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없이 그 장소를 버리고 허공으로, 운수납자(雲水衲子)로 묘사된 백조
흰구름이 모자이크 되어
때로 하늘이 아름다울 때가 있다. 비가 온 다음 날 하늘은 맑고 깨끗하다. 가을하늘 공활하다는 애국가 가사가 있듯이 청명한 하늘은 그 깊이를 알 수 없이 아득하다. 그러나 몇 시간 지나지 않아 구름이 형성되어 시시각각 모습이 변한다.
늦은 오후 하늘을 쳐다 보니 마치 방석을 깔아 놓은 듯 흰구름이 모자이크 되어 있다. 하늘의 구름도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 같다. 이런 현상은 거의 전국적이다. 스마트폰 시대에 카톡으로 보내 온 사진들을 보면 거의 동일한 구름 모습이다.
청산백운(靑山白雲)
동아시아불교에서 ‘청산백운(靑山白雲)’이라는 말이 있다. 푸른산과 흰구름이라는 뜻이다. 이는 선시 “청산묵묵(靑山默默)이요 백운잠잠(白雲潛潛)”에서 유래한다. 풀이하면 “청산이 말없이 묵묵하니 그 위에 떠 있는 흰 구름조차 고요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청산이란 주인을 말하고, 백운은 정처 없이 떠도는 객(客)을 비유한 것이다. 예부터 불가에서는 대중이 머무는 큰 방의 좌우에 청산(靑山)과 백운(白雲)을 써놓고 청산 쪽에는 절 안에 머물고 있는 대중들이 앉고 백운 쪽에는 객스님들이 앉도록 자리를 배치하였다. 이때 청산의 주인들이 묵묵한데 백운의 객승들이 소란을 피우거나 떠들 리가 없다는 것이다.
작은 절 시골절 천장사에 올해 하안거때 일곱 명의 스님들이 방부를 들였다. 해제가 되어 뿔뿔이 흩어졌지지만 그 중에 두 명은 해제기간에도 함께 살기로 했다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절의 주지스님과 대중스님은 청산이 되고, 선방스님들은 백운이 되는 셈이다. 청산은 움직이지 않는 고정된 이미지이고 백운은 흘러가는 구름의 이미지이기 때문에 절의 대중스님과 선방스님과의 관계가 청산과 백운으로 묘사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천장사
운수납자(雲水衲子)
해제가 되면 스님들은 뿔이 흩어진다. 다음 안거 때까지 만행을 하고 또 다시 안거에 들지만 이전 스님들을 또 다시 만난다는 보장이 없다.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스님들은 일정한 거처가 없기 때문에 정처 없이 떠돌아 다닌다. 마치 흘러 가는 구름처럼 떠 돌아 다니는 것이다. 도를 구하기 위해 스승을 찾아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승려를 일컬어 운수납자(雲水衲子)라 한다. 법구경에 운수납자의 삶을 연상케 하는 게송이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Uyyuñjanti satimanto,
na nikete ramanti te,
Haṃsā va pallalaṃ hitvā
okam-okaṃ jahanti te.
새김을 갖춘 님들은 스스로 노력하지
주처를 좋아하지 않는다.
백조들이 늪지를 떠나는 것처럼
그들은 집마다 그 집을 떠난다. (Dhp91)
첫 번째 구절을 보면 “새김을 갖춘 님들은 스스로 노력한다.(Uyyuñjanti satimanto)”라고 했다. 주석에 따르면 “광대한 새김을 확립하고 번뇌를 끊은 자들은 선정과 통찰과 같은 자신이 꿰뚫어야 할 명상수행에 노력한다.”라고 설명이 되어 있다.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을 하며 이것들에 주의를 기울이고, 도달하고, 거기서 나와서 “이러 이러한 때에 나는 그것들 속에서 지내리라.”라고 결정하고 성찰함을 말한다.
두 번째 구절을 보면 “주처를 좋아하지 않는다. (na nikete ramanti te)”라고 했다. 빠알리어 nikete는 ‘abode; home’의 뜻이다. 머무는 것을 좋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주석에 따르면 “욕망의 경향에 대하여 환락이 없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욕망 또는 집착에 대한 경향이 없음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 즉 오욕락을 뜻하는 것이라 했다.
법정스님의 난(蘭)이야기
수행자는 욕망을 멀리 하는 삶을 산다. 세상사람들이 추구하는 오욕락을 멀리 하는 삶을 살아 가는 것이다. 따라서 그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소유물도 집착하지 않고, 머무는 곳도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는 삶에 대한 재미 있는 일화가 있다. 법정스님의 난이야기이다 .
스님이 어느 날 봉선사로 운허스님을 뵈로 떠났는데 갑자기 ‘난초’생각이 났다는 것이다. 햇볕을 쪼이기 위하여 밖에 내 놓았는데 깜박 잊고 떠난 것이다. 난초가 햇볕에 말라 죽을까 걱정이 되서 길을 가는 도중에 되돌아와 물을 주고 정성껏 돌 보아 주었다고 한다. 이를 두고 스님은 집착과 소유욕이 마음속에 뿌리 깊게 남아 있었음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 소유에서 해방 되고자 아는 지인에게 난초를 주어 버렸다고 한다. 그러고 나니 그렇게 홀가분 할 수 없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무소유를 실천한 것에 대하여 “이때부터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 했다. 난을 통해 무소유의 의미 같은 걸 터득하게 했다고나 할까.”라고 책에 써 놓았다.
미련없이 떠난다
세 번째 구절을 보면 “백조들이 늪지를 떠나는 것처럼(Haṃsā va pallalaṃ hitvā)”이라 했다. 수행승을 백조로 묘사한 것이다. 이 구절에 대한 주석을 보면 “백조들이 물고기 같은 음식이 풍부한 물웅덩이에 있으면서 음식을 취하고 떠날 때에는 거기에 있는 어떤 대상에도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백조들은 “이것이 나의 물이다. 나의 연꽃이다. 나의 백합이다. 나의 과피(果皮)이다.”라고 생각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대신 백조들은 미련없이 그 장소를 버리고 허공으로 날아 가는 것이다.
네 번째 구절을 보면 “그들은 집마다 그 집을 떠난다. (okam-okaṃ jahanti te)”라 했다. 거처가 없는 수행승에게 소유물은 거추장스러운 것이다. 주석에 따르면 “취하게 하는 것이 사라지고 어디서든지 어떤 곳에서든 머물러 지낼 때에 가정에 집착하지 않으며, 떠날 때에도 ‘나의 승원, 나의 건물, 나를 따르는 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미련없이 떠난다.”라 했다. 무소유로 사는 수행자에게 소유물과 거처에 대한 애착과 집착이 생겨나지 않도록 떠나야 함을 말한다.
백조(haṃsa) 와 백로(koñca)
법구경 91번 게송을 보면 수행승에 대하여 백조로 묘사하였다. 백조는 빠알리어로 ‘haṃsa’라 한다. 영어로 ‘swan’이다. 초기경전에서 수행승을 백조로 묘사한 곳은 많이 있다. 대표적으로 숫따니빠따 성자의 경(Sm1.12)에서 “하늘을 나는 목이 푸른 공작새가 백조의 빠름을 따라 잡을 수 없는 것처럼, 재가자는 멀리 떠나 숲속에서 명상하는 수행승, 그 성자에 미치지 못한다.”(stn221) 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공작을 재가자로 비유하고, 백조를 수행승으로 비유했음을 알 수 있다. 날개를 펼치면 마치 부채처럼 멋진 모습의 공작새는 컬러풀하여 화려하기 그지 없다. 그러나 나는 재주는 별로 없다. 이는 백조와 비교 되고 있다. 백조는 희고 우아할 뿐만 아니라 나는 것에 있어서 공작과 비교 되지 않는다.
숫따니빠따 ‘방기사의 경(Sn2.12)’에서는 “백조가 목을 빼고 천천히 우는 것처럼, 잘 다듬어진 원만한 음성으로 말씀해주십시오.” (stn350) 라 되어 있다. 부처님의 음성에 대하여 백조의 음성으로 비유한 것이다. 숫따니빠따 ‘피안으로 가는 길에 대한 마무리의 경(Sn5.18)’에서는 “이를 테면, 새가 엉성한 덤불을 떠나 열매가 많은 숲에 깃들 듯, 저도 또한 소견이 좁은 자들을 떠나, 백조처럼 큰 바다에 이르렀습니다.” (stn1134) 라 되어 있다. 백조가 깨달은 성자를 상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Swan(백조)
백로와 대비되는 새가 있다. 백로가 그것이다. 법구경 155번 게송을 보면 “고기 없는 연못에 사는 늙은 백로처럼 죽어간다.”라 했다. 여기서 백로는 빠알리로 koñca라 하며, 영어로는 heron이라 한다. 거해스님은 “마치 날개 부러진 왜가리가 물고기 없는 마른 연못에 있는 것과 같다.”라 하여 왜가리라 했다. 나까무라하지메는 “魚のいなくなった池にいる白鷺のように、痩せて滅びてしまう”라 하여 백로라 했다. 타닛사로빅쿠는 “they waste away like old herons in a dried-up lake depleted of fish.”라 하여 헤론(heron)이라 했다.
Heron(백로)
백로를 뜻하는 Heron에 대하여 사전을 찾아 보니 왜가리, 해오라기, 백로과의 총칭이라 되어 있다. 백조가 수행승 또는 성자를 상징하는 것과 비교하여 백로 또는 왜가리는 세속인으로 상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날게 부러진 늙은 왜가리는 말라 버린 호수가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것으로 묘사 되어 있다. 그러나 같은 호수라도 청정도론에서는 “황금 백조의 왕이 천민촌의 입구에 있는 더러운 웅덩이에 머물기를 즐거워 하지 않고 일곱 개의 큰 호수에 머물기를 즐거워하는 것처럼, 수행자 백조도 위험이라고 분명히 본 여러 가지의 상카라들에 대해 즐거워하지 않는다.” (Vism.21.43) 라하여 백조를 수행승의 상징으로 비유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소유의 수행승은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수행자는 무소유의 청정한 삶을 살아 간다. 오욕락을 멀리 하여 욕망을 여의는 삶에 소유물에 집착하지 않는다.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마치 고고한 자태의 백조가 늪지에서 머물지만 떠날 때는 그 장소를 버리고 허공으로 날아 가는 것처럼, 무소유의 수행승 역시 떠날 때는 ‘나의 승원, 나의 건물, 나를 따르는 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미련없이 떠나는 것이다.
선방스님들은 해제가 되면 미련 없이 거처를 떠난다. 언제 다시 돌아 온다는 기약이 없다. 도를 찾아 스승을 찾아 유행을 하는 것이 흘러 가는 구름과도 같다.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스님들이 집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굳이 집이 있다면 부처님이 모셔져 있는 곳이 내집이다. 전국의 사찰이 내집이고, 전세계의 사찰이 내집인 것이다. 그러나 오래 머물지 않는다. 소유하지도 않는다. 바랑 하나 메고 도를 찾아 스승을 찾아 구름처럼 유행하는 것이다. 고고한 자태의 백로처럼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미련 없이 허공으로 나는 것이다.
2016-08-27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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