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을 베어 명지의 피를
니까야를 읽다 보면 역동적이고 생생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할 수 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앙굿따라니까야 하나의 모음에서 볼 수 있는 ‘무명의 경(A1.41)’이다. 경에서 부처님은 벼와 보리의 잎파리를 비유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했다.
“Seyyathāpi, bhikkhave, sālisūkaṃ vā yavasūkaṃ vā micchāpaṇihitaṃ hatthena vā pādena vā akkantaṃ hatthaṃ vā pādaṃ vā bhecchati [bhijjissati (syā. kaṃ. ka.), bhejjati (sī.) moggallānabyākaraṇaṃ passitabbaṃ] lohitaṃ vā uppādessatīti netaṃ ṭhānaṃ vijjati. Taṃ kissa hetu? Micchāpaṇihitattā, bhikkhave, sūkassa. Evamevaṃ kho, bhikkhave, so vata bhikkhu micchāpaṇihitena cittena avijjaṃ bhecchati, vijjaṃ uppādessati, nibbānaṃ sacchikarissatīti netaṃ ṭhānaṃ vijjati. Taṃ kissa hetu? Micchāpaṇihitattā, bhikkhave, cittassā” ti. Paṭhamaṃ.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벼이삭이나 보리이삭이 잘못 놓였다면, 손이나 발이 스치면 손이나 발을 베어 피가 흐르게 할 수 없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삭이 잘못 놓인 까닭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들에게 마음이 잘못 놓이면, 무명을 베어서 명지를 흐르게 하지 못하여 열반을 실현시킬 수 없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그것은 마음이 잘못 놓인 까닭이다.”
(무명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1.41, 전재성님역)
앙굿따라니까야 ‘벼이삭의 품’에서 첫 번째로 나오는 경이다. 전재성님은 ‘벼이삭품’이라 하여 ‘sūkavagga’라 했으나 빠알리원전에는 ‘Paṇihitaacchavaggo’라 되어 있다. 초불연에서는 ‘바르게 놓이지 않은 품(paṇihitaacchavaggo)’ 이라 번역했다. 빅쿠보디의 NDB에서는 ‘A Spike’라 번역했다. 영어 Spike는 ‘대못, 이삭’의 뜻이다.
빠알리어 sūka는 ‘awn of barley’의 뜻이다. 보리의 꺼끄라기로 번역된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꺼끄라기는 ‘벼나 보리 등의 낟알 겉껍질에 붙은 수염이나 수염 동강으로서 몸에 붙으면 따끔따끔하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초불연 대림스님은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비구들이여, 만약 밭벼나 보리의 꺼끄러기가 [위로 향하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잘못 놓여있을 때 손이나 발에 밟히면 손이나 발을 찔러 손이나 발에 피를 내게 한다고 하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비구들이여, 꺼끄러기가 있는 벼가 잘못 놓여있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그와 마찬가지로 마음을 잘못 쓰는 비구가 무명을 꿰찔러 영지(靈知)를 일으켜 열반을 실현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무슨 까닭인가? 비구들이여, 마음을 잘못 쓰기 때문이다.”
(바르게 놓이지 않음 품 1번 경, 대림스님역)
빠알리원문을 보면 두 종류의 식물이 등장한다. 그것은 sālisūka와 sālisūka
이다. 공통적으로 sūka가 들어 있다. 여기서 sūka는 ‘awn of barley, 茅草’의 뜻으로 보리이삭을 뜻한다. Sālisūka는 ‘sāli+sūka’형태로서 sāli가 ‘a good kind of rice’이므로 ‘쌀보리’라는 뜻이다. yavasūka는 ‘yava+sūka’로서 yava 가‘barley’의 뜻으로 보리 이삭의 꺼끄러기라는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sālisūka와 sālisūka는 쌀보리나 보리의 날카로운 잎파리를 뜻한다. 빅쿠보디는 ‘spike of hill rice or barley’로 번역했다. 쌀이나 보리의 날카로운 잎파리를 뜻한다.
벼나 보리를 보면 잎파리가 위로 향하게 되어 있다. 마치 기세등등한 창끝이 위로 향해 있는 것과 같다. 만일 잎파리가 옆으로 누워져 있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럴 경우 벼나 보리의 잎파리는 예리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벼이삭이나 보리이삭이 잘못 놓였다면, 손이나 발이 스치면 손이나 발을 베어 피가 흐르게 할 수 없다.”라 했다. 초불연에서는 대괄호를 이용한 주석적 번역을 하여 “밭벼나 보리의 꺼끄러기가 [위로 향하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잘못 놓여있을 때 손이나 발에 밟히면 손이나 발을 찔러 손이나 발에 피를 내게 한다고 하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라 했다. 빅쿠보디는 “suppose a misdirected spike of hill rice or barley were pressed by the hand or foot. It is impossible that it would pierce the hand or the foot and draw blood.”라 했다. 빅쿠보디는 ‘micchāpaṇihita’에 대하여 ‘misdirected’라 번역하여 잘못 방향을 잡은 것이라는 뜻으로 번역했다. 잎파리가 옆으로 또는 아래로 처진 경우를 상상할 수 있다. 식물의 잎파리가 쳐지면 예리 하지 않기 때문에 만져도 상처가 나지 않는다.
벼와 보리의 잎파리가 위로 향해 있다면 손이나 발에 상처를 줄 수 있다. 그래서 피를 흐르게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벼이삭이나 보리이삭이 올바로 놓였다면, 손이나 발이 스치면 손이나 발을 베어서 피가 흐르게 할 수 있다.” (A1.42) 라 했다. 부처님은 왜 이와 같은 비유를 들었을까? 그것은 “무명을 베어서 명지를 흐르게 하지 못하여 열반을 실현시킬 수 없다.”라는 말로 알 수 있다. 마치 꼿꼿하게 잘 서 있는 잎파리 즉, 올바로 놓은 잎파리에 베이면 피를 흘리듯이, 마찬가지로 마음이 올바로 놓이면 무명을 베어서 명지라는 피를 흐르게 하여 열반을 실현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무명의 경(A1.41)과 명지의 경(A1.42)은 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잎파리의 방향으로 비유하여 마음의 방향을 설명했다. 잎파리의 방향이 바로 놓이지 않으면 피를 나게 할 수 없듯이, 마음이 방향이 바르지 않으면 무명을 벨 수 없음을 말한다. 무명을 베어 지혜의 피가 흘렀을 때 열반을 실현할 수 있다고 했다. 이와 같은 부처님 가르침은 매우 역동적이다. 대승경전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매우 신선한 가르침이다. 그리고 앙굿따라니까야에서만 볼 수 있는 가르침이다.
2016-08-14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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