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자는 백 가지를 본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물을 한 측면만 보고 두루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일컫는 말입니다. 초기경전에도 이와 유사한 말이 있습니다. 테라가타에서 “어리석은 자는 한 가지 고리만 보고 슬기로운 자는 백 가가지를 본다. (Ekaṅgadassī dummedho satadassī ca paṇḍito)”(Thag.106) 라 했습니다. 알아야 할 것이 백 가지나 됨에도 오로지 한 가지만을 알게 되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어리석은 자는 한 가지 고리만 본다고 했습니다. 여러 가지 징표와 여러 가지 특징 가운데 한 가지만 보고 다양하게 보는 지혜가 없습니다. 오로지 한 가지 특징만을 보고서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는 견해가 생겨납니다. 이는 맹인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과 같습니다.
우다나에 코끼리에 대한 비유가 있습니다. 어떤 수행자들과 성직자들은 “세계는 영원하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유일신교의 교리와 유사한 영원주의적 견해 입니다. 또 어떤 수행자들은 “세계는 영원하지 않다.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물론자의 허무주의적 견해입니다. 오늘날 과학을 기반으로 불교를 이해 하려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과학은 물질에 기반하므로 유물론이 단멸론으로 귀결 되듯이 과학적불교를 표방하는 자들은 업과 업의 과보를 인정하지 않아 내세와 윤회를 부정합니다. 이외 수 많은 견해가 있지만 이는 맹인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맹인과 코끼리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했습니다.
태어날부터 눈이 먼 자들은 코끼리를 한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어떤 맹인은 코끼리 머리를 만지면서 물항아리같다고 할 것입니다. 또 어떤 자는 코끼리 귀를 만지면서 키질 하는 바구니 같다고 할 것입니다. 우다나에 따르면 모두 아홉 가지가 소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눈 있는 자가 볼 때는 코미디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더욱 가관인 것은 맹인들이 자신이 본 것에 대하여 서로 싸운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이러한 것이 진리이고 이러한 것은 진리가 아니고, 이러한 것은 진리가 아니고 이러한 것이 진리이다.’라고 싸우고 다투고 논쟁하면서 서로 입에 칼을 물고 찌른다.” (Ud6.4) 라 했습니다. 이는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는 견해를 말합니다.
한쪽 면만 보았을 때 한쪽 면에만 해당되는 견해를 취합니다. 다양성이 있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눈이 있어도 맹인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라 합니다. 그러나 지혜의 눈이 생겨나면 있는 그대로 보기 때문에 사물의 다양성을 보게 됩니다. 사물이 백 가지 고리로 연결 되어 있다면 백 가지를 다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는 한 가지 고리만 보고 슬기로운 자는 백 가지를 본다.”고 했습니다.
의취는 백 가지 표정을 지니고
백 가지 특징을 지녔으니,
어리석은 자는 한 가지 고리만 보고
슬기로운 자는 백 가지를 본다.”(Thag.106)
2016-09-14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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