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분노와 거룩한 분노
인간의 정신세계는 알 수 없습니다. 그가 깨달았다고 하지만 진짜 깨달은 자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의 행동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깨달았는지 깨닫지 못했는지는 그의 행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만일 그가 화를 낸다면 그는 깨달은 자가 아니기 쉽습니다. 깨달은 자는 절대로 화를 낼 수 없습니다.
탐진치가 소멸된 자에게 분노의 마음이 일어날 리 없습니다. 아직 성냄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고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화를 낼지 모릅니다. 사다함단계 까지 입니다. 아나함이 되면 탐욕과 성냄이 완전히 소멸되어 분심이 일어 날 수 없습니다. 아나함 단계가 되면 부부관계도 유지하기 힘듭니다. 욕망이 소멸된 성자는 홀로 살아 갈 수밖에 없을 겁니다.
어떤 이는 ‘자비의 분노’를 이야기 합니다. 수직 또는 상하관계에서 윗사람이 아래사람에게 내는 분노는 자비의 분노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조직의 기강을 다 잡기 위해, 가르치기 위해 내는 분노는 분심과는 다르다는 겁니다. 이런 논리를 확장하면 ‘거룩한 분노’가 됩니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부정과 부패와 불의에 대하여 분노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천인공노라 하여 하늘도 사람도 분노가 일어 났을 때 침묵한다면 사람도 아니라 합니다. 그래서 자비의 분노, 거룩한 분노는 정당한 것이라 합니다.
자비의 분노, 거룩한 분노에 대하여 일견 동의하지만 모두 받아 들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가르침에 없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가르침을 근거로 하면 ‘문자주의’라느니, ‘근본주의’라는 딱지를 붙이며 비난합니다. 그리고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자라 하며 위험시하고 불온시 합니다. 그러나 가르침을 바탕을 하지 않으면 중구난방이 되어 버립니다. 누군가 자비의 분노와 거룩한 분노의 정당성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만 가르침에 없는 내용이라면, 설령 그 주장이 정당성을 갖는다 하더라도 100% 받아 들일 수 없습니다.
평소 존경하는 스승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버럭버럭’ 성질을 내었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누군가는 제자를 훈계하기 위한 자비의 분노라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감정이 실려 있다면 결코 자비의 분노라 볼 수 없습니다. 그냥 화풀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분노가 자비의 분노인지 화풀이인지 구분이 애매 모호할 때도 있을 겁니다.
‘살생유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삼국시대 신라에서 원광법사의 세속오계중의 하나입니다. ‘살생도 가려서 하라’는 말은 후대 호국불교신앙이 되었습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승려들도 칼과 창을 들고 나라를 지켜야 된다는 사상입니다. 유신시대때는 절에서 스님들이 예비군복을 입고 총검훈련을 하기도 했습니다. 불교방송에서 어느 비구니 스님은 연평해전기념을 위해 거금 5천만원을 성금으로 기탁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국가가 위기에 빠졌을 때 스님도 칼과 창을 들 수 있고, 총검훈련을 하고, 국방성금을 내는 것도 거룩한 분노에 기인 한 것이라 봅니다.
깨달은 자에게 분노의 마음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깨달은 자에게 욕망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이 깨달았는지 깨닫지 않았는지는 화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단 한번이라도 화내는 모습을 보았다면 그는 덜 깨달은 자입니다. 범부일수도 있습니다. 그런 자를 스승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탐욕이 있는지 아는 방법은 밥 먹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탐욕으로 먹는다면, 분노로 먹는다면 그는 덜 깨달은 자이거나 범부입니다. 먹는 것에 집착해서 눈을 두리번 거리며 젓가락이 자주 왔다 갔다 하거나, 정신 없이 퍼 먹는다면 탐욕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페에서 동그란 그릇에 이것 저것 맛있는 것을 잔뜩 담아 왔다면 역시 욕망이 지배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먹는 것 하나만 보아도 그가 욕심이 많은지 적은지 알 수 있습니다. 매너가 없이 먹는다면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정신세계는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의 정신세계에 들어가 보기 전에는 그 사람 말만 듣고 그 사람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는 방법은 ‘언행일치’입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 되었을 때 깨달은 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화내는 것과 먹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만 보면 그 사람의 정신세계를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습니다.
화내는 모습은 천박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럼에도 자비의 분노라 해서 스승의 행위를 정당화 하기도 하고, 거룩한 분노라 해서 사회의 불의에 대하여 공분을 정당화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노는 분노일 뿐입니다. 그가 아무리 깨달음의 경지에 대해 얘기 해도 화내는 모습, 먹는 모습을 보면 현재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자비의 분노와 거룩한 분노는 분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진정으로 깨달은 자는 인내하며 자비의 마음을 내는 자입니다.
“분노가 그대를 이기게 하지 말고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하지 말라.
분노가 없고 해침이 없는 자는
항상 거룩한 님 가운데 사네.
산 사태가 일어나는 것처럼,
분노는 악한 사람을 부숴버리네.”(S11.25)
2016-07-16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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