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 가는 세상입니다. 시간이 돈인 세상에서 시간낭비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옆을 돌아 볼 여유도 없고 뒤돌아 볼 시간도 없습니다.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 가는 세상에서 잠시 멈출 필요가 있습니다. 밭에서 호미질을 하다 잠시 멈추고 하늘을 바라 보는 것 같습니다. 푸른 창공에 흰구름이 흘러 가는 것을 볼 때 잠시나마 삶의 여유를 가질 수 있습니다.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테라가타교정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9월 9일 택배로 받았으니 꼭 일주일 지났습니다. 보름 이내에 교정작업을 마무리 해야 합니다. 계산해 보니 하루 50페이지 이상씩 진도를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도중에 급하게 일처리 하는 것들이 있었고 명절이라 긴 이동거리도 있었기 때문에 시간에 쫓겼습니다. 절대적 시간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에 남는 시간을 활용해야 했습니다. 이른 아침이나 저녁 늦게 책을 보았습니다. 자연스럽게 가장 편한 자세로 보게 되었습니다. 이런 자세가 성전을 대하는 자세가 아님에도 약속된 기간을 맞추기 위해서는 어떤 자세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교정작업을 한지 만 일주일 지난 현재 800페이지 가까이 되는 번역본에서 604페이지를 보았습니다. 모두 1,291개나 되는 게송에서 992번까지 보고서 잠시 멈추었습니다. 사리뿟따존자의 35개의 게송 중에 10번째 게송을 읽다가 잠시 멈춘 것입니다. 시를 읊은 자에 대한 긴 인연담과 각 구절마다 상세한 주해가 읽기에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단순하게 소설읽듯이 읽는 것이 아니라 그 뜻을 음미해 가면서 이해해가면서 읽어야 하기 때문에 더디게 진행되는 것입니다.
밭을 메다가 힘들면 그 자리에서 잠시 호미질을 멈추고 하늘 한번 바라보듯이 사리뿟따존자의 긴 게송을 읽는 도중에 잠시 멈추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 매번 쓰는 것이 글이고, 글쓰는 것이 습관화 되어 있어 거를 수 없습니다. 더구나 글을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멈출 수 없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하던 일을 멈추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읽은 사람이 될지도
테라가타 교정본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까지 듣도보도 못한 것을 접한 기분입니다. 등산할 때 등산로가 아닌 곳으로 접어 들었을 때 ‘혹시 내가 처음 밟아 보는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테리가타를 접하자 한번도 가 보지 못한 미지의 땅을 밟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그런 것 같습니다. 아직까지 테라가타를 제대로 접한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국내에 테라가타 번역본이 나와 있기는 하지만 일본 것을 중역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석은 일체 보이지 않아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습니다. 또 한 번역이 있기는 하지만 어쩐 일인지 번역하다 중단 되었습니다. 주석을 번역하긴 했는데 대단히 난해 합니다. 1권이 출간되고 나서 2권과 3권이 출간되어야 하나 1권이 출간되고 난 후 십년이 넘도록 나머지가 출간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출간된 1권도 절판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테리가타 정식번역본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말로 완역된 전재성박사의 테라가타는 전인미답의 경지라 봅니다. 아마 번역자 다음으로 어쩌면 두 번째로 읽은 사람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외국에서도 빠알리어로 된 주석을 모두 번역한 사례는 없다고 합니다. 전재성박사에 따르면 담마빨라가 주석한 테라가타를 세계최초로 ‘주석번역’한 것이라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8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내용 대부분이 담마빨라 주석을 번역한 것입니다. 도중에 게송과 관련된 니까야의 경을 소개 해 놓기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큰 글씨의 게송 밑에 작은 글씨의 주석으로 빼곡합니다. 그래서 소설 읽듯이 진도가 나갈 수 없습니다. 그 의미를 파악해야 하고 동시에 오자와 탈자도 잡아 나가야 합니다.
테라가타 구성
사리뿟따존자의 게송을 읽으면서 갈수록 내용이 심오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전 게송들은 매우 간략했습니다. 한 제자가 한 게송을 읊은 것으로부터 시작 되는데 갈수록 게송이 늘어나 사리뿟따 존자에 이르면 무려 36개나 되는 게송이 됩니다. 이는 테라가타 구성의 특징입니다.
테라가타는 마치 앙굿따라니까야에서 법수별로 경을 구별해 놓듯이, 제자에 따라 시가 몇 개 있는지에 따라 편집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제자가 네 개의 게송을 읊었다면 네 개의 게송을 읊은 제자들의 게송으로 이루어진 품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리뿟따처럼 36개의 게송을 읊었다면 36개의 게송을 읊은 또 다른 제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십 이상으로 시작 되는 품에서는 그런 원칙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삼십품이라면 게송이 30개에서 39개에 해당되는 제자의 게송이 모두 포함 되어 있습니다.
최후의 시대가 오면
테라가타 게송을 읽으면서 사부니까야에서는 전혀 보지 못하던 게송이 많았습니다. 주석 역시 이제까지 접하지 못하였던 내용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 들 중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습니다.
“미래의 시기에
최후시대가 오면,
수행승들과 수행녀들의
행실이 이와 같으리라.”(Thag.977)
뿟싸존자가 읊은 31개 게송중의 하나입니다. 게송을 보면 미래 불교의 모습에 대해 예견 하는 것 같습니다. 가르침이 쇠퇴하였을 때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게송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수다스럽고 배운 것이 없는 자들이 참모임에서 힘을 얻게 될 것이리”(Thag.955) 라 했습니다. 또한 “잘 설해진 가르침을 어리석은 자들이 오염시키리라.” (Thag.954) 라고 했습니다. 정법이 쇠퇴하고 비법이 힘을 받는 것입니다. 승가역시 정법비구는 자리붙이지 못하고 이익을 탐내는 자들이 차지 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도 훌륭하고 등으로 설해진 가르침을 지혜가 없는 자들이 오염시킬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예측은 오늘날 딱 들어맞는 것 같습니다. 가르침이 변질되어 원음과 어긋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느 경우는 정반대의 길로 가고 있습니디. 그래서일까 “어떤 자들은 이교도의 힌색 깃발을 착용하리라.”라며 마치 오늘날 한국불교를 예견 하는 것처럼 게송에서 말했습니다.
가르침의 쇠퇴 다섯 단계
뿟사존자에 따르면 게송에서 다가올 미래에 가르침이 어떻게 되리라 하는 것을 예견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다섯 시대(pañca yugani)라 하여 다음과 같이 구별했습니다.
“해탈의 시대, 삼매의 시대, 계행의 시대, 학습의 시대, 보시의 시대이다. 첫 번째 해탈의 시대인데, 그것이 사라지면, 계행의 시대가 전개되고, 그것도 사라지면, 학습의 시대가 전개되고, 그것도 사라지면 보시의 시대가 전개되는데, 학습의 시대때 부터가 최후의 시대에 해당한다. 학습의 시대에는 탐욕 등의 욕망 때문에 계행이 완전히 청정하지 못하고 학습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논의의 주제를 끝으로 하는 학습이 일체 사라지면, 그로부터 흔적만 남을 것이고 그 때 부터는 재물을 모아서 보시로서 베푼다. 이것이 최후의 올바른 실천이다.”(테라가타 977번 게송에 대한 3097번 각주, 전재성님역)
주석을 한 담마빨라는 6세기 중반의 인물입니다. 일반적으로 주석서는 스리랑카에서 5세기 붓다고사, 6세기 초의 아난다에 이어, 6세기 중반 담마빨라에 의해서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담마빨라는 테라가타 뿐만 아니라 우다나와 이띠붓따까 등의 주석서도 썼습니다.
담마빨라에 따르면 다섯 단계로 가르침이 쇠퇴하는 것으로 표현 했습니다. 담마빨라가 활동했던 6세기 중반이라면 대승불교가 흥기하여 대륙에서는 전성기를 누리고 있을 시점입니다. 그래서인지 다섯 단계를 보면 가장 마지막 단계에서 ‘보시의 시대’가 전개 되리라 했습니다. 보시바라밀을 가장 앞세운 대승불교에 대한 일종의 비판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부처님제자 뿟사는 테라가타게송에서 가르침의 변질에 대하여 예측 했습니다. 이는 빤다랏싸라는 고행자가 뿟사에게 “미래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겠소”라는 물음에 답한 것입니다. 미래에는 “부끄러움을 알고 욕망을 여읜 자들은 참모임에서 힘을 잃게 될 것이라.”(Thag.954) 라고 했습니다. 이는 한국불교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것입니다. 잘 배우고 똑똑한 스님들은 변방에 머물고, 그대신 이득에 밝은 스님들이 요직을 차지 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을 그대로 예견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미래에는 “금화와 황금, 그리고 전지와 택지, 염소와 양, 남자노비와 여자노비를 미래에 어리석은 자들이 받아들이리라.”(Thag.957) 라 했습니다. 여기서 금화는 화폐단위를 말하고, 황금은 보석과 진주 등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스님들이 통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뿟사존자가 테라가타 구성을 아무리 늦게 잡아도 부처님 멸후 삼백년이라 잡아도 아소까 왕 이전의 사람이라면 그 옛날에도 오늘날과 같은 승가의 타락이 있었음을 말합니다.
한 사람의 성자가 출현하면
다시 사리뿟따 존자이야기로 돌아 옵니다. 사리뿟따존자의 36개 게송을 보면 사부니까야에서 보던 것도 있고 처음 접하는 것도 있습니다. 법구경과 병행하는 게송 중에 이런 게송이 있습니다.
“마을에서나 숲에서나
계곡이나 평원에서나
거룩한 님이 머문다면,
그 지역은 즐거운 곳이다.”(Thag.991)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거룩한 님(아라한)들은 신체적 멀리 여읨을 얻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멀리 여읨을 얻는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석에서는 이 게송에 대한 인연담을 소개 하고 있는데 법구경 98번 게송 인연담과 동일합니다. 법구경에서는 단편적으로 사리뿟따 존자의 게송을 소개 하고 있지만 테라가타에서는 이 게송과 관련된 것을 소개 하고 있기 때문에 일관성이 있습니다. 마치 경장에서 율장에 있는 내용을 단편적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율장을 보면 그 게송이 나오게 된 동기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사리리뿟따는 이 게송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요?
게송에 따르면 마을에서나 숲에서는 거룩한 자, 번뇌 다한 성자가 머무는 지역이 아름다운 지역임을 말합니다. 게송의 인연담에 따르면 “마을이건 숲이건 거룩한 님이 사는 곳은 기쁨이 넘치는 곳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마치 “한사람의 도인이 출현하면 세상에 향기가 난다. 반면에 한사람의 사기꾼이 출현하면 세상에 악취가 풍긴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도인은 반드시 깊은 산속에 머물러 있어야 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비록 세속에 살지만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할 바를 다하는 자가 성자입니다. 그런 성자가 있는 곳은 기쁨이 넘치는 곳이고 즐거운 곳이라는 가르침이라 볼 수 있습니다.
등을 대고 눕는다는 것
교정작업을 하다 잠시 중단하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 밭을 매다가 호미질을 잠시 멈추고 청산과 하늘을 쳐다 보는 것과 같습니다. 앞으로 일주일 후에는 택배로 보내 주어야 합니다. 오자와 탈자를 잡아 내는 재미도 쏠쏠 하지만 방대한 주석을 꼼꼼하게 읽어 봄으로 인하여 부처님 제자들이 가르침을 어떻게 이해 했는지에 대해서도 알게 해 줍니다. 또한 관련된 경을 소개 하고 있기 때문에 한 구절 한 구절이 매우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빠라빠리야 존자의 게송 중에 “그들은 등을 대고 눕고”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부처님이 경책한 말입니다. 게송에서는 게으른 비구들에게 “배부르게 먹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등을 대고 눕고 깨어서는 이야기를 즐기니, 스승께서 꾸짖은 것이다.” (Thag.935)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말은 사부니까야에서 보기 힘듭니다. 부처님이 잠을 잘 때 “오른쪽 옆구리를 밑으로 하여 사자의 형상을 취한 채 한 발을 포개고”라는 정형구가 있는데, 잠을 잘 때 등을 붙이고 큰 대자로 자지 않는 것인지에 대한 근거가 되는 게송이라 보여집니다.
또 하나 잊지 못할 게송이 있습니다. 그것은 “재산과 자식 그리고 아내를 버리고 출가하고도 한 숟가락의 탁발식 때문에 그들은 해서는 안 될 일 을추구한다.”(Thag.934) 라는 게송입니다. 초발심으로 출가했으나 출가목적은 오간데 없고 오로지 생존하기에 급급한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이런 게송은 아직까지 어느 경전이나 어느 불교전통에서도 들어 본 바 없습니다. 아마 테라가타에서만 볼 수 있는 게송이라 보여집니다. 이 밖에도 수 많은 게송과 주석에서 매우 인상적적인 경구를 많이 발견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노랑메모리로 칠을 하다 보니 이곳저곳이 노랑칠입니다. 모두 글로서 표현하고픈 욕심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지면의 한계가 있고 노력의 한계가 있습니다.
경전을 대하는 자세
세계최초로 완역된 주석번역을 접했습니다. 이런 주석번역을 접한 자는 그다지 많지 않으르리라 봅니다. 우리나라에서 원효대사도 이런 주석을 접하지 않았을 겁니다. 물론 성철스님도 마찬가지 입니다. 천 개가 넘는 게송 하나하나가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여 해탈과 열반의 기쁨을 노래 한 것이 테라가타입니다. 교정이라는 목적이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읽어 보고 있습니다.
이제 까지 경전을 읽고 싶은 부분만 읽었는데 이번 교정작업을 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때로는 소설읽듯이 다 읽어 보아야 할 것이라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전이 책장에 꼽혀 있는 장식품이 아니라 읽어서 내 것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다면 노랑메모리펜을 들고 밑줄 치며 읽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경전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서 부처님 그분이 어떤 말을 했는지,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한 제자들의 기쁨은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하여 아는 것도 큰 기쁨이라 봅니다.
2016-09-16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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