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탈과 열반의 기쁨에 대한 오도송 테라가타(長老偈)
비가 오려거든 오라고
“하늘이여, 비를 내리려거든 내리소서”숫따니빠따에 나오는 말입니다. 부처님이 수행자로서 유행할 때 어느 농가에서 하루 머물게 되었습니다. 소치는 다니야는 “나는 이미 밥도 지었고, 우유도 짜 놓았고, 마히 강변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고, 내 움막은 지붕이 덮이고 불이 켜져 있으니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stn18) 라 했습니다. 마치 오늘날 중산층의 삶을 살아 가는 자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중산층은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아파트에 살며 승용차를 굴리며 가족과 단란하게 사는 모습이 연상됩니다. 부처님 당시 소치는 다니야 역시 오늘날 중산층처럼 여유만만 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비가 내려도 걱정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도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라고 말합니다. 부처님은 “분노하지 않아 마음은 황무지가 사라졌고 마히 강변에서 하룻밤을 보내면서 내 움막은 열리고 나의 불은 꺼져 버렸으니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stn19) 라고 말합니다.
농부도 움막에 있고 부처님도 움막에 있습니다. 공통적으로 비가 내려도 상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농부의 움막과 수행자의 움막은 다릅니다. 농부의 움막에는 불이 켜져 있고 수행자의 움막에는 불이 꺼져 있습니다. 농부의 움막에 불이 꺼지면 살 수 없습니다. 불이 켜져 있기 때문에 움막에 비가 새지 않아야 합니다. 움막을 잘 지어 놓은 농부는 비가 오려거든 오라고 자신만만하게 이야기 합니다.
수행자의 움막에는 지붕이 없어도 된다고 했습니다. 불이 꺼져 있기 때문입니다.불이 꺼져 있기 때문에 움막의 지방이 열려 있어도 꺼질 불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불이 꺼졌다는 것일까요? 주석에 따르면 탐욕의 불, 성냄의 불, 어리석음의 불이 꺼졌음을 말합니다. 시각, 청각 등으로 생겨난 일체의 불이 꺼진 것입니다.
부처님은 일체가 불타고 있다고 했습니다. 시각을 예로 든다면 “수행승들이여, 시각도 불타고 있고 형상도 불타고 있고 시각의식도 불타고 있고 시각접촉도 불타고 있고 시각접촉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도 붙타고 있다.”(S35.28) 라고 했습니다. 부처님이 말한 일체는 시각, 청각 등 여섯 가지 감각능력에 따른 접촉의 결과 발생된 세상을 말합니다.
일체가 불타고 있는 세상에서 불이 꺼졌다는 것은 해탈 했음을 말합니다. 해탈한 자에게 아무리 비가 뿌려도 비를 맞을 염려는 없습니다. 그래서 ‘내 움막은 열리고’라 했습니다. 여기서 움막(kuti)이라는 말은 자기자신이나 몸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몸이 하늘에 노출 되어 있어 비를 맞아도 염려 없음을 말합니다. 탐욕의 부불, 성냄의 불, 어리석음의 불이 꺼져 버린 수행자에게 있어서 오염원의 잠재성향이 뿌리채 뽑혀 버렸기 때문에 걸림이 없음을 말합니다.
테라가타 1번 게송을 보면
테라가타(장로게)에도 숫따니빠따 소치는 다니야의 경에서와 보는 것처럼 유사한 내용의게송이 있습니다. 테라가타에서 가장 첫 번째로 등장하는 게송은 다음과 같습니다.
Channā me kuṭikā sukhā nivātā
vassa deva yathāsukhaṃ
Cittaṃ me susamāhitaṃ vimuttaṃ
ātāpī viharāmi vassa devā'ti.
“나의 초암은 지붕이 이어졌고,
바람이 들이치지 않으니, 쾌적하다.
하늘이여, 비를 내리려거든 내리소서.
나의 마음은 잘 집중되어 해탈되었고,
용맹정진하니, 하늘이여 비를 내리소서.”
(테라가타 Thag.1, 전재성님역)
무엇이든지 첫 번째 등장하는 경이나 게송은 의미가 있습니다. 테라가타에서 가장 처음 나오는 게송은 ‘초암’에 대한 것입니다. 빠알리어로 꾸띠(kuṭi)를 말합니다. 전재성님은 숫따니빠따에서 움막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영어로는 ‘any single-roomed abode, a hut, cabin’라 설명되어 있습니다. 수행자가 머무는 작은 처소를 말합니다.
주석에 따르면 초암은 우리 몸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그런 몸은 행위(업)로부터 생겨난 것입니다. 뼈와 힘줄 등으로 이루어진 몸은 집과 같습니다. 이는 “집짓는 자여, 그대는 알려졌다. 그대는 다시는 집을 짓지못하리. 서까래는 부서졌고 대들보는 꺽였다.”(Dhp154) 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테라가타 1번 게송은 수부티가 읊었습니다. 그런데 숫따니빠따에서의 게송과 다르게 초암의 지붕이 잘 엮어져 있어서 바람이 들이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소치는 다니야의 경에서는 “내 움막은 열리고 나의 불은 꺼져 버렸으니”라 했습니다. 그런데 테라가타에서는 “나의 초암은 지붕이 이어졌고”라 했습니다. 움막이 열린 것과 초암의 지붕이 잘 엮인 것의 차이입니다. 그러나 내용은 동일합니다. 모두 해탈과 열반의 기쁨을 노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부띠가 ‘초암은 지붕이 이어졌고’라 한 것은 바람이 들이치지 않음을 말합니다. 이는 법구경에서 “지붕이 잘 이어진 집에 비가 스며들지 않듯이 잘 닦여진 마음에 탐욕이 스며들지 않는다.”(Dhp14) 라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잘못 지붕이은 집에는 비가 스며드는 것처럼, 탐욕, 성냄, 어리석음, 자만 등의 모든 번뇌가 닦여지지 않은 마음에 스며듦을 말합니다. 그런데 수부띠는 지붕을 잘 이어 놓았기 때문에 비바람도 들이치지 않을 것이라 했습니다. 더 나아가 비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늘이여, 비를 내리려거든 내리소서”라며 자신 있게 말합니다. 아무리 많은 비가 내려도 잘 이어진 지붕이 있기 때문에 비가 샐 염려가 없듯이, 열 가지 족쇄에서 벗어난 해탈자에게 번뇌가 스며 들 수 없음을 말합니다.
교정작업에 참여하고
테라가타는 부처님 제자들의 해탈과 열반의 기쁨을 노래한 초기경전입니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번역되어 나온 책이 없습니다. 민족사에서 ‘비구고백 비구니고백’이라 하여 일본어판을 번역해 놓은 것입니다. 주석은 전혀 보이지 않고 다만 게송만 소개 되어 있을 뿐입니다. 또 하나 번역서로 백도수님이 편역한 ‘위대한비구’가 있습니다. 장로게 주석이라 되어 있으나 완전한 번역은 아닙니다. 일부만 번역되어 있고 나머지가 번역되어 있지 않은데 현재 절판 된 상태입니다. 또한 내용을 보면 매우 난해하여 내용을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아직까지 테라가타와 테리가타는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도 완전한 번역은 없습니다. 그런데 최근 전재성박사 이를 완역했습니다. 방대한 주석을 포함하여 모두 800여 페이지에 달합니다.
최근 전재성박사의 테라가타 출간을 앞두고 교정작업의 임무를 맡았습니다. 지난달 모임에서 교정작업 요청을 받았습니다. 이에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아무런 대가 없이 다만 편집자 중의 한 사람으로 실명이 올라간다면 요즘 세상에서 하는 말로 가문의 영광입니다. 부처님 원음이 실린 성전에 교정작업에 참여 했다는 그 사실 만으로도 영광스럽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택배로 교정본을 받았습니다. 책을 출간하기 앞서 오자, 탈자 등을 점검하기 위해 프린트 된 것입니다. 구성을 보니 출간될 책의 형태와 똑 같습니다. 최대한 오자, 탈자 등을 잡아 내는 것이 교정자의 할 일입니다. 800여 페이지 달하는 책을 15일 이내로 교정하기 위해서는 하루 50페이지 이상씩 읽어 나가야 합니다. 게송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글씨로 주석이 빼곡한데 이를 읽고 최대한 오자와 탈자 등을 찾아 내야 합니다.
교정작업을 하다 보니 많이 알게 되고 많이 배우게 됩니다. 한구절 한구절이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이에 대한 각주를 보면 저절로 공부가 됩니다. 이제까지 습득된 불교지식을 다시 한번 복습하는 듯 합니다. 교정이 끝나면 아마 한달이내로 테라가타가 출간 될 것입니다. 이어서 테리가타(장로니게)도 출간 되는데 약 서너달 간격이 될 것 같습니다.
제자들의 오도송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깨달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가르침을 실천한 제자들은 부처님과 동일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부처님이 체험한 경지를 그대로 경험한 것입니다. 의사로 말하면 임상실험이 성공한 것입니다. 누구나 부처님 가르침대로 실천하면 해탈과 열반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 부처님제자들의 오도송이 테라가타입니다.
제자들의 오도송을 보면 알아 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한구절한구절은 매우 심오합니다. 그 한구절을 위해 부처님제자들은 목숨을 걸고 전승해 와서 오늘날 해탈과 열반의 기쁨에 대한 오도송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쌉빠다싸]
“집을 떠나 출가한지 나는
이십오 년이 되었으나,
손가락 튕기는 순간만큼도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했다.”
“심일경성을 얻지 못하고
감각적 쾌락의 탐욕으로 괴로워하며
팔을 움켜잡고 울면서
정사(精舍)를 박차고 나왔다.”
“차라리 칼을 들어 자결해 버릴까?
나에게 목숨이 무슨 소용이랴?
학습계율을 포기하고,
나와 같은 자가 어떻게 죽을 수 있을까?”
“그때 나는 삭도를 가져와
침상이 있는 곳으로 왔다.
나의 정맥을 자르기 위해
면도칼을 갖다가 대었다.”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이
그 때문에 일어났고
위험이 분명해졌고
싫어하여 떠남이 정립되었다.”
“그 때문에 나의 마음이 해탈되었다.
여법한 훌륭한 가르침을 보라.
세 가지 명지를 성취하였으니,
깨달은 님의 교법이 나에게 실현되었다.”(Thag.408~410)
2016-09-1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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