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마의 거울

“나는 주인으로서 행세하리라”테라가타에서 본 수처작주(隧處作主)

담마다사 이병욱 2016. 9. 17. 12:18

 

나는 주인으로서 행세하리라테라가타에서 본 수처작주(隧處作主)

 

 

주인으로 살기

 

수처작주입처개진(隧處作主 立處皆眞), 이 말은 절에 가면 주련으로 볼 수도 있고 법문할 때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이다. 불교인들에게 매우 친숙한 이 말 뜻은 무엇일까? 문자그대로 해석하면 자리마다 주인이 되라. 서 있는 곳이 진리다.’ 가 된다. 언제 어디에서나 주인공으로 살아라라는 뜻으로 말하기도 한다. 임제어록에 실려 이 말은 무위진인(無爲眞人)의 삶으로써 구속받지 않는 삶을 뜻한다. 어떤 경계에서도 걸림 없는 삶이다.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노예로 산다는 것과 반대의 말이다. 진리의 길에 선 자는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도 당당함을 말한다. 비록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라도 진리를 실천하여 세상의 이치를 알아 버린 자는 이 세상의 주인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세상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마음을 잘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다. 미쳐 날 뛰는 마음을 제어할 수 있는 자만이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금강경에서는 항복기심(降伏其心)’이라 하여 그 마음을 항복받는다.’라 했다.  그 마음의 항복을 받아 내는 것이다. 그 마음을 항복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선종에서 말하는 수처작주입처개진과 금강경 문구 중의 하나인 항복기심이라는 말은 초기경전에서도 볼 수 있다. 테라가타에서 오십시집딸라뿟따존자의 시(Tālapuattheragāthā)’가 그것이다. 수처작주에 해당되는 말이 그러나 나는 주인으로써 행세하리라. (Tathā tu kassāmi yathāpi issaro)”(Thag.1144) 라는 문구이고, 항복기심에 해당되는 말이 마음이여, 어찌해야 그대가 내게 항복하겠는가? (kiñcāpi te citta virādhita mayā)”(Thag.1135) 라는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초기경전에 있는 문구가 모티브가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제자들의 오도송

 

테라가타는 우리나라 불자들에게는 생소하다. 디가니까야 등 사부니까야는 잘 알지만 쿳다까니까야에 실려 있는 경전들은 익숙하지 않다. 물론 법구경이나 숫따니빠따는 매우 유명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지만 10여 개에 달하는 소부경전(쿳다까니까야)에서 테라가타(장로게)와 테리가타(장로니게)는 생소하다. 아직까지 제대로 번역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최근 전재성박사는 테라가타를 완역했다. 출간에 앞서 교정작업에 참여 했다. 단기간에 처음부터 끝까지 본문과 주석을 꼼꼼히 읽어 보면서 사부니까야에서 볼 수 없는 주옥 같은 문구를 다수 발견했다. 그 중의 하나가 오십시집에 있는 딸라뿟따존자의 긴 시이다. 무려 54개의 긴 게송으로 이루어져 있는 시를 보면 진리에 대한 열망과 그 과정에서 고뇌, 그리고 해탈과 열반의 기쁨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미 알려져 있는 사리뿟따나나 목랄라나의 시 보다도 무명에 가까운 딸라뿟따의 시를 보면 진솔한 고백을 듣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1991년 일본어판을 중역하여 발행한 바 있는 민족사의 책에서는 테라가타에 대하여 비구의 고백이라 했다. 마치 타종교의 간증을 연상케한다. 출가하여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갈등하고 고민하지만 마침내 깨달음을 이루었을 때 해탈과 열반의 기쁨을 노래한 것이다. 그래서 테라가타는 비구의 고백이라기 보다 부처님 제자들의 오도송이라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나는 언제쯤이나

 

테라가타에서 가장 인상적인 게송이 있다. 딸라뿟따존자의 시가 그섯이다. 진리의 길에 들어 섰을 때 고뇌와 이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 대한 것을 보면 고백처럼 보이기도 하고 간증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데 마음의 항복을 받고 주인으로 살게 된 것을 노래하였을 때 마치 인간승리를 보는 것 같다.

 

딸라뿟따의 시를 보면 초반부에 그것이 언제쯤일까?”라는 후렴구가 붙은 연작의 시가 있다. 언제쯤이나 깨달음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자신에게 물어 보는 것이다. 그 중에 하나를 보면 다음과 같다.

 

 

Kadā nuha bhinnapaandharo muni,

kāsāvavattho amamo nirāso;

Rāgañca dosañca tatheva moha,

hantvā sukhī pavanagato vihassa.

 

언제쯤이나 누더기 옷을 걸친 성자로서

가사를 걸치고 나의 것이 없이 소망이 없이

탐욕과 성냄뿐만 아니라 어리석음도 버리고

나는 행복하게 산기슭에서 지낼 수 있을까?”(Thag.1098)

 

 

 

Tipitaka books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오염원의 소멸을 갈망하고 있다. ‘언제쯤이나 (Kadā)’라는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아직 오염원이 소멸되지 않았음을 말해 주고 있다. 오염원이 소멸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오염원으로 인해 갈애에 끄달려 살 수밖에 없는 삶에 대하여 고뇌하고 있다.

 

오염원을 소멸시키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부처님 교법을 충실히 따르면 될 것이다. 가장 빠른 길은 수행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출가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출가를 했지만 여전히 오염원에서 해방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선정에 들면 오염원을 부술 수 있다. 그래서 선정에 들어 감각적 쾌락의 대상에 대한 욕망을 내가 쳐부술 수 있을까? 그것이 언제쯤일까?”(Thag.1111) 라며 고뇌한다.

 

마음이여, 왜 그대는

 

딸라뿟따는 믿음으로 출가했지만 마음의 항복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 알 수 없는 마음에 대하여 고백하듯이 이렇게 시로써 말한다.

 

 

Bahūni vassāni tayāmhi yācito,

‘agāravāsena ala nu te ida’;

Ta dāni ma pabbajita samāna,

kikāraā citta tuva na yuñjasi.

 

여러 해 동안 그대에게 나는 청원을 받았다.

재가의 생활은 너에게 이것으로 충분하다.’라고

그래서 내가 지금 출가한 수행자인데.

마음이여, 왜 그대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가?”( Thag.1113)

 

 

시를 보면 마음을 제 3자 대하듯 한다. 자신 속에 있는 마음이 내 마음이 아닌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에 대하여 그대에게(te)’ 라든가 마음이여(citta)’라고 말하고 있다.

 

출가를 했어도 그 마음을 항복받지 못했다면 그 마음에 지배당하기 쉽다. 마음이 하자는 대로 살아 가야 하기 때문에 마음의 종이나 마음의 노예로 살아 갈 수밖에 없다. 가족을 버리고, 친지를 버리고, 친구를 버리고, 세상의 갖가지 유희와 감각적 쾌락을 버리고 오염원을 소멸시키기 위하여 출가했건만 그 마음을 항복시킬 수 없다면 고뇌에 찬 것이다. 그런 마음에 대하여 마음은 동요하니 원숭이와 같다.”라는 부처님 말씀을 시구에 인용하기도 한다.

 

원숭이 같은 마음

 

마음이 마치 원숭이 같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는 한가지를 붙잡았다가 그것을 놓아 버리고 다른 가지를 붙잡는 것과 같다.”(S12.61) 라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원숭이가 이 나뭇가지에서 저 나뭇가지로 옮겨 가듯이 마음은 대상을 옮겨 다니며 대상에 대한 집착을 일으킴을 말한다. 마음은 시각, 청각 등의 감각적 대상이나 과거, 현재, 미래의 대상, 때로는 외적, 내적 대상에 대한 집착을 일으킨다. 부처님은 왜 이와 같은 비유를 들었을까? 닦여지지 않는 마음은 항상 대상과 함께 한다는 속성을 보여주고자 원숭이 비유를 든 것이다.

 

닦여지지 않은 마음, 계발되지 않은 마음은 제멋대로이다. 그런 마음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일반적으로 마음은 1) 마음은 길들이기 어렵고, 2) 마음은 빠르게 일어났다 사라지고, 3) 마음은 제멋대로 이고, 4) 마음은 원래 선하지 않은 것을 좋아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 그래서 잠시라도 마음은 가만있지 않는다. 대상에 따라 끊임 없이 마음이 일어나는 마음은 길들여지지 않았을 때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를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마음의 속성에 대하여 딸라뿟따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다채롭고 감미롭고 즐거운 것이라 거기에 의존하고 무지한 일반사람들은 다시 태어남을 구하며 괴로움을 원하니, 그들은 마음에 이끌려 지옥에 간다.”(Thag.1118) 라고 했다. 마음을 계발하지 않고 내버려 두면 지옥에 간다고 했다. 이 시는 마치 엔트로피(Entropy)’법칙을 연상케 한다.

 

엔트로피는 열역학 제2법칙으로서 닫혀진 계()내에서 질서에서 무질서로 향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런 법칙은 사회에서도 볼 수 있다. 집안을 내버려 두면 엉망이 되고, 회사를 관리하지 않으면 부도로 가고, 아이를 교육시키지 않으면 부랑아가 되듯이, 내 버려 두면 무질서가 극대화 되어 엉망이 됨을 말한다. 마음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제멋대로 날 뛰는 원숭이 같은 마음을 제어하지 않고 계발하지 않고 조복받지 않는다면 그 마음은 우리들을 결국 지옥으로 이끌고 말 것이라 한다.

 

토해서 버려진 것을 다시 삼킬 수 없으리

 

마음을 조복받기란 쉽지가 않다. 마치 아주 작은 불씨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어도 조건만 형성되면 불이 붙어 모든 것을 태워 버리듯이 아주 작은 오염원이 남아 있어도 그 오염원에 압도될 수 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오염원을 소멸시키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완전히 다 소멸되지 않았다면 아주 작은 것이 불씨가 되어 자신을 집어 삼킬 수 있다. 마치 금연하는 자가 담배 한모금 빠는 순간 이전의 노력이 물거품 되는 것과 같고, 금주하는 자가 술 한잔을 입에 털어 놓는 순간이 이전 것은 전부 무효가 되는 것 같다.

 

마음속에 아주 작은 욕망도 조건이 형성되었을 때 알아차림이 없다면 감각적 쾌락의 불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을 수 있다. 이는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출가한 딸라뿟따 역시 마음의 조복을 받지 못하여 고통을 겪었다. 그래서 마음이여, 이제 그대는 이전의 습관으로 돌아간다.”(Thag.1130) 라 했다.

 

마음을 조복받으려고 하였으나 조복받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의 노리게가 되었을 때 어떤 기분일까? 이에 대하여 딸라뿟따는 매우 인상적인 시를 다음과 같이 남겼다.

 

 

Tahā avijjā ca piyāpiyañca,

subhāni rūpāni sukhā ca vedanā;

Manāpiyā kāmaguā ca vantā,

vante aha āvamitu na ussahe.

 

갈애, 무명, 여러 가지 사랑스러운 것,

아름다운 형상, 즐거운 느낌,

마음에 드는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토해 냈으니,

내가, 토해서 버려진 것을 다시 삼킬 수 없으리.”(Thag.1131)

 

 

이 시를 접하면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얼마나 더러운 것인지에 대하여 매우 리얼(real)’하게 이것만큼 표현한 구절은 아직까지 못했다는 생각을 한다. 그것은 토해서 버려진 것을 다시 삼킬 수 없다.”라는 말에서 절정을 이룬다.

 

음식을 먹을 때 단지 미각으로만 먹는 것이 아니다. 오감이 총동원 된다. 음식을 먹을 때 눈으로도 보고, 귀로 지글지글 끓는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보고, 목구멍으로 넘어 갈 때 감촉을 느낀다. 이어서 이전에 먹었던 맛과 비교하여 그 느낌을 표현하는데 대게 맛있다’ ‘최고다라는 말과 함께 엄지손가락을 올리기도 한다. 그런데 목구멍을 넘어 간 음식을 게워 냈을 때 그것은 어떤 맛일까? 목구멍을 넘어 가기 전에는 예술품 같은 음식이었다. 그런데 토해낸 것을 보면 더 이상 예술품이 아니다. 구토의 대상이 되는 혐오스런 것이다. 이런 것을 아무도 먹으려 하지 않는다. 감각적 대상도 그렇다는 것이다.

 

개뼈다귀 같은

 

감각적 쾌락의 위험성에 대하여 여러 가지 비유가 있다. 맛지마니까야 뱀에 대한 비유의 경(M22)’를 보면 해골의 비유등 모두 10 가지 비유가 있다. 그 중에 해골의 비유는 개뼈다귀같은 것으로 설명된다. 개가 개뼈다귀를 먹으려 할 때 먹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해골에는 살점이 붙어 있지 않다. 개가 먹는 뼈다귀에도 역시 살점이 붙어 있지 않다. 다만 겉보기에 먹음직 해 보이지만 막상 먹으려 하면 발라 먹을 것이 없음을 말한다. 마치 뼈다귀해장국에서 살점을 찾는 것 같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쾌락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갈증만 일으킬 뿐 욕구가 충족되지 않음을 말한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관하여 해골의 비유 뿐만 아니라 고깃덩어리, 건초횃불, 숯불구덩이, 꿈 등의 여러 비유가 있다. 부처님이 이와 같은 감각적 욕망의 비유를 한 것은 어떤 이유일까? 그것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는 즐거움은 적고 괴로움이 많고 근심이 많으며, 재난은 더욱 많다.” (M22) 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을 때 재난이 닥친다고 했다. 즐거움은 잠시에 지나지 않고 긴 고통을 겪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범부들은 감각적 쾌락에 목숨을 건다. 일시적인 짜릿한 느낌에 죽어도 좋아!”라며 목숨을 거는 것이다. 하지만 즐거운 느낌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오래 지속되지 않아 괴로운 것이다. 조건이 바뀌면 이전 느낌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현자들은 즐거운 느낌을 괴로운 느낌으로 아는 것이라 했다. 세상사람들과는 반대로 살아 가는 것이다.

 

티끌만큼이라도

 

토해서 버려진 것을 다시 삼킬 수 없다. 오염원을 소멸시킨 성자들에게 있어서 감각적 쾌락의 추구의 마음이 일어날 수 없다. 만일 누군가 깨달았다고 말하면서도 막행막식하고 다닌다면 그는 감각적 욕망에서 자유로운 자가 아니다. 결코 깨달은 자가 아니다. 욕망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에 탐진치가 소멸되지 않은 것이다.

 

티끌만큼이라도 눈곱만큼이라도 탐욕이 남아 있다면 속된말로 도로아미타불이 될 수 있다. 지족선사가 황진이의 유혹에 넘어가 파계했듯이, 마음속에 아주 작은 오염원이 남아 있다면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노예가 될 수 있다. 그렇게 해서는 마음의 항복을 받을 수 없다. 이 모두가 계발되지 마음 때문이다. 조복받지 않은 마음에 대하여 딸라뿟따는 이렇게 노래했다.

 

 

Sabbattha te citta vaco kata mayā,

bahūsu jātīsu na mesi kopito;

Ajjhattasambhavo kataññutāya te,

dukkhe cira sasarita tayā kate.

 

마음이여, 어떠한 경우이든 그대의 말을 들었다.

다생에 걸쳐 그대는 내게 항복하지 않았다.

내부에서 생겨난 것은 그대의 은혜를 입었고,

나는 그대로 인한 고통속에서 오래도록 윤회했다.”(Thag.1132)

 

 

마음 하자는 대로 하면 어떻게 될까? 마음이 이끄는 대로 갈 것이다. 아름다운  형상을 보면 거기에 집착하게 되고, 아름다운 소리를 들으면 역시 집착하게 된다. 오욕이 이끄는대로 살다보면 이 생에서 저 생으로,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옮겨 다닐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마음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여, 그대가 우리를 바라문으로 만들고, 그대가 전사로 만들고,”(Thag.1133) 라 했다. 또한 마음먹기에 따라 언젠가 우리가 평민이 되고 노예가 되고 하늘사람이 되는 것도 그대 때문이다.” (Thag.1133) 라 하여 마음이 우리들을 만드는 것이라 한다.

 

마음에 따라 천상에 태어나기도 하고 아수라에 태어나기도 한다. 지옥에 태어나기도 하고 축생으로 태어나기도 하는 것은 마음 때문이다. 그런 마음은 내 것이 아니다. 마음 하자는 대로 하기 때문에 마음에 끌려 다니는 것이다. 마치 나의 주인처럼 행동하는 마음은 친구가 아니라 적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딸라뿟따는 시시각각 가면놀이를 보여 주는 것 같지만, 그대는 거듭해서 나를 해치려 하지 않겠는가?” (Thag.1133) 라 했다. 적으로서 마음은 이전에도 가면놀이 하는 것처럼 이생에서 저생으로 거듭나게 하여 해쳤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해치고 있고 앞으로도 해칠 것이라는 말이다. 이런 마음을 지켜만 보고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딸라뿟따는 마음이여, 어찌해야 그대가 내게 항복하겠는가?” (Thag.1133) 라며 마음과의 전쟁을 하는 듯이 말한다.

 

어떻게 해야 마음을 항복 받을 수 있을까?

 

마음을 항복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마음에 끄달리지 않고 주인으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딸라뿟따의 54개나 되는 긴 시에서 말미에 해법이 나온다. 그 마음을 조복받기 위하여 이렇게 말한다.

 

 

Ida pure cittamacāri cārika,

yenicchaka yatthakāma yathāsukha;

Tadajjaha niggahessāmi yoniso,

hatthippabhinna viya akusaggaho.

 

예전에는 이 마음이 원하는 것에 따라

좋아하는 것에 따라, 즐거움에 따라 떠 돌았다.

이제 나는 그것을 이치에 맞게 제어하리라.

코끼리조련사가 미친 코끼리를 제어하듯.”(Thag.1136)

 

 

마음을 미친 코끼리에 비유했다. 이렇게 본다면 마음은 미친 것이라 볼 수 있다. 누군가 내가 미쳤지라며 후회한다면 그 순간에 미혹된 마음에 지배당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감각적 대상의 유혹에 빠져 마음이 헤어 나오지 못했을 때 미친 마음이 되는 것이다. 이를 코끼리 조련사가 미친코끼를 제어 하듯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고 했다.

 

즐거운 마음이 일어났을 때 즐거운 느낌에 대한 갈애가 일어나면 대상에 집착하게 된다. 집착은 결국 괴로움을 유발하게 된다. 세상에서 즐겁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알고 보면 괴로운 것이라는 말이다. 이런 사실을 알아야 한다.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느낌 단계에서 알아차리는 것이다. 즐거운 느낌이 일어났을 때 즐거운 느낌이라고 알아 차리면 갈애로 넘어 가지 않는다. 그래서 딸라뿟따는 이제 나는 그것을 이치에 맞게 제어하리라 (Tadajjaha niggahessāmi yoniso)”라 했다. 여기서 키워드는 이치에 맞게(yoniso)’이다.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기울이는 것(yoniso manasikāra)’이다.  그렇게 하면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딸라뿟따는 마음을 조복받기 위하여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했다. 그래서 스승께서는 나에게 세상을 무상, 무견실, 무실체로서 시설하셨다. (Satthā ca me lokamima adhiṭṭhahi, aniccato addhuvato asārato)”(Thag.1137) 라고 했다. 테라가타에서 스승(Satthā)’은 부처님을 지칭하는 말이다. 스승의 가르침에 따르면 현상을 무상, , 무아인 것으로 보면 건너기 어려운 거센흐름을 건널 수 있다고 했다. 이렇게 승리자의 교법을 실천 했을 때 더 이상 마음의 노예가 될 수 없다. 그래서 딸라뿟따는 나는 그대의 지배아래 돌아 갈 수 없다.”라고 선언 했다. 마음과의 전쟁이나 다름 없다. 마음을 항복받으면 토해낸 것을 다시 먹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더 이상 감각적 쾌락의 노예가 되지 않음을 말한다.

 

수행의 힘으로

 

딸라뿟따에게 있어서 이전의 마음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나의 마음이여, 끔찍하고, 끔찍하니, 무엇을 하려는가?”(Thag.1140) 라 했다. 다시는 미쳐 날 뛰는 마음에 끌려 다니지 않겠다고 하여 마음이여, 그대의 지배에 복종하지 않으리.” (Thag.1140) 라 했다. 종이나 노예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인으로 살겠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래서 마침내 이렇게 선언한다.

 

 

Tathā tu kassāmi yathāpi issaro,

ya labbhati tenapi hotu me ala;

Vīriyena ta mayha vasānayissa,

gajava matta kusalakusaggaho.

 

그러나 나는 주인으로서 행세하리라.

얻은 것이 있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코끼리몰이꾼이 미친 코끼리를 길들이듯.

나는 그대를 힘으로 나의 지배아래 두리라.”(Thag.1145)

 

 

여기서 얻은 것은 네 가지 필수품을 말한다. 탁발음식, 분소의, 와좌구, 필수의약품이면 수행자로서 족함을 말한다. 무소유와 소욕지족의 생활이다. 이렇게 마음을 내려 놓았을 때 더 이상 마음이 주인행세를 하지 못한다.

 

미쳐 날뛰는 마음은 미친 코끼리와 같은 것이다. 미친 코끼를 를 밧줄로 기둥에 묶듯, 마음에 대해서는 그대를 힘으로 명상대상에 붙들어 매리니”(Thag.1147) 라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수행력으로 널 뛰는 마음을 제어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는 새김으로 잘 닦아서라는 말로도 알 수 있다. 늘 알아차리고 깨어 있음을 말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멈춤(samatha)과 통찰(vipassana)이라는 수행의 힘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이렇게 마음을 항복받았을 때 마침내 나는 주인으로서 행세하리라.(kassāmi yathāpi issaro)”라고 선언한 것이다.

 

나는 주인으로서 행세하리라

 

사람에게는 배꼽 위의 세상이 있고 배꼽 아래의 세상이 있다. 두 개의 세상은 서로 다른 영역에 있는 것과 같다. 감각이 지배하는 세상과 이성적 사유의 세상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세상이 공존하다 보니 부조화를 이루고 심지어 불화를 일으킨다. 마치 자이니즘에 있어서 형이상학적 지바(영혼)와 형이하학적 푸드갈라(육체)가 끊임 없이 갈등하는 것과 같다.

 

이성과 감성이 부딪쳤을 때 어떻게 될까? 대게 감성이 승리하게 된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대표적이다. 도둑이 도둑질이 나쁜 것인줄 알면서도 손이 가는 것은 손맛을 알기 때문이다. 알코올중독자가 술을 끊지 못하는 것도 맛에 대한 갈애 때문이다. 안되는 줄 알면서도 어기게 되는 것은 오랜 습관 때문이다. 이런 못된 습관은 수행의 힘으로 극복해야 한다. 운동을 하면 근육이 생겨 다른 사람 보다 월등한 힘을 발휘 하듯이, 수행을 하면 수행의 힘이 생겨서 그 힘으로 습관을 고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을 수습이라 했다. 습관 들이는 것이 수행인 것이다.

 

배꼽아래 세상은 감각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물론 배꼽 위에도 감각이 지배하는곳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아래처럼 위가 그렇고  위처럼 아래가 그렇다.(Thag.396) 라 했다. 이는 무슨 뜻인가? 주석에 따르면 “몸이 배꼽 아래로 부정하고 악취나고 혐오의 대상으로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듯, 그와 같이 이 몸이 배꼽 위로도 부정하고 악취나고 혐오의 대상으로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다”(ThagA.II.168) 라 했다.

 

신체에는 모두 아홉 개의 구멍이 있는데 대부분 배꼽 위에 있는 것으로 보아 신체 자체가 감각이 지배하는 세상이라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아홉 가지 구멍에 대하여 부끄럽다! 아홉 구멍으로 넘쳐 흐르는 것!”(Thag.1140) 이라 했다. 또 배꼽 아래 세상은 시각, 청각 등 오욕으로도 설명된다. 감각대상을 만났을 때 알아차리지 못하고 끄달려 갔을 때 감각의 노예로서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 마음이 하자는대로 하는 것이다. 마치 낚시바늘에 걸린 물고기와 같은 신세와 같다.

 

배꼽아래 세상은 욕망의 세계와도 같다. 욕계를 말한다. 욕망의 세계를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도 색계와 무색계도 벗어나 대자유를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가장 빠르다. 수행의 힘으로 욕계를 벗어나고, 더 큰 수행의 힘으로 색계와 무색계마저 벗어나는 것이다. 그렇게 하였을 때 주인으로 살게 된다. 더 이상 마음에 끌려 다니지 않는 것이다. 마음을 항복 받아서 어디에 서 있든지 주인으로 사는 것이다. 선가에 말하는 수처작주 (隧處作主)라 볼 수 있다. 수행의 힘으로 마음을 항복 받았을 때 주인으로 살 수 있다. 테라가타에서 딸라뿟따 존자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라 본다.

 

 

Ye tuyha chandena vasena vattino,

narā ca nārī ca anubhonti ya sukha;

Aviddasū māravasānuvattino,

bhavābhinandī tava citta sāvakā

 

남자들이나 여자들의 어떠한 행복이든

그대의 욕망과 기호를 좇아서 누린다면,

마음이여, 그들은 무지한 자들, 악마에 사로잡힌 자들,

존재에 환희하는 자들, 그대의 노예들이다.”(Thag.1151)

 

 

2016-09-1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