 무인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존자들이여, 그렇다면 사람들은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더라도 원인이 없고 조건이 없을 것이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더라도 원인이 없고 조건이 없을 것이고, 청정하지 못한 삶을 살더라도 원인이 없고 조건이 없을 것이고, 거짓말을 하더라도 원인이 없고 조건이 없을 것이고, 이간질 하더라도 원인이 없고 조건이 없을 것이고, 욕지거리하더라도 원인이 없고 조건이 없을 것이고, 꾸며 대는 말을 하더라도 원인이 없고 조건이 없을 것이고, 탐욕스럽더라도 원인이 없고 조건이 없을 것이고, 분노하더라도 원인이 없고 조건이 없을 것이고, 잘못된 견해를 지니더라도 원인이 없고 조건이 없을 것이다.

 

(Titthāyatanādisutta-이교도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3.61,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세 가지 이교도 관점에 대해 설명했다. 이런 관점은 현자에 의해서 철저하게 조사 되었다고 했다. 철저하게 탐구하고 철저하게 연구해 보니 모두 무작설로 드러나게 되었다고 했다. 그것은 원인과 조건이 없이 결과만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은 논박되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비난 받지 않고, 수행자나 성직자나 현자에게 비방받지 않는다.”(A3.61) 고 했다. 왜 그럴까? 부처님 가르침은 작론이기 때문이다.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가르침이고 연기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비방받지 않는 가르침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은 다름 아닌 진리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현자들에게 비난이나 비방 받지 않는 가르침이라 했다. 그런 이유로서 구체적으로 여섯 가지 세계, 여섯 가지 감역, 열 여덟 가지 정신적 사유, 네 가지 진리에 대하여 설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여섯 가지 세계는 땅, , , 바람의 네 가지 광대한 세계와 허공과 의식을 말한다. 흔히 과학에서 말하는 물질에 대한 것이긴 하지만 의식이 포함되어 있다. 지수화풍 사대의 근본물질과 허공에서 파생된 물질인 공간이 있다. 그리고 인식의 요소로 의식의 다발이 있다. 이렇게 물질과 비물질로 구성되어 있다. 과학에서 단순하게 물질로만 설명하는 것과 다르다.

 

여섯 가지 감역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정신적 감역을 말한다. 예를 들어 시각의식은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생겨난다.”라고 설명된다. 이 세 가가지 화합하면 접촉이 생겨나는데, 접촉을 조건으로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발생된다. 이렇게 조건발생하여 세상이 생겨나는 것이다.

 

열 여덟 가지 정신적 사유란 무엇일까? 이를 정신적 탐구라고도 하는데 사유와 숙고를 말한다. 사유와 숙고를 통해 대상을 경험한다. 이에 대하여 하나의 예를 보며면 형상을 보고 쾌락을 야기하는 형상에 대한 탐구, 불쾌를 야기하는 형상에 대한 탐구, 평정을 야기하는 형상에 대한 탐구라고 설명된다. 모두 열 여덟 가지 탐구가 있다. 이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눈으로 형상을 볼 때 정신적 즐거움의 기반이 되는 형상을 지속적으로 고찰하고 정신적 괴로움의 기반이 되는 형상을 지속적으로 고찰하고 평온의 기반이 되는 형상을 지속적으로 고찰한다.”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는 느낌에 대한 것이다. 감각접촉에 따라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세 가지 느낌이 여섯 감각영역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모두 18계가 된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어느 누구도 진리가 아니라고 비방하지 못할 것이다.

 

네 가지 진리란 사성제를 말한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사성제를 느낌과 관련하여 어떻게 설명했을까?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Channa, bhikkhave, dhātūna upādāya gabbhassāvakkanti hoti; okkantiyā sati nāmarūpa, nāmarūpapaccayā saāyatana, saāyatanapaccayā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Vediyamānassa kho panāha, bhikkhave, ida dukkhanti paññapemi, aya dukkhasamudayoti paññapemi, aya dukkhanirodhoti paññapemi, aya dukkhanirodhagāminī paipadāti

 

수행승들이여, 여섯 가지 세계를 조건으로 입태가 있고, 입태를 조건으로 명색이 있고,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가지 감역이 있고, 여섯 가지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있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또한 나는 느끼는 자의 관점에서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가르치고. ‘이것은 괴로움의 발생이다.’라고 가르치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가르치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선언한다.”

 

(Titthāyatanādisutta-이교도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3.61,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결국 사성제를 설했다. 조건발생하는 연기법을 설한 것이다. 원인과 조건 없이 그 어떤 것도 발생할 수 없음을 말씀 하신 것이다. 특히 입태를 조건으로 명색이 있고라 했는데, 여기서 입태(gabbhassāvakkanti)’는 분명히 재생연결식에 대한 설명이다. 일반적 십이연기에서 의식이 들어설 연기고리의 자리에 입태가 들어 간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결생식을 의미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 하신 작론이다.

 

유전자연기론으로 윤회와 부활을 통합한다고?

 

사람은 어떻게 태어났을까? 이에 대하여 대부분 사람들은 부모로부터 태어났다고말한다. 과학적 상식을 가진 자들은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태어났다고 말한다. 더 상식있는 자들은 유전자에 의해서 생겨났다고 말한다. 우리의 몸이 부모의 유유전자부터 형성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정신적 현상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물질에 기반을 둔 과학적 상식으로는 왜 사람들의 성향이 다른지 설명할 수 없다. 누군가는 유전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느낌이나 의도와 같은 정신현상을 과학적으로 규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행위와 행위의 과보에 대해서는 말할 나위 없다. 그럼에도 과학만능주의자들은 모든 것을 물질로 환원하여 이 세상을 설명하고자 한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K교수가 말하는 유전자연기론이다.

 

K교수의 유전자연기론에 따르면 불교의 윤회와 기독교의 영생도 설명이 된다. 그는 불교닷컴칼럼에서 유전자를 통해서, 불교와 기독교라는 이질적인 두 종교의 핵심교리인, 윤회와 부활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다.”라 했다. 이는 물질적 생체유전자와 비물질적 문화유전자(meme)를 염두에 두고 한말이다. 생체유전자가 유전자가 자손에게 전달 되었을 때 윤회하는 것으로 보고, 자손이 태어난 것에 대하여 유전자의 부활로 본다는 것이다. 공통적으로 물질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래서일까 정신적 유전으로서 문화유전자를 말하고 있다. 한집단의 언어와 풍습과 문화는 후대로 전승됨을 말한다. 그래서 우리 몸에 대하여 개체적인 유형의 생물학적인 몸과 집단적인 무형의 사회적인 몸이다.”라고 주장한다. 마치 몸과 마음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것 같다.

 

K교수에 따르면 불교는 계속 진화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생명이 진화해 온 것처럼 불교도 2600년전에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현대 과학의 시대에 맞게 끊임 없이 진화하고 업그레이드 되어야 함을 말한다. 마치 컴퓨터 프로그램이 매년 업그레이드 되듯이 불교도 진화해서 21세기 과학의 시대에 맞는 불교를 만들어야 함을 말한다. 그래서 초기불교에서 부파불교로, 다시 부파불교에서 대승불교로, 또다시 대승불교에서 선불교로 끝없이 모습을 바꾸어온 2,500년 불교역사라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고자 함일까? 부처님의 가르침이 완전하지 못한 것이고 미완성 된 것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불교는 계속 진화해 왔다는 것이다.

 

K교수의 유전자연기론은 무작설(akiriya)

 

부처님 가르침은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이다. 만일 불완전한 것이거나 덜 깨달았다면 전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가르침을 이해 하지 못하는 자들은 끊임 없이 의문을 제기하며 새로운 불교를 만들어 내었다. 그 결과 불교는 정법에서 멀어지고 변질 되었다. 오늘날 과학을 기반으로 하여 유전자연기론을 주장하는 것 역시 불교의 변질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학은 철저하게 물질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처님은 우리 몸과 마음에 대하여 오온으로 분석하여 십이처와 십팔계로 설명했다. 주로 정신현상에 대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작론이다. 이를 연기법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그러나 물질에 기반한 과학은 정신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그러다 보니 물질에 기반한 유전자연기론을 말하는 것이다.

 

물질에 기반한 모든 것은 단멸로 끝난다. 사람이 죽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남는 것이 있다면 후손에게 전달 된 유전자라 한다. 만일 후손이 없다면 단멸하고 말 것이다. 설령 문화유전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깊은 산속에서 살다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살다가 죽은 자가 있다면 역시 단멸이라 볼 수 있다.

 

K교수의 유전자연기론은 단멸을 설한 것이다. 겉으로는 생체유전자와 문화유전자에 의한 윤회의 재생을 설명하지만 물질을 기반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단멸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런 사실로 본다면 K교수의 유전자연기론은 이교도의 교설에 가깝다. 부처님 당시에 숙작인설, 존우화작설, 무인론이 업과 업의 과보를 부정하는 무작설이듯이 K교수의 유전자연기론 역시 무작설(akiriya)이라 볼 수 있다.

 

 

 

2016-07-2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