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는 어떻게 논파 되었나?

담마다사 이병욱 2016. 8. 23. 07:56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는 어떻게 논파 되었나?

 

 

 

 

 

 

평생 불교을 믿던 노보살이 죽음을 앞두고 유일신교로 개종했다는 소리를 종종 듣는다. 평생 관세음보살을 염하던 불자가 어떻게 하루 아침에 종교를 바꿀 수 있을까? 어떤 이는 병원에서 적극적 선교하는 타종교인들의 정성을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평생기복으로 살아온 불자가 더 큰 기복으로 갈아 타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현상인지 모른다. 관세음보살이 제아무리 용하기로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만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평생 기도만 하고 살아온 불자들이 쉽게 개종하는 것은 교리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다.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고 배우려 하지도 않기 때문에 부처님 가르침이 얼마나 심오한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다행히도 빠알리 니까야가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와서 불자들은 이제 부처님이 어떤 말씀을 했는지 알게 되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아비담마와 청정도론 등 논서도 번역 되어서 교리를 체계적으로 접하게 되었다. 초기불교를 강연하는 동영상도 인터넷에서 접할 수 있다. 무엇보다 위빠사나 수행센터에 가면 수행과 함께 초기블교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어서 부처님 가르침을 만난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 알게 된다.

 

교리에 대하여 무지한 자들은 유일신교나 불교나 근본에 있어서는 같은 것이라 한다. 기독교의 사랑과 불교의 자비를 예로 들기도 한다. 정말 그럴까? 기독교의 사랑은 어디까지나 그들만의 사랑일 뿐이다. 창조주의 사랑이 타종교인 모두에게 해당 되지 않는다. 이에 반하여 불교의 자애와 연민은 보편적이다. 차별이 없는 것이다. 교리 또한 불교와 확연히 다르다. 창조론, 원죄론, 구원론, 대속론, 종말론과 같은 교리는 불교에서 찾아 볼 수 없다.

 

불교의 입장에서 본다면 유일신교는 상주론에 해당된다. 영원주의를 말한다. 그런데 부처님은 영원주의에 대하여 허무주의와 하께 삿된견해라 했다. 왜 영원주의가 사견일까? 이는 부처님의 연기법으로 설명된다.

 

연기법을 이해하면 부처님 가르침 이외 모든 견해는 사견이 된다. 디가니까야 브라흐마잘라경(D1)에서는 62가지 사견이 소개 되어 있다. 그 중에 영원주의도 포함되어 있다. 그렇다면 창조론으로 대표되는 영원주의가 왜 거짓일까? 부처님은 상윳따니까야 깟짜야나곳따의 경(S12.15)’에서 허무주의와 함께 영원주의를 다음과 같이 논파 했다.

 

 

[세존]

“깟짜야나여,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깟짜야나여,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S12.15)

 

 

짤막한 이 문장이 상견(영원주의)과 단견(허무주의)를 논파한 유명한 구절이다. 그러나 이 구절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조건발생과 조건소멸의 연기에 대한 지혜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주석에서는 창조론 등 상견이 왜 거짓인지, 단멸론과 같은 허무주위가 왜 성립할 수 없는지에 대해 설명해 놓았다.

 

부처님 당시에는 각종 사상이 난무 하였다. 대표적으로 영원주의와 허무주의이다. 영원주의는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라고 보는 상주론을 말하고, 허무주의는 ‘죽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단멸론을 말한다. 이는 양극단이다. 깟짜야나곳따의 경에서는 “깟짜야나여, 세상사람들은 대부분 존재[] 또는 비존재[] 두 가지에 의존한다.(S12.15)”라는 문구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 세상사람들은 부처님 당시 삿된 견해에 의존해서 살아 가던 사람들을 말한다. 이런 양극단은 오늘날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바 없다.

 

오늘날 유일신교는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와 유사한 영원주의 종교이다. 이렇게 영원주의 또는 상주론을 믿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는 단멸론이다. 물론 부처님 당시에도 있었다. 그런데 요즘이라 해서 크게 다를 바 없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죽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미래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양극단은 잘못된 견해이다. 이를 부처님이 연기법으로 논파하였다. 그와 관련된 경이 ‘깟짜야나곳따의 경(S12.15)’이다.

 

부처님은 어떻게 영원주의를 부수었을까? 이는 연기의 역관을 관찰하면 알 수 있다. 역관에서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 형성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멸하며,…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소멸한다.”라는 구절이다. 이렇게 무상하게 조건 소멸하는 것을 관찰하였을 때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는 절대유로서의 극단은 거짓이 된다. 그래서 영원주의가 논파 된다.

 

허무주의는 연기의 순관을 관찰하면 알 수 있다. 순관에서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이 함께 생겨난다.”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다. 이렇게 조건발생하여 다시 형성되는 것을 관찰하였을 때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라고 보는 절대무로서 극단은 역시 거짓이 된다. 그래서 허무주의가 논파된다.

 

부처님은 절대유와 절대무의 양극단에 대하여 연기법, 즉 십이연기로 논파 하였다. 그래서 경에서는 “여래는 그러한 양극단을 떠나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라 하였다. 이렇게 양극단에 대한 중도의 가르침은 십이연기의 순관과 역관으로 설명된다.

 

교리를 알게 되면 가르침에 대한 확신이 일어난다. 이는 맹목적 믿음이 아니라 이해를 바탕으로 한 확신에찬 믿음이다. 경에서 유무중도를 설한 원리를 알게 되면 흔들림 없는 믿음이 된다. 또한 부처님 가르침이 정견임을 알게 되어 불자 되기 참 잘했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갖게 된다. 그러나 교리를 모른 채 오로지 기도만 하며 기복적 신행생활 하다 보면 모든 종교가 결국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를 갖게 된다. 절에 10, 20, 30, 아니 평생 다녀도 부처님이 무슨 말씀했는지 모른다면 불자라 볼 수 있을까?

 

 

 

2016-08-2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