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고 익히면
“단지 스치는 향기처럼이라도 자애의 마음을 닦는다면, 그것은 커다란 과보를 가져올 것입니다.”앙굿따라니까야 ‘벨라마의 경(A9.20)’에 실려 있는 가르침이다. 엄청난 보시를 해도 단 한순간 자애의 마음을 내는 공덕만 못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단지 스치는 향기처럼 gandhuttampi)’이라는 말은 주석에 따르면 “두 손가락으로 값비싼 향료덩어리를 집어서 냄새 맡는 시간을 말한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짧은 시간을 말한다. 주석에서는 어원을 분석하여 ‘송아지가 어미소의 젖통을 한번 빠는 시간 정도 된다(gandhuhanamatta)’고 한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더 큰 과보가 있다. 그것은 “단지 손가락 튕기는 순간이라도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는다면”이라 했다. 두 손가락을 비벼서 소리가 날 정도로 짧은 시간이라면 일초 이내라 볼 수 있다. 그 짧은 시간 동안만이라도 무상을 절감한다면 단지 스치는 향기처럼 자애의 마음을 닦는 것 보다 비교할 바 없는 공덕이 된다고 했다.
손가락 튕기는 시간은 매우 짧다. 이 짧은 시간에 어떻게 무상을 지각할 수 있을까? 계절이 변하면 자연무상을 느끼고 사람이 늙어 가면 인생무상을 느끼지만 긴 시간이다. 계절이 바뀐 다음에야 무상함을 느끼고 늙어서 역할이 없어 졌을 때 비로소 무상을 느끼지만 너무 늦다. 손가락 튕길 정도로 짧은 시간에 무상함을 지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고 익히면
상윳따니까야에 ‘무상에 대한 지각의 경(S22.102)’이 있다. 이는 “단지 손가락 튕기는 순간이라도 무상에 대한 지각을”이라는 말과 유사하다. 경에서는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고 익히면”이라는 정형구로 표현되어 있다. 오온에 대한 것이다.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에 대하여 발생과 소멸을 관찰하면 세상에 대한 탐욕을 뿌리 뽑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경에 따르면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았을 때 다섯 가지 이익이 있다고 했다.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고 익혔을 때 1)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욕, 2) 물질에 대한 탐욕, 3) 존재에 대한 탐욕, 4) 무명, 5) 자만을 뿌리째 뽑아 없앨 수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구체적인 비유를 들었다.
첫 번째 비유는 쟁기의 비유이다. 쟁기질 하면 모든 뿌리들이 파해쳐 없어지듯이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고 익히면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욕 등 위에 언급된 다섯 가지가 뿌리째 뽑혀 없어진다고 했다.
밥바자(babbaja)에 대하여
두 번째 비유는 골풀의 비유이다. 전재성님의 번역을 보면 “골풀을 베면 꼭대기를 잡고 위아래로 흔들고 좌우로 흔들어 털어버린다.”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골풀은 인터넷사전에 따르면“다년생 초본으로 근경이나 종자로 번식한다. 전국적으로 분포하며 풀밭의 습지나 강가 및 논둑에서 자란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골풀에 대한 빠알리어는 밥바자(babbaja)이다. 영어설명은 ‘the fragrant root of the Andropogon Muricatus’라 되어 있고 한자어로는 ‘등심초(燈心草)’라 한다. 초불연 각묵스님은 ‘갈대’로 번역했다.
밥바자라 불리는 풀은 영어로 ‘Andropogon’라 하는데 일반적으로 ‘beard grass’라 불리운다고 한다. 주로 아시아가 원산지로서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유럽 등에 널리 퍼져 있는 풀이다. 한자어로 등심초라 하는데 우리말 이름은 골풀이다. 한무더기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등심초(골풀)
빅쿠보디는 어떻게 번역했을까? CDB를 찾아 보니 ‘rush-cutter’라 되어 있다. 인터넷검색을 해 보아도 rush-cutter에 대한 것을 찾을 수 없다. 초불연에서는 갈대라고 번역했으나 적절치 않아 보인다. 갈대라는 말은 빠알리어로 ‘kaṭṭhaka’이다. 이는 법구경에서 “자기파멸을 위해 익어가는 갈대의 열매와 같이. (phalāni kaṭṭhakasseva attaghātāy phallati)” (Dhp 164) 라는 게송에서도 알 수 있다.
골풀을 뜻하는 밥바자와 갈대를 뜻하는 깟타까는 다른 것이다. 빠알리어 kaṭṭhaka는 ‘葦, 蘆葦’의 뜻으로 갈대라는 뜻이다. 갈대를 영어로 reed라 하는데 1~3미터 정도로 높이 자라고 줄기는 곧고 속은 비었으며 잎은 긴 피침형이다. 그러나 경에서 언급된 밥바자는 등심초로서 무더기를 이루어 피는 식물로서 일종의 긴 풀 같은 것이다.
등심초를 뽑았을 때 꼭대기를 잡고 흔들면 붙어 있던 흙이 털어진다. 이를 “골풀을 베면 꼭대기를 잡고 위아래로 흔들고 좌우로 흔들어 털어버린다. (babbajalāyako babbajaṃ lāyitvā agge gahetvā odhunāti niddhunāti nipphoṭeti,)”라고 했다. 이와 같이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으면 탐욕 등이 떨어져 나감을 말한다.
열 가지 비유를 들어
세 번째 비유를 보면 망고가 등장한다. “망고더미가 달린 나무줄기를 자르면 그 줄기에 달린 망고들이 모두 그 줄기를 따라 잘려진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네 번째 비유는 용마루이다. “누각의 어떠한 서까래든지 모두 용마루로 향하고, 용마루로 기울고, 용마루로 모이고, 용마루를 그들 가운데 최상이라고 한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네 번째 비유에서부터 ‘최상’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이어 다섯 번째 비유는 “어떠한 뿌리의 향이 있든지 그들 가운데 흑단향을 최상으로 여긴다”라 했다. 서까래 가운데 용마루가 최상이고 뿌리의 향가운데 흑단향이 최상이듯이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으면 탐욕, 자만 등이 뿌리째 뽑힘을 말한다.
여섯 번째 비유는 적단향이다. 이에 대하여 “어떠한 나무심의 향이 있든지 그들 가운데 적단향을 최상으로 한다.”라고 비유되어 있다. 일곱 번째 비유는 재스민으로서 “어떠한 꽃의 향이 있든지 그들 가운데 재스민 향을 최상이라 한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어 여덟 번째는 전륜왕의 비유이다. “어떤 군왕이 있든지 그들 모두는 전륜왕에 종속되며 그들 가운데 전륜왕을 최상이라고 한다.”라 되어 있다.
아홉 번째 비유는 달의 광명이다. “어떠한 별이 비추는 광명이든 그것은 모두 달이 비추는 광명이 십육분의 일도 미치지 못하며, 그들 가운데 달이 비추는 광명을 최상이라고 한다.”라 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열 번째는 태양의 비유이다. “가을에 하늘이 맑고 구름이 한 점도 없으면, 태양은 높이 떠오르면서 빛나고 빛을 방출하고 널리 비추어서 일체의 어둠을 허공에서 없애 버린다.”라 되어 있다.
열 가지 비유를 든 것은 무상의 지각을 닦는 것에 대한 이익을 말한 것이다. 손가락 튕길시간 정도라도 잠시만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아도 엄청난 보시를 하는 것 보다 공덕이 훨씬 더 수승하다고 했는데, 무상의 대한 지각을 지속적으로 닦았을 때 공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경에서는 탐욕, 무명, 아만 등의 족쇄가 떨어져 나가 아라한이 되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열 가지 비유를 다시 한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가을에 농부가 큰 쟁기날로 쟁기질을 하면
모든 뿌리들이 파 헤쳐 없어진다.
2) 골풀을 베는 사람은 골풀을 베면
꼭대기를 잡고 위아래로 흔들고 좌우로 흔들어 털어버린다.
3) 망고더미가 달린 나무줄기를 자르면
그 줄기에 달린 망고들이 모두 그 줄기를 따라 잘려진다.
4) 누각의 어떠한 서까래든지 모두 용마루로 향하고,
용마루로 기울고, 용마루로 모이고, 용마루를 그들 가운데 최상이라고 한다.
5) 어떠한 뿌리의 향이 있든지
그들 가운데 흑단향을 최상으로 여긴다.
6) 어떠한 나무심의 향이 있든지
그들 가운데 적단향을 최상으로 한다.
7) 어떠한 꽃의 향이 있든지
그들 가운데 재스민 향을 최상이라 한다.
8) 어떤 군왕이 있든지 그들 모두는 전륜왕에 종속되며
그들 가운데 전륜왕을 최상이라고 한다.
9) 어떠한 별이 비추는 광명이든
그것은 모두 달이 비추는 광명이 십육분의 일도 미치지 못하며,
그들 가운데 달이 비추는 광명을 최상이라고 한다.
10) 가을에 하늘이 맑고 구름이 한 점도 없으면,
태양은 높이 떠오르면서 빛나고 빛을 방출하고
널리 비추어서 일체의 어둠을 허공에서 없애 버린다.
이와 같은 열 가지 비유를 든 것은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았을 때 이득이 있기 때문이다. 즉,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욕, 물질에 대한 탐욕, 존재에 대한 탐욕, 무명, 자만이 제거 된 경지에 대하여 열 가지 비유로 설명한 것이다.
왜 마음대로 삭제하는가?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는 다섯 가지 족쇄가 타파 되어야 한다. 그것은 ‘색계에 대한 욕망(craving for fine-material existence: rūpa-rāga), 무색계에 대한 욕망(craving for immaterial existence, arūpa-rāga), 자만(conceit, māna), 침착하지 못함(restlessness, uddhacca), 무명(ignorance, avijjā)’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다.
Aniccasaññā bhikkhave, bhāvitā bahulīkatā sabbaṃ kāmarāgaṃ pariyādiyati. Sabbaṃ rūparāgaṃ pariyādiyati. Sabbaṃ bhavarāgaṃ pariyādiyati. Sabbaṃ avijjaṃ pariyādiyati. Sabbaṃ asmimānaṃ pariyādiyati, samūhanti
“수행승들이여,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고 익히면, 그것은 모든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모든 물질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모든 존재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모든 무명을 없애고, 모든 ‘나’라는 자만을 뿌리째 뽑아 없앤다.”
(Aniccasaññā sutta-무상에 대한 지각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102, 전재성님역)
경에서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으면 다섯 가지가 없어진다고 했다. 여기서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욕은 아나함의 경지에서 없어지지만, 나머지 네 가지는 아라한이 되면 사라진다. 그런데 빅쿠보디는 ‘모든 물질에 대한 탐욕을 없애고 (Sabbaṃ rūparāgaṃ pariyādiyati)’를 의도적으로 삭제하고 번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CDB를 찾아 보았다. 찾아 보니 “Bhikkhus, when the perception of impermanence is developed and cultivated, it eliminates all sensual lust, it eliminates, all lust for existence, it eliminates all ignorance, it uproots all conceit ‘I am.’”라 되어 있다. 빠알리 원문과 다르게 물질에 대한 욕망 부분이 삭제되고 네 가지만 번역되어 있다. 왜 이렇게 번역했을까? 각주를 찾아 보았다. 찾아 보니 “Sensual lust is eliminated by the path of nonreturning; lust for existence, ignorance, and the conceit "I am" by the path of arahantship.”(CDB 215번 각주) 라고 짤막하게 언급되어 있다. 감각적 욕망은 돌아오지 않는 길(불환자)에서 제거되고, 아라한에게 있어서는 존재에 대한 열망과 무명, 그리고 내가 있다는 자만이 제거 되기 때문이라 했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의 설명을 보면 “rupa raga가 나타나면 arupa-raga가 나타나야 전자는 색계에 대한 탐욕, 후자는 무색계에 대한 탐욕이 되어 색계에 대한 집착과무색계에 대한 집착으로 배대가 된다. 아니면 rupa-raga는 생략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보디스님은 본경에서 rupa-raga를 빼버리고 번역하지 않았다.”라고 했다.
번역에 있어서 원문에 충실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번역자가 자의적으로 판단하여 삭제하거나 삽입한다면 정확하게 뜻을 전달할 수 없다. 전재성님의 경우 ‘물질에 대한 탐욕(rūparāga)’에 대하여 색계에 대한 욕망으로 보고, ‘존재에 대한 탐욕(bhavarāga)’에 대한 탐욕을 무색계에 대한 욕망으로 보아 모두 다 번역했음을 각주에서 밝히고 있다.
절집에서 통용되는 한자말들을 그대로 사용하려고 노력했다?
위 구절에 대한 초기불전연구원 번역을 보면 “무상의 [관찰로 생긴] 인식을 많이 닦고 많이 [공부]지으면”이라 되어 있다. 이 말은 전재성님의 번역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고 익히면”라는 말과 비교된다. 초불연 번역을 보면 대괄호를 이용한 주석적 번역을 했고 선가에서 사용되는 용어인 ‘공부짓는다’라는 말이 들어가 있다. 전재성님의 번역이 유려하고 유연하다면 각묵스님 번역은 대체로 딱딱하고 경직되어 보인다. 더구나 일상에서 잘 쓰이지 않는 ‘[공부]지으면’이라는 말은 낯설다.
왜 이런 번역이 들어가게 되었을까?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해제글에서 대림스님이 “한문불교 용어에 익숙한 분들을 위해서 많은 곳에서 눈의 알음알이[眼識], 무더기[溫], 기능[根] 등으로 한문을 병기했다.”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한문불교에 익숙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가장 먼저 절집을 들 수 있다. 절에서 한문교재로 공부한 스님들이 가장 먼저 떠 오르는 것이다. 스님들이나 옛날 한문 세대를 위하여 대괄호를 이용하여 한문을 병기했다는 것이다. 이는 이어지는 설명에서 알 수 있다.
초기불전연구원의 번역원칙에 따르면 술어의 한글화에 대하여 “오히려 지금 절집에서 통용되는 한자말들을 그대로 사용하려고 노력했다.”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절에서 스님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번역에 반영했음을 말한다. 그 대표적인 말이 ‘공부짓다’라는 말이다.
보통불자들이나 일반사람들은 ‘공부하다’라는 말은 알아도 ‘공부짓다’라는 말은 매우 생소하다. 절집에서나 사용되는 말이 번역에 실린 것이다. 그래서 빠알리어 ‘bhāvitā bahulīkatā’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많이 닦고 많이 [공부]짓다’라고 번역했다. 반면 전재성님은 ‘닦고 익히다’의 뜻으로 번역했다. 여기서 닦다는 뜻은 빠알리어로 ‘bhāvitā’라 하는데 영어로 ‘increased; cultivated; developed.’의 뜻이다. 문제의 ‘공부짓다’는 말은 빠알리어로 ‘bahulīkatā’라 하는데 이는 ‘took up seriously; increased. (adj.), practised frequently’의 뜻이다. 빠알리어 ‘bhāvitā bahulīkatā’의 뜻은 열심히 수행하여 닦고 익힌다는 뜻이다. 특히 ‘bahulīkatā’는 끊임 없이 자신을 향상시킨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를 ‘공부짓다’라 하여 선가에서 쓰는 용어를 사용했다.
초기불전연구원의 번역을 보면 도처에 한문이 병기되어 있고 대괄호를 이용한 주석적 번역이 되어 있다. 더구나 아름다운 시로 이루어진 게송에서 조차 한문과 대괄호가 사용되고 있다. 한문과 대괄호를 사용하여 주석적 번역을 하면 별도 설명을 해 놓지 않더라도 의미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문장의 흐름을 방해할 수 있다. 문맥을 통하여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음에도 친절하게 주석적 번역을 해 놓으면 마치 시냇물 가운데 커다란 바위가 있는 것 같다. 더구나 시어에 사용되었을 경우 시어로서 맛을 잃어 버리게 한다. 그럼에도 한자어와 대괄호를 넣는 것은 한문불교에 익숙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 했다. 만일 세월이 한 두 세대 흘로 한문불교세대들이 모두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한문경전을 우리말로 옮겨 놓은 듯한 번역이 될 것이다. 더구나 절집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번역에 반영했다고 하는데 이는 승가라는 특수한 사람들을 위한 번역이라 볼 수 있다.
대다수의 독자를 외면하고 절집에 사는 스님위주의 번역이 되었을 때 세상의과 유리된다. 세상에서 사용하는 용어가 아닌 특수한 집단에서 사용되는 용어, 예를 들어 ‘공부짓다’라든가, ‘잡도리하다’ 등의 선가에서나 사용되는 용어를 사용했을 때 익숙하지 않다. 또 다시 사전을 찾아 보아야 하는 수고러움이 뒤따른다. 무엇 보다 시대에 뒤떨어진 번역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무상을 느끼지만
종종 TV를 보면 나이 든 외국여인을 볼 수 있다. 환경이나 생명운동을 한 지적인 여성의 이미지이다. 그러나 외모를 보면 형편없이 늙은 모습이다. 피부는 쭈글쭈글하여 볼 품 없다. 전반적으로 몹시 늙은 이미지이다. 이와 같은 이미지는 처음 본 것이다. 이전에 한번이라도 보았다면 젊고 싱싱한 이미지와 대비시켜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유명영화배우라면 빛나던 청춘시절의 이미지와 현재의 모습을 보고서 인생무상을 느낄 수 있지만 TV에서 처음 보는 늙은 여인의 모습은 원래 그렇게 있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 노인에게도 분명히 젊음은 있었을 것이다.
모든 것은 변한다. 어느 것 하나 가만 있지 않는다. 어떤 것은 서서히 변하지만 어떤 것은 급격히 변한다. 노화는 서서히 진행 되지만 오랜만에 보면, 그것도 수 십 년 만에 보면 급격하기 변한 것처럼 보인다. 젊음은 우리들을 내버려 두지 않고 노년으로 몰아 가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인생무상이다.
누구나 무상을 느낀다. 그렇다고 하여 모두 깨달음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 인생무상을 느낀다고 하여 다음 생을 받지 않는 불사의 경지에 도달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범부들은 자아에 대한 집착이 있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오취온의 존재에게 있어서 인생무상이나 계절무상, 자연무상은 단지 변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에 대한 감상일 뿐이다.
오온의 발생과 소멸을 관찰했을 때
현자들이 느끼는 무상은 어떤 것일까? 부처님가르침을 접한 자라면 같은 무상을 느껴도 오취온의 범부처럼 보지 않는다. 변하기 때문에 괴롭고 변하기 때문에 실체가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무상, 고, 무아로 보는 것이다. 같은 무상이라도 대상을 보는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무상에 대한 지각의 경에서는 이렇게 되어 있다
Iti rūpaṃ iti rūpassa samudayo iti rūpassa atthagamo,
iti vedanā iti vedanāya samudayo iti veda nāya atthagamo
iti saññā iti saññassa samudayo iti saññassa atthagamo
Iti saṃkhārā iti saṃkhārassa samudayo iti saṃkhārassa atthagamo,
iti viññāṇaṃ iti viññāṇassa samudayo iti viññāṇassa atthagamoti.
“이것이 물질이고, 이것이 물질의 발생이고, 이것이 물질의 소멸이다.
이것이 느낌이고, 이것이 느낌의 발생이고, 이것이 느낌의 소멸이다.
이것이 지각이고, 이것이 지각의 발생이고, 이것이 지각의 소멸이다.
이것이 형성이고, 이것이 형성의 발생이고, 이것이 형성의 소멸이다.
이것이 의식이고, 이것이 의식의 발생이고, 이것이 의식의 소멸이다.” (S22.102)
부처님은 오온에서 발생과 소멸을 관찰하라고 했다. 이는 오온을 자신의 것이라 여기는 자들은 발생과 소멸을 보지 못한다. 사라지는 것들에 대하여 아쉬워 할 뿐이다. 그래서 슬퍼도 내가 슬프고 기뻐도 내가 기쁜 것이다. 항상 자아에 대한 관념이 들어가 있다. 그러나 현자들은 지금 여기에서 내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하여 관찰한다. 구체적으로 일어남(samudaya)과 사라짐(atthagama)이다.
몸만 관찰하는 것이 아니다. 느낌도 관찰한다. 어떤 느낌이든지 일어난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만일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느낌에 대한 갈애가 일어나면 집착이 되어 결국 괴로움으로 귀결된다. 지각도, 형성도, 의식도 관찰의 대상이다. 우리 몸과 마음에서 매 순간 일어나는 변화를 관찰하여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지각하는 것이다.
한번 형성된 것이라면 반드시 소멸하고 마는 것이라 했다. 몸과 마음에서 매 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했을 때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는 것이라 했다. 이렇게 했을 때 모든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욕, 물질에 대한 탐욕, 존재에 대한 탐욕을 없앨 수 있다고 했다. 또한 무명도 없어지고 아만도 없어진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벨라마의 경(A9.20)에서는 “단지 손가락 튕기는 순간이라도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는다면, 그것은 커다란 과보를 가져 올 것”이라 했을 것이다.
2016-09-08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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