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지금 이 순간 죽음을 맞이 한다면

담마다사 이병욱 2016. 8. 4. 12:00

 

지금 이 순간 죽음을 맞이 한다면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이 기적으로 느낄 때가 있습니다. 교통사고를 보면서 드는 생각입니다. 우리에게 온갖 편의를 가져다 주는 자동차는 사실상 달리는 폭탄과도 같습니다. 우리도 희생자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뉴스에서 본 끔찍한 교통사고를 보면 남의 일 같지 않게 느껴 집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사고는 순간적 입니다. 운전대를 잡으면 오늘도 무사할까?”라며 생각합니다. 특히 고속도로 운전시에 촉각을 곤두세웁니다. 앞차와의 간격을 유지함은 물론 옆차와 뒷차에도 신경 쓰는 일종의 방어운전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주의를 한다고 해도 뒤에서 받아 버리거나 옆에서 치고 들어 온다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공항에 가기 위해 택시를 탔는데 그날 따라 신호등에 자주 걸려 비행기를 못 탔다면 운이 나빴다고 할 것 입니다. 그런데 타고자 했던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추락했다면 어떤 생각이 들어갈까요? 가슴을 쓸어 내리며 운이 좋았을 것이라 말할지 모릅니다. 그 기차를 타지 않았더라면, 그 배를 타지 않았더라면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생과 사의 갈림길은 하필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전생의 숙명으로 보아야 할까요? 신의 뜻으로 보어야 할까요? 단지 우연히 일어난 사건으로 보아야 할까요?

 

사고를 당한 것은 좋지 않은 시간에 있었기 때문 입니다. 사고가 일어날 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전생의 탓도 아니고 신의 뜻도 아니고 우연히 일어난 일도 아닙니다. 일어날 만 해서 일어난 사건에 좋지 않은 장소와 좋지 않은 시간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초기경에서는 우연의 피습(Opakkamikāni)’불운한 사건(Visamaparihārajāni)’으로 설명합니다.

 

우연의 피습에는 직접적 원인과 간접적원인 두 가지가 있습니다. 주석에 따르면, 직접적 원인으로 간통을 하다 체포 되었을 때 누군가 머리통을 가격하였을 때 이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라 했습니다. 또 부처님이 돌조각에 우연이 발을 다친 것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데와닷따가 부처님을 살해할 목적으로 바위를 굴렸는데 그 때 돌조각 하나가 부처님에게 상처를 입힌 것 입니다. 간접적 원인으로 굶주림이나 목마름, 중독, 물림, 불타고, 익사하고, 살해되는 것은 제때에 업보에 따라 죽지 못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사고의 직접적 원인은 인과의 동시성이라 볼 수 있고 간접적 원인은 업이숙에 따른 과보라 볼 수 있습니다.

 

인과에는 반드시 선후관계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행위를 하면 반드시 과보가 따르는 것이 업의 법칙이긴 하지만, 행위에 대한 과보가 즉각적으로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시간을 두고 달리 익는다고 하여 업이숙이라 합니다. 그래서 현생에서 업보를 받을 수 있지만 내생에 받을 수도 있고 몇 생을 건너 띄어 받을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악행을 저지른 자가 잘 살수도 있고 선행을 한 자가 못 살수도 있습니다.

 

업이 달리 익는 것은 조건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 입니다. 흔히 운때가 맞아서라는 말을 하는데 이는 이숙연이라 볼 수 있습니다. 운때가 맞으면 흥하고 운때가 맞지 않으면 망하기도 하는데 이는 조건에 따른 것 입니다. 흥할 조건을 갖추면 성공하고 망할 조건을 갖추면 망하는 것 입니다. 그런데 사고에는 이숙연이라는 숙세의 간접적 조건이 작용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예기치 못한 사고와 같은 직접적 조건이 따르기도 합니다. 교통사고 등 각종사고가 대표적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예기치 못한 사건은 반드시 선후관계의 인과만 작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과는 때로 동시적으로도 작용 합니다. 더구나 현대와 같이 복잡한 세상에서는 동시적 인과가 발생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움직이는 모든 것이 변수로 작용하기 때문 입니다. 운전을 할 때 변수를 고려 하여 방어운전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고는 일어납니다. 움직이는 것 모두가 변수이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날이 저물고 밤이 오면 이와 같이 ‘나에게 죽음의 조건은 많다. 뱀이 나를 물거나, 전갈이 나를 물거나, 지네가 나를 물면, 그 때문에 나는 죽을 것이고 그것은 나에게 장애가 될 것이다. 나는 걸려 넘어져서 떨어지거나, 점액이 나를 막히게 하거나, 날카로운 바람이 나를 괴롭히면, 그 때문에 나는 죽을 것이고 그것은 나에게 장애가 될 것이다.’라고 성찰한다.” (A6:20)

 

 

 

 

 

 

앙굿따라니까야 죽음에 대한 새김의 경에 실려 있는 가르침 입니다. 죽음의 위험이 도처에 널려 있음을 말합니다. 설령 내가 아무리 조심하고 위험을 미리 피해 간디고 할지라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뱀 등 발생할 수 있는 조건을 나열하였는데 이런 위험은 ‘몰리야씨바까의 경(S36.21)’에서 여덟 가지 죽음의 요인과도 일치합니다.

 

몰리야씨바까의 경에서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에 대하여 1)담즙(Pitta), 2)점액(Semha), 3)바람(Vāta), 4)체질(Sannipātikāni), 5)계절의 변화(Sannipātikāni), 6)불운한 사건(Visamaparihārajāni), 7)우연한 피습(Opakkamikāni), 8)업보의 성숙이라 했습니다. 이와 같은 여덟 가지 항목에 공통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탕에 자신의 행위가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는 것입니다.

 

뱀에게 물렸을 경우 우연한 피습으로 볼 수 있지만 하필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은 자신의 행위도 개입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우연의 피습을 당한 것입니다. 우연의 피습이나 불운한 사건 등으로 죽음의 요인이 있다고 하지만 그 바탕에는 본인의 행위(kamma)가 소극적이나마 작용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날이 저물고 밤이 오면 죽음의 조건이 많다고 했습니다. 그 조건으로서 뱀, 전갈, 담즙, 바람 등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움직이는 모든 곳에 죽음의 조건이 도사리고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승용차, 버스, 기차, 선박, 비행기 등 탈것을 포함하여 도둑이나 강도를 만나서 죽을 수도 있고, 삭은 간판이 떨어져서 즉사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하루 밤도 긴 것입니다. 지금 호흡을 하고 있는 순간에도 죽음이 엄습할 수 있습니다.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이와 같이 ‘나는 밤에 나에게 죽음을 초래하고 나에게 장애가 되는 악하고 불건전한 원리를 버리지 못했는가?’라고 성찰해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이 성찰하면서 이와 같이 ‘나는 밤에 나에게 죽음을 초래하고 나에게 장애가 되는 악하고 불건전한 원리를 버리지 못했다.’라고 안다면,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악하고 불건전한 원리를 버리기 위해 극도로 의욕을 일으키고 노력하고 정진하고 정근하고 불퇴전하고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려야 한다. (A6:20)

 

 

부처님은 늘 알아차릴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죽는 그 순간에도 알아차려야 함을 말합니다. 자연사이든 사고사이든 죽는 그 순간까지 사띠를 놓치지 말아야 함을 말 합니다. 만일 사띠를 놓쳐 악하고 불건한 행위를 하고 있을 때 죽음이 덮쳤다면 어떻게 될까요? 상윳따니까야 연소에 대한 법문의 경에 따르면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의 의식이 인상의 유혹에 사로잡히거나 속성의 유혹에 사로잡혀, 그 순간에 죽는다면 지옥으로 떨어지거나 축생으로 태어나는 두 가지 운명 가운데 하나를 얻을 가능성이 있다. (S35.235) 라 했습니다.  지금 이순간 죽음을 맞이 하였을 때 선업 보다 악업이 더 많다면 죽음은 두렵고 공포를 줄 것입니다. 그러나 선업이 더 많다면 담담히 받아 들일 것입니다.

 

사고사 등으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죽음을 맞이 했더라도 그 순간 사띠를 유지 한다면 선처에 태어날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더구나 현상에 대하여 일어나고 사라짐을 알아차린다면 불사가 될 것이라 했습니다. 현상이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알아차리면서 죽음을 맞는다면, 이렇게 죽는 순간에 알아차렸을 때 아라한이 됨과 동시에 완전한 열반에 들 것이라 합니다. 동시에 두 가지를 성취한다 하여 사마시시(samasisi)라 합니다.

 

 

2016-08-03

진흙속의연꽃