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을 알고부터, 이 세상이 생겨난 원리
땅조각쿠키
누구나 맛에 대한 갈애가 있습니다. 한번 맛을 들이면 그 맛을 잊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맛을 찾아 어디로든지 달려 갑니다. 그런데 맛에 대한 갈애로 인하여 세상이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천지창조를 연상케 하는 디가니까야 ‘세계에 대한 기원의 경(Aggaññasutta , D27)’에 따르면 맛에 대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Nesaṃ rasaṃ paṭhaviṃ aṅguliyā sāyataṃ acchādesi,
taṇhā ca tesaṃ okkami.
“맛있는 땅조각을 손으로 맛보자
그것에 매료되어 갈애가 그를 엄습했다.” (D27)
여기서 맛있는 땅조각은 쿠키 같은 것입니다. 경에 따르면 이 세상이 생겨나기 전에는 이 세상보다 더 수승한 세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세상에 사는 존재들은 몸이 스스로 빛나고 깃털처럼 가벼워서 하늘을 날아 다닌다고 합니다. 또 기쁨을 먹고 살기 때문에 음식을 필요치 않습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성겁의 시기가 되자 우리가 사는 우주가 형성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태양도 별도 달도 없었고, 계절도 없었고, 남자와 여자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물의 존재만 있었던 것입니다. 주석에서는 “일체의 철위산이 단지 일수(一水)로서 생겨난 것이다.”(smv865) 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마치 기독교의 천지창조를 연상케 하지만 창조주가 있어서 이 세상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형성된 것입니다. 더구나 욕망이 개입되어 이 세상이 생겨난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다름 아닌 욕계입니다.
욕계는 욕망의 세계입니다. 하고자 하는 욕망이 투영 되어서 삼라만상이 생겨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가장 극적인 사건이 맛에 대한 갈애입니다. 하나의 물에서 비롯된 세상에서 오랜 세월이 흐르자 새로운 현상이 일어납니다. 경에서는 “마치 끊인 우유가 식으면 그 위에 엷은 막이 생기는 것처럼, 맛있는 땅조각이 물위에 막을 형성하며 나타났다.”(D27) 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땅조각 비스켓 같은 것입니다. 모든 비스켓이 달콤하고 맛이 있듯이 땅조각비스켓 역시 맛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경에서는 “마치 정제된 버터와 정제된 생버터와 같은 색깔을 지녔고, 순수한 야생의 꿀처럼 맛있었다.”(D27) 라고 묘사 되어 있습니다.
맛에 대한 갈애
성겁이 되어 새로 생겨난 세상에 중생들이 태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보다 수승한 세상에서 공덕과 수명이 다하여 업의 힘으로 태어난 자들입니다. 그런데 어느 중생에게 맛있게 보이는 땅조각 비스켓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무엇일까?”라는 호기심과 함께 땅조각 비스켓을 입에 댄 것입니다. 마치 바이블에서 하와가 금단의 사과에 입을 댄 것과 유사해 보입니다. 혀로 땅조각쿠키 맛을 보자 그 맛에 매료되어 갈애가 그를 엄습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혀 끝에 놓은 것만으로 칠천 개의 미각신경이 퍼져나가 마음에 드는 갈애가 생겨났다.”(smv865) 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한 번 맛을 보자 칠천개의 미각세포가 동요한 것입니다.
땅조각쿠키는 금단의 열매 같은 것입니다. 한번 맛을 알게 되자 그 맛에서 벗어 나지 못한 겁니다.땅조각을 한 덩어리씩 깨어서 먹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경에 따르면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Atha kho tesaṃ vāseṭṭhā, sattānaṃ sayampabhā antaradhāyi. Sayampabhāya antarahitāya candimasuriyā pāturahesuṃ. Candimasuriyesu pātubhutesu, nakkhattāni tārakārūpāni pāturahesuṃ, rattindivā paññāyiṃsu. Rattindivesu paññāyamānesu, māsaddhamāsā paññāyiṃsu. Māsaddhamāsesu paññāyamānesu utusaṃvaccharā paññāyiṃsu. Ettāvatā kho vāseṭṭhā, ayaṃ loko puna vivaṭṭo hoti.
“바쎗타여, 그 뭇삶들은 스스로 빛나던 광명은 사라졌다. 스스로 빛나던 광명이 사라지자 달과 태양이 나타났다. 달과 태양이 나타나자 별자리와 별빛이 나타났다. 별자리와 별빛이 나타나자 밤과 낮이 나타났다. 밤과 낮이 나타나자 한 달과 보름이 나타났다. 한 달과 보름이 나타나자 계절과 일년이 나타났다. 바쎗타여, 이와 같이 해서 세상은 다시 생겨난다.”(D27)
이 구절을 보면 마치 바이블에서 천지창조를 연상케 합니다. 바이블에서는 창조주가 있어서 천지를 창조하지만 불교의 세계관에서는 성주괴공과 욕망으로 설명합니다. 성겁의 시기가 되었을 때 업으로 태어난 자들이 맛에 대한 갈애가 일어나는 것이 세상의 발생원인으로 본 것입니다. 그 결과 땅에 몸을 붙이고 땅을 의지하고 사는 존재로 된 것입니다. 이전에는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서 하늘을 날고 또한 기쁨을 먹고 살았으나 이제 땅조각쿠키의 맛을 알아 버린 이상 더 이상 빛나는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오 이 맛!, 오 이 맛!”
부처님은 맛에 대한 갈애로 인하여 달과 태양, 별이 생겨나고 그에 따라 계절이 생겨 난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맛에 대한 갈애가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자꾸 새로운 것이 생겨납니다. 땅조각을 먹거리로 삼고 음식으로 삼았을 때 빛나고 가볍던 몸이 자꾸 무거워지고 용모도 추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용모에 있어서도 차별이 생긴 것입니다. 같은 땅조각을 먹었지만 어떤 중생은 용모가 추하고, 어떤 중생은 용모가 아름다웠던 것입니다. 이 때 생겨난 것이 교만과 오만과 자만입니다. 맛에 대한 갈애가 이제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됩니다. 지금까지 해와 달과 절기 등이 생겨났다면 이제는 오만, 시기, 질투, 편견 등 악하고 불건전 마음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잘 생긴 중생들은 못 생긴 중생들을 깔보고 “우리가 이들 보다 더욱 잘 생겼고, 이들은 우리보다 못 생겼다.”라는 자만이 생겨난 것입니다.
땅조각쿠키에서 맛에 대한 갈애로 오만과 편견이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건이 발생됩니다. 잘생기고 못생긴 것에 대한 교만, 오만, 자만이 생겨나자 맛있는 땅조각쿠키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아마 땅조각 쿠키가 한정적 이었던 것습니다. 땅조각 쿠키가 널려 있는 것이 아니라 유한한 자원인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오늘날 석탄이나 석유와 같은 화석연료 같습니다. 화석연료는 매장량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다 써버리면 모든 일이 올스톱됩니다. 마찬가지로 유한한 땅조각쿠키에 대한 맛의 갈애로 인하여 모두 소진 되었을 때 난감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함께 모여서 ‘오 이 맛!, 오 이 맛! (ahorasaṃ ahorasan)”하며 슬퍼 했다고 묘사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사람들은 무엇인가 아주 맛있는 것을 얻으면 ‘오 이 맛!, 오 이 맛!’이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 이 맛!, 오 이 맛!’하는 의미를 모른 채 그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성적교섭은 비법(非法)
부처님은 맛에 대한 갈애로 이 세상이 생겨난 원리에 대하여 설명했습니다. 한번 맛을 보게 되자 그 맛을 못잊어 탐착하게 되다 보니 몸은 무거워지고 용모는 갈수록 추했졌다고 했습니다. 또 용모에 있어서 차별이 생겨나 교만, 자만, 아만도 함께 생겨났다고 했습니다. 이 모두가 맛에 대한 갈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런데 세계의 기원에 대한 경을 보면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를 보면 남녀가 구분되고 네 가지 계급이 생겨난 것도 중생들의 욕망에 따른 것으로 봅니다.
남녀의 특징이 나타난 것에 대하여 쌀을 음식으로 삼고 나서 부터라합니다. 땅조각 쿠키에서 맛에 대한 갈애로 지상에 몸을 붙이고 살게 된 중생들은 새로운 먹거리를 끊임 없이 찾습니다. 하늘을 날던 빛나던 존재가 자꾸 먹음에 따라 몸이 무거워져서 맛에 대한 갈애만 남은 것입니다. 그런데 남녀가 생겨난 것에 대하여 여무는 쌀을 먹으면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쌀맛에 대한 갈애가 일어나면 일어날수록 몸은 거칠어지고 아름답고 추한 것을 드러냈는데 마침내 “여자에게는 여자의 특징이 나타나고 남자의 특징이 나타났다.”(D27) 라 했습니다. 이전에는 남녀 구분이 없는 중성이었으나 쌀에 대한 갈애가 결국 남녀로 구분짓게 만들었음을 말합니다. 그러자 또 다른 양상이 전개됩니다. 경에서는 이렇게 표현 되어 있습니다.
Itthi ca sudaṃ 'purisaṃ ativelaṃ upanijjhāyati, puriso ca itthiṃ. Tesaṃ ativelaṃ aññamaññaṃ upanijjhāyataṃ sārāgo udapādi, pariḷāho kāyasmiṃ okkami. Te parilāhapaccayā methunaṃ dhammaṃ paṭiseviṃsu.
“그러자 여자는 남자에게 지나치게 몰두하게 되었고 남자는 여자에게 지나치게 몰두하게 되었다. 그들은 서로 지나치게 몰두하면서 탐애가 생겨났고 몸이 달아 올랐다. 그들은 몸이 달아 올라 성적교섭을 행했다.”(D27)
맛에 대한 갈애가 이제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됩니다. 땅조각쿠키에 대한 맛으로 칠천개나 되는 미각신경이 퍼져 나갔다고 했는데, 남녀가 성적교섭으로 인한 감촉은 그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땅조각쿠키에 대한 맛의 갈애로 맛을 못잊어 하여 맛에 집착하였듯이, 한번 성적교섭이 일어나자 그 맛에 대한 갈애 역시 잊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성적교섭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그 때 당시에는 성적교섭이 비법(非法: adhamma)이었다는 것입니다. 경에 따르면 성적교섭하는 자들에 대하여 “짐승 같은 놈아 꺼져라! 어찌 뭇삶이 그럴 수 있는가?”라며 흙먼지를 던지고 재를 던진다고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경에서는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어떤 지방에서는 신부를 데리고 갈 때에 어떤 자들은 흙먼지를 던지고 어떤 자들은 재를 던지고 어떤 자들은 쇠똥을 던진다.”(D27) 라고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 합니다. 성적교섭에 대하여 짐승이나 하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성적교섭에 대하여 법답지 않은 것으로 본 것입니다.
성적교섭은 법답지 않았기 때문에 몰래 한 것입니다. 그래서 “비법을 가리기 위해 집을 짓기 시작했다.”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성적교섭을 행할 때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한 것입니다. 그런데 경에 다르면 “바쎗타여, 그 당시에는 비법이었던 것이 지금은 정법이 되었다.(Adhammasammataṃ kho pana vāseṭṭhā, yaṃ tena samayena hoti, tadetarahi dhammasammataṃ.)”(D27) 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성적교섭은 짐승들이나 하는 것이고 더구나 울타리를 쳐 놓고 몰래 하는 것이라 비법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비법이 이제는 정법처럼 당연시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모두 짐승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 성적교섭 역시 맛에 대한 갈애로 새로 생겨난 것을 말합니다.
욕계를 벗어나려면
부처님이 설한 세계에 대한 기원의 경을 읽어 보면 우주적 스케일에 놀라게 됩니다. 이제까지 보던 초기경전과 전혀 다른 구성으로서 세계의 발생원리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세상에 대한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해와 달과 별이 생겨났는지, 어떻게 해서 낮과 밤이 생겨 났는지에 대하여 알려 줍니다. 그리고 어떻게 남녀가 생겨났는지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네 가지 계급이 생겨났는지에 대한 원리도 설명해 줍니다. 그런데 한 가지 관통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욕망’입니다. 땅조각쿠키의 맛을 알고부터 시작된 맛에 대한 갈애가 오늘날 세상의 온갖 것들이 생겨난 것의 시초라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를 욕망의 세계라 합니다. 이를 줄여서 욕계라 합니다. 욕계에는 인간뿐만 아니라 위로는 욕계천상이 있고 아래로는 지옥이 있습니다. 욕망에 매여 있는 한 끊임 없이 육도를 윤회합니다. 그러다가 우주의 수명이 수명이 다하는 괴겁이 되면 우주가 소멸되어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다가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성겁기간이 되면 다시 욕망의 세계가 생겨납니다. 이렇게 세상은 끊임없이 성주괴공합니다. 그렇다면 욕망의 세계를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부처님은 경에서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Khattiyo pi kho vāseṭṭhā kāyena saṃvuto, vācāya saṃvuto, manasā saṃvuto, sattannaṃ bodhipakkhiyānaṃ dhammānaṃ bhāvanamanvāya, diṭṭheva dhamme parinibbāti.
“바쎗타여, 왕족도 신체적으로 자제를 하고, 언어적으로 자제를 하고, 정신적으로 자제를 하고, 일곱가지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원리를 닦으면, 현세에서 완전한 열반에 든다.”(D27)
여기서는 왕족에 대하여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수행자뿐만 아니라 바라문, 평민, 심지어 노예도 일곱가지 원리를 닦으면 완전하게 열반에 들 것이라 했습니다. 이는 땅조각쿠키에 대한 맛의 갈애가 일어나기 이전에 하늘을 날고 기쁨으로 살던 시절로 되돌아 가는 것이 아니라 죽지도 않고 태어남도 없는 완전한 열반에 대하여 말씀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일곱가지 원리란 주석에 따르면 사념처, 사정근, 사신족, 오근, 오력, 칠각지, 팔정도를 말합니다.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37가지 보리분법을 뜻합니다.
청정한 삶을 살았을 때
요즘 TV를 보면 먹거리방송이 대유행입니다. 적은 제작비로 최대의 효과를 얻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은 먹거리에 대해 관심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광고에서도 “바로 이 맛이야!”라든가 “너희들이 이 맛을 알어?”라 말합니다. 맛에 대한 갈애를 유발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맛에 대한 갈애로 인하여 이 세상이 생겨났다고 말한다면 믿을까요? 그러나 초기경전을 보면 분명히 이 세상이 생겨난 원리에 대하여 맛에 대한 갈애로 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인가 아주 맛있는 것을 얻으면 “오, 이 맛! 오, 이 맛!”이라 하는 것도 무의식적으로 맛에 대한 갈애가 표출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맛에 대한 끊임 없는 갈애는 남자와 여자를 특징짓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성적교섭을 함으로 인하여 또 다른 맛을 알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성적교섭이 비법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성적교섭이 사실은 맛에 대한 갈애에서 비롯된 비법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그 당시에는 비법이었던 것이 지금은 정법이 되었다.”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맛에 대한 갈애를 극복하지 못하면 욕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맛있는 것을 찾아 맛집을 순례하는 것도 맛에 대한 갈애이고, 이성에 지나치게 몰두하여 성적교섭에 탐닉하는 것 역시 맛에 대한 갈애입니다. 권력에도 맛이 있습니다. 작은 조직이나 단체에서 쥐꼬리만한 권력이라도 맛을 들으면 그 맛을 잊지 못합니다. 차나 커피, 술에 탐닉해도 맛에 대한 갈애로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취향이라 하지만 맛에 대한 갈애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욕계를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맛에 대한 갈애를 벗어나려면 가르침을 실천해야 합니다. 청정한 수행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Imesaṃ hi vāseṭṭhā catunnaṃ vaṇṇānaṃ yo hoti bhikkhu arahaṃ khīṇāsavo vusitavā katakaraṇīyo ohitabhāro anuppattasadattho parikkhīṇabhavasaññojano sammadaññāvimutto, so nesaṃ aggamakkhāyati.
“바쎗타여, 이 네 가지 계급가운데 수행승으로서 번뇌를 부수고 청정한 삶을 성취하고 짐을 내려 놓고 이상을 실현하고 존재의 결박을 끊고 올바른 궁극적 앎으로 해탈한 거룩한 님이 있다면, 그가 그들 가운데 최상자라고 불린다.”(D27)
2016-09-09
진흙속의연꽃
'담마의 거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슬기로운 자는 백 가지를 본다 (0) | 2016.09.14 |
---|---|
해탈과 열반의 기쁨에 대한 오도송 테라가타(長老偈) (0) | 2016.09.11 |
무상에 대한 지각을 닦고 익히면 (0) | 2016.09.08 |
미련없이 그 장소를 버리고 허공으로, 운수납자(雲水衲子)로 묘사된 백조 (0) | 2016.08.27 |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는 어떻게 논파 되었나? (0) | 2016.08.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