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강호의 숨은 고수들은 세상 밖으로 나오시길

담마다사 이병욱 2016. 7. 15. 19:42

 

강호의 숨은 고수들은 세상 밖으로 나오시길

 

 

“필자는 어떠한 경우에도 분노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만일 자기 어머니나 누이가 강간을 당하고 있다고 하자. 그때도 분노하지 말아야 하는가? 만일 그러한 상황에서도 절대로 분노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면, 그를 어찌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만일 그런 사람은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일 것이다.

 

“이 세상에는 각 분야의 전문가와 고수들이 있다. 그들은 대부분 대중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헛된 명예를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도 뛰어난 불교학자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오직 논문으로 자신의 연구 성과를 발표할 뿐, 대중과 접촉을 꺼린다.

 

“진짜 풍수(風水) 전문가는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자신의 명예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반면 반풍수가 집안을 망치듯, 어설픈 초기불교 근본주의자들이 한국불교를 망치고 있다.

 

 

어느 스님이 오늘 미디어붓다에 올린 기고문 중의 일부입니다. 초기불교근본주의자들이 한국불교를 망친다고 합니다. 마치 본인을 지적해서 말하는 것 같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분노하면 안된다고 했습니다. 단 한번이라도 분노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 곁으로 떠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유튜브에서 범일스님의 ‘니까야강좌’를 듣고 쓴 글입니다.

 

맛지마니까야에서는 스승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탐진치가 있는지 살펴 보아야 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있는 스승인지 먼저 알아야 함을 말합니다. 성냄과 관련된 것을 보면 이 존자가 성냄의 상태에 있으면서 성냄의 상태에 사로잡혀 알지 못하면서 나는 안다.’라고 말하고, 보지 못하면서 나는 본다.’라고 말하며”(M95) 라 했습니다. 앎과 봄을 이야기 하지만 화내는 모습을 보인다면 결코 앎()과 봄()이 있을 수 없음을 말합니다.

 

스승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탐진치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 보라고 했습니다. 탐진치가 있는지 물어 보아서 ‘없다’라고 말하면 스승으로 삼아야 함을 말합니다. 이에 범일스님은 강좌에서 단 한번이라도 탐욕의 모습을 보았다면, 단 한번이라도 성내는 모습을 보았다면 짐을 싸서 그곳을 떠나라고 했습니다. 또 수트라에서 상대의 언행에서 탐진치의 일부라도 드러나면 그의 마음이 오염된 것으로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을 버리고 떠나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한번만이라도 경멸한다면 그의 가르침을 버리고 그를 떠나야 한다.” (수트라, 393) 라 했습니다.

 

스승의 선택은 매우 중요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깨달은 자처럼 보이지만 경계에 부딪치면 화를 버럭버럭 낸다면 오염원이 남아 있는 것 입니다. 비록 그것이 자비의 분노나 거룩한 분노일지라도 화를 낸 것은 사실입니다. 화를 냈다는 자체는 탐진치에서 자유롭지 않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화내는 것 하나만 보아도 깨달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탐진치가 소멸된 스승을 선택하였을 때 결국 향상으로 이끌게 됩니다. 맛지마니까야 짱끼의 경(M95)’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를 조사해서 어리석음의 현상에서 벗어나 청정한 것을 알았으므로, 거기에서 그에게 믿음이 확립되고, 믿음이 확립되면 존중하게 되고, 존중하면 섬기게 되고, 섬기면 청문하게 되고, 청문하게 되면 가르침을 배우게 되고, 배우게 되면, 가르침에 대한 새김이 생겨나고, 새김이 생겨나면, 가르침에 대한 의미를 고찰하게 되고, 의미를 고찰하게 되면 가르침에 대한 성찰을 수용하게 되고, 가르침에 대한 성찰을 수용하게 되면, 의욕이 생겨나게 되고, 의욕이 생겨나면 노력하게 되고, 노력하면 깊이 관찰하게 되고, 깊이 관찰하면 정근하게 되고, 정근하면 몸으로 최상의 진리를 깨닫게 되며, 마침내 지혜로써 꿰뚫어 보게 됩니다.”(M95)

 

 

 

 

 

 

스승에 대한 믿음이 생겼을 때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부터 시작하여, 존중, 섬김, 청문, 배움, 새김, 고찰, 성찰, 수용, 의욕, 노력, 정근의 과정이 일어나며 마침내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자비의 분노나 거룩한 분노를 거론 하며 화내는 것을 정당화 시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글을 쓸 때 철저하게 경전에 근거하여 쓰고 있습니다. 모든 판단 기준은 경전입니다. 만일 판단 기준이 없다면 중구난방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문구하나 문장하나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좋은 게송은 외우기도 합니다.

 

오늘날 방대한 빠알리삼장이 전승되어 올 수 있었던 것은 그 가치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숨걸고 지켜왔고, 목숨걸고 지켜 왔기에 오늘날 후대사람들이 보게 된 것입니다.

 

진정한 고수는 숨어 있다고 합니다. 자신의 명예 때문이라 합니다. 그러나 강호의 숨은 고수들이 세상 밖으로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어설픈 보통불자의 글쓰기 보다 훨씬 세련 되어 보이고 깊이가 있어 보이고 신뢰도 있어 보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습니다. 보통불자의 글쓰기 역시 아는 만큼 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제 글을 보시고 부족하다 생각하시면 더 고매하고 높으신 분들한테 찾아 가셔가지고 더 공부를 하시고 수행을 하시는데 도움을 얻으시면 되겠습니다. 저는 제가 아는 만큼만 여러분들 깨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2016-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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